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작가세계 89호(2011년 여름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책 정보는 이렇구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472204

살짝 시간이 지났으니 블로그에도 전문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P.S 백업파일 복구하면서 주석이 도중에 들어가 있네요. 양해구합니다. :)

---------

테마리뷰 :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 사회


  2010년 11월 출간된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는 5월에 나온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와 함께 인문사회 도서 붐을 주도했다. 두 책이 수십만 부의 판매고를 올리자 샌델의 다른 도서들이 속속 번역되어 나왔고, 장하준의 예전 책들이 서점 매대를 장식했다. 


  흔히 (주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생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갈망, ‘하버드’와 ‘케임브리지’라는 학벌에 대한 신뢰 등으로 두 책의 성공의 이유를 설명한다. 타당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유독 두 책의 성공이 두드러진 면이 있을지라도 그 점이 다른 나라에서도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책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는 조류까지 설명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장하준의 책이 각광받는 이유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저자의 책 중에서 이번 장하준의 신간과 가장 성격이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의 <지금 이 순간의 역사(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한겨레출판, 2010)일 것이다. 책 판매량의 차이는 현격하지만, 두 책에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두 신간이 두 저자가 예전에 몇 권의 단행본에서 다루고 있던 모든 주제들을 망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두 신간이 그 모든 주제에 대한 서술을 한 권의 책 안에 넣으면서도 지극히 대중적이면서 평이한 서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샌델의 책은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기존의 도덕철학·정치철학 책들과 비교해 본다면 역시 이러한 특성이 공유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장하준이 기존의 저술에서 해왔던 주장을 넘어서는 면이 있을지언정, 다른 학자들이 하지 않은 새로운 얘기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의 경우는 아예 한홍구가 <대한민국사(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4>(한겨레출판, 2003~2006)시리즈 네 권을 통해 해 왔던 얘기들을 축약하되 서사적으로 재구성하여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들이 상찬받는 이유는, 그것들이 막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를 느낀 30대 독자들이 손에 집어 들 만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한 판단 기준이 상실된 시대에, 사람들은 다시금 그것들을 판단 내릴 관점을 전달해 줄 어떤 기본서를 필요로 한다. 한홍구의 신간은 대중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지만, 이 책의 기획에는 거시담론의 문제를 한 권의 책으로 집약하는 최근의 조류, 유시민과 조국(曺國,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책으로 대표되는 그 ‘문화적 우세종’의 압박이 흔적처럼 배어 있다. 우리는 그 ‘한 권의 책’으로 상실된 모든 맥락을 보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국의 독자들은 세계의 독자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만난다. 1987년 이후 형성된 진보담론은 1997년 민주개혁 세력의 집권이란 결실을 맺었지만, ‘잃어버린 10년’이란 비난은 그들이 집권 내내 그 담론을 소모하기만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염증의 역풍으로 보수세력이 다시금 돌아왔지만,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전의 ‘(그들에게) 좋았던 세월’의 기억에 사로잡혀 이제는 재현될 수도 없는 과거의 몸짓을 관성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런 실정에 한국의 독자들이 실망한 맥락은, 어쩌면 자유 시장주의자들과 신진보주의자들이 함께 예찬한 금융자본주의가 2008년 금융 위기라는 철퇴를 맞고 담론적으로 공허해진 세계의 실정과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세계인들에게도, 한국인들에게도, 장하준의 신간은 하나의 ‘교과서’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장하준의 책을 평가하기 전에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책이 세계인들에게도 교과서이고 한국인들에게도 교과서인 게 확실하지만 그렇게 된 사정은 다르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장하준의 주장이 현 시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갖는 타당성 문제와, 한국 사회의 경제개혁 문제에 대해 지니는 적합성 문제를 분리하여 사고해야만 한다. 한국의 꽤 많은 경제학자들은, 장하준이 전자에 대해선 의미가 있지만 후자에 대해선 미심쩍다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둘은 이 책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라는 책이 아니라 ‘장하준의 주장 전반’에 대해 논하는 사정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학자들의 장하준 책에 대한 논평에 대해 “이 책 내용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독자들이 장하준의 전작들을 읽는 흐름 속에서 경제학자들의 비평이 나왔다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신간에 대한 평가를 넘어선 장하준의 주장 전체에 대한 평가일 수가 있다.  


  장하준을 향한 ‘신성동맹’


  과연 장하준의 책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영국의 역사학자가
“통렬하고 재미있다”고 평했고,(주1: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전기 3부작(<배반된 희망, 1883~1920>,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 <영국을 위한 투쟁, 1937~1946>)으로 유명하다는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의 평가. 이종태 기자, <영국을 들썩인 장하준의 직설,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더 변혁적이다”>, 시사IN 159호, 2010년 10월 2일자에서 인용.) <가디언(The Guardian)>이 노동당 신임 당수에게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하라”는 권유를 하게 만들었다는 이 책은,(주2:이종태 기자, <“장하준과 점심이라도 함께하라”>, 시사IN 165호, 2010년 11월 17일자.) 장하준 외에는 딱히 ‘스타 경제학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입장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의견을 한마디씩은 보태야 하는 그런 책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뜨거운 반응에 여의도의 한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좌우파 경제학자들이 장하준을 잡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은 듯”하다고 촌평했고 몇몇 경제 전문가는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일”이란 호들갑을 떨었다.(주3:강남규 기자, <진보·보수서 ‘공공의 적’ 협공 받는 장하준>, 중앙일보, 2011년 2월 14일자.)


  장하준 본인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단순하게 요약할 때 ‘정부 개입이나 시장 자유냐’의 문제에선 전자를 택하니 ‘좌파’라 불리고, 급진적 변화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니 ‘우파’라 불리며, 자본과 노동의 대립각에선 양쪽이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중도파’라 불릴 수 있을 거라고 설명한다.(주4:위의 기사.) 그러나 신간이 특출나게 많이 팔렸기에 ‘신성동맹’이 형성된 것이지 그가 ‘오해’받아 온 역사가 짧지는 않다. 2005년에 출간된 대담집인 <쾌도난마 한국 경제―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장하준․정승일 지음, 이종태 엮음, 부키)의 서두에서 장하준은 이렇게 적는다.
“이 책에서 본인과 정승일 박사가 펼치는 견해는, 기존의 한국 경제 정책에 대한 논쟁 구도에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가 그 나쁜 재벌 체제에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보수’적인 사람들인데, 또 난데없이 노조 편을 드는 이야기도 하는 것을 보면 조금은 ‘진보’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정부 개입을 적극 옹호하는 것을 보면 박정희를 찬양하는 ‘수구’임에 틀림없는데, 또 자본 시장 자유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것을 보면 ‘극좌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싶기도 한, 뭐라 딱히 규정하기 힘든 입장을 펼치기 때문이다.”(주5:장하준․정승일, 장하준·정승일의 대화를 이종태가 엮음, <쾌도난마 한국 경제―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부키, 2005, 4쪽.) 


그런데 불과 6년의 시차를 지닌 이 두 가지 자기규정에서도 묘한 불일치가 드러난다. 2005년의 장하준은 본인이 정부 개입을 옹호하기 때문에 ‘수구’라 불린다 말한다. 그런데 2011년의 장하준은 본인이 정부 개입을 옹호하기 때문에 ‘좌파’라 불린다고 설명한다. 이 불일치엔 ‘정부 개입’이 ‘개발국가론’과 ‘복지국가론’을 동시에 지칭할 수 있다는 사정이 숨어 있다. 아마도 장하준에겐 본인의 입장이 너무나도 일관적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이 사정이 단순하지 않기에, 그 일관성으로 인해 그는 ‘좌파’라고도 불리고 ‘수구’라고도 불리게 된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한국 사회의 왜곡된 정치담론이 그에 대한 오해를 더 크게 노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부키, 2007)이 출간되었던 2007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김순덕은 그의 경제학이
“참여정부가 극찬한 이단 경제학(heterodox economics)”이며 조지프 E. 스티글리츠(Joseph Eugene Stiglitz)와 함께 남미를 말아먹은 포퓰리즘과 다르지 않다고 썼다.(주6:김순덕, <김순덕 칼럼> <장하준과 ‘착한 경제학자들’>, 동아일보, 2007년 10월 12일자.) 김순덕에 따르면 장하준은 참여정부의 경제 운용에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 경제를 망쳐 왔다는 것인데, 이는 <개혁의 덫>(부키, 2004)과 <쾌도난마 한국 경제>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던 장하준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런데 이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좌파’ 정책을 펼쳤기에 ‘잃어버린 10년’이 왔다는 보수언론의 통설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종류의 ‘왜곡’이다. 한나라당의 지지자들이 민주당 정권을 공박하기 위해 구축해야 했던 어떤 ‘언어적 가상의 건축물’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비판하고 박정희를 (적어도 경제정책의 측면에서는) 옹호했던 장하준을 ‘노무현의 스승’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23가지’는 무엇을 말하는가.


  장하준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의 지형을 감안하면서 이제 꼼꼼하게 책을 읽어 보자. 이 책은
“자유 시장주의자들이 말해 주지 않는 자본주의에 관한 여러 가지 중요한 진실들을 이야기하는 것”(주7: 장하준, 김희정․안세민 옮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 Things They Don't Tell You About Capitalism)―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부키, 2010, 14쪽. )을 목적으로 삼는다. ‘진실’은 ‘23가지’ 쟁점 사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사실 관계와 맥락이 단순화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점을 감안하지 않고 이 책을 학술논문 대하듯 비판하는 것은 지나친 면이 있다.(주8: 강남규 기자, 앞의 기사(중앙일보, 2011년 2월 14일자)에 나오는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23가지’ 항목은 짜임새가 있다. 매우 핵심적인 쟁점들이 ‘23가지’로 선정되어 있으며, 별도의 장(章) 나눔 없이 병렬적으로 이어져 있음에도 유기적으로 장하준의 생각을 드러낸다. ‘23가지’의 Thing은 다음과 같다. 


  Thing 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Thing 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Thing 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Thing 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Thing 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Thing 6. 거시 경제의 안정은 세계 경제의 안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Thing 7. 자유 시장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Thing 8.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Thing 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Thing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Thing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Thing 12.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Thing 13.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Thing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Thing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Thing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Thing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Thing 19. 우리는 여전히 계획 경제 속에서 살고 있다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Thing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Thing 22.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Thing 23. 좋은 경제 정책을 세우는 데 좋은 경제학자가 필요한 건 아니다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의 정리를 따른다면, ‘23가지’ 쟁점 사항 중 1번과 2번은 ‘정치’와 ‘소유’의 중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그리고 장하준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부분은 저 묵직한 두 가지 질문에 비해 훨씬 가벼워 보이는 3번인데, 이 3번은 11번, 15번, 17번 등과 얽혀 제도경제학의 핵심적인 포인트를 전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는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 노동자 개인의 생산성이나, 자본가 개인의 기업가 정신이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잘 조직된 제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제도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해보라면 그 요점은 ‘성장 요소(source of growth)’와 ‘성장 요인(cause of growth)’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 요소는 자본, 교육, 기술혁신 등인데 반해, 성장 요인은 이들 성장 요소들을 전체적으로 묶어내는 제도적 틀 또는 제도형태다. 이때 성장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개별 성장 요소들을 성장 요인인 제도 틀 안에 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성장 잠재력은 유실(流失)되어 버리기 때문이다.”(주9: 이병천, <“장하준의 복지국가론은 ‘리얼’하지 않다…왜?”>, 프레시안, 2011년 1월 24일자.) 


  그런 제도적 여건의 차이의 결과, 8번에서 말하듯 자본은 함부로 자국을 떠나지 못하여 ‘국적’을 가지게 될 경제적 유인을 얻는다. 6번, 7번, 14번, 18번 등에서 장하준은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형성백 옮김, 부키, 2004)에서 그랬듯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가 실제의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12번과 19번 등을 통해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설명했듯 정부 개입이 효율적일 수 있으며 필수불가결한 일이라 설명한다. 전작들에서 주로 개발도상국들의 성장전략을 논했다면, ‘23가지’에선 선진국에서도 자유 시장 이데올로기를 배격할 때에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포괄적으로 주장했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점이다.    


  그러나 ‘23가지’는 제도학파적 입장을 설명하고 경제성장에 있어서의 개발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병천 교수는 ‘23가지’가 복지국가론을 제시하면서 <사다리 걷어차기> 등의 전작들을 넘어서고 있다고 말한다. 제도경제학의 원리를 설명하는 3번은 13번과 결합하여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그 떡고물이 흘러내리게 하자는 자유 시장주의자들의 “트리클다운(trickle-down)” 전략에 대항하는 “보텀업"(bottom-up)” 전략을 제시한다. 그리고 5번과 10번과 20번, 21번 등은 그런 복지가 필요한 이유들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장하준은 성장과 분배 및 복지가 선순환하는 진보주의 경제학을 설명하게 된다.[footnote]위의 칼럼. [/footnote] 여기서 드러나는 개발국가와 복지국가에 대한 동시적인 옹호는 앞서 말했듯 장하준에게는 매우 일관적인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그들’의 탓인가?


  ‘23가지’는 먼저 2008년 금융 위기로 한계를 드러낸 전 지구적 차원의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장하준이 줄곧 강조하는 것은 자유 시장 정책, 자유 무역 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를 찾을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반대 경우들을 찾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이는 <사다리 걷어차기>와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는 마지막 장인 23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 불안과 불평등 악화, 그리고 지난 30년간 전 세계를 괴롭혀 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 왔다.”(주10: 장하준, 앞의 책, 322쪽.)  


  그러나 장하준의 평결은 통쾌하긴 하지만 과연 충분한 근거를 지닌 것인지는 미심쩍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출간되었을 때에도 이코노미스트와 파이낸셜타임즈 등은 장하준이 자신의 논지에 우호적인 역사적 사례에만 집중한다고 지적했으며, 이는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이 장하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김기원 교수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장하준을 공격한다. 김기원 교수의 경우 장하준이 <사다리 걷어차기>에 인용한 자료도 왜곡해서 인용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주장은 오히려 김기원 교수가 장하준의 통계 자료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나온 오류로 밝혀지기는 했다. 그러나 김기원 교수의 중심적인 논지는 유효하다. 장하준은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80년대 이후 IMF의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받아들이면서 나빠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지역의 성장률은 1970년대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이후의 상황도 동일한 것이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는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 장하준은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한 1990년 이후 미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주주자본주의와 거리가 먼 일본과 서유럽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도 하락했다는 점을 도외시한다.(주11: 김기원, <삼성이 뭐라고요? 장하준 교수님 틀리셨습니다―장 교수 논리의 비판적 해부… 극단적 소액주주 배척론의 위험성>, 오마이뉴스, 2011년 1월 26일자.)


  이 경우 장하준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기보다는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얘기하는 것이 된다. 자유 시장 정책과 성장률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하려면 거친 국가별/시기별 성장률 비교를 넘어서는 경험적 근거나 논리적 고리가 필요할 것이다. 자유 시장 정책이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말하는 것이 근거가 부족한 일이듯, 자유 시장 정책이 성장률을 떨어뜨렸다고 말하는 것도 근거가 부족한 일이 될 수 있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정책의 옹호자가 만드는 ‘신화’보다 더 그럴듯한 얘기를 만들어 냈다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 그의 주장은 자유 시장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안티테제에 불과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 시장 정책’을 한국의 진보진영이 흔히 쓰는 용어인 ‘신자유주의’로 바꾼다면,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왔기 때문에 성장률이 둔화되었는가? 아니면 성장률이 둔화되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왔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단순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닐 수 있지만, 장하준은 이 질문에 대해 대체로 전자라고 답변하고 싶은 듯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도 가능하다. 특히 장하준이 지식기반 경제론과 탈산업 사회론을 비판하기 위해 내세운 4번과 9번이 역설적으로 제도학파의 관점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 장하준의 주장대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세상을 훨씬 많이 바꾼 것이 사실이다. 또 제조업 분야의 기술혁신에 의한 생산성 증가는 서비스업 분야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다. 앞서 우리는 이병천 교수를 통해 제도학파는 자본, 교육, 기술혁신 등 성장 요소의 문제보다 그것들을 제도적으로 묶어 내는 성장 요인의 문제를 더 중시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탁기처럼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기술혁신의 영향으로 성장하는 시대가 아니라, 인터넷과 같이 다수 대중이 이용하지만 많은 고용을 창출하지 못하고 생산성을 급격하게 올리지도 못하는 기술의 혁신이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즉 오히려 제도학파의 논리와는 달리, 기술혁신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담보하기 힘든 형태로 경제구조가 변형되면서 성장률이 낮아진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 생산성 악화에 의한 자본이윤율 감소에 대한 하나의 대책이었을 수 있다.(주12: 이 논변은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하시는 바이커 님의 블로그 포스트에서 따왔다(http://sovidence.tistory.com/349). )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장하준이 말하는바 자유 시장 정책을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지난 30년 동안의 불평등 악화와 금융 위기에 대해선 책임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성장률 둔화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두 가지 책임이 구별될 필요가 있으며, 후자의 책임을 묻는 것이 좀 더 대담한 가설이라는 점은 인정해야만 한다. 또 장하준이 의미 없는 담론으로 격하한 지식기반 경제론이 지적하는 경제구조의 변화에 대해서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가령 지식기반 경제론의 문제의식을 좌파적으로 전유하려고 하는 최근의 ‘인지자본주의’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장하준은 인지자본주의가 심화되어 생겨나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기존의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대처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런 입장을 취하지 않더라도, 이 문제에 관한 장하준의 논변이 충분치 않으며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점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하준은 재벌의 폐해를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부분들에 대해선 장하준 본인도 한계를 알고 있을 것 같다. 장하준은 1970년대 들어 케인스(Keynes)주의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이후 집권한 대처가 그 위기를 하나도 해소하지 못하고 더 심화시켰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주13: 강양구 기자, <장하준 인터뷰 下> <삼성, 李씨 3세 세습 용인하고 받을 것 받자!">, 프레시안, 2011년 1월 4일자.) 그런 점에서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가 ‘지금의 자본주의’보다 더 높은 성장률을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추론은, 그의 경제학의 매력을 결정적으로 훼손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하준의 ‘개발국가-복지국가’ 조합이 최소한 ‘지금의 자본주의’만큼의 성장률은 보장하면서 분배의 문제에 있어 더 탁월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사회의 개혁에 얼마나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장하준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평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은 모두 나름의 ‘한국 사회에 대한 개혁 방안’을 가지고 장하준의 방안에 맞서려고 한다.  


  장하준의 방안에 대해 가장 꼼꼼하게 논평한 것은 앞서 언급한 이병천 교수다. 그는 장하준의 자유 시장 비판에서 더 나아가 시민경제론이 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장하준의 주주자본주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노동자, 납품업자도 경영자와 투자자와 마찬가지로 권리를 가지는 이해당사자 소유론이 고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주14: 이병천,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경제시민'은 '시민경제'를 요구한다>, 프레시안, 2011년 1월 11일자와, 이병천, <장하준, 재벌권력엔 왜 눈 감는가?―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2)>, 프레시안, 2011년 1월 17일자를 참조할 것.) 그러나 이병천의 서술은 장하준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그의 생각에 장하준이 더 나아가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부연에 가깝다. 


  이렇게 서로의 세계관이 차이가 나는 부분을 빼고 한국 사회 혹은 경제를 개혁하는 실천적인 차원에서 장하준과 다른 경제학자들이 부딪치는 첨예한 부분은 바로 ‘재벌 문제’다. 이병천과 김기원과 김상조(한성대 무역학과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장하준이 주주의 폐해만 말하지 대기업 권력 집단의 폐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23가지’에 한해서라면 이 비판은 기각된다. 장하준이 말하는 바는 정부 개입을 통해 대기업을 키우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지만, 대기업이 주주자본주의로 재편되면 그 도움이 되는 정도가 매우 작아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벌 권력의 폐해가 상존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개혁의 문제를 말한다면 장하준의 시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장하준 스스로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그간 많은 발언을 해 왔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장하준과 진보 경제학자들의 ‘재벌’ 논쟁에 대한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참여연대>가 10여 년 전부터 추진한 소액주주 운동을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다른 하나는 장하준이 재벌에 대해 내세운 ‘사회적 대타협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은 분리해서 논의될 수 있다. 


  장하준은 그간 <참여연대>의 소액주주 운동이 대기업을 주주자본주의에 의해 재편하고 외국 자본에 대기업을 팔아넘길 수 있는 우려가 있는 잘못된 방향의 운동이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장하준의 우려를 이해하더라도 이 비판이 현실적인 맥락에서 타당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한국의 소액주주들은 배당금을 노리지 않고 시세차익을 노린다. 소액주주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은 환경과, 시세차익이 아니라 매매에 대해 과세하는 조세제도 때문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을 견제할 방도 하나를 만들려는 소액주주 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일종의 ‘미끄러진 비탈길 논증’에 해당한다. 홍종학 경원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하준·정승일의 <쾌도난마 한국 경제>를 비판하는 <한국경제 새판짜기―박정희 우상과 신자유주의 미신을 넘어서>(김상조․ 홍종학․유종일 좌담, 곽정수 엮음, 미들하우스, 2007)에서 미국식 규제든 유럽식 규제든 지금의 한국보다는 대기업에 대한 책임을 물리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의 타당성은 의심할 수 있겠지만, 그와 별도로 재벌에 대해 당장의 압박을 가하는 수단이 주주자본주의를 결정적으로 선택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우려는 지나친 면이 있다.    


  반면 ‘사회적 대타협’ 문제는 얘기가 다르다. 그 막강한 삼성과 무슨 수로 사회적 대타협을 하느냐고 하지만, 이 문제는 훗날 재벌을 견제할 방안을 찾았을 때 그 기업 집단을 해체할 것인가, 아니면 기업 집단의 구조는 유지하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리는 방안을 찾을 것인가의 문제다. 장하준 논리의 핵심은 기업 집단이 적절한 제도적 보완을 통해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형태로 존속할 수 있다면, 이는 주주자본주의나 시장 논리에 의한 해체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삼성 해체’를 말하면서 어째서 삼성을 국유화할 생각은 못 하느냐고 반문한다.(주15: 강양구 기자, 앞의 기사.) 소액주주 운동이 되었든 불매운동이 되었든 아니면 오너의 투자 실패로 인한 고난이 되었든 훗날 삼성과 같은 재벌이 더 이상 탈법적 비자금으로 지탱하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회적 대타협’은 시민사회가 재벌 문제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주주자본주의의 확립이나 외국 자본에 기업을 팔아넘기는 것보다는 기업 집단의 경영권을 오너 가문에 인정해 주고 그것에 대해 통제하는 편이 낫다는 장하준의 주장은 분명히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하준의 한국 사회에 대한 대안은 김상조 교수의 지적처럼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던 ‘구자유주의와 포드주의(Fordism)를 건너뛴 것’인지도 모른다.(주16: 김동환․권우성 기자, <김상조 교수의 종횡무진 한국경제 ①> <장하준식 경제 해법이 한국에 맞지 않는 이유는?―신자유주의와 한국경제>, 오마이뉴스, 2011년 4월 15일자.) 그러나 그 대안들이 한국 사회의 현실에 접목되어 효과를 발휘할 가능성을 미리부터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복지국가론 대(vs.) 사회투자국가론 


  ‘장하준 논란’의 백미는 장하준이 책에서 사실상 파산 선고를 내리는 신진보주의자들, 그러니까 우익들의 지식기반 경제론에 기대어 사회투자국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노선을 계승한다는 국민참여당 대표 유시민과, 그 노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 김대호 등이 그들이다. 유시민은 <대한민국 개조론>(돌베개, 2007)에서 사회투자국가론을 천명했고, <후불제 민주주의>(돌베개,  2009)에서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주장에 거의 동의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선진국에 진입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한미 FTA(한미자유무역협정)’와 같은 자유무역협정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한국보다 후진국이란 것일까?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과 막상막하의 인식이다. 사회투자국가론을 주장하는 김대호 소장의 경우, 시사IN과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 장하준·정승일의 노선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김대호 소장 논변의 핵심은 한국에는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 없기 때문에 세금과 복지라는 2차 분배구조를 통한 조정으론 충분치 않고, 1차 분배구조인 사회적 상벌체계의 정비를 통해 개혁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주17: 김대호, <노무현은 알았다…장하준·정승일의 착각 또는 헛발질―진보의 길을 말하려면, 현실에 발을 딛어라!>, 프레시안, 2010년 11월 19일자.) 김대호 소장 논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논변이 사회투자국가론을 옹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논변으론 어째서 2차 분배구조인 복지제도를 배격하고 먼저 정의와 공평을 구현하는 사회적 상벌체계를 정비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전문직이나 대기업 정규직 등이 지나치게 높은 ‘지대(地代, rent)’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개혁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대호 소장이 말하는 것처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결코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들이 누리는 지나친 지대와 사회가 보장하는 최소한의 복지제도 간의 엄청난 괴리에 있다면, 그들의 지대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복지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엔 동의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노동유연화와 자유로운 해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한국의 대기업들은 그들 인력에 더해서 수많은 외주 노동자들까지도 정기적으로 고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경영이 어려워질 경우 지금의 정규직들에 대해서도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대호 소장은 법원들이 수많은 고용안정 협약을 무력화시켰던 사정에 대해서 무지한 듯하다. 그는 우리가 1987년의 덫에 빠져 있으며, 1997년 이후 노동자 해고가 결정적으로 늘어나지는 않았고 ‘신자유주의’란 낱말을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 


  1987년 이후부터 1997년까지는 대기업 정규직이 단체협상을 통해 임금을 올리면 기타 협력업체들의 임금도 따라서 상승하는 식의 나름의 체계가 작동했다. 이 체계가 깨지고 대기업 정규직과 기타 노동자의 괴리가 진행된 것은 IMF 이후 정리해고법과 파견법의 시행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들이 오직 자신들의 밥그릇만을 지킬 수 있게 되면서부터였다. 1997년부터 시행된 노동유연화의 영향에 눈을 감고, 오늘날의 노동운동의 파행을 1987년의 유산으로 몰고 가는 행태는 ‘개혁세력’ 집권 10년의 경제정책적 책임에 대해서 철저하게 외면하고, 이를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기주의’ 문제로 몰고 가 도덕적으로 비판하려는 끈질긴 욕망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오늘날의 최근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의 ‘자녀 세습’ 논란에서 드러났듯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에 비판할 지점이 분명히 있겠으나, 그 책임을 1997년이 아니라 1987년에 물으려는 시도는 너무나도 구차하다. 복지제도가 현격히 부족한 한국의 실정에서, 장하준 정도의 복지국가론을
“사회주의권의 몰락”이나 “1970년대 영국의 복지병”(주18: 김대호, <“장하준의 ‘복지론’에 마냥 동의할 수 없다>, 시사IN 166호, 2010년 11월 26일자.)을 논거로 합리적 자원배분 법칙이 아니라고 규탄하는 그 몰역사성과 관념성 앞에서 우리는 장하준의 책이 하나의 ‘교과서’로 유용한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한윤형 자유기고가. 청년세대 문제에 관한 많은 글을 기고했으며, 주변부 노동 문제와 언론개혁 문제에 관심이 많다. 현재 경향신문 <2030콘서트>란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언론개혁연대 정책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뉴라이트 사용후기> <안티조선 운동사> 등이 있으며, 공저로 <리영희 프리즘> <진보의 재탄생>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등이 있다.


꾸벅

2011.07.23 05:00:19
*.236.12.188

아주 재밌게 읽었습니다. 모르고 지나쳤을 글인데 공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프레소

2011.07.23 10:59:57
*.133.116.85

흠 신간으로 나오자마자 사서 읽었었는데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저도 3장이 많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임금이 좀 더 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뉴녕

2011.07.24 15:28:22
*.171.89.66

정확히는 많이 받는 이들은 많이 받고 적게 받는 이들은 적게 받는 노동시장 내의 이중구조가 생겨난 상황입니다. (신자유주의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좀 이런 추세이긴 한데) 평균임금보다 중위임금이 훨씬 낮아요. (평균임금은 말 그대로 임금의 평균이고, 중위임금은 임금을 높은 순서대로 늘어놓았을 때 중간순위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죠.)

휴론

2011.07.23 14:43:09
*.51.33.13

시사인 200호에서는 컬럼비아 대학의 자그디시 바그와티 교수도 장하준 씨와의 논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국에서도 장하준 교수의 논리를 제대로 공격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없어 보이네요. 이 정도면 장하준 씨의 복지국가론을 유효한 해결책으로 볼 수 있겠지요.

하뉴녕

2011.07.24 15:30:14
*.171.89.66

저도 그 기사봤는데 바그와티 교수와의 논쟁은 '탈산업화 사회' 논쟁이었습니다. 장하준은 탈산업화 사회가 아니다, 바그와티 교수는 탈산업화 사회다, 뭐 이런 논쟁이었죠. 어느 쪽 말이 옳건 이 논쟁에선 장하준이 더 빛나는 것으로 보이더군요. 물론 현대 사회가 탈산업화 사회가 아니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다 해서 장하준의 복지국가론이 곧바로 정당하게 되는 건 아닙니다만, 설득력을 느낄 심정적인 근거로는 작용할 수 있겠지요...^^;;;

hwal-in

2011.07.23 18:54:02
*.138.173.94

저도 굉장히 장하준 교수님을 좋아합니다. 주장에도 많은 부분 공감하구요.

장하준 교수님의 주장이 굉장히 여러 층위로 구성되다보니, 논쟁거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죠.

이병천, 김대호의 주장은 말씀하신대로 장하준의 주장을 '한국화'시킨 것에 가깝죠.
김순덕 아줌마와 어디 원장님의 주장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얘기구요.

다만, FTA 이슈와 사회투자국가 vs 복지국가, 기업 지배구조 이슈는 장하준의 주장을 포함해 앞으로 많은 논의와 논쟁이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전략적 실용성'의 문제에 가깝고, 많은 부분 우리가 역사에서 목도한 바와 같이, '좋은 전략'보다는 '할 수 있는 조금 덜 좋은 전략'이 가장 최선의 결과를 내기 때문이죠.

-한국이라는 다이나믹한 국민성을 가진 국가에서 '세습'을 인정해주는 대타협이 가능할 것인가?,
- 사적 이익의 극대화가 약화되고 의사결정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며, '와'가 중요한 국가 컨트롤 지배 구조'가 한국인 정서에 맞을 것인가?
- 복지 국가의 재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 우리는 사다리 위에 있는가, 아래에 있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시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미시의 레벨에서 보면 너무나 복잡한 경우가 많은거 같습니다. 왜냐면, 거시는 이성으로 분석이 되지만, 미시는 '감정'의 영역에 가까우니까요.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 진보신당, 민노당의 통합 문제나 그런 것도 비슷한 맥락아닐까요. 기업과 경제는 더욱 더 그러한 거 같습니다.

쉽게 재단할 문제는 아니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시스템을 합리화할수도 없지만요^^

하뉴녕

2011.07.24 15:31:38
*.171.89.66

대개 동의하는데 이병천과 김대호의 주장은 전혀 방향이 달라서...민주당의 정책도 김대호의 주장보다는 왼쪽으로 가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그렇다면 김대호는 국참당과 얼라이를 맺고 싶을 텐데...글쎄...그게 국참당에게 좋은 길일지...(만일 유시민이 <대한민국 개조론>에서 언급한 사회투자 국가론을 고수한다면 저는 무리없이 민주당이 국민참여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hwal-in

2011.07.24 18:29:51
*.138.173.84

제가 이해한 바로는 김대호의 주장은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저렇게 표현했습니다. 장하준의 주장이 실현되기전의 '선결조건'이라고 할까요.^^:

'복지국가'를 하기에 앞서 '상식적인 국가'를 만드는게 맞긴하니까요-ㅎㅎ 이병천은 확실히 구체화가 맞지요..^^:

hwal-in

2011.07.24 18:35:09
*.138.173.84

아 그리고, 저도 민주당이 국참당보다 -훨씬- 진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참당이 얘기가 나온 김에, 제 오랜전부터의 궁금점을 하나 여쭈어보자면-

제가 주워듣기로는 친북 NL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서적 충격에서 많은 부분 발생했다고 들었고, 노무현 '추종자'의 경우 전형적인 '아기장수'설화로 이해할수 있는데(기득권에 저항한 실패한 민중의 영웅),유시민 추종자분들의 '형성'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윤형님이 돌맞을 각오를 하고 '유시민 골수 지지자'들의 형성을 한번 다루어주셨으면 합니다-ㅋ (완전 이기적인 부탁ㅋㅋ)

혹자들은 '강남좌파', 혹자들은 '영남 민주화 패권주의 세력'로 해석하는데, 제가 보기에 유시민 지지자들 중 이 두 부류는 소수거든요. '아기장수' 설화파가 차라리 조금 더 많구요. 나머지 절대다수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파도소리28

2011.07.23 23:57:18
*.41.248.48

김상조 교수 이야기 들어보면 (한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장하준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는군요. 이유는 영국적 관점에서 한국을 봤다 그러는데 자세하게는 모르겠구요. 장하준의 주장은 대중적이라 그런가 봅니다. 나쁜사마리아인들이나 23가지 같은 책은 저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었는데요.

하뉴녕

2011.07.24 15:34:10
*.171.89.66

본문에도 나오지만 구자유주의와 포드주의를 이미 지나친 영국 사회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에 구자유주의와 포드주의의 과제가 남아 있음을 도외시한다는 게 김상조의 장하준 비판의 핵심이겠죠.

그리고 그보다 실천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소액주주운동에 대한 장하준(+정승일, 대안연대)의 비판에 대한 불만이 있는 것이겠구요...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가 담고 있는 주장엔 사실 크게 흠잡을 부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근데 본문 초반부에 언급했듯 사람들이 장하준을 신용하게 되면 장하준이 한국 사회에 대해 내세운 처방까지 신뢰하게 될 테니, 그런 지점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경제학자들이 경계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겠지요...:)

psyche2k

2011.07.24 17:15:33
*.136.28.46

윤형님 건강하시죠? 트위터의 psyche2k입니다..
트위터에서 갑자기 사라지셔서(?) 블로그에 인사차 왔습니..다만 사실

알고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장정일-조영일의 개싸움에
(장정일 본인이 직접 제게 '개싸움'이라 했습니다..ㅎ)
제 블로그가 장정일의 마이크-_-;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박가분이란 사람이 약간 얽혀서,
윤형님의 박가분 비판을 읽어보려고 왔습니다.

에궁 저 필요할때만 찾는 것 같아 죄송하네요..
예전에 제 블로그에 윤형님의 블로그를 링크 해 두긴 했습니다만;
저조차도 찾지 않는 폐가 블로그라(..)

무엇보다 본문먼저 안읽고 본문과 상관없는 선리플 후감상이라 죄송합니다. ㅠㅠ

하뉴녕

2011.07.25 22:24:55
*.141.20.107

안 그래도 님 블로그의 글들을 어제 확인하면서...

'슈가분'은 여전히 저러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박가분의 글 한 편에 대꾸할까 하다가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이 덕에(?) 곧 쓸지도요.

라캉주의자

2011.07.25 23:57:30
*.228.192.153

요즘 장안의 화제인 뽕장 논쟁 혹은 장슈뽕 논쟁이군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361 죄책감의 정치의 두 부류, 그리고 도덕성의 강박 [9] 하뉴녕 2011-09-15 24294
1360 우리편 전문가, 비평의 방법론, 그리고 현실의 재구성 [13] 하뉴녕 2011-09-13 26513
1359 곽노현 문제 [39] 하뉴녕 2011-09-10 23248
1358 SK와이번스 단상 : 현실은 드라마와 달라... file [18] 하뉴녕 2011-09-09 22760
1357 청춘 탐구와 시대 탐구 :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7] 하뉴녕 2011-09-03 22270
1356 [기획회의]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기를 - 키워드로 살펴보는 저자 "20대 멘토" 편 [126] [1] 하뉴녕 2011-08-19 30851
1355 피해자중심주의와 냉소주의 [7] 하뉴녕 2011-08-18 24490
1354 세계문학의 구조 : 정말로 문학 바깥에서 바라보았을까? [43] 하뉴녕 2011-08-04 20605
1353 어떤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 윤리적 판단을 위한 역지사지 [118] 하뉴녕 2011-08-03 27433
1352 어떤 민주당 지지자들 [85] 하뉴녕 2011-07-28 25237
1351 슬럿워크와 잠재적 성범죄자의 문제 [10] [1] 하뉴녕 2011-07-26 23269
1350 어느 '스포츠맨'의 답변 [27] 하뉴녕 2011-07-25 19444
» [작가세계]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 사회 [14] 하뉴녕 2011-07-23 25954
1348 [황해문화]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22] 하뉴녕 2011-07-15 23966
1347 왜 좌익은 희망버스를 곤혹스러워 하지 않는가? [21] [1] 하뉴녕 2011-07-14 23514
1346 [작가세계] 이건희는 생각하지마. [5] 하뉴녕 2011-07-13 26757
1345 SNS의 진보성? [14] 하뉴녕 2011-07-10 23750
1344 [프레시안books] 더 울퉁불퉁하게 기록하고, 더 섬세하게 요구했으면... [5] 하뉴녕 2011-07-09 22485
1343 한화의 가르시아 헌정 짤방 file [5] 하뉴녕 2011-06-30 37774
1342 [고황] 야권연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24] 하뉴녕 2011-06-21 24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