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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대통령이 너무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오랜만에 맥주를 한 잔 하다 옆 테이블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 ‘묘한 상상’을 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결혼도 하지 않은 미혼의 여성 대통령이란 존재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그냥 ‘쿨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영역에 있다. 때문에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나 정치적 선택 등을 두고 이런 식의 농담이 횡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인권 감수성 돋는 얘기는 일단 제쳐두고, 이런 농담이 장삼이사들 사이에 유통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표현 방식이 고약해서 그렇지, 근거가 아주 없는 얘길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기춘대원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봐도 그렇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1939년생으로 우리나라 나이로 따지면 올해 75세의 노인이다. 75세의 노인이 정국의 한복판에 혜성같이 등장해 검찰총장 등 각종 권력기관 인사에 개입하는 등의 ‘파워’를 보여준 예는 흔치 않다.

1930년대생들의 전성기

시계를 보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왼쪽)과 이경재 방통위원장. 이경재 방통위원장은 1941년생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속해있다는 이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 7인회의 면면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사실상 좌장으로 분류되는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1932년생이다. 나머지 멤버들도 대개 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1946년생인 강창희 국회의장을 제외하면 김기춘 비서실장이 가장 나이가 젊다. 이렇게 보면 김기춘 비서실장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궃은 일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맥락이 이해가 된다. 나이 드신 양반들이 “그러면 내가 하리?”라고 반응할 지경에 이른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인수위 시절까지 가면 김용준 전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의 존재가 뇌리를 스친다. 김용준 전 위원장은 1938년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핸드폰도 없고 컴퓨터도 다루지 못한다는 그에게 국무총리직까지 맡기려고 했다는 사실까지 돌아보면 그가 이 정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10.30 재보궐선거에서 국회 입성에 성공한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도 위에 열거한 인물 정도는 아니지만 ‘나이 많은 남자’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번 선거의 승리로 7선 의원이 된 서청원 전 대표는 1943년생으로 강창희 국회의장보다 세 살이 많다. 당 내에 감히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김무성 의원과 7선으로 25년째 정치를 하고 있는 정몽준 의원이 1951년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청원 전 대표의 연륜(?)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청와대의 선호에 의해 재보궐선거 공천을 받았을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정치권에서 기정사실이 돼있다.

이쯤 되면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세간의 악질적인 농담이 그냥 우습게 들리지 않는다. 품위 없는 시장 바닥에서는 ‘파더 컴플렉스’라는 고약한 말까지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저 그런 개인적 선호 때문에 이런 식의 인사를 고수한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대통령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노인들을 중용하는 것일까?

기성 정치권에 지분 없거나 유난히 충성스러운 인사 중용

이에 대한 답을 내기 전에 우선 박근혜 대통령 인사 스타일의 다른 점을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정홍원 국무총리를 보자. 정홍원 국무총리는 1944년 생이다. 역대 총리들과 비교하면 살짝 많은 나이에 총리가 됐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한승수 국무총리의 예를 들어보면 비슷한 나이대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국무총리라는 직책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그 정도 나이라면 용인이 되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원래 국무총리직을 맡기려고 했던 김용준 전 인수위원장의 존재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KDI 연구원 출신인 문형표 신임 보건복지부 장관은 어떨까? 1956년생이다. 결코 ‘젊은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나이지만 주목받고 있는 인사들보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인 것은 분명하다. 이외 박근혜 정부의 장관들은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장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50대다.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연령대인 것이다.

‘대통령이 반드시 늙은 남자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든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늙지 않은 남자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내각 인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장관들이 정치권에 별로 지분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류길재 통일부 장관,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은 굳이 구분하자면 학계 출신이다. 나머지 대다수의 장관들은 해당 부처에서 활약해온 공무원 출신이다.

서청원 전 친박연대 대표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정도를 정치권 출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유정복 장관은 의원 시절부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자랑해온 사람이다. 이 덕에 유정복 장관은 친박인사들에게는 그렇게도 엄혹했던 이명박 정부에서도 ‘친박 몫’을 배당받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할 수 있었다. 충성심으로 따지자면 이정현 홍보수석을 또 빼놓을 수 없다. 이정현 수석은 정치권 출신이지만 ‘박근혜의 입’으로 불릴 만큼 열의를 가지고 대통령을 보좌해 그야말로 ‘충신’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렇게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선호하는 인사는 충성심이 유달리 강한 사람, 학계에서 활동해온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김기춘 비서실장의 전임자인 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경질된 과정을 돌아보면 이들의 공통점에 대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경질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는 게 정설이지만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공기업 및 공공기관 인사’와 관련한 잡음이다. 현 정부에서부터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와 관련한 인사위원장을 겸하게 했는데, 이를 활용해 자기 인맥을 심는 등의 전횡을 부릴 수 있다는 약점이 계속해서 지적돼왔다. 이런 점을 돌이켜보면 허태열 전 비서실장이 인사권을 갖고 자기 세력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니냐는 식의 추론도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2인자 혐오’와 ‘차기’

대통령의 ‘2인자 혐오’는 박근혜 용인술의 특징이다. 김무성 의원이 친박 좌장의 자리에서 밀려나 새누리당 탈당을 고민한 처지에까지 몰리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인자 김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허태열 비서실장도 인사권을 잘 활용해 2인자의 자리에 오를 기회를 잡으려 했다는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김기춘 비서실장의 존재는 이러한 ‘2인자 혐오’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될 수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도 2인자인데 왜 그의 존재는 용납되고 있는가?

아마 이런 것일 게다. 나이가 많은 원로들은 권력 욕심이 상대적으로 적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도 아니고, 그 나이 먹고 앞으로 더 무엇을 하겠냐는 것이다. 그들이 권력을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대통령에게 더 많이 충성해서 인생의 남은 기간이라도 소소한 재미를 누려보겠다는 생각에 그치는 것일 게다. 서청원 전 대표가 김무성 의원과 대비되는 유력한 차기 당권주자로 꼽히면서도 한사코 “나는 당권에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학계 출신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와서 정치권에 줄을 대봐야 더 무엇을 하겠는가? 기껏해야 의원 배지를 달아보는 정도가 끝이다. 현직 출신 장관들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다. 국무총리도 그렇다. 이명박 정부의 정운찬 전 총리 정도나 돼야 ‘차기’를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정권 초반의 이런 존재가 국정운영에 부담이 된다는 건 박근혜 대통령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스스로가 이명박 정부가 시작할 때부터 ‘차기’의 입장에 섰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의도 대통령은 박근혜 의원'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은 ‘차기 대권 주자’의 지위를 마음껏 누리며 이명박 정부를 흔들었다. 자신이 대통령인 상황에서 그런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즉, 박근혜 대통령의 특이한 인사스타일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을 바치면서 본인들의 정치적 영달에 관심을 갖지 않고 국정운영 동력을 훼손할 수 있는 차기 대권 주자들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인사들을 중용하려는 데에서 나온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이 많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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