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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9월 20일,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웬 피켓이 놓여 있다. 내용을 읽어보니 갑자기 가슴이 턱 막힌다. ‘진보신당 전 대표 노회찬 의원은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만든 사람은 김현우 녹색위원장이라고 한다. 새진보정당추진회의의 노회찬, 조준호 공동대표가 진보신당을 예방하기로 한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만든 피켓이다.

노회찬 의원의 방문은 1시 30분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김현우 위원장은 1시부터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엘리베이터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버티기 시작했다. 김종철 부대표와 박은지 대변인이 말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홍세화 대표까지 와서 김현우 위원장을 설득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고 있는 가운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침내 노회찬 의원이 수행원들과 함께 등장했다.


9월 20일 오후 노회찬의원이 진보신당 사무실을 방문하고 있다. | 김민하 제공

김현우 위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노회찬 의원의 사무실 출입을 가로막고 “아무리 정치인이라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셔야지요” “돌아가십시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노회찬 의원의 얼굴에는 의례적 미소와 당혹감이 번갈아가며 나타났다. 김현우 위원장의 표정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가까웠다. 어떻게 보면 간신히 울음을 참는 소년의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보다 못한 김종철 부대표가 김현우 위원장을 밀쳐내고 그 틈으로 홍세화 대표가 노회찬 의원을 안내해 사태는 일단락됐다. 노회찬 의원이 당사에 입장하자 김현우 위원장은 자신이 만든 피켓을 찢어버렸다. 그것 역시 분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워 보였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진보신당의 정치적 편협함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는 분들에게 사건의 맥락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노회찬 의원은 김현우 위원장의 ‘운동권 선배’(?)다. 그들은 민중당을 비롯하여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는 와중에서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고생을 자처했다. 1997년 권영길 후보의 출마로 결성된 국민승리21에서도 노회찬 의원은 기획위원장으로, 김현우 위원장은 선거운동원으로 함께했고,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나서도 노회찬 의원은 사무총장으로, 김현우 위원장은 서울시당의 정책담당자로 일을 했다. 김현우 위원장은 이후에도 노회찬 의원 측과 정책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해왔다.

2007년 민주노동당이 분당되고 노회찬·심상정 의원은 진보신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에 합류했다.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결국 진보신당을 나가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당을 나가서 잘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통합진보당 사태’에 휘말려 또 다시 새 정당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제 노회찬 의원의 이력에 남은 당은 3개이다. 새진보정당추진회의가 창당을 하면 4개가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지 않을 ‘운동권 후배’가 있을까.

사무실에 들어온 노회찬 의원은 당직자들과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자신이 당 대표로 있던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오던 사람들이다. 한때는 존경했던, 우리 당의 지도자였던 분을 다른 단체의 대표로서 맞이해야 하는 심경은 씁쓸함 그 자체였다. 노회찬 의원의 표정에서도 잠깐씩 그런 곤란함이 비쳐졌다. 노회찬 의원은 나에게도 악수를 건네며 “책을 냈던데?” 하고 물어주었지만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김현우 위원장은 나의 운동권 선배이다. 10여년 뒤 내가 그의 나이가 됐을 때 나는 누구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날은 김현우 위원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게재되었습니다. :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20925134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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