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내가 당했으니…” 고통의 평등주의 악순환 끊어야
‘슈퍼갑’ 정점으로 수많은 ‘을들’이 위계의 피라미드 형성
‘을들’간 착취 구조 못 깨면 ‘제2 남양유업’ 영원히 지속


남양유업 사태 등으로 갑을관계가 문제가 되니 어느 백화점은 ‘갑을’이란 문구를 없애자고 한다. 헝겊인형에 이름 쓰고 저주하면 그 사람이 죽을 거라 믿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발상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부러 저러는 것 같기도 하다. 이름을 뭘로 바꾸건 갑을관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무서워지기도 한다.

갑과 을은 주지하다시피 계약상의 강자와 약자를 가리킨다. 자본의 차이라고 표현하건 힘의 차이라고 표현하건 어쨌든 갑을관계는 비대칭적이다. 발본적 관점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이 비대칭성, 불균등성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을 게다(“모든 권력관계의 억압성을 철폐하자”). 우리의 목표로 삼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관점이 당장 실용하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권력의 비대칭은 일종의 ‘상수’라고 봐야 한다. 지금 사람들의 반응은 해도 해도 너무한 갑들의 횡포에 대한 공분이고 공감인 것이다.

갑을관계와 무리한 ‘갑질’은 예전에도 있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실시간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로 과거에는 유야무야 넘어갔던 ‘갑질’이 더 빨리, 더 많이 노출된 측면도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갑을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핵심은, 기업의 아웃 소싱(외주)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는 점이다. 외주화·비정규직화를 통해 기업의 현재적 비용과 미래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것, 그리고 그 비용과 리스크를 사회 전체로 떠넘기는 것. 정리하자면 신자유주의 원리가 국가의 통치에 스며들고, 통치권력은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방기하는 것을 법적·제도적으로 정당화해줌으로써 그 피해가 고스란히 시민·소비자들에게 전가되는 과정의 반복과 축적.

명백한 사실은 시간이 가도 ‘갑질’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혹독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사회구조적 문제다. 한국의 상황을 보자. 이른바 ‘슈퍼갑’을 정점으로 수많은 을들이 또다시 서로 갑을관계를 맺으며 촘촘한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는 시장에서, 노동조건이나 공정경쟁에 대한 기업의 인식 수준은 낮고 국가의 감시와 규율마저 턱없이 미흡하다. 이런 상황은 룰을 지키는 경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라미드의 구성원은 현재의 위계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제 살을 잘라 먹으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버티거나, 편법과 불법을 강요하는 갑의 요구를 다시 자기 아래의 을에게 전가 시키게 된다.

피라미드의 중간층 내지 중하위층의 을들은 갑에게 피를 빨리는 피착취자이면서도 자기 밑의 을에게는 자신의 갑보다 훨씬 가혹한 착취자인 경우가 많다. 피라미드의 최하층에 있던 을이 지위를 높여 이제 자신의 을을 거느리게 됐을 경우, 그동안 층층시하의 갑들에게 당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이 반복할 가능성 또한 높다. 비평가 이택광이 언젠가 탁월하게 묘파한, “내가 당했으니 너도 그만큼 당해야 한다”는 ‘고통의 평등주의’가 ‘갑질’의 동학에도 정확히 작동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고선 남양유업 사태는 기업명만 바뀐 채 영원히 지 속될 게 틀림없다.

박권일


» 법의 보호를 받는 노동자여도 될 사람들이 대리점의 지점장으로, 특수고용노동자로, 영세자영업자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갑의 횡포’는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 2010년 7월 불법 다단계 하도급 폐지를 요구하며 경기도 군포시의 한 건설현장에서 농성 중인 건설노동자들. 한겨레 김명진 기자

‘갑질’ 배양하는 매트릭스는 흔들리는 노동
노동자로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영세사업자가 되는 현실
사태 해결 열쇠는 노동에 대한 존중과 노동시장 복원


‘갑질’이 새삼 화제다. 남양유업의 욕설 파문 때문에 더 커지긴 했지만 이른바 ‘라면 상무’ ‘폭행 빵 회장’ 등 최근 화제가 된 여러 사건들 때문에 그간 억눌려 있던 을들이 목소리를 높일 기회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공간에서 을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가 겪은 갑들의 부당한 ‘갑질’들 때문에 겪은 고충을 쏟아 내는 통에 인터넷 세계가 떠들썩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신들이 겪어본 갑질의 종류도 다종다양하다. 남양유업처럼 프랜차이즈 본사에서 대리점에 횡포를 부리는 경우를 말하는가 하면, 법적으로 개인사업자의 지위인 학습지 교사, 화장품 방문판매원 등에 대한 대기업의 부당한 착취를 예로 드는 경우도 있다. 젊은 사람들은 ‘손님은 왕’ 이라며 감정노동을 강요당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 역시 과거 덤프트럭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에서 일할 때 건설현장에서 벌어지는 갑질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 건설 산업은 다단계 하도급이 가장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일 것이다. 원청은 하청에게, 하청은 그 아래의 업자에게, 업자는 또 그 아래의 업자에게 갑질을 하며 자기 배를 불린다.

부당한 정도는 아래 단계로 내려올수록 더 심해지고 치졸해진다. 이 괴이한 먹이사슬의 맨 끝에 있는 덤프트럭 노동자들은 현장소장이 이름 대신 “야!”라고 부르며 모욕을 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만 했다. 과적을 강요당하고 도로에서 단속에 걸려 운전자가 벌금을 뒤집어써도 일거리가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냥 참아야 했다. 중간업자가 원청으로부터 받은 공사대금을 떼먹고 도망가도 덤프트럭 노동자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덤프트럭 노동자들은 “인간이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갑질의 부조리는 을도 ‘인간’이라는 것을 갑들이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목소리도 많다. 갑들이 을의 인간성을 인정하고 갑질을 인간적으로 용납되는 수준으로만 했더라면 롯데백화점의 매출 실적 압박에 입점업체 직원이 자살하는 비극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성은 ‘노동’을 통해 유지된다. 즉, 사회의 노동에 대한 태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갑질의 형태도 달라진다. 법에 의해 보호받는 노동자의 처지여도 될 사람들이 대리점의 지점장으로, 개인사업자화된 특수고용노동자로, 노동시장에서 탈락한 영세자영업자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갑의 횡포’는 필연이 될 수밖에 없다. 사태 해결의 진정한 실마리는 여기에서부터 얻어야 한다. 계약서에서 갑을 명칭을 없애거나 역할을 바꾼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김민하

문서 첨부 제한 : 0Byte/ 2.00MB
파일 크기 제한 : 2.00MB (허용 확장자 :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5 경제부총리 재신임과 경제민주화 역행하는 대통령 이상한모자 2013-08-05 1143
134 '알맹이 빠진' 정부의 서비스산업 활성화 대책 이상한모자 2013-08-05 1085
133 [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박근혜 정부의 지속 가능성 이상한모자 2013-08-05 1004
132 [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노무현의 수난 [3] 이상한모자 2013-07-10 1259
131 박근혜 대통령 의지가 유일한 희망 이상한모자 2013-06-20 1177
» [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갑질의 횡포 이상한모자 2013-05-24 1457
129 남성들 스스로 자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상한모자 2013-05-24 1414
128 홍준표 지사의 존재감 높이기? 이상한모자 2013-04-25 5291
127 [한겨레21/크로스] 이주의 트윗, ‘엄마 가산점’이 쏘아올린 작은 공 이상한모자 2013-04-25 3411
126 사장 맘대로 논조 바꾸는 것 차단해야 이상한모자 2013-04-04 3826
125 '모피아의 대부' 강만수가 걸어온 길 이상한모자 2013-04-01 1962
124 전에 없이 신중한 강만수, 모피아의 운명은… 이상한모자 2013-04-01 1828
123 국민행복기금, 분명한 한계 안고 출범 예정 이상한모자 2013-04-01 13161
122 박근혜 정부, 강만수를 어찌할 것인가? 이상한모자 2013-04-01 1656
121 '열석발언권 논란'에서 보는 정부와 중앙은행의 관계 이상한모자 2013-04-01 1877
120 '과다 노출'이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 문제 이상한모자 2013-04-01 1802
119 새누리당 비주류 기지개 켜나? 이상한모자 2013-04-01 2744
118 담뱃값 올려 '사회보장제도' 확충한다? 이상한모자 2013-04-01 1817
117 신제윤 금융위원장, 모피아식 금융개혁 가능할까? 이상한모자 2013-04-01 1771
116 경제민주화는 왜 5대 국정목표에서 빠졌나? 이상한모자 2013-04-01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