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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문학이 궁금하다면, 문학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문학 안에서 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연극’에 질렸다면 말이다.(p5, 책머리에)


조영일, <세계문학의 구조>, 도서출판b, 2011


문학에 관심이 없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 책에 대한 장정일의 시사in 리뷰로 촉발된 장정일과 조영일의 넷상의 투닥거림 때문이었다. 그 투닥거림에선 책 내용이나 리뷰에서 제기되었던 논점이 전혀 해명되지 않았다. 논쟁이 시작된건 SNS의 뒷담화적 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장정일의 과민반응 때문이었던 측면이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논쟁이 생산성 없는 얘기로 진행된 까닭은 조영일의 논쟁에 임하는 태도의 문제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논쟁에 대한 판단과 장정일 리뷰의 적절성에 대한 판단은 또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장정일의 리뷰만 보고는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리뷰에 나오는 ‘제국주의’나 ‘식민지’와 같은 단어들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식민지, 근대화, 민족문제 같은 것들은 분명히 내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었고, 이제는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한 품평과는 상관없이 이 글을 쓴다. 나는 조영일이 번역한 고진의 책이나 그의 앞선 저작들을 읽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한국 문단을 비판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면서, 이 문학에 관한 논의들에 역사에 관심있는 청년의 코멘트를 첨가하는 것이 “문학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을 의도한 저자의 취지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해야 할 얘기의 분량이 만만하지가 않으니 내가 이 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첫째, 나는 이 책이 전반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부실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선 로쟈의 서평도 완곡하게 표현한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제목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인 “세계문학”의 역할이 장마다 단일하지 않아서, 논거의 부실함을 떠나 이 책이 하나의 일관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둘째, 그러나 나는 이 책이 말하는 내용들이 흥미로우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논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보론으로 붙어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구조”는 본문과 별도로 재미있는 글이었다. 나는 보론과는 달리 본문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장의 내용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고 더 많이 얘기할 거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나는 이 책이 아쉬운 이유는 상당부분 저자가 ‘문학 바깥으로 나가’ 문학을 바라보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소설들을 통해서만 근대화와 민족서사의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논의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한국문학, 민족문학, 그리고 세계문학이다. 한국문학이 어떤 이유에서 ‘제대로 된’ 민족문학이나 세계문학이 되지 못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의식이라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비교대상으로 일본문학과 러시아문학, 주로 일본문학의 상황이 호출된다. 


즉 저자의 의도는 ‘한국문학의 위기’라는 공통적으로 주어진 사건에 대하여, 주류문단의 평자와는 다른 관점을 제출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소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이 위기는 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면 편해!!!”에 가깝다. 


그러면 먼저 주류문단에서 말하는 그 ‘위기’라는 게 무엇인지를 짚어 봐야 할 텐데, 뭉뚱그려진 ‘위기’란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세부적인 사안으로 해체가 가능하다. 

1) 존경 (소설가, 혹은 문인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문제.) 
2) (시장규모가 작아지고 있다는 문제. 외국문학, 상업문학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문제.)
3) 수상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다는 문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온다는 문제.)
4) 수준 (생산되는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



이 정도로 명료하게 구별하진 않을지라도, 조영일은 ‘존경’, ‘돈’, ‘수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이야기한다. 조금 애매한 것은 ‘수준’인데, 조영일은 작품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다소 주저하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그가 작품성의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책의 몇 구절은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문학이 다른 민족문학보다 ‘후지다’는 전제 하에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수준의 문제를 작가적 역량의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피해가려고 하는 듯하다.



그래서 '수준'의 문제를 생략한다 하더라도,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머지 세 개를 구별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각각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고 원인도 다를 수 있는데, 이것들을 '위기'란 말로 뭉뚱그리면 현실세계의 활동과 무관한 추상적인 대책 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조영일의 전작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조영일이 이전에 이 각각의 사안에 대해 세심하게 각각의 원인에 대해 분석을 시도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 조영일은  이 사안들을 구별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인에서 파생된 결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이 부분은 이 책 기획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하나의 원인으로 여러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을 경우엔 매우 설명력이 큰 가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방식의 접근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  '존경', '돈', '수상'의 문제 중 '존경'의 문제에 대해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을 망라하고 닥쳐오는 보편적인 사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돈'과 '수상'의 문제에 있어 조영일은, 한국문학이 일본문학에 비해 열악한 이유가 하나의 이유로 수렴될 수 있다고 보고 그 이유에 대한 가설을 제시한다.


그 가설에 대해 검토해보기 전에 먼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고진은 근대문학이 원래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런 물건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수한 기능을 맡았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근대문학은 근대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역할을 부여받았다.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에서 고진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란 태고부터 있어왔던 게 아니라 근대의 민족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족국가는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하여 문학이 필요했다. 근대문학은 ‘민족국가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주조(세뇌)하고 국어 확립에 일조하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자 구실을 떠맡았다. 근대문학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치르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근대의 신화가 됐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전 세계 규모에서 완수되고, 문학 자체가 대학(국가)이나 출판 제도(자본)에 포획된 오늘에도, 근대문학이 지탱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민족국가 체제의 지구적 성립과 더불어 문학의 정치적 구실도 소진했다면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고 나서 문학이 아닌, 자본·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다.


조영일은 그동안 고진의 관점을 한국에 소개하며 그 잣대에서 한국 문학/문단의 문제를 비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관점에선, 앞서 설명했듯 '존경'의 문제는 일본과 한국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사태다. "문학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문학이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긍정적인 형태로든 비판적인 형태로든 한 사회의 통합(국민국가 건설)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형식적 완성이 사회적 영향력 상실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p57) 그러므로 남는 것은 '돈'과 '수상'의 문제일텐데, 이 분야에 있어 한국문학과 일본문학 사이엔 심연의 강이 존재한다. 조영일은 이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을 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유토피아)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p76)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근대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p103)

여기서 루카치의 논점은 근대문학이 '전쟁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를 '원인과 결과'의 문제로 협소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즉 근대문학이 전쟁동원에 큰 공헌을 했다는 말도 맞지만, 그 역(근대전쟁이 근대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도 어떻게 보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상호 협력하는 방식입니다.(p189)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가 부재한 시대를 산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민족서사시 내지 국민서사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p225)

하지만 한국의 근대문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역사적 필연성(국민적 경험) 없이 그저 이식되어진(상상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만 상기한다면, 새삼스럽게 당황해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p226)
 
민족문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민족문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국민서사시를 가진 민족문학과 그렇지 못한 민족문학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자의 국민문학인 경우 그 자체로 이미 세계문학(물론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기보다는 현실로서의 세계문학을 말합니다)이라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단순히 돈과 마케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도 모릅니다.(같은쪽)
*굵은 글씨 강조는 필자


즉 조영일은 한국의 근대문학, 민족문학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가 이 이유에 대해서 얼마나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했느냐다.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에서 조영일의 주장을 두 가지 지점에서 논박하는데, 그중 한 부분은  “근대문학이 발달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판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국민작가의 유무라 하겠습니다."(p76)라는 구절을 가져온 후 '국민작가'는 일본에 밖에 없는 현상이므로 조영일의 주장이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용한 구절도 조영일의 주장이기에 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기는 하나, 나는 위에서 내가 인용한 구절들에 비해 이 구절이 조영일 논변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영일이 말한 '국민작가'는 엄밀한 얘기는 아닌듯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내가 위에서 말한 '수상'의 차원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영일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만약 러일전쟁(또는 그와 비슷한 대량살상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근대문학은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어 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어떤 식이 되었을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일본문학은 오늘날 노벨문학상을 두 명이나 배출할 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p114)
*굵은 글씨/글자크기/글자색 강조는 필자

  
말하자면 '국민작가'론이 부정당한다 하더라도 조영일은 다른 잣대를 근거로, 하다못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숫자를 통해서라도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역량을 구분지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국적별/언어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를 살펴보자.

국적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
프랑스 14 / 미국 10 / 영국 9 / 독일 9 / 스웨덴 6 / 이탈리아 6 / 스페인 5 / 폴란드 4 / 아일랜드 4 / 소비에트 연방 4 / 노르웨이 3 / 덴마크 3 / 스위스 2 / 칠레 2 / 그리스 2 / 일본 2 / 남아프리카 공화국 2 / 벨기에 1 / 인도 1 / 핀란드 1 / 아이슬란드 1 / 유고슬라비아 1 / 이스라엘 1 / 과테말라 1 / 오스트레일리아 1 / 콜롬비아 1 / 체코 1 / 나이지리아 1 / 이집트 1 / 멕시코 1 / 세인트루시아 1 / 포르투갈 1 / 트리니다드 토바고 1 / 헝가리 1 / 오스트리아 1 / 터키 1 / 페루 1

언어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
영어 27 / 프랑스어 14 / 독일어 13 / 스페인어 11 / 스웨덴어 6 / 이탈리아어 6 / 러시아어 5 / 폴란드어 4 / 노르웨이어 3 / 덴마크어 3 / 그리스어 2 / 일본어 2 / 벵골어 1 / 세르보크로아트어 1 / 아랍어 1 / 아이슬란드어 1 / 오크어 1 / 이디시어 1 / 중국어 1 / 체코어 1 / 터키어 1 / 포르투갈어 1 / 핀란드어 1 / 헝가리어 1 / 히브리어 1

*출처 : 한글 위키백과,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목록


조영일의 논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적어도 스웨덴(6), 폴란드(4), 아일랜드(4), 노르웨이(3), 덴마크(3), 스위스(2), 칠레(2), 그리스(2), 남아프리카 공화국(2)이 식민지를 가졌거나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의 말미에서 아일랜드 문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조영일에게 요구한다. 내 생각에 조영일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변의 방법이 있다.

1) 위 국가들은 통념적으로 훌륭한 근대문학-민족문학을 꽃피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 위 국가들은 통념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수행했다.

1)과 같이 답변한다면 조영일은 노벨문학상이나 세계의 인정과는 별도로 문학성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제시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조영일은 이 부분에 대해 딱 부러지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노벨상'이란 기준마저 벗어던진다면 조영일은 오히려 '남미문학'을 숭앙하는 이들의 더욱 거센 반론에 시달리게 될 듯하다.


2)와 같이 답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문제는 이 경우 '제국주의 전쟁의 경험'을 '식민지 경험 유무'라는 잣대보다도 꽤 넓은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이고 한국(남한)이 그 경험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을미의병(1895)과 정미의병(1907)을 통해 식민화에 저항했고, 식민지가 된 후엔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일본인은 이 전쟁들을 뭉뚱그려 '15년 전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식민지기 35년 중 15년을 제국주의 전쟁과 함께 한 것이다.) 징용을 경험했으며, 제국주의 전쟁의 전승국들에 의해 분단된 한국이 '제국주의 전쟁의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건 꽤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영일이 여기서 할 수 있는 항변은 두 가지 정도라고 생각된다. 먼저, 자신이 말하는 '전쟁'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말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한일합방은 일국 대 일국 간의 전쟁 같은 것조차 없이 이루어졌습니다."(p83) 그리고 우리가 '전쟁'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일본인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저항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태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에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일본인의 무의식에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적었습니다."(같은쪽)  


그런데 후자의 경우 일본인의 무의식과 근대문학에 '한국'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할지언정 '한국인의 경험'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부분은 전자일 것이다. 장정일은 이 주장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는다. "다만 모자란 것은, 정규군이 나서야만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지은이의 순진함이다. (...) 다시 말해,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과 대치만으로도 근대국가나 근대문학을 조성하는 충분조건이 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정규군을 동원하지 못한 투쟁은 모두 비합법적 테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게 지은이가 안중근을 돈키호테로 여기고, 마치 한국은 제국주의에 대항한 전쟁을 벌였던 적이 없다고 여기게 된 궤변의 바탕이다." 그러나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논박은 "한국도 제국주의 전쟁을 해봤다!!!"라는 볼멘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거야 조영일이 그 단어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사태를 다르게 재단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드러나는 조영일의 이론적 곤궁은, 그가 애초에 근대문학을 형성한 경험으로 '전쟁'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예상되는 반박을 받다 보면 결국 '전쟁'이 아니라 '국가'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있어야 근대문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고진의 얘기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간 얘기가 아니니, 사실상 조영일은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세계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앞서 내가 제시한 일본에 필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의 리스트에서, '국가 없는 전쟁'만을 치뤄낸 이들을 지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만한 역량은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근대문학은 전후문학이다."라는 멋들어진 테제가 '식민지를 거느리거나, 국가 대 국가로 제국과 전쟁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근대문학 융성'이란 명제를 반드시 함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명제는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하다. 그리고 위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사례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조영일은 나폴레옹으로 통칭되는 유럽문학, 러시아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정도를 예시로 들 뿐이다. 유명한 것들을 일별하긴 했지만(그나마 그것조차 충분하지 않다.) 예상되는 반론들(가령 장정일의 "아일랜드는?!?!?!" 드립이라든지)을 고려한 맥락설명은 없다. 전반적으로 본인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근거를 충실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를 다소 축소하여, 조영일의 분석을 "왜 일본문학은 융성했는데, 한국문학은 그렇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 논의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인이 서구인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근대문학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있다. 그러나 이 분석을 통해 보이는 것은 일본문학의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이다. 일본인은 제국주의적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야 일본인이 서구인과 맞설 수 있는 대등한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을 수 있지만, 아일랜드인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한국인이 일반적인 식민지를 경험한 국민들에 비해 식민모국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도, 일본의 통치가 모든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 중에서 가장 악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을 전근대 시절부터 경험했고 결코 그들이 한국인보다 우월한 인종이라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아일랜드나 폴란드 같은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식민지를 거느린 적이 없는 어느 유럽 소국의 문학인을 상상해 볼 때, 우리는 그가 러일전쟁 이전의 일본인들처럼 영/미/불/독/러 등의 제국시민들에게 컴플렉스를 심하게 느껴 문학활동을 못할 정도라고 추측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제 민족의 서사시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제국의 언어로 제국의 맥락에 포섭되는 문학활동을 하면서 '보편적인' 근대문학의 생산자가 될 수 잇을 것이다. 


'국민작가'는 일본만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장정일의 비판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서양의 군사적/문화적 공세에 대항하여 '국민'의 개념을 만들어내었고, 그들이 조선에 대해 같은 공세를 펼칠 때 조선은 다시 그 일본에 대해 저항하며 '국민' 담론을 형성했다. '국민작가'를 찾는/만들어낸 일본지성계의 풍조는 이런 현실의 반영일 뿐이지 국민작가 자체가 근대문학의 융성을 판가름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영일의 '오류'는 일본의 특수한 사례를 그 특수함을 통해 탐구하지 않고, 쉽사리 그들의 경험이 근대문학의 조건을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믿은데 있다. 


또한 조영일은 한국적 경험의 특수성 역시 그 특수성을 통해 고찰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근대문학은 전후문학이다."라거나 "근대문학은 민족서사시가 가능해야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적어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어떻게 다른 전쟁을 경험했는지, 한국의 민족서사시가 일본과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혹은 뒤틀렸는지)를 탐구했어야 할 게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중근에 대해 쓴 이문열의 소설 한 편을 분석하면서 해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상황/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들을 고려한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체 민족서사시란 측면에서 이문열의 <불멸>이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만큼의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다. 시바 료타로가 <언덕 위의 구름>에서 다룬 시대에 대입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않은 이문열의 안중근 소설을 대입했다면 논의가 너무 자의적이지 않을까? 더구나 식민지 경험을 지닌 한국인의 민족서사는 기본적으로 피해자-담론이고, 차라리 그 피해자-담론을 환상적으로 구축한 것은 조정래의 일련의 소설들일 텐데, 조정래 소설은 바로 그 '지나친 피해의식 때문에' 분석하지 않겠다고 눙치고 지나간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애초에 식민지 국가의 민족서사시는 제국의 것과 다르게 접근해야지, 제국의 민족서사시와 비슷한 형식을 갖춘 허접한 놈(문열의 소설)을 끄집어낸 후 "역시 제국이 아니면 민족서사시가 안 만들어져!!!"라고 결론 내려서야 미리 집어넣은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 밖에 안되지 않을까?


조영일은 책 속에 "한국에는 근대문학이 없다.(약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일본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고진 선생에게 문의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걸 자랑스럽게 적어놓았는데, 그가 일본인들 앞에서 피력한 주장과 이 책의 전반적인 논지 사이에는 두 가지 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엔 근대문학이 없다."는 주장은 어찌어찌 구성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이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은 나라는 근대문학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과 같은 것은 아니란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도 훨씬 무모한 주장이고,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나는 일본의 학자들이 후자를 듣고도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하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한국엔 지금껏 근대문학이 없었다."는 주장과 "한국은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았으므로 애초에 근대문학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또 전혀 다른 것이란 거다. 학적 엄밀성의 측면을 떠나서라도 일본 학자들이 남의 나라 얘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한국인인 조영일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데, 글쎄, 그렇다고 일본 학자들이 이 의아한 주장에 대해 속시원하게라도 생각할까?


조영일의 주장은 흡사 기독교 문명권만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할 수 있다던 19세기 서구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노벨문학상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여될 터이니 한국문학의 기원이 일본문학의 이식에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한국도 노벨문학상을 '두 개' 쯤은 탈 것이다. 조영일은 이 미래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려 할까?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방식이 있겠고, '근대문학 종언' 되었으니 이제부터 수여되는 노벨문학상은 후루꾸라고 우기는 방식이 있겠는데, 양쪽 다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제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네이션 빌딩'이란 차원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 문학을 살펴볼 경우 분명 일본 사례와 다른 면모가 있을 것이다. 가령 남한 정부는 '빨갱이'를 비국민의 영역에 몰아넣어 학살하는 측면에서 '네이션 빌딩'을 수행했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족 서사시'와는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정부의 국가 건설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인들은 근대민족의 형성을 고찰하는 민족서사시를 만드는 대신 '우리는 5천년간 한민족이었다.'는 환상적인 전근대민족의 서사를 반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통해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한국엔 근대문학이 없단 조영일의 말에 찬성하며 "하지만 시가 있지 않습니까?"라 대꾸했다는 일본 평론가는 시로써 국가에 대항한 김지하나 고은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지만 한국의 근대문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역사적 필연성(국민적 경험) 없이 그저 이식되어진(상상된) 것에 불과하다" 확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이식된 것이란 것과 근대국가에 대한 국민적 경험이 없다는 건 전혀 별개 문제다. 어쨌든 대한민국도 근대 국가라면, 이 근대국가를 형성한 경험은 어떠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 섬세한 분석이지 경험이 없으므로 근대국가도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리석다. 더구나 '민족'은 우리에게만 '상상된' 것이 아니라, 근대민족의 발상지라는 프랑스에서도 '상상적 공동체'다.  

 

조영일은 "한국에 근대문학이 없다."라고 단언하거나 "미약하다"고 말할 때 본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논리적 곤궁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가 말하는 '근대문학'은 물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분석한 그 '근대문학'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이 한국 사회에선 존재한 적조차 없다는 조영일의 주장이 옳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규정에 전혀 맞지 않는 한국 문학/문단의 문제점을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조영일이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주장들은 그간 그의 활동들의 의미를 심하게 훼손하는 측면이 있다. 어쩌면 그가 책 본문에서 (일본 학술대회에서 했다는) "근대문학이 없다."는 단언 대신 '미약한/성숙하지 못한 근대문학'이란 표현을 선택한 것은 그 점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문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다는 말을 했을 뿐이라 변명하더라도, 고진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한국 문학의 상황을 고진의 견해를 통해 비판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설명을 위한 작업은 '한국엔 어떤 역사적 경험이 없고, 따라서 성숙한 근대문학이 불가능하다.'는 단언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국의 '네이션 빌딩'의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그런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아쉬운 이유는 상당부분 저자가 ‘문학 바깥으로 나가’ 문학을 바라보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소설들을 통해서만 근대화와 민족서사의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내 최초의 지적은, 바로 이 지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세계문학'의 개념이 장마다 달라서 내용의 통일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해야겠다. 1장에서 백낙청을 비판할 때, 조영일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이념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낙청이 "민족문학이냐 세계문학이냐는 질문을 시장문학이냐 아니면 반시장문학이냐로 바꾸고, 둘 중 하나는 지양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둘 모두를 구해내는 마술을 펼치고 있다"(p37)고 비판했다. 세계문학의 이념을 조영일이 정리한 바대로 괴테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 비판은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조영일이 책 말미에서 '이렇게 나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될 수 없는 이유를 규명했다'고 선언할 때, 그가 말하는 세계문학은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이다.


즉 조영일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이념적으로 대립시킨 후 앞으로는 세계문학을 따라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민족문학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문학도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입장은 다를지 몰라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포개놓는다는 점에서 그는 백낙청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우리는 민족문학이 애초에 불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세계문학하자!!'고 했으면 무슨 소린지 이해나 갈텐데 말이다. 민족문학도 세계문학도 불가능하다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락거리가 되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렇다면 그 오락거리에 종사하는 문단사람들이 국가에 보조금 달라고 하는 걸 비웃는 이유를 모르겠다. 본인이 문학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 정리했다면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여하간 세계문학의 개념이 이렇게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이 책에 붙어 있는 '세계문학의 구조'란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도대체 책을 다 읽어도 알 수 없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이 책은 분명히 잘못된 제목이 붙은 책인데, 안쓰러운 것은 내용이 너무 퍼져 있어 다른 적절한 제목을 고민해 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장정일의 리뷰에 대해서는, 나는 이 리뷰가 다소 민족주의적 정서와 편견에 치우친 비분강개로 느껴져 부담스럽고 이 책의 문제점의 핵심을 짚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진 질문들도 조영일이 답변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은 맞는데, '지적 사형선고'니 장정일 시집을 '불로 정화'니 운운한 친구들을 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나 조영일이 인터넷에서 주장했다시피 이 책의 2장의 장정일 비판이 장정일의 리뷰의 논점을 미리 방어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에 나온 조영일의 장정일에 대한 '문화주의자'라는 비판이 타당하다고 보지만, 장정일의 시사in 리뷰는 책 본문에 등장한 장정일의 문화주의적 관점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다만 나는 조영일이 안중근을 '돈키호테'라 칭한 것에 대한 장정일의 분노는 (물론 이해는 가지만) 핀트가 어긋났다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는 책 전체의 주제의식과는 조금 다르게 별도의 해명이 필요하니 다음에 다시 한 번 글을 쓰도록 하겠다. '안중근'을 매개로 이 책의 4장의 내용을 민족주의자들의 정서적 편견과 함께 비평하는 종류의 글이 될 것이다. 나는 조영일이 '새끼 제국주의자'라는 장정일의 험담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안중근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봤다고 생각하고 다소 부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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