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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문학이 궁금하다면, 문학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문학 안에서 문학이 무엇인지 묻는 연극’에 질렸다면 말이다.(p5, 책머리에)


조영일, <세계문학의 구조>, 도서출판b, 2011


문학에 관심이 없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 책에 대한 장정일의 시사in 리뷰로 촉발된 장정일과 조영일의 넷상의 투닥거림 때문이었다. 그 투닥거림에선 책 내용이나 리뷰에서 제기되었던 논점이 전혀 해명되지 않았다. 논쟁이 시작된건 SNS의 뒷담화적 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장정일의 과민반응 때문이었던 측면이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논쟁이 생산성 없는 얘기로 진행된 까닭은 조영일의 논쟁에 임하는 태도의 문제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논쟁에 대한 판단과 장정일 리뷰의 적절성에 대한 판단은 또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장정일의 리뷰만 보고는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리뷰에 나오는 ‘제국주의’나 ‘식민지’와 같은 단어들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식민지, 근대화, 민족문제 같은 것들은 분명히 내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었고, 이제는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한 품평과는 상관없이 이 글을 쓴다. 나는 조영일이 번역한 고진의 책이나 그의 앞선 저작들을 읽지 않았고, 그래서 그가 한국 문단을 비판하는 관점에 대해서는 낯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문학에 대한 무지를 인정하면서, 이 문학에 관한 논의들에 역사에 관심있는 청년의 코멘트를 첨가하는 것이 “문학 바깥으로 나가보는” 것을 의도한 저자의 취지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해야 할 얘기의 분량이 만만하지가 않으니 내가 이 책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첫째, 나는 이 책이 전반적으로 주장하는 바를 뒷받침하는 논거가 부실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선 로쟈의 서평도 완곡하게 표현한다. “나폴레옹 전쟁과 러시아 근대 문학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바 료타로와 이문열에 대한 이야기가 "국민 문학은 전후 문학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흥미로운 논거이지만 충분한 논거인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제목에 등장하는 핵심적인 키워드인 “세계문학”의 역할이 장마다 단일하지 않아서, 논거의 부실함을 떠나 이 책이 하나의 일관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둘째, 그러나 나는 이 책이 말하는 내용들이 흥미로우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논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보론으로 붙어 있는 “세계문학전집의 구조”는 본문과 별도로 재미있는 글이었다. 나는 보론과는 달리 본문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드러내는데 실패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장의 내용들은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고 더 많이 얘기할 거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째, 나는 이 책이 아쉬운 이유는 상당부분 저자가 ‘문학 바깥으로 나가’ 문학을 바라보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소설들을 통해서만 근대화와 민족서사의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논의하는 핵심적인 키워드는 한국문학, 민족문학, 그리고 세계문학이다. 한국문학이 어떤 이유에서 ‘제대로 된’ 민족문학이나 세계문학이 되지 못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의식이라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비교대상으로 일본문학과 러시아문학, 주로 일본문학의 상황이 호출된다. 


즉 저자의 의도는 ‘한국문학의 위기’라는 공통적으로 주어진 사건에 대하여, 주류문단의 평자와는 다른 관점을 제출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위기’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다소 다르게 읽어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이 위기는 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면 편해!!!”에 가깝다. 


그러면 먼저 주류문단에서 말하는 그 ‘위기’라는 게 무엇인지를 짚어 봐야 할 텐데, 뭉뚱그려진 ‘위기’란 단어는 다음과 같이 세부적인 사안으로 해체가 가능하다. 

1) 존경 (소설가, 혹은 문인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문제.) 
2) (시장규모가 작아지고 있다는 문제. 외국문학, 상업문학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문제.)
3) 수상 (국제적으로 인정을 못 받는다는 문제. 노벨상 수상자가 안 나온다는 문제.)
4) 수준 (생산되는 작품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문제.)



이 정도로 명료하게 구별하진 않을지라도, 조영일은 ‘존경’, ‘돈’, ‘수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 이야기한다. 조금 애매한 것은 ‘수준’인데, 조영일은 작품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다소 주저하는 눈치다. 그러면서도 그가 작품성의 측면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책의 몇 구절은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문학이 다른 민족문학보다 ‘후지다’는 전제 하에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수준의 문제를 작가적 역량의 문제로 보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이 부분에 대한 서술을 피해가려고 하는 듯하다.



그래서 '수준'의 문제를 생략한다 하더라도,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려면 나머지 세 개를 구별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각각의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고 원인도 다를 수 있는데, 이것들을 '위기'란 말로 뭉뚱그리면 현실세계의 활동과 무관한 추상적인 대책 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조영일의 전작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조영일이 이전에 이 각각의 사안에 대해 세심하게 각각의 원인에 대해 분석을 시도했는지 여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에서 조영일은  이 사안들을 구별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인에서 파생된 결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하나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이 부분은 이 책 기획의 장점이자 단점이 된다. 하나의 원인으로 여러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설득력이 있을 경우엔 매우 설명력이 큰 가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방식의 접근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본 것일 수도 있다.  '존경', '돈', '수상'의 문제 중 '존경'의 문제에 대해 조영일은, 가라타니 고진이 주장한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일본문학과 한국문학을 망라하고 닥쳐오는 보편적인 사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돈'과 '수상'의 문제에 있어 조영일은, 한국문학이 일본문학에 비해 열악한 이유가 하나의 이유로 수렴될 수 있다고 보고 그 이유에 대한 가설을 제시한다.


그 가설에 대해 검토해보기 전에 먼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담론이 무엇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고진은 근대문학이 원래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그런 물건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국면에서 특수한 기능을 맡았던 것이라고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근대문학은 근대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역할을 부여받았다.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에서 고진의 주장을 이렇게 정리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란 태고부터 있어왔던 게 아니라 근대의 민족국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민족국가는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하여 문학이 필요했다. 근대문학은 ‘민족국가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주조(세뇌)하고 국어 확립에 일조하는 동시에, 국가에 대한 비판자 구실을 떠맡았다. 근대문학은 국가 만들기와 국가 비판이라는 이중의 임무를 치르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근대의 신화가 됐다.

그런데 민족국가가 전 세계 규모에서 완수되고, 문학 자체가 대학(국가)이나 출판 제도(자본)에 포획된 오늘에도, 근대문학이 지탱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민족국가 체제의 지구적 성립과 더불어 문학의 정치적 구실도 소진했다면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그러고 나서 문학이 아닌, 자본·민족·국가를 넘어서는 ‘세계공화국’의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다.


조영일은 그동안 고진의 관점을 한국에 소개하며 그 잣대에서 한국 문학/문단의 문제를 비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관점에선, 앞서 설명했듯 '존경'의 문제는 일본과 한국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사태다. "문학의 대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대문학이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긍정적인 형태로든 비판적인 형태로든 한 사회의 통합(국민국가 건설)에 나름대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의 형식적 완성이 사회적 영향력 상실로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p57) 그러므로 남는 것은 '돈'과 '수상'의 문제일텐데, 이 분야에 있어 한국문학과 일본문학 사이엔 심연의 강이 존재한다. 조영일은 이 문제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나라는 근대문학이 발달했으나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했던 것일까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을 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서사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유토피아)으로서 식민지를 가져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습니다.(p76)

좋고 나쁘고의 문제를 떠나 한국근대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제국주의적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것(그리고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p103)

여기서 루카치의 논점은 근대문학이 '전쟁선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를 '원인과 결과'의 문제로 협소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즉 근대문학이 전쟁동원에 큰 공헌을 했다는 말도 맞지만, 그 역(근대전쟁이 근대문학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도 어떻게 보면 옳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상호 협력하는 방식입니다.(p189)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국가가 부재한 시대를 산 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민족서사시 내지 국민서사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p225)

하지만 한국의 근대문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역사적 필연성(국민적 경험) 없이 그저 이식되어진(상상된) 것에 불과하다는 점만 상기한다면, 새삼스럽게 당황해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p226)
 
민족문학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민족문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국민서사시를 가진 민족문학과 그렇지 못한 민족문학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전자의 국민문학인 경우 그 자체로 이미 세계문학(물론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라기보다는 현실로서의 세계문학을 말합니다)이라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단순히 돈과 마케팅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지도 모릅니다.(같은쪽)
*굵은 글씨 강조는 필자


즉 조영일은 한국의 근대문학, 민족문학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이유를 분석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해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그가 이 이유에 대해서 얼마나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했느냐다.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에서 조영일의 주장을 두 가지 지점에서 논박하는데, 그중 한 부분은  “근대문학이 발달한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를 판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국민작가의 유무라 하겠습니다."(p76)라는 구절을 가져온 후 '국민작가'는 일본에 밖에 없는 현상이므로 조영일의 주장이 오류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인용한 구절도 조영일의 주장이기에 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기는 하나, 나는 위에서 내가 인용한 구절들에 비해 이 구절이 조영일 논변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영일이 말한 '국민작가'는 엄밀한 얘기는 아닌듯 하지만, 큰 틀에서 볼 때 내가 위에서 말한 '수상'의 차원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영일은 이렇게 말한다. 


이는 만약 러일전쟁(또는 그와 비슷한 대량살상 전쟁)이 없었다면, 일본근대문학은 전혀 다른 형태로 전개되어 갔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물론 어떤 식이 되었을지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일본문학은 오늘날 노벨문학상을 두 명이나 배출할 만큼의 지위를 얻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p114)
*굵은 글씨/글자크기/글자색 강조는 필자

  
말하자면 '국민작가'론이 부정당한다 하더라도 조영일은 다른 잣대를 근거로, 하다못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숫자를 통해서라도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역량을 구분지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국적별/언어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를 살펴보자.

국적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
프랑스 14 / 미국 10 / 영국 9 / 독일 9 / 스웨덴 6 / 이탈리아 6 / 스페인 5 / 폴란드 4 / 아일랜드 4 / 소비에트 연방 4 / 노르웨이 3 / 덴마크 3 / 스위스 2 / 칠레 2 / 그리스 2 / 일본 2 / 남아프리카 공화국 2 / 벨기에 1 / 인도 1 / 핀란드 1 / 아이슬란드 1 / 유고슬라비아 1 / 이스라엘 1 / 과테말라 1 / 오스트레일리아 1 / 콜롬비아 1 / 체코 1 / 나이지리아 1 / 이집트 1 / 멕시코 1 / 세인트루시아 1 / 포르투갈 1 / 트리니다드 토바고 1 / 헝가리 1 / 오스트리아 1 / 터키 1 / 페루 1

언어별 노벨문학상 수상자 수
영어 27 / 프랑스어 14 / 독일어 13 / 스페인어 11 / 스웨덴어 6 / 이탈리아어 6 / 러시아어 5 / 폴란드어 4 / 노르웨이어 3 / 덴마크어 3 / 그리스어 2 / 일본어 2 / 벵골어 1 / 세르보크로아트어 1 / 아랍어 1 / 아이슬란드어 1 / 오크어 1 / 이디시어 1 / 중국어 1 / 체코어 1 / 터키어 1 / 포르투갈어 1 / 핀란드어 1 / 헝가리어 1 / 히브리어 1

*출처 : 한글 위키백과,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목록


조영일의 논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적어도 스웨덴(6), 폴란드(4), 아일랜드(4), 노르웨이(3), 덴마크(3), 스위스(2), 칠레(2), 그리스(2), 남아프리카 공화국(2)이 식민지를 가졌거나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장정일은 시사in 리뷰의 말미에서 아일랜드 문학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를 조영일에게 요구한다. 내 생각에 조영일에게는 이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답변의 방법이 있다.

1) 위 국가들은 통념적으로 훌륭한 근대문학-민족문학을 꽃피운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 위 국가들은 통념적으로는 제국주의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수행했다.

1)과 같이 답변한다면 조영일은 노벨문학상이나 세계의 인정과는 별도로 문학성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제시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조영일은 이 부분에 대해 딱 부러지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노벨상'이란 기준마저 벗어던진다면 조영일은 오히려 '남미문학'을 숭앙하는 이들의 더욱 거센 반론에 시달리게 될 듯하다.


2)와 같이 답변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문제는 이 경우 '제국주의 전쟁의 경험'을 '식민지 경험 유무'라는 잣대보다도 꽤 넓은 의미로 해석하게 될 것이고 한국(남한)이 그 경험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을미의병(1895)과 정미의병(1907)을 통해 식민화에 저항했고, 식민지가 된 후엔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일본인은 이 전쟁들을 뭉뚱그려 '15년 전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우리는 식민지기 35년 중 15년을 제국주의 전쟁과 함께 한 것이다.) 징용을 경험했으며, 제국주의 전쟁의 전승국들에 의해 분단된 한국이 '제국주의 전쟁의 경험'이 없다고 말하는 건 꽤 난감한 일이기 때문이다.  


조영일이 여기서 할 수 있는 항변은 두 가지 정도라고 생각된다. 먼저, 자신이 말하는 '전쟁'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말한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한일합방은 일국 대 일국 간의 전쟁 같은 것조차 없이 이루어졌습니다."(p83) 그리고 우리가 '전쟁'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일본인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물론 저항은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태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일본에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일본인의 무의식에 한국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매우 적었습니다."(같은쪽)  


그런데 후자의 경우 일본인의 무의식과 근대문학에 '한국'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설명할지언정 '한국인의 경험'에 대해서는 말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부분은 전자일 것이다. 장정일은 이 주장에 대해 맹비난을 퍼붓는다. "다만 모자란 것은, 정규군이 나서야만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지은이의 순진함이다. (...) 다시 말해,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별과 대치만으로도 근대국가나 근대문학을 조성하는 충분조건이 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 정규군을 동원하지 못한 투쟁은 모두 비합법적 테러로 전락하고 만다. 이게 지은이가 안중근을 돈키호테로 여기고, 마치 한국은 제국주의에 대항한 전쟁을 벌였던 적이 없다고 여기게 된 궤변의 바탕이다." 그러나 좀 더 섬세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논박은 "한국도 제국주의 전쟁을 해봤다!!!"라는 볼멘소리는 아닐 것이다. 그거야 조영일이 그 단어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사태를 다르게 재단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드러나는 조영일의 이론적 곤궁은, 그가 애초에 근대문학을 형성한 경험으로 '전쟁'을 제시하려고 했으나, 예상되는 반박을 받다 보면 결국 '전쟁'이 아니라 '국가'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국가가 있어야 근대문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는 고진의 얘기에서 한발짝도 더 나아간 얘기가 아니니, 사실상 조영일은 동어반복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세계사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앞서 내가 제시한 일본에 필적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국가의 리스트에서, '국가 없는 전쟁'만을 치뤄낸 이들을 지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럴만한 역량은 없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근대문학은 전후문학이다."라는 멋들어진 테제가 '식민지를 거느리거나, 국가 대 국가로 제국과 전쟁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근대문학 융성'이란 명제를 반드시 함의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명제는 좋게 말하면 대담하고, 나쁘게 말하면 무모하다. 그리고 위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러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사례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조영일은 나폴레옹으로 통칭되는 유럽문학, 러시아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정도를 예시로 들 뿐이다. 유명한 것들을 일별하긴 했지만(그나마 그것조차 충분하지 않다.) 예상되는 반론들(가령 장정일의 "아일랜드는?!?!?!" 드립이라든지)을 고려한 맥락설명은 없다. 전반적으로 본인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근거를 충실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를 다소 축소하여, 조영일의 분석을 "왜 일본문학은 융성했는데, 한국문학은 그렇지 못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정도로 받아들인다면 이 논의는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를테면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인이 서구인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근대문학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분석은 꽤 설득력있다. 그러나 이 분석을 통해 보이는 것은 일본문학의 보편성이 아니라 특수성이다. 일본인은 제국주의적 전쟁의 승리를 통해서야 일본인이 서구인과 맞설 수 있는 대등한 사람임을 자각하게 되었을 수 있지만, 아일랜드인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가령 한국인이 일반적인 식민지를 경험한 국민들에 비해 식민모국에 대해 강렬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도, 일본의 통치가 모든 제국주의 국가의 통치 중에서 가장 악랄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일본을 전근대 시절부터 경험했고 결코 그들이 한국인보다 우월한 인종이라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아일랜드나 폴란드 같은 사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식민지를 거느린 적이 없는 어느 유럽 소국의 문학인을 상상해 볼 때, 우리는 그가 러일전쟁 이전의 일본인들처럼 영/미/불/독/러 등의 제국시민들에게 컴플렉스를 심하게 느껴 문학활동을 못할 정도라고 추측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제 민족의 서사시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혹은 그저 제국의 언어로 제국의 맥락에 포섭되는 문학활동을 하면서 '보편적인' 근대문학의 생산자가 될 수 잇을 것이다. 


'국민작가'는 일본만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장정일의 비판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은 서양의 군사적/문화적 공세에 대항하여 '국민'의 개념을 만들어내었고, 그들이 조선에 대해 같은 공세를 펼칠 때 조선은 다시 그 일본에 대해 저항하며 '국민' 담론을 형성했다. '국민작가'를 찾는/만들어낸 일본지성계의 풍조는 이런 현실의 반영일 뿐이지 국민작가 자체가 근대문학의 융성을 판가름하는 지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영일의 '오류'는 일본의 특수한 사례를 그 특수함을 통해 탐구하지 않고, 쉽사리 그들의 경험이 근대문학의 조건을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믿은데 있다. 


또한 조영일은 한국적 경험의 특수성 역시 그 특수성을 통해 고찰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가 "근대문학은 전후문학이다."라거나 "근대문학은 민족서사시가 가능해야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면, 적어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어떻게 다른 전쟁을 경험했는지, 한국의 민족서사시가 일본과는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는지(혹은 뒤틀렸는지)를 탐구했어야 할 게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중근에 대해 쓴 이문열의 소설 한 편을 분석하면서 해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상황/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들을 고려한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대체 민족서사시란 측면에서 이문열의 <불멸>이 임권택의 영화 <장군의 아들> 시리즈만큼의 가치라도 지니고 있는지 의문이다. 시바 료타로가 <언덕 위의 구름>에서 다룬 시대에 대입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읽지도 않은 이문열의 안중근 소설을 대입했다면 논의가 너무 자의적이지 않을까? 더구나 식민지 경험을 지닌 한국인의 민족서사는 기본적으로 피해자-담론이고, 차라리 그 피해자-담론을 환상적으로 구축한 것은 조정래의 일련의 소설들일 텐데, 조정래 소설은 바로 그 '지나친 피해의식 때문에' 분석하지 않겠다고 눙치고 지나간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애초에 식민지 국가의 민족서사시는 제국의 것과 다르게 접근해야지, 제국의 민족서사시와 비슷한 형식을 갖춘 허접한 놈(문열의 소설)을 끄집어낸 후 "역시 제국이 아니면 민족서사시가 안 만들어져!!!"라고 결론 내려서야 미리 집어넣은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 밖에 안되지 않을까?


조영일은 책 속에 "한국에는 근대문학이 없다.(약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일본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고진 선생에게 문의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걸 자랑스럽게 적어놓았는데, 그가 일본인들 앞에서 피력한 주장과 이 책의 전반적인 논지 사이에는 두 가지 면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앞서 말한 것처럼, "한국엔 근대문학이 없다."는 주장은 어찌어찌 구성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이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은 나라는 근대문학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과 같은 것은 아니란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도 훨씬 무모한 주장이고,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나는 일본의 학자들이 후자를 듣고도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을지 정말로 궁금하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얘기인데, "한국엔 지금껏 근대문학이 없었다."는 주장과 "한국은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았으므로 애초에 근대문학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또 전혀 다른 것이란 거다. 학적 엄밀성의 측면을 떠나서라도 일본 학자들이 남의 나라 얘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한국인인 조영일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데, 글쎄, 그렇다고 일본 학자들이 이 의아한 주장에 대해 속시원하게라도 생각할까?


조영일의 주장은 흡사 기독교 문명권만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할 수 있다던 19세기 서구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노벨문학상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수여될 터이니 한국문학의 기원이 일본문학의 이식에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한국도 노벨문학상을 '두 개' 쯤은 탈 것이다. 조영일은 이 미래의 사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려 할까? 결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방식이 있겠고, '근대문학 종언' 되었으니 이제부터 수여되는 노벨문학상은 후루꾸라고 우기는 방식이 있겠는데, 양쪽 다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제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네이션 빌딩'이란 차원에서 한국 사회와 한국 문학을 살펴볼 경우 분명 일본 사례와 다른 면모가 있을 것이다. 가령 남한 정부는 '빨갱이'를 비국민의 영역에 몰아넣어 학살하는 측면에서 '네이션 빌딩'을 수행했는데, 이는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족 서사시'와는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정부의 국가 건설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인들은 근대민족의 형성을 고찰하는 민족서사시를 만드는 대신 '우리는 5천년간 한민족이었다.'는 환상적인 전근대민족의 서사를 반복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통해 국가에 대항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말할 수도 있겠는데, 한국엔 근대문학이 없단 조영일의 말에 찬성하며 "하지만 시가 있지 않습니까?"라 대꾸했다는 일본 평론가는 시로써 국가에 대항한 김지하나 고은 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지만 한국의 근대문학이라는 것이 애초에 역사적 필연성(국민적 경험) 없이 그저 이식되어진(상상된) 것에 불과하다" 확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근대문학이 이식된 것이란 것과 근대국가에 대한 국민적 경험이 없다는 건 전혀 별개 문제다. 어쨌든 대한민국도 근대 국가라면, 이 근대국가를 형성한 경험은 어떠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 섬세한 분석이지 경험이 없으므로 근대국가도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어리석다. 더구나 '민족'은 우리에게만 '상상된' 것이 아니라, 근대민족의 발상지라는 프랑스에서도 '상상적 공동체'다.  

 

조영일은 "한국에 근대문학이 없다."라고 단언하거나 "미약하다"고 말할 때 본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논리적 곤궁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가 말하는 '근대문학'은 물론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분석한 그 '근대문학'일 것이다. 그런데 만일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이 한국 사회에선 존재한 적조차 없다는 조영일의 주장이 옳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가라타니 고진의 규정에 전혀 맞지 않는 한국 문학/문단의 문제점을 가라타니 고진을 통해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조영일이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주장들은 그간 그의 활동들의 의미를 심하게 훼손하는 측면이 있다. 어쩌면 그가 책 본문에서 (일본 학술대회에서 했다는) "근대문학이 없다."는 단언 대신 '미약한/성숙하지 못한 근대문학'이란 표현을 선택한 것은 그 점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문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다는 말을 했을 뿐이라 변명하더라도, 고진의 논의에 전형적으로 들어맞지 않는 한국 문학의 상황을 고진의 견해를 통해 비판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좀 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설명을 위한 작업은 '한국엔 어떤 역사적 경험이 없고, 따라서 성숙한 근대문학이 불가능하다.'는 단언이 아니라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국의 '네이션 빌딩'의 특수성을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그런 작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이 아쉬운 이유는 상당부분 저자가 ‘문학 바깥으로 나가’ 문학을 바라보겠다는 공언과는 달리, 소설들을 통해서만 근대화와 민족서사의 문제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내 최초의 지적은, 바로 이 지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세계문학'의 개념이 장마다 달라서 내용의 통일성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해야겠다. 1장에서 백낙청을 비판할 때, 조영일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이념이 엄연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낙청이 "민족문학이냐 세계문학이냐는 질문을 시장문학이냐 아니면 반시장문학이냐로 바꾸고, 둘 중 하나는 지양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둘 모두를 구해내는 마술을 펼치고 있다"(p37)고 비판했다. 세계문학의 이념을 조영일이 정리한 바대로 괴테의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 비판은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조영일이 책 말미에서 '이렇게 나는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이 될 수 없는 이유를 규명했다'고 선언할 때, 그가 말하는 세계문학은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 이념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이다.


즉 조영일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이념적으로 대립시킨 후 앞으로는 세계문학을 따라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민족문학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문학도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입장은 다를지 몰라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포개놓는다는 점에서 그는 백낙청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우리는 민족문학이 애초에 불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세계문학하자!!'고 했으면 무슨 소린지 이해나 갈텐데 말이다. 민족문학도 세계문학도 불가능하다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락거리가 되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렇다면 그 오락거리에 종사하는 문단사람들이 국가에 보조금 달라고 하는 걸 비웃는 이유를 모르겠다. 본인이 문학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 정리했다면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여하간 세계문학의 개념이 이렇게 어그러져 있기 때문에, 이 책에 붙어 있는 '세계문학의 구조'란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도대체 책을 다 읽어도 알 수 없는 일이 되고야 말았다. 이 책은 분명히 잘못된 제목이 붙은 책인데, 안쓰러운 것은 내용이 너무 퍼져 있어 다른 적절한 제목을 고민해 내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장정일의 리뷰에 대해서는, 나는 이 리뷰가 다소 민족주의적 정서와 편견에 치우친 비분강개로 느껴져 부담스럽고 이 책의 문제점의 핵심을 짚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진 질문들도 조영일이 답변할 수 있어야 하는 질문은 맞는데, '지적 사형선고'니 장정일 시집을 '불로 정화'니 운운한 친구들을 보니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나 조영일이 인터넷에서 주장했다시피 이 책의 2장의 장정일 비판이 장정일의 리뷰의 논점을 미리 방어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이 책에 나온 조영일의 장정일에 대한 '문화주의자'라는 비판이 타당하다고 보지만, 장정일의 시사in 리뷰는 책 본문에 등장한 장정일의 문화주의적 관점과 별다른 관련이 없었다. 다만 나는 조영일이 안중근을 '돈키호테'라 칭한 것에 대한 장정일의 분노는 (물론 이해는 가지만) 핀트가 어긋났다고 생각하는데, 이 문제는 책 전체의 주제의식과는 조금 다르게 별도의 해명이 필요하니 다음에 다시 한 번 글을 쓰도록 하겠다. '안중근'을 매개로 이 책의 4장의 내용을 민족주의자들의 정서적 편견과 함께 비평하는 종류의 글이 될 것이다. 나는 조영일이 '새끼 제국주의자'라는 장정일의 험담엔 동의하지 않지만, 그가 '안중근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 봤다고 생각하고 다소 부연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 


이챠

2011.08.05 23:08:33
*.41.224.95

1즉 조영일은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이념적으로 대립시킨 후 앞으로는 세계문학을 따라가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작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민족문학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문학도 달성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입장은 다를지 몰라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포개놓는다는 점에서 그는 백낙청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우리는 민족문학이 애초에 불가능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세계문학하자!!'고 했으면 무슨 소린지 이해나 갈텐데 말이다.

2민족문학도 세계문학도 불가능하다면 남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락거리가 되는 것 밖에 없을텐데, 그렇다면 그 오락거리에 종사하는 문단사람들이 국가에 보조금 달라고 하는 걸 비웃는 이유를 모르겠다. 본인이 문학을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 정리했다면 먹고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 일단 지나가며 지엽적일 수도 있는 부분 두 개만.....
1. 세계 문학은 민족 문학과 다르지만 작가의 민족성이 '드러나면서도' 보편성 위에 있어야 되기 때문에 세계문학은 민족문학의 달성 이후에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쉽게 말해 세계 문학은 민족 문학이 성립된 다음에 가능한 테크트리 다음 단계라는 의견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맞다면 대립 돼 있지만 뿌리 쪽 어떤 지점에서 포개져 있는게 기정사실인 것이다. 자기 것 조차 없는 상태에서 뭘 가지고 어떻게 보편을 이야기 하겠냐는 물음인 듯.(그건 가능하다고해도 세계문학이 아니라 또 다른 피식민성일 뿐인 것이 아닌가) 물론 그의 기획이 가지는 흐름에서 따온 추측이고, 백낙청에 대한 반박이나 장마다 다른 식으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건 내가 제대로 읽지 않아서 아직 뭐라 할 수 없음.'(읽기 전이라 이건 추측의 추측인데 : 그렇다면 이 논리를 그대로 따라갈 때 한국에서 세계문학은 불가능해도, 그 새로운 - 민족 문학 없는 운명의 불행?을 보여줄 수는 있겠으나 작가 개인으로 볼 때는 누구나 받게 마련인 수준의 문화적 영향이나 다를 바 없으니 굴욕적인 의미는 별로 없겠지만- 피식민성을 띠는 보편성의 획득을 통해서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은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건 이 논리상 있지도 않은 한국의 민족문학과 관계 없고, 자본과는 관계가 깊을 수 있고, 어쩌면 세계문학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한국의 세계문학은 아니게 되겠지. --; 자세히 읽고 해야지 이 부분은 이 시점에서 내가 더 나가면 안 될 듯.)

2. 조영일이 그걸 비웃는 이유는 그 사람들은 그걸 먹고 사는 일로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뭐나 되는 듯이 여기면서 보조금은 '돈이 좋다. 먹고 살아야 되니까 보조금을 주세요.'라고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고 그 '되는 듯한' 이유로 요구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게 단지 먹고 사는 문제이고 엔터테인먼트일 뿐이라면 시장에 의해서 걸러지는게 더 양질의 제품 나올 수 있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 이 시점에서 국가는 몇몇 작가와 작품의 무쓸모한 연명만 부당하게 돕는 것이다. - 추가, 그리고 국가 장치에 반항하는 내용을 평소에 자주 쓰는 작가의 경우에는 이상한 종류의 타협이나 투항이라는 혐의도 추가된다. 싫어하는 애한테 왜 빌어먹냐는 것이지. (물론 나는 전체적으로 조영일과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주인장과 정 반대로 그의 3부작 기획 중 지난 두 책을 제대로 읽었고, 이번 건 다른 일에 너무 치여 대충 훑어 읽었을 뿐이라, 이 정도 짐작을 이야기 할 뿐임.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볼 요량임. 그 뒤에 말할 게 있으면 조금 더 말해보겠음.
그의 기획을 바라보는 생각 못한 시점을 이야기해서 일단 즐겁게 읽었다.

하뉴녕

2011.08.06 09:27:33
*.118.61.248

1과 같이 이해할 때에 조영일의 견해는 백낙청의 견해와 '실천적으로' 더욱 포개지는 것이지. 결국 민족문학을 제대로 돌파하지 않으면 세계문학이 안 된다는 얘기인데, 물론 조영일의 논지는 우리는 애초에 민족문학이 안 되기 때문에 '포기하면 편해' 쪽에 가깝지만, 아무것도 안 해야 한다는 주장에 사람들이 찬성표를 줄리가 만무. 그렇다면, 세계문학을 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조영일이 그렇게까지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챠의 견해대로라면, "먼저 민족문학을 성취해야!!!!" 그러니 백낙청인 것이지.


2에 대해선, 예술한다고 보조금 달라고 하는 문인들이 꼴같잖을 수는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논점이탈이라고 생각. 우리가 '사상의 자유'를 말할 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별로 옹호하지 않는 극좌/극우파들에게도 그 혜택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지. 특히 문학을 오락거리로만 사유하고 문화산업으로 여긴다면, 무조건 보조금을 주는게 산업육성에 이득. 조영일은 보조금을 안 주는 일본 상황과 한국을 포개고 있으나, 결국 보조금 받는 한국 영화산업이 일본 영화산업보다 흥하지 않았던가? 일본이야 지금 보조금이 없다니 보조금 안 줘야 한단 주장을 할 수 있겠으나, 소득없는 문인들이 많은 시점에 이미 보조금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보조금 주지 말라는 건... 굉장히 과한 주장이지. 그리고 돈을 줄 때 "넌 시장주의자야!!"라고 확인받고 줄게 아니라, (그건 앞서의 비유를 이어간다면 사상전향서 내지는 준법서약서겠지.) 그냥 어느 정도 요건 충족된 사람들에게 흩뿌려야 시장은 더 잘 조성되기 마련이지. 그러니 타협이나 투항을 비판하는 것은 비자본주의적인 발상. 문학을 자본주의 체제의 오락거리라 생각했으면 그런 견해를 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 부분을 굳이 내가 지적했던 이유는, 다른 영역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음. 사실 국가가 돈을 일률적으로 주면 그 단체/사람들은 국가에 종속되기는커녕 시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군소정당, 시민단체, 군소언론에 대한 보조금이 강화된다면, 그들은 국가에 종속되기는커녕 사실 더 자유로워지는데, (물론 제대로 정착이 안 되면 MB정부에서 보여지듯 막 보조금 끊겠다고 협박할 수도 있지만...) 지나치게 나이브한 관점을 정책 영역에 적용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이챠

2011.08.06 12:09:23
*.41.224.95

1. 나라면 모를까. 민족문학이 불가능하다는 조영일이 세계 문학에 도달하기 위해 먼저 민족문학을 성취해야한다고 말할 리가 없지.
저 논리상에서 세계 문학은 한국이라는 커다란 친구 입장에서는 버리거나 포기해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수순이나 좋거나 한 것. 말했듯이 작가 개인적으로는 세계 문학을 하고 싶다면 남의(한국의 민족문학을 통하는 게 아니라 기존에 짜여진 세계의) 보편에 올라서서 뭘 해도 상관 없는 것이겠지(실천적으로). 조영일은 문학 실천에 관련해 '새로운 문학을 위해서는 이미 굳은 문단과 되지도 않을 민족문학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고, 현상적으로는 장르 문학과 라이트 노벨 등에(혹은 이 현상의 미래에)관심이 많고 호의적이지.
조영일이 실천적으로 뭔 이야길 한다면 아무것도 안하자는 이야기는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이나, 상업 소설 하고 싶으면 하고, 예술문화의 고갱이인 '새로운 작품' 하려면 이미 끝난 (그게 나올 수 없는 토양인)문단이나 민족문학에 - (그 야바위가 뭘 할거라 믿고 돈 주는) 정부에 - 기대지 말고 자기 힘으로 가난하게라도 해보자는 것이지. 둘 다 같이해도 자연스럽고. (물론 이 요구의 실천이 전면적인 상업주의로 이어질 수 있지. 그가 말하는 새로움이라는게 대부분 상업주의에 종속 된 것으로만 나타날 수도 있고. 국가에서 벗어나는 한편 상업주의에서도 벗어나 새 작품만 추구하는 사람이 그런 척박한 지리에서 '새로운 문학의 완수'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대부분 사장되는 결론에 이를 거라는 게 내 생각이고, 그래서 결국 이 논의를 긍정적으로 보며 참가한 사람들 중에서는 문단이나 국가보조를 유지하면서 문단의 성격을 바꾸어 가자는 사람의 견해에 가장 공감하는 편) - 장마다 세계문학을 다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아직 뭐라할 수 없지만 거기에서 오는 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

2. 조영일에게 문학은 자본주의 체제의 오락거리.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학을 위해서는 문단과 민족문학에서 벗어나면서도, 그 크기의 새로운 운동? 비슷한게 필요하다고 보는 듯.(비자본주의적 측면이 있는 것 같음) - 혹은 오락거리로 전면적으로 이동해 참신해지는 것 자체또한 그 새로운 운동의 일부라고 보는지도 모르겠음, 사실 의도는 다른듯 한데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면에서, 돈이 필요하면 원하는게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고, 다 벗어나서 새로운 거 하고 싶은 사람은 새로운 걸 요구하는 사람이 얼마 안되니 굶어가면서 하고, 능력 되면 둘 다 하라는 것이, (논의적 측면에서 새로운 것의 창조에 더 큰 방점이 찍히는 건 사실이나 실천적으로)문화산업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난 아직 잘 모르겠어서 - 문학청년들을 호출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그리고 '국가로 부터 돈 받는데 어떻게 국가로부터 자유로워?'라고 이야기하고 있긴한데. 뉘앙스상, 돈벌이에 오락거리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받지 말라거나 주지 말라는 게 아니라.(그 부분은 논의한 바 없는 걸로 알고 있음) 평소에 그렇지도 않았던 애들이 이미 끝난 대의를 원리로 삼아 그걸 살려놓는게 가치 있다고 보고, 보조금을 주고 받고, 또 그걸 받으려하고, 실제로 받기까지하니 실망스럽고 웃겨보인다. 둘 중 하나는 놓아야지 하는 말그대로 "꼴같잖다"는 뉘앙스라서.
조영일 입장에서는 민족문학은 끝났거나 시작도 안 된 것인데, 거기에 복무하는 문단 문학에 다시 복무하는 작가는 가짜 대의를 논하는 사기꾼이거나 최소한 멋모르는 사람. 참 예술과 문화산업의 가치를 저해하는 인물인 것이지. 조영일은 과거의 영광 때문에 이런 활동이 버티고 있지만 곧 무의미함이 뽀록나고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아직 싸그리 망하지 않은 시점이니 (문화사업하거나 진짜 새로운 문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민족문학하겠다는 야바위들에게?ㅋ)돈까지 주고, 국가를 비난하던 인물이 또 그걸 받으니 이중으로 황당하겠지.

예술하는게 꼴같잖다거나, 문화사업에 돈주는게 모순이라는 게 아니라. "왜 얘들은 예술이나 문화사업을 하지 않고 이미 무의미하다고 결론난 짓을 하며 그게 뭐라고 돈까지 받냐"는 것이겠지. 그 무의미하다고 결론난 짓을 하며 심지어 자신에게 돈 줄 상대를 욕하기까지 했는데.(이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을 까는 지점이겠지)
그대로 논의가 진행돼서 굳이 기어코 주던대로 돈을 주려면 차라리 더 금전적으로 척박하고 진짜 새로운 소설을 하려고 하는 인터넷 소설 동호회, 혹은 문단 외 소설가들 중 잘 찾아서 주라고 말할 것 같음.

(본격적으로 뭘 하진 않지만 난 논의의 더 근원적인 지점에서부터 은근히 조영일까에 가까운데 ㅋㅋ 길게도 썼군. - 넝마주이 만세, 그리고 여기도 나왔듯이 조영일의 논의와 다른 지점의 국민문학, 그것을 통한 세계문학의 가능성도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그의 논의가 전부 사실로 결정 난다고 해도 새 성격의 문단 가능성과 기존의 플랫폼을 혁명적으로 탈출하지 않고 잘 이용하거나 점진적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 아무튼 전작을 읽은 입장에서 몇 가지 목소리가 머리에 울려서 써 봄.)

마빠인때가 있었어...

2011.08.05 21:49:14
*.113.78.96

윤형님 글은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1.약간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대수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만), 장정일님은 조영일님께 '새끼 제국주의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책의 전체 기조와 안중근 관련 대목이 우승열패의 '새끼 제국주의자'사상이라고 언급했었지요. 그리고, 장정일님은 조영일님 책 전체 주제 의식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의식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윤형님 글 덕에, 조영일님 책 2장에 대해 관심이 생겼습니다.

하뉴녕

2011.08.06 09:49:19
*.118.58.17

책은 길지 않으니 관심이 있으시다면 금방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리뷰를 쓸 생각을 하고 읽다보니 줄을 박박 쳐야 했지만, 님에겐 이미 제 리뷰가 있으니....(먼산)

음...

2011.08.05 22:55:07
*.146.36.209

한윤형의 글은 인터넷에 떠다니는 잘 차려진 샐러드와 달콤한 레어 스테이크라능!!

만족스럽게 식사했으나, 값은 나중에 지불하겠음;;

하뉴녕

2011.08.06 09:49:40
*.118.58.17

으헝헝 값은 어떻게 지불하실건가요...;; 저도 계좌번호라도 올려야 하는 건지 허허....

장정일

2011.08.06 00:34:51
*.129.17.28

한윤형형. 더우실텐데, 뭐 저런 쓸데 없는 책을 읽고 독후감까지 쓰시나요?

"논쟁이 시작된건 SNS의 뒷담화적 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장정일의 과민반응 때문이었던 측면이 있지만"이라고 하시는데, SNS건 뭐건, 자신의 책에 대해 방어해야 할 저자가 고작 자신의 '빠'들을 향해 글쓴이를 비방하고 비아냥되는 건, 비평가로서의 논리의 바닥뿐 아니라, 저열한 인격까지 보여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화뇌동한 똥가분인지 똥가룬지...아직 사과의 말이 없군요. 누구나가 볼 수 있는 트윗에 "놈"이니 "종자"니 "지적 사형선고"니 하고 뇌까려 놓고, 쿨 한척 생까고 있으니...무려 이런 작자가 입만 떼면, 사회주의니 혁명이니 지랄을 떤다니...

*

한형은 장정일이 시사인에서 했던 두 가지 비판이 본질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시는데, 그게 본질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왜 조달뽕(도저히 다른 명칭을 쓸 수 없군요)이 장정일의 비판에 인신비방과 비아냥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다시말해 그만큼 핵심이었단 거죠.

1. '국민작가' 문제.
조달뽕은, 일본 용어인 '국민작가'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등)의 대응어를 하나도 제시하지 않은채, 그저 민족국가/근대문학이 확립된 곳에는 다 '국민작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장삼이사의 술자리에서라면 맞장구쳐 줄 수 있지만, 조달뽕의 저 책은 진지한 학술서라는 외양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제목부터 '세계문학의 구조'니까요. 그래서 '어디에 그런 게 있느냐?'고 묻는 건 당연한 순서입니다. 이걸 그냥 넘어가면, '한 나라의 특수 사정을, 세계 문학 일반'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조달뽕이 일본 용어인 '국민작가'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의 대응어나 개념도 제대로 조사해 보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민족국가/근대문학이 확립된 곳에는 다 국민작가가 있다'는 가설을 '세계 문학 일반'으로 넓혀서는 안되죠. 한형도 짚고 있는대로, 저 용어와 저 현상은, 일본의 '특수'사정으로 국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본의 특수성에서 생긴 저 용어(더 정확하게는 일본의 '문학적 후진성'에서 생긴)를 가지고 한국 문학을 재단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죠.

덧붙이자면, 장정일은 국민작가가 '있다/없다'에 관심이 없습니다. 국민작가가 있다면, 그게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가 더 문제죠. 조달뽕이 국민작가 운운하면서 했던 가장 큰 패착은, 민족국가/근대문학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국민작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따라 생기는 듯이 기술한 거였습니다. 그래서 장정일이 나쓰메 소세키와 고바야시 다키지를 비교하면서, 국민작가란 국가(일본)가 기획한 것이라고 예를 들어 주었지 않습니까? 거기에 조달뽕이 말하는 바와 같은 '문학 작품의 수준'이 끼어들 틈이란 미미한 겁니다.
다시말해 한국에 국민작가가 없는 이유는 조달뽕이 말하는 것처럼, (전쟁을 못해봐서거나)'문학적 수준'이 일본보다 변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그럴 수도 있지만, '수준'문제가 아니라), 그걸 기획할 국가가 없었다는 것, 또 분단과 좌우 갈등이 누구를 '국민작가'로 할 것인가를 합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2. 전쟁과 문학
조달뽕의 책에서 독자들이 재미있게 여길, 전쟁과 문학 간의 관계는 문학 연구서에 흔합니다. 특히 조달뽕 혼자 아는듯이 떠드는 나폴레옹과 근대문학 사이의 연관성은, '마라시력설' 혹은 '악마파 시의 힘'이라고도 번역되는 루쉰의 1907년의 글에 자세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달뽕이 전쟁을 굉장히 협소하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전쟁에 대한 조달뽕의 협소한 이해가 근대문학이나 민족국가의 형성마저 협소하게 이해하도록 이끈다는 것.
조달뽕은 '국민작가'에 대한 개념 분석을 건너뛰었듯이, 전쟁(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개념 규정도 자의적이죠.
이리저리 맞추어 보면, 조달뽕이 말하는 전쟁(제국주의 전쟁)은, 정규군에 의한 '정규전'을 의미하죠. 바로 그런 규정 아래서, 식민강점기의 한국은 '전쟁을 치룬 일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고, 그 결론이 낙착한 데가, '전쟁을 치뤄본 일이 없는 한국은, 근대문학을 이룰 수 없다'는 거죠.

과연 전쟁은 정규군에 의한 '정규전'만을 가리킬까? 칼 슈미트의 '파르티잔'을 읽으셨다면, 아실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입법한 국제법(제네바 협약)은, 정규군만이 합법적으로 '전쟁'을 할 권리가 있다고 명시합니다. 저 법에 따르면, 제국주의 군대와 싸우려는 피식민국가의 저항가(독립 운동가)들은 모두 '군복 입고' 싸우라는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 불법적인 폭력(테러)이 되죠.

노르웨이에서 가혹행위를 했던 나치의 전범들이 "나치에 지배에 항거한 노르웨이 저항 운동가들이 군복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그들은 보호기준(제네바 협약)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주장"(에이미 굿맨, 데이비드 굿맨 공저 '미친 세상에 저항하기'169-170쪽)하는 근거가 거기 있죠.
그리고 현재 미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관타나모의 이라크인 저항자들도, '군복을 입은 정규군이 아니다'라는 미국의 강변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이미 정규군이 괴멸된 상태에서, 또 무력에서나 정보력에서 열세인 피식민국가의 저항자가 '날 쏘슈!'하고 군복을 착용하거나, 제네바 협약에 따른 신사적(?)인 교전 규칙을 다 지키며 저항할 수는 없는거죠.

한형은 시사인에 쓴 장정일의 리뷰가 "다소 민족주의적 정서와 편견에 치우친 비분강개"로 느껴졌다고 말씀하시는데, 장정일이 조달뽕을 '새끼 제국주의자'로 여기는 것은(시사인 리뷰에는 이런 표현이 없죠), 저런 바탕에서 나온 것으로, 흔히 '독도 문제'로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반일'따위의 민족주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조달뽕은 그것이 제국주의자의 논리인 줄도 모른채, 전쟁을 '정규군에 의한 정규전'으로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들이 일본과 전쟁을 치뤄 본 일이 없다고 여기며, 그 선상에 그가 호기롭게 내뱉은 '안중근은 돈키호테다'라는 말이 놓여 있습니다.


한형이 말한바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비분강개'로 시사인의 리뷰가 읽히는 게 저어되어, 아예 조영일의 논리가 "우승열패의 제국주의 논리라는 것은 굳이 지적하지 않겠다"고 그 속에 써놓았는데도, 기를 쓰고, 그렇게 읽고 말다니...그래서 저 리뷰를 쓴 다음, 조달뽕의 '안중근은 돈키호테다'라는 말만 놓고, 따로 한편의 글을 계획해 놓았습니다.

조달뽕의 '전쟁'이 정규군의 전쟁만을 뜻할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총포'가 동원되는 전쟁만을 의미하는 것도 순진하기 이를데 없죠. 조달뽕의 논리에 따르면 '총포가 동원되는 전쟁을 치루어야만 민족 의식이 생겨난다'는 건데...분명 전쟁이, 일시적으로 또 대규모로 '국민 의식'을 창출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이 국가나 민족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전쟁의 다는 아니고, 그것만이 국민 의식을 창출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이런 대목이 다 허술했던 게 저 허접한 책인데, 앞에 썼듯이, 전쟁에 대한 조달뽕의 협소한 이해가 근대문학이나 민족국가의 형성마저 협소하게 이해하도록 이끄는 게 더 큰 문제죠.

조달뽕은 시바다 료와 이문열의 '불멸'을 비교하면서, 근대국가가 이루어진 나라(일본)에서는 영웅담(영웅의 존재)이 '반성'되는데, 아직 근대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분단' 한국)에서는 여전히 영웅담이 '갈구'된다고 말하죠. 조달뽕의 저 허접한 책에서 그나마, 살 만한 대목이 저 대목.
그런데 문제는 한국 작가들에 대한 증오에 눈이 먼 조달뽕이, 시바다 료를 일본의 제국주의나 국수주의 자체를 반성하는 작가로 띄우고 있다는 것. 그건 무너진 나스메 소세키 신화(일본의 양심)를 가로늦게 시바다 료에게 외삽한 것으로, 시바다 료가 어떤 인물인지 조금이라도 안다면, 조달뽕의 시바라 료 예찬이 말짱 뽕구라라는 걸 알게 되죠.

*

조달뽕은 스땅달, 위고, 톨스토이...등의 유럽 소설이 '특수한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유럽 문학에 '세계 문학(보편 문학)'이라는 마술 모자를 씌워 놓고, 한국 문학도 거기에 한 꼽사리 끼어 보자는 요구 자체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하죠. 그런데 이 주장은, 문학의 기초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의 개소리요.
한형, 소설은 넝마주이의 '넝마 주머니'요. 다시말해 소설이란 장르는 '모든 걸 다 쓸어 담는' 무정형의 장르요. 그러니 스땅달, 위고, 톨스토이...등의 유럽 문학이 '특수한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은 근접할 수 없다는 주장은 우스개죠. 애초에 스땅달, 위고, 톨스토이...등의 유럽 문학 자체가 인류 역사의 온갖 이야기 형식과 문서 더미를 모두 주워 담은 거였고, 현재도 서로(유럽)가 서로(제3세계)를 주워 담고 있는 중이요. 여기에 무슨 특수가 있습니까?(이 대목이 '세계문학의 구조'를 허접한 뽕구라로 만드는 핵심 가운데 핵심이요).

*

근데...조달뽕이 장정일더러 하는 "문화주의자"의 내용이 뭔가요?
글을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이미 문화주의를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런 뜻에서 한형도 그 테두리에 들죠.
그런 뜻에서 말고, 문화주의자라는 말이 진짜 값을 가질려면, 그걸 하나의 '주의'로 추구해야죠.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이 문화주의자든가요?

하뉴녕

2011.08.06 09:34:14
*.118.61.248

선생님, 지난번엔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일단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논점에 대해서도 조영일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책에서 미리 논박했다고 말하는 것은 (본문에서도 지적했듯) 잘못된 것이죠. 그리고 저는 A4 10장 분량의 글을 쓴 것인데, 선생님은 원고지 15매 가량을 쓴 상황이니 제가 선생님의 글을 보고 '이러저러한 점을 지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게 다소 치사한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분량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좀더 핵심적인 부분들을 짚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입니다. 먼저 첫번째 논거로 말씀하신 국민작가 문제는 물론 조영일이 답변해야 하는 영역인 건 맞습니다만, 제가 본문에서 설명했다시피 그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지적을 인정하거나 포기한다 하더라도 책 전체의 논지가 결정적으로 훼손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저보다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더 비판적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살'이 아니라 '뼈'를 치려고 의도하시는게 더 옳은 일이었겠지요.


그리고 두번째 논점은, 사실 굉장히 핵심적인 부분을 짚어주셨는데, 서술하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정신적/문화적인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조선인이 식민화에 저항하여 물리적인 투쟁을 벌였다는 점을 (그래서 제가 본문에서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을 언급하지요. 을미의병의 경우 전근대적인 근왕파들의 의병으로 시작했으나 이것이 정미의병까지 진화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를 넘어선 한국인의 민족의식의 맹아가 성립되었음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정미의병을 진압하기 위한 일제의 남한대토벌은 메킨지의 <한국의 비극>이란 저술을 낳기도 했었지요.) 더 명료하게 지적해 주셨다면 좋을 뻔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야 서술의 문제겠지만, 저는 선생님이 '국가'를 매개로 한 폭력만이 전쟁경험을 말하는 거냐라고 질문한 것이 매우 핵심적인 부분이라 여기면서도, 안중근을 돈키호테에 비유한 조영일의 진술을 이 부분과 포갠 것이 적절한 비평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옳은 지적과 미심쩍은 지적을 뒤섞었다고 여긴다는 것이지요. 저는 돈키호테란 말을 꼭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심한 분석은 아니었지만 조영일의 안중근 논평에서 취할 것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제가 조영일보다는 안중근에 대해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이 글 말미에서 예고한 다음 글에선 안중근의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 그리고 공판록 내용들을 참조하면서 (저는 적어도 이걸 다 읽었는데 조영일의 책에선 이걸 읽었다는 흔적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었습니다. 물론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읽었을 수도 있겠죠.) 얘기를 풀어내보려고 합니다. 저는 책 목차를 보고 조영일이 안중근을 비평한다는 걸 알았을 때, 최소한 동양평화론에 등장하는 황색 인종주의가 일본 극우파의 대동아 공영권과 논리적으로 동치라는 비판 정도는 나올 줄 알았습니다. 위인이라 하더라도 사상의 면에선 시대의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는데, 조영일의 안중근 비평은 이 점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이 아쉽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식민지기를 볼 때, 선생님은 김구나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칭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을 못하시는 것 같고, 저는 테러리스트란 명칭은 국가가 없이 폭력을 행사한 이들에 대한 중립적인 명칭으로 수용하면서, 다만 국가가 없었기에 이런 식으로밖에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인데 '테러리즘'을 가치평가의 어휘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 미국인(서구인)들에게 테러리스트라 불리는 이들이 우리의 독립투사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인지에 대해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입니다. (독립투사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막연한 부정적인 평가에 대해 한번 더 이의를 제기해보는 것이지요.) 제 생각이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안중근을 '암살범' 그리고 '돈키호테'라고 지목한 것에 분개하고 게다가 리뷰 제목도 그것이 중심으로 나왔는지라 '민족주의적인 비분강개'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국민작가의 문제, 반드시 국가를 경유해야 전쟁경험이 성립하느냐의 문제는 저 역시 민족주의적 편견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제기되어야 할 논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좀 더 정밀한 비평을 위해, 조영일의 입장에서 방어가능한 모든 논법을 고려하더라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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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 '문화주의자'란 비판에 대해서, 물론 엄밀하게 본다면 선생님이나, 조영일 선배나, 저나, 글밥 먹고 산단 점에서 문화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당 장에서 조영일이 의미하려고 했던 것이 두루뭉술하지는 않다고 봐요. 선생님은 정운찬 청문회에 대해 감상을 적으시면서 그가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독서교육을 받았다면 그런 인격체로 성장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책 좋아하는 입장에서 그런 환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살긴 합니다만, 정치평론하는 입장에서 그런 환상을 주장으로 피력하기는 어렵고, 게다가 좋은 책 보고 이상한 소리 하는 인간들을 하도 많이 본지라 마음 한 구석에서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정운찬은 731부대가 뭔지를 몰랐잖아요? 그런데 그게, 사실 교과서만 읽은 사람이었다면 결코 모를 수가 없었던 명사가 아닐까요? 다른 책을 하도 많이 읽다 보니 그런 건 다 까먹었나 보다, 라고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이 말씀하신 독서교육이 그저 닥치고 책을 많이 읽는 것과는 다르다는 건 압니다만, 그게 현실세계에서 제도로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게 실현된다 한들 정치적 제도나 습속에 변경이 없는 한 실천적인 효용을 가질지에 대해, 저 역시 회의적인지라, 그 부분에선 선생님이 아니라 조영일 선배의 의견을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막말로 독서교육은 조선 사대부들이, 지금 우리보단 제대로 받았을 거라 생각되는데, 물론 조선 사대부들의 도덕성이 지금 관료들 도덕성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긴 합니다만, 정치가 그렇게 선량한 통치자들을 길러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그 비판은 적절하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문인이 그런 칼럼으로 총리지명자를 조소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도 생각합니다만. ;;;;

마치래빗

2011.08.06 13:32:04
*.122.144.3

글의 전반적인 논점과는 별로 상관 없는 얘기지만, 조선인이 15년동안 징용을 했는지는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얼핏 알기로는 조선인에게는 공민권이 없었고, 징병되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커지니까 40년대 가까이 되어서야 징용, 징병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어요. 소위 내선일체 같은 구호와 드립이 이런 맥락이고, 전쟁이 벅차니 조선인에게도 일본인이라는 네이션 빌딩을 시도한 거겠죠. 어쨌든, 일본은 투표권은 안 주면서 일단 징용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조선인이 바라봤던 '15년 전쟁'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가미카제 중에 조선인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 연구도 약간은 있던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하뉴녕

2011.08.06 13:45:50
*.118.58.17

징병/징용은 태평양 전쟁 이후에 하게 된 것이 맞구요. 일본에서도 회의론이 있었으나 전세가 기울자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죠. 그것과 별개로 '전쟁을 겪었다.'라곤 할 수 있지 않겠어요? 가미카제 중에 조선인이 있었던 건 분명하고 연구서인지 논문인지 있었던 것 같은데 저도 읽진 않았습니다.

장정일

2011.08.06 14:24:49
*.129.17.28

한윤형형. 장형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국민작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문학의 구조'도 없습니다. 조달뽕은 민족국가/근대문학이 성립된 어느 나라에서나 국민작가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면 혼자만의 망상이죠. 한형도 잘 아실테지만, '디테일이 스케일'이랍니다. 조달뽕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디테일 이상의 '이 책은 더 크고 중요한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어'라고 기대하는 눈치인데, 디테일이 망가진 스케일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뿐더러, 디테일을 견디지 못하는 스케일은 사기죠. 이런 일은 지식계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더우기 국민작가가 일본에는 있으나, 한국에는 없다고 조달뽕이 말할 때, 그것이 자연히 있는 게 아니라 국가가 기획해야만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했다는 것. 이 점은 여러가지로 조달뽕이 문학 연구자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조달뽕이 기원을 전복하고 신화를 탈신화하는 요즘의 연구 경향에 민감했다면, '국민 작가란 이렇게 만들어 진다'를 추적해야지, 이제는 이빨없는 개도 물어가지 않는 민족국가/근대문학을 신화화하는 방법으로 오히려 국민작가를 내세우고 있는 형국이라니...(예를들어, 독일인들에게 바흐나 여타의 작곡가가 아닌 베토벤이 어떻게 불굴의 '음악적 영웅'이 되었나를 파헤치는 음악학자들의 연구는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듯이 '국민작가'의 신화를 파헤쳐야지, 이제와서 무슨 '일본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운운해대며 국민작가를 축수한다는 말입니까? 일본에서 마저 국민작가(나스메 소세키)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는 이 마당에...

또한 국민작가 문제는, 주관적이고 비약이 심한 조달뽕의 글쓰기에 대한 충고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족국가/근대문학이 성립한 어느 나라에서나 반드시 국민작가가 있다'라고 주장할 양이면, 국민작가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어야죠. 국민작가가 무슨 술자리의 국민여동생도 아니고...저렇게 어수룩히 해서는 비평이 될 수 없죠.

*

두번째 논점은 시사인을 받아보고 나서, 약간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총포가 동원되지 않는 의식 속의 전쟁을 신채호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역사의 원리로 정식화했고"라고 적혀 있는데, 저 말은 '나라나 민족 사이의 전쟁에 꼭 총포가 동원되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하고픈 성급함 때문에, 실수한 겁니다. 신채호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총포가 동원되지 않는" 투쟁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사인이 나온 직후, 누군가가 그 글을 손수 타이핑해서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 놓았길래 그 대목을 "신채호는 총포의 동원만 아니라 의식 속에서 싹튼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의 원리로 정식화했고"로 수정해 달라고 했습니다. 우선 이 대목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바로 저 문단에 조달뽕이 호기롭게 말한 '안중근은 돈키호테다'라는 말을 겹쳐 놓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문맥상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조달뽕이 저런 "궤변"을 하게 된 바탕에는, 전쟁은 '정규군'에 의해 그리고 '총포로만'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죠. 저런 궤변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라는 것은 뻔히 감지되는 것이고.

*

조달뽕의 저 책을 비판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비분강개'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어떤 논쟁에서건 '민족주의 드립'을 치면 곧바로 '쌍팔년도 세대'로 치부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시사인의 글을 쓰면서도 가장 경계한 게 그것이었는데, 잡지사에서 제목을 그렇게 뽑아 놓았더군요.

민족주의적 비분강개에서가 아니라, 조달뽕의 안중근에 대한 악의적인 곡해와 불충분한 연구는 지적할 게 많습니다. 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뒤 도서관에 반납한 터라, 직접 인용을 못하는 게 아쉽지만, 기억에 의지하면...조달뽕은 안중근에게 아무런 사상이 없었다면서, 안중근이 반짝하고 어떤 사상의 편린을 보여 줄 때는, '옥중에서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짝 성숙은 죽음 앞에서 누구나가 다 하는 거라나 어쨌다나...

저런 소리가 얼마나 개소리인 줄은, 안중근의 삶을 몰라서죠. 안중근의 삶에서 독특한 것은, 그에게는 '모든 게 두 번 반복된다'였습니다. 1. 안중근은 젊어서 일본 관료를 암살하고자 했습니다. 그게 실패한 뒤 오랫동안 숙성한 게 이토 암살로 나타납니다(이토 암살에 실패 했다면, 그 다음의 목표는 천황이 되었겠죠. 하나마나한 소리겠지만) 2. 조달뽕은 젊은 안중근이 애써 잡은 일본 군인을 포로로 대우하며 풀어 준 것을 한껏 비웃는데, 안중근은 자신의 거사 직후 줄곧 자신을 국제법에 근거한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죠. 다시말해 안중근은 거사나 죽음 앞에서야 갑자기 숙성된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얘기(사례 3도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 그러면 4, 5는 더 없을까?)

조달뽕은 이토에 비해 안중근을 조악한 인물로 폄하하고 있는데, 두 사람의 동양평화론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형은 어떤 이유(반서양, 정확하게는 반러)를 들어 두 사람의 그것이 '동치'라고 말하는데, 그것조차 그 시대의 상황을 살피지 않으면 잘못된 결론이 되기 십상입니다.

*

한형은 "선생님은 김구나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칭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을 못하시는 것 같고, 저는 테러리스트란 명칭은 국가가 없이 폭력을 행사한 이들에 대한 중립적인 명칭으로 수용하면서"라고 하시는데, 글쎄요...테러의 사전적 풀이는 '폭력을 수단으로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성취하려는 일'일텐데, 그게 어떻게해서 제국에 강점된 피식민 민족의 독립과 저항을 지칭하는 중립적인 용어가 되는지 알 수 없군요.

(김구는 제하고) 안중근이 했던 것은, 총리 암살이었죠. 그런데 그의 행동과 나치 점령하의 유럽에서 활동한 '레지스탕스'의 행동은 뭐가 다른지요?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들이 벌인 작전은, 대개 요인 암살이나 적군 암살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은 명품 레지스탕스가 되고 안중근은 짝퉁 테러리스트가 되는지요? (안중근의 암살을 어떻게 볼 것이냐에 대한 좋은 준거점을 제공해 주는 게, 앞 글에서 말한 칼 슈미트의 '파르티잔-그 존재와 의미'라는 소책자입니다. 2002년에 출간된 '장정일의 독서일기5'에, 2001년 1월 28일자로 작성된 4쪽의 독후감이 있군요. 한형이 참고하실 일은 없겠지만).

*

한형이 장정일은 "문화주의자"라는 조달뽕의 비판을 타당하게 여겼다는 근거가 고작 장정일이 '정운찬 더러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않았다'고 타박한 거였군요. 그러나 한형이 말한것처럼 그 컬럼은 "총리지명자를 조소"할 목적이 컸고, 또 해당 책이 독서관련 도서라 그렇게 조합된 것입니다.

문제는 저 사례를 들어 '장정일은 문화주의자다'라는 비난한 다음, 조달뽕이 달아놓은 결론입니다. 한형 집에 책이 있으면 그 대목을 한번 보세요. 한형은 고작 조달뽕의 장정일에 대한 규정만 도드라지게 보았지만, 더 문제 되는 것은 조달뽕의 자기 모순적이고, 맹동주의적이며, 혁명가연 하는 태도죠.

조달뽕은 거기서 이렇게 말하죠. '장정일은 정운찬에게 책을 권할 게 아니라, 책을 불태워 버려라!고 말해야 맞다.' 하지만 '문화주의자'라는 생뚱맞은 규정을 당해도 좋으니, 저런 충동질이나 해결에는 코웃음을 쳐야죠. 문화적 탈레반이 되든, 반달리즘에 투신하든, 그런건 조달뽕, 너나 하라고!

하뉴녕

2011.08.06 16:47:07
*.118.58.17

예, 국민작가 부분은 잘 알겠습니다. 저 역시 선생님이 (음, 제겐 아무래도 이 호칭이 더 편하니 양해를 구합니다.) 말씀하신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한국에 국민작가는 없다."는 단얼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게 아니라 대체 어떤 사람들이 누구를 국민작가라 생각하는지를 일별하고 그 의미를 분석하는 비평을 해야 하는게 아냐?"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문열을 국민작가로 믿는 사람과 황석영을 국민작가로 믿는 사람은 다를 터인데, 그 사람들을 국민작가로 보는 상이한 정치적 욕망에 대해 말해야 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조영일의 '국민작가'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국민작가'도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문맥을 살피면 조영일은 '국민작가'를 '비빌 언덕'으로 취급하는데요. 그러니까 한국 국민들이 사랑하지만 해외사람들은 모르는 그런 작가가 아니라, 해외에다 얘기해도 먹히는 그런 작가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노벨상 얘기가 더 본질이 아닌가 생각했던 겁니다. 그외 선생님의 견해에 이견은 없습니다.

--

안중근 얘기는, 제가 다른 포스트로 쓰려고 했던 것인데 약간 미리 말씀드리게 되겠군요. 저는 물론 안중근의 활동이 윤리적인 층위에서 볼 때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안중근 개인은 나치 부역자란 핑계로 사적으로 미운 사람들을 처단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꽤 많은 레지스탕스들에 비해 훨씬 더 성찰적인 인물이었죠. 그리고 저는 레지스탕스도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을 정치적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가능하겠는데, 레지스탕스는 공화국이 전복되어 민의에 기반하지 않은 정권으로 교체되었으므로 저항권을 행사했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조선은 공화국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방면에서 자격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그런 구분을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테러리스트란 명칭이 윤리적으로 그릇된 행위에 붙는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의열단 등은 본인들이 '테로'를 한다고 천명하기도 했는데, 나라를 빼앗긴 약소민족이 테러 이외에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게 "우리의 우국지사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제국에 대해 더 근본적인 항변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여기서 다시 '안중근은 돈키호테'라는 조영일의 규정으로 돌아오면, 그가 말하려고 하는 바가 혼자서는 민족서사시를 만들 수 없다이고, 이것이 국가를 매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아니다는 인식과 연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저는 이 부분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영일도 약간은 지적했지만 안중근은 자신을 조선이란 국가의 대표자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이란 국가의 선의를 체계적으로 왜곡한 어떤 대표자로 상상했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안중근을 비웃을 근거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레지스탕스들에겐 적국의 요인이므로 암살한다는 의식만으로 충분했겠지만,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만큼은 죽여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필요했습니다.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이유는, 그가 적성국의 총리대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위해 했어야 했던 그 '상상'을, '돈키호테'란 단어로 표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조영일이 여기까지 생각했는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안중근이 그러했기 때문에, 최후공판에서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안중근을 처벌할 법이 없다는 변호사의 말에 반박하며, "모든 인간은 법의 적용을 받는다. 사람을 죽이고 벌을 받지 않는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내가 어떤 법으로 처벌을 받느냐인데, 나는 의병 총참모중장 신분으로 이토를 주살하였으므로 만국공법으로 처단받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던 것이겠지요.그리고 사실 안중근이 그런 캐릭터니까 일본에서도 회자 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영일은 안중근은 한국에서나 유명하지 일본에서는 무관심이다란 식으로 말했으나, 사실 조선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안중근처럼 일본에서도 보도된 위인은 없었지요. 그래서 굳이 시바 료타로 소설과 안중근을 끼워맞춘 것이 매우 자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영일의 안중근 서술에서 가장 불편했던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안중근의 행동을 이문열의 소설 속에서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안중근이 이문열 소설 속의 인물도 아닌데, 왜 그러는지 좀 의아했지요. 그런데 인용된 부분을 보니 이문열의 소설이 굉장히 안중근을 근왕주의자로 그려놓았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이문열은 사회를 봉건적 인간관계의 총체로 바라보니까요. 그래서 조영일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문학평론이란 이유로 소설만 비평하려고 했던 태도의 문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서사시를 분석하겠다고 했으면 그렇게 해선 안 되는 일이었지요.)


---

해당 책이 독서관련 도서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다면 그 칼럼은 훨씬 더 이해가 되는 구석이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이 정운찬에게 그런 조소를 할 수 있었다면, 다른 이도 "근데 책 많이 읽는다고 그런 짓 안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구절은 찾아봤는데 "도리어 책 따위는 내다버려라! 대학 따위는 거부해라"고 외쳤어야 했다고 써있네요. 그러나 이 서술 역시 '정운찬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진지하게 제시한 것은 아니고 그 조소를 뒤집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정일

2011.08.06 18:39:06
*.129.17.28

한윤형형.

조달뽕이 '국민작가'를 문학 연구자들이 '비빌 언덕'이나 '국가대표(해외선전용)'라는 식으로 쓴 데가 있긴 하지만, 저 책과 상관해서나 조달뽕의 논리와 연관하여 거기엔 중요한 의미가 없는듯 합니다.
조달뽕은 몇 줄에 불과하긴 하지만, 딱 두군데 정도에서 '국민작가'에 대한 상식적인 개념 규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책이 없어 인용은 못하지만, 요지는 '국민작가란 한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 정신의 향도가 되어주는 작가'. 그러니까 국민작가란 문학 연구자들이 좋으라고 있는 것도 아니요. 저런 용도로 만들어지는 국민작가란 우선 자국민을 위한 계몽용이지, 해외선전 목적이 먼저는 아니지요.

*

한형이 '테러리스트'란 용어를 중립적인 용어로 쓰고자 한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것의 사전적 의미가, 원래 '폭력을 수단으로 정치적, 종교적 목적을 성취하려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알다시피, 모든 용어는 원래의 뜻이 바뀌죠. 그래서 개념사란 방법론도 생겨난바, 현재 '테러'라는 말에는 사전적 의미보다 '불법 폭력'이란 뜻이 더 강하게 동반됩니다.

예를들어 국가도 '폭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실제로 공권력이라는 폭력을 사용하죠, 그러나 그걸 '테러'라고는 말하지 않죠. 까닭은 국가의 폭력은 법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지는,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 다시말해 국내법이든 국제법이든, 거기에 들지 않는 폭력을 테러라고 부르지 않는지요?

*

안중근이 독실한 천주교인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인이 이토를 살해하기 위해, 유럽의 레지스탕스보다 더 드높은 동기가 필요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레지스탕스도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었을테니 말입니다.
그 이하,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이유는, 그가 적성국의 총리대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기 때문이었습니다"라거나, "국가가 없는 상황에서 안중근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위해 했어야 했던 그 '상상'을, '돈키호테'란 단어로 표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같은 말은 무슨 말인지 퍼뜩 납득이 가지 않고, 또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나, 그러자고 한형 블로그를 찾아온 건 아니니, 이만 하겠습니다.
하여튼 안중근은, 자신의 고민과 실천을 반복하면서 숙성되어 간 사람이지, 조달뽕이 말하는 것처럼, 아무런 철학이 없던 사람이, 거사나 형집행 직전에 갑자기 사상가로 돌변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

한형 말처럼, 조달뽕이 정운찬 문제에 대한 진지한 해법으로 "도리어 책 따위는 내다버려라! 대학 따위는 거부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릴 배짱도 아니었다면, 뭐하러 정운찬에게 바른 독서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람에게 '문화주의자'라는 딱지까지 붙이는건지...

시원한 여름 되시고, 앞으로 허접한 구라에 혹하지 마세요.

하뉴녕

2011.08.07 02:50:52
*.118.58.23

예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허접한 구라에 혹하는 성격은 아니고 뭔가 다른 얘기가 더 튀어나올 수 있을 것 같은 썰에 관대한 거랍니다. ㅎㅎㅎ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

N.

2011.08.07 07:05:06
*.88.210.189

역시나역덕한윤형의위엄.txt

1204호

2011.08.09 04:57:38
*.199.132.76

독서왕 장정일 선생께서 친히 논술왕 한윤형 선생의 블로그에 방문하시다니!
뒤늦게야 이를 안 무지랭이에 용서를...





그나저나 조영일이 혹시 일뽜들의 원조?
과거 친일빠들의 연장선 상에 있는 찬일(讚日) 꼰대들과 지금의 일뽜는 분명 다른 맥락에 있는데
이전에는 어떤 질서내지 이념에 대한 찬양이었다면 지금은 어떤 양(量)적인 것에 대한 찬양이라고 볼 수 있죠. 비슷하게는 처덕들이 미국차들의 무식한 크기와 배기량에, 밀덕들이 미국의 국방비에 열광하는 것처럼. 교육의 목표가 국가에 대한 희생에서 경제적 성공으로 바뀐 것과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겠... 헛소리고

조영일은 그런 정서에 기대어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들을 길러내고 있는 중...

하뉴녕

2011.08.09 10:42:02
*.118.58.18

일빠면 안되나요? 그나저나 왕왕 거리는게 제일 일빠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용공폭도

2011.08.12 11:34:03
*.180.37.93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일본 문학(또는 일본의 전반적인 문화적 생산물)이 한국보다 강하다고 할 때, 그 중요한 이유는 아무리 봐도 시장의 규모인데 이걸 이야기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란 말이죠. 혹시 너무 뻔한 이유라 말 하지 않는 건가요?

하뉴녕

2011.08.13 20:27:06
*.118.61.129

시장 규모 얘기 다들 합니다. 암묵적으로 하는가 대놓고 하는가의 차이는 있지만...오죽하면 몇년 전 판타스틱에서 "인구 1억되면 장르문학 시장이 살까?"라는 주제로 에세이가 나온 적도 있어요. 출판관계자들이 허구헌날 '인구 1억'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기 때문입니다...


조영일 책에도 시장규모 얘기가 나옵니다. 다만 일본이 그 시장규모를 만들기 위해선 러일전쟁 승리가 필요했고....우리는 그런 전쟁의 승리나 식민지 획득 경험이 없으니까 근대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란 식으로 얘기를 끌고 가지요.


이건 '시장'의 크기로만 본다면 말이 되지만 다른 기준에서 문제점들이 생깁니다. 가령 조영일의 책에서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시장주의적 저변없이도 높은 성취를 거둔 것으로 나오는데... 우리가(그리고 조영일이) "문학이 잘 된다."고 말할 때 '잘'은 시장의 크기 뿐만 아니라 저런 종류의 성취도 포함하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기준별로 나눠서 서술했으면 훨씬 더 논의가 세밀했을 거라고 논평한 겁니다.

용공폭도

2011.08.12 14:10:24
*.180.37.93

그리고 '근대문학'이라는 표현 자체가 제가 보기에는 고진의 영향을 받아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 듯 하네요. 고진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보통 같은 개념에 대해 '순수문학'이라는 단어를 쓰지요. 우리 나라에서 이 두 표현은 거의 같은 개념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으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어떤 사람들은 이 근대-순수문학이 죽었다고 엄숙하게 선언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것의 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영원불멸의 가치를 가질 것이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죠. 약간 눈을 돌려 (현재 한국 출판시장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라이트노벨판 같은 데서는 순수-근대문학을 증오하고 적대하시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것의 문학적 가치가 조만간 이것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기묘한 공포감과 경외심으로 이것을 아예 무시하거나 더러는 자신들의 '가벼운'문학의 자리를 내 달라고 이것에게 애원하려는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정작 그런 근대-순수문학을 쓰는 사람이나 사서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단 말이죠. 이것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고등학교 문학교육에서도 중심축은 40년대 이전의 문학작품들에 맞춰져 있구요.

그래서 한국 문학(또는 출판시장)에서 근대적인 순수문학이란 일종의 유령으로 떠돌고 있는게 아닌 가 싶습니다.

1204호

2011.08.13 17:32:37
*.199.132.76

한국 출판시장에서 국내 베스트셀러는 대체로 근대-순수 또는 문단소설이에요. 조영일도 인정하는 부분인데 한국 출판시장에서 문단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아마 일본이겠죠)보다 큽니다. 그리고 최근의 고등학교 문학에는 해방 이후 8-90년대 소설까지도 소개합니다. 또 월북작가들의 작품도 포함하고 있어요. 해방 이전 문학에 대한 비중이 줄어들고 있죠.
아래 댓글에 과거 유럽, 일본의 담론들을 반복한다고 했는데, 위에 장 선생이 말한 것처럼 "소설은 넝마주의의 '넝마 주머니'"라는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어디에서도 소설은 죽고 있지만, 또 죽지 않을거라는 게 일반론입니다.

하뉴녕

2011.08.13 20:46:49
*.118.61.129

1204호 님 말씀대로 제일 덩치가 큰 녀석을 유령이라 부르긴 그렇고...ㅎㅎㅎ 아마도 용공폭도 님이 그 분야에 관심도 취미도 없는 거겠죠.


다만 출판시장 내에서 문단소설의 비율은 문단소설이 잘 되고 있다는 지표라기보다는...상업/오락소설 시장이 잘 발달하지 않았다는 지표로 받아들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일본사람이라고 뭐 한국사람보다 어려운 소설을 많이 읽는게 아니라 가볍게 즐기거나 정보습득을 위한 책들을 많이 사보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양국의 소득수준, 인구, 출판물을 대하는 문화적 태도 문제가 다 걸려 있겟지요...아마도 살만한 여력이 안 되어서 그럴 수는 있겠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에 대해 묘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가령 일본에 가보면 블로그 하는법, 트위터 하는법, 아이폰 쓰는법도 얇은 책으로 많이들 사봅니다만 한국에서 그런 텍스트는 넷에서 소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지요. 한국 책값이 비싸단 얘기가 많은데... 사람들이 비싼 돈 주고 살만한 책 아니면 안 사니까 나름 출판시장에서 합리적으로 책정한 가격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가령 장르소설을, 값을 낮춰서 페이퍼북으로 낸다고 하더라도 딱히 판매량이 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장식적인 요소로 생각해서, 서재에 꽂아둘 수 있는 책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양장본도 많고... 장르소설 판매의 경우는 90년대에 흥행한 도서대여점이 발목을 잡은 부분도 있지요...\


여담이지만 출판계에서 페이퍼북에 대해 서너번 실험해본 케이스가 있었는데 다 잘 안되었습니다...대표적인 것으로는 90년대 고려원에서 나온 김용의 영웅문 시리즈가 있었는데...(아시다시피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영웅문' 3부작으로 엮여 나왔었지요...) 많이 안 팔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이 경우엔 이미 꽤나 팔린 상황에서 페이퍼북으로 나온 경우라서 아쉬움은 좀 남지요...첨부터 페이퍼북으로 나왔더라면 한국에서도 페이퍼북 시장이 열리지 않았을까...뭐 그런 얘기들이 있었습니다.

용공폭도

2011.08.12 14:20:01
*.180.37.93

조영일의 '세계문학의 구조'라는 책은 읽어보지 못해서 책 자체에 대래서는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만, 한국에서 이뤄지는 순수문학-근대문학에 대한 여러 토론들을 보면 위 덧글의 이야기처럼 어떤 유령을 두고 하는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해서요. 그들이 사용하는 담론 자체가 사실은 수십년 전에 유럽이나 일본에서 등장한 논리들이죠. 그쪽에서 과거에 그 '죽음'이 선포되었던 것 처럼, 지금은 우리가 이곳에서 그것이 죽었다고 선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고진이 말한 것 처럼 한국 근대문학도 죽은지가 꽤 됐는데.. 왜 그걸 이제 선포하고, 또 그에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지 좀 의아하다 싶네요. 지금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과거의 담론들을 반복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이야기해야 하는 게 아닐 까 싶어서요.

하뉴녕

2011.08.13 20:40:06
*.118.61.129

고진 얘기가 수십 년 전 얘기는 아니고요...

우리가 어떤 꼬라지로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외국 담론을 들여와서 외국 실정과 비교해 보는 작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걸 제대로 하지 않고 뭐가 죽었니 살았니만 가지고 쫑알거리면서 싸우다 보니 될 것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죽었니 살았니가 문제가 아니라, 사실 어떤 꼬라지로 살고 있느냐가 문제죠. 이 글이 말하려는 바도 대략 그것입니다.

애독자

2011.08.15 13:29:45
*.140.58.209

다음글 고파요 ;ㅁ; 언제 써요? ;ㅁ;

N.

2011.08.16 13:46:38
*.92.57.198

다음글 고파요 ;ㅁ; 언제 써요? ;ㅁ (2)

수하이

2011.08.16 15:27:53
*.106.247.81

다음글 고파요 ;ㅁ; 언제 써요? ;ㅁ (3)

gng

2011.08.16 21:06:47
*.254.158.210

하뉴녕

2011.08.16 22:48:50
*.118.61.133

여러분 제가 몸이 아파서....(먼산)


......그리고 예고한 글이 이것만 있는게 아닐텐데??!!

애독자

2011.08.16 23:01:38
*.140.58.209

그러셨군요.. 그것도 모르고 죄송해요 ;ㅁ;
그래도 한윤형님의 글이 너무 좋아서 ;ㅁ;

음...

2011.08.17 09:21:20
*.146.36.209

얼마전에 이 포스팅에 스테이크 운운한 사람인데요, 여러분, 맛있게 식사했으면 돈을 냅시다. 한윤형 씨가 계좌번호를 홈페이지에 올리도록 청원합시다. 그래서 맛있게 먹었으면 자기 상황에 알맞게 밥값을 냅시다.

애독자

2011.08.17 11:42:48
*.140.58.209

안 그래도 한윤형씨가 저자로 참여한 책 전부 샀거등요?! 인증도 할 수 있거등요?!

애독자

2011.08.17 11:46:36
*.140.58.209

직접 돈을 받으면 좀 기분이 묘해지지 않을까 하는데(뭔가 이상함), 차라리 주위사람들에게 책광고를 하는게 나을 것 같은데요 ㅇㅁㅇ

애독자

2011.08.17 11:51:09
*.140.58.209

블로그의 독자님들 차라리 한윤형 팬카페를 만들어서 회원비를 받아 한윤형씨에게 전달하는 건 어떨까요ㅋㅋㅋ

andante

2011.08.18 06:39:30
*.36.61.211

애독자님이 팬카페 만드셔요.
총대 매시고 깃발 흔드시면 뒤따라는 갑니다.:)
회원비를 한훃이 받겠슴까?
차라리 한훃책을 구매해서 뿌립시당 ㅎㅎ

애독자

2011.08.18 13:05:11
*.140.58.209

블로그 독자들끼리 정모를 하건 그거하고 비슷한 걸 하건, 그런 걸 먼저 해보고 카페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얼마나 가입될지를 알아야 하던말던 하지..

andante

2011.08.19 01:09:40
*.36.61.211

"비밀글입니다."

:

애독자

2011.08.19 19:31:46
*.140.58.209

밑에 뭐라고 달아놓은 거죠? 저 이거 로긴이 아니라서 확인을 못하는 것 같은데
저 보라고 쓴 건가요 아니면 이 댓글이 뭐 이상해서 쓴 건가요

andante

2011.08.19 22:46:49
*.36.61.211

애독자님/
님의 댓글이 이상해서 쓴 것은 절대 아니고요(이상할 이유가 없잖아요!!)
쓰다보니 제 사적인 설명이 들어가서
애독자님만 보시라고 비밀글로(체크하는 게 있길래)등록했는데
님이 보시는 방법은 저도 모릅니다.;;; OTL

애독자

2011.08.19 23:00:26
*.140.58.209

헐..ㅋ 그랬군요
정모가 안 되면 트위터를 이용해서 이야기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한윤형 팬카페를 만드는 건 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한윤형씨 예전 글들 보면 아직도 이슈로 써먹을만한 이야기들이 엄청 많거든요. 그런 거 남겨두고 썩히는 게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한윤형씨 글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뭘 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아 이거 제가 트위터를 안해서리..

psyche2k

2011.08.19 12:04:00
*.136.28.55

윤형님 건강하시지요?

"개싸움" 을 중계했던 사람으로서 제 블로그에 이 글을 퍼가고 싶습니다.
(물론 출처 표기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윤형님의 허락이 난다면 퍼가겠습니다.

하뉴녕

2011.08.19 17:05:21
*.118.59.131

예 별 문제없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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