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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김한길 대표에게 보내는 편지

조회 수 1025 추천 수 0 2013.09.27 21:06:15
김한길 민주당 대표님. 건강하신지요? 이 글을 쓰는 날이 마침 대표님 취임 100일이 되는 날입니다. 넓은 의미의 동업자(?)적 입장에서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온당하겠으나, 대표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하니 그런 축하를 마음 편하게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을 절로 일으키는 무더운 날씨에 뙤약볕을 쬐고 앉아 장외투쟁을 벌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저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은 소설가 출신으로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는 것으로 정치인의 인생을 시작하셨지요. 당시 여·야에서 모두 러브콜을 받으셨지만 굳이 김대중 당시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를 선택한 것은 선친이신 고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영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신 후에는 청와대국정기획수석과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시고 방송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발휘해 선거에서 미디어 전략 등을 총괄해 1997년과 2002년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2007년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드는 데 기여를 하는 바람에 소위 친노인사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사람이 됐고, 그 영향으로 당 대표가 된 이후에도 계파 갈등의 우여곡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신세가 되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라는 게 그렇지요. 정치의 여정은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돼있고,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설 것을 강요당하며, 선택에는 항상 대가가 따릅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듣던 대표님이 지금 광장에 서있어야만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요. 온건하고 합리적이던 사람이 갑자기 과격한 사람이 됐기 때문이 아니라 과격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린 결과로 보는 것이 올바른 관점이겠습니다.

이렇듯 의석을 127개나 가진 민주당이 장외에 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오늘날 민주당이 처한 정치적 딜레마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외투쟁은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민주당은 이제 장외투쟁을 선택하는 것 외에 정국을 풀 방법을 스스로 모색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만 이 역시 지난 과정으로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초선의원으로 미디어 관련 참모를 맡아 활약하시던 바로 그 해의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정치세력은 권영길 당시 후보의 선전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진보정치를 선택하기보다는 정권교체의 당위를 선택하였습니다.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국민들은 진보정치의 성장보다는 당장의 기성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2번의 기회가 있었던 셈이지만 여러분이 선택한 것은 국가 권력의 폐단을 쫓아낸 자리에 공정한 경쟁의 탈을 쓴 전면적 시장원리를 도입하고 노동자·서민을 파탄지경으로 몰아넣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안철수 현상’이라는 것은 민주당 정권이 세상을 더 살기 좋게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받았던 분에 넘치는 지지도 근본적인 성격을 놓고 보자면 안철수 현상과 유사한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여러분의 정당이 집권을 하는 것에 대해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어떤 감상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민주당 나름대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지난 총선과 대선은 진보정치세력에게 시련의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민주당은 전격적인 좌클릭 행보를 통해 총선에서 진보정당과의 적극적인 선거연합을 이뤘고 대선에서는 공격적인 단일화 필요성 제기로 안철수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들을 사실상 주저앉히는 데도 성공하였습니다.

2012년 대통령 선거는 그간 여러분이 오매불망 간절히 원해왔던 보수세력과의 1대 1구도를 만드는 데 사실상 성공한 선거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진보정당 소속 후보를 선택했을 만한 수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문재인 민주당 후보에 투표했노라는 고백을 제 주위에서는 아직도 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패배했습니다. 동시에 1997년, 2002년, 2007년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 가까스로 지켜져 왔던 진보정치의 소중한 유산도 그렇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선거가 끝나자 자칭 진보정당들이 헌납한 정치적 신념을 여러분은 헌신짝 버리듯 내동댕이쳐버렸지요. 대표님이 이끄는 민주당 지도부는 선거 패배의 이유를 과도한 좌클릭에서 찾으며 당헌, 강령, 주요 정강정책을 좀 더 온건한 것으로 수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진보정치를 향해 밀물처럼 몰려오던 여러분은 진보정치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다시 썰물처럼 속절없이 밀려 나갔습니다.

민주당이 무엇을 하려는 정당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나오는 것은 여러분의 이러한 행위들 때문일 것입니다. 좌우를 떠나 당장의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놓고 정작 그 시기가 지나면 이도 저도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 말입니다. 말로는 대중의 급진적인 그 어떤 요구도 수용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득표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그러한 요구들을 무력화 시키려 시도하는 그런 잔머리 때문에 민주당이 오늘날의 곤궁을 겪게 된 것이 아닐까요?

며칠 전 정부가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대한 여러분의 반응을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정부가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대해 민주당은 월급쟁이가 봉이냐며 유리지갑 퍼포먼스까지 벌이며 반발했습니다. 저 역시 정부의 세법개정안은 환영할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지만, 월급쟁이가 봉이냐고 되묻는 것이 올바른 문제의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왜냐하면 월급쟁이들의 조세부담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는 정부의 세법개정안에 소득공제에 해당하는 인적공제 항목과 특별공제 항목 일부를 세액공제로 전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득공제는 고소득자들에 유리하고 세액공제는 저소득자들에 유리하다는 상식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부 개정안의 이러한 방향 자체는 문제삼을 만한 것이 못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이 제기하는 반발의 근거가 된 월급쟁이의 유리지갑론은 이번 정부 안에 의하면 소득 상위 28%, 연봉 3450만원 이상 받는 노동자들이 1년에 14만원을 추가 부담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숫자로 따지면 44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고소득자들로부터 더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고 이렇게 확보된 세수는 근로장려세제 등 저소득층 세금 경감에 투입돼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에 기여하게 된다는 정부의 설명 월급쟁이 유리지갑론을 통해 반박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머리가 아프니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볼까요? 민주당은 지난 총선과 대선에서 보편적 복지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편적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걷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소득 상위 28%에 해당하는 노동자가 1년에 14만원보다 많은 세금을 내게 될 가능성이 과연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쪽에서는 보편적 복지에 기초한 복지국가 건설을 말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월급쟁이들이 왜 세금을 더 내야 하냐며 반발하는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직접세 및 조세의 누진기능 강화를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서민층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세제개편을 밀어붙인 것이라고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주장을 여러분이 하는 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여러분이 국가의 통치를 책임졌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도 간접세 인상이나 법인세 인하를 검토한 바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경제부총리였고 민주당에서 국회의원도 하셨던 강봉균 전 장관은 부가가치세를 현행 10%에서 12%로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작년에 하신 바 있고, 참여정부의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는 법인세 인하를 밀어 붙인 바 있지요. 우리는 오늘날 민주당이 내놓고 있는 정치적 주장과 실제로 정권을 잡았을 때 실행한 정책의 차이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세금에 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많은 것들에 대한 기회주의적 대응을 고수해왔습니다. 그 결과는 여러분뿐만 아니라 진보정치를 뚝심있게 해보겠다고 주장한 사람들 모두에게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떠든 거짓말을 사람들은 진보적 주장으로 오인하게 됐기 때문이죠.

김한길 대표님은 당 대표 경선 당시 ‘새로운 민주당’의 슬로건을 걸고 당선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당내 개혁에 대해 누구보다도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당이 좀 더 급진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거나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 적극적으로 엄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게 제대로 되면 좋죠. 하지만 여러분의 그러한 시도는 대부분 민중에 대한 기만으로 귀결돼왔습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민주당이 자신들의 지향을 명확히 하고 다시 태어나는 게 옳지 않을까요? 중도적 보수정당으로서의 포지션을 명확히 하고 진보정치는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솔직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잘 안 되겠죠? 알면서 이렇게 물어봐 미안합니다. 여러분을 비롯해 촐싹대는 자칭 일부 진보정치인들 덕분에 진보정치라는 단어를 이제 우리는 쓸 수도 없게 됐습니다. 우리 당의 이름이 ‘노동당’인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말이 나왔으니, 혹여 이 편지를 보게 되신다면 우리의 이름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날이 더우니 건강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들은 여러분이 잠시 겪는 이 고생을 사시사철 항시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고요.

*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창간호(8월)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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