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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세계] 이건희는 생각하지마.

조회 수 26762 추천 수 0 2011.07.13 23:52:50

작가세계 2010년 여름호에 실렸던 글 전문 공개합니다.

예전에 이런 식으로 일부분만 공개한 적이 있었죠.

2010/07/16 - [정치/정치평론가들] - 김상봉이 삼성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비평


1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륭과 쌍용과 삼성을 비판했을 때 사람들에게 나왔던 반응을 보고 느꼈던 것들을 이런 식으로 정리했으니(앞부분은 <삼성을 생각한다>를 둘러싼 작년 전반기의 헤프닝이 주로 서술되어 있으나 원고 뒷부분에 좀 다른 얘기가 나옵니다.), 한진중공업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고 앞으로 다른 기업들에 대해 발언할 때도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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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는 생각하지마.
- 우리는 ‘삼성의 주술’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삼성이 난리다. 언제부터인가 ‘삼성 문제’는 한국의 정치평론을 지배하는 주요한 화두가 되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의 저자인 미국의 민주당 성향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말을 빌린다면, ‘삼성은 생각하지마’라고 말해야 할 판국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레이코프의 말이 성립하는 상황은 아니다. 우리는 삼성 문제에 너무 매몰되어서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삼성 문제’가 그토록 중요함에도 공적인 담론에서 충분한 논의를 하지 못해서 문제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둘러싼 사건 사고들


삼성의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의 신간 『삼성을 생각한다』를 둘러싼 모든 난장은 이 점을 여실히 증명했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보수언론들에게 철저한 외면을 받으리라는 사실은 굳이 예상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진보언론들에 있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는 『 한겨레신문』에서도 광고 게재를 거부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출판사가 광고를 하려고 했을 때, 『한겨레신문』 측에서는 통상적으로 도서광고비에 적용되는 할인가 대신 그 세 배에 해당하는 정상 가격을 요구했다. 출판사가 “그동안 김 변호사의 폭로를 철저히 외면해 온 보수 신문에 먼저 광고 게재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한겨레신문사를 찾아왔"기 때문이고, "광고가 나가면 날개 돋친 듯 팔릴 것이 분명한 책이었기에 광고료를 제대로 낼 것을 요구했던 것"이라 한다.[footnote]『미디어오늘』 2010년 3월 3일, 안재승 한겨레 전략기획실장, "한겨레는 삼성 광고 없이도 정도 걸었다" [/footnote] 


이 해명은 납득하기 어렵다. 첫째로 출판사측이 보수언론에 광고를 내려고 했던 게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보수언론의 힘을 빌려 삼성을 비판할 수 있다면 그도 좋은 일이고, 거절당할게 뻔하다 하더라도 거절당한다는 사건 자체가 마케팅 포인트가 된다. 슬픈 것은 『한겨레신문』도 그런 마케팅 포인트를 트위터리안들에게 제공했다는 거다. 둘째로 많이 팔릴 책이므로 높은(정상적인?) 광고료를 요구했다는 요구했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한겨레신문』이 어떤 우려를 가졌는지를 확인하게 해준다. 출판사측은 애초에 삼성 측이 소송을 걸 가능성에 대비해 『삼성을 생각한다』의 값을 높게 책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겨레신문』 역시 그런 우려에서 높은 광고료를 요구한 것일 수 있다. 차라리 그렇게 변명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다. 홍세화는 3월 3일에 『한겨레신문』에 실린 <아픔>이란 칼럼에서 이 사건이 “내면화된 굴종”을 드러내보였다고 평했다. 


더 드라마틱한 사건은 『경향신문』에서 일어났다. 2월 17일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개하고 삼성을 비판하는 기명칼럼이 『경향신문』에 게재되지 못한 사건이 그것이다. 편집국에선 이 칼럼을 조금만 수정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김상봉 교수에게 전달했지만 김상봉 교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칼럼을 보내고 나는 편집국 기자 세 사람과 직위 순으로 올라가며 통화를 했다. 나중에 용기 있게 고백했듯이 그분들은 광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솔직하게 전하면서 표현을 조금만 완화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거절했더니 다음엔 단 하루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거의 애원하듯 간청했다. 나는 매몰차게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다.”[footnote]『경향신문』,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은 까닭”, 김상봉, 2010년 3월 10일 [/footnote] 김상봉은 『경향신문』의 애원을 거부하고 별도의 글을 붙여 인터넷 언론에 자신의 칼럼을 공개해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프레시안』과 『레디앙』에는 해당 칼럼이 게재되었으나 『오마이뉴스』에선 ‘명예훼손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게재가 거부되면서 사태는 절정에 이른다.     


이 사건의 급격한 반전은 『경향신문』의 일선 기자들로부터 왔다. 일선 기자들은 사측에 해명을 요구했다. 특히 막내기수인 47기 기자들은 김상봉 칼럼이 인터넷에 회자된 날인 2월 17일 <이명박은 조질 수 있고 삼성은 조질 수 없습니까>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이번 사건은 최소한의 선을 넘었다. 도대체 삼성과 관련된 기사 혹은 칼럼에서 어디까지가 허용되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허용되지 않는 것인가. 이명박 정부의 언론장악은 비판하면서 우리 내부의 검열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나. (중략) 『경향신문』도 결국 이명박 정부는 비판할 수 있어도 삼성은 함부로 비판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 것이 아닌가. 그만큼 삼성이 한국 사회에서 견제되지 않는 황제로 자리 잡았다는 방증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삼성과의 불화는 한국사회에서 언론이 존재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삼성에 대한 편집 방침이 무엇인지 소상하게 밝혀주시길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2월 18일 저녁에는 기자들의 요청으로 비상기자 총회가 열렸다. 총회에서 노동조합과 기자협회, 편집국장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그 결과는 2월 24일 지면에 1면의 <알림>과 사회면의 <『경향신문』, 삼성 비판 ‘김상봉 칼럼’ 미게재 전말>이란 기사로 반영되었다. 『경향신문』은 <알림>에서 이번 사태가 “김 교수의 이번 칼럼이 삼성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게재할 경우 자칫 광고 수주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한 때문”에 일어났음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또한 “이 일이 있은 뒤 치열한 내부 토론을 벌”인 결과 “진실보도와 공정논평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언론의 원칙을 재확인”하였음을 천명했다. 『경향신문』의 용기 있는 자기고백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자본권력, 언론권력, 그리고 삼성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둘러싼 진보언론의 내홍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비유하자면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짱돌이 ‘진보언론’이라는 연못에 던져져 그 연못의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더러운 퇴적물들을 수면 위로 이끌어 올린 것과 같았다. 이 사건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그저 표피적인 ‘이미지’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이 사건에서 ‘가오’를 지킨 것은 『프레시안』과 『경향신문』, 자존심을 구긴 것은 『한겨레신문』과 『오마이뉴스』인 것 같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신문기업이 자본권력에 대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말이다. “신문의 광고수입 의존도는 1950년대까지 20∼30%에 불과했으나 1960년대에 40%, 1970년대에 50%를 넘어서고, 1990년대 이후에는 80% 이상으로 높아진다.”[footnote]『한국 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2007), p368 [/footnote] 구독료 수입의 비중이 적으니 독자들이 무섭지 않고 광고 수입의 비중이 높으니 광고주가 무섭다. 보도국과 광고국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언론윤리가 확립되지 못한 한국 신문기업 특유의 관행은 언론이 자발적으로 기업에 대해 눈치보는 풍토를 정착시켰다.   


이런 구조 속에서 오늘날의 진보언론들이 특히 삼성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별도의 이유가 있다. 하나는 2000년 이후 신문산업 자체가 사양산업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2008년 경제개혁연대의 자료에 의하면, 신문광고 시장은 2002년에서 2006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15.8%나 줄어들었다. TV, 유선방송, 인터넷 등 뉴미디어 시장의 확대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다. 시장이 축소되면서 상대적으로 군소언론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음은 물론이다. 둘은 정권교체 이후 진보언론의 정부와 공기업 광고 수주가 거의 ‘금지’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정부와 공기업 광고를 ‘균등’하게 배분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진보언론들을 지원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시장논리에 의거한 광고배분을 원칙으로 내세워 사실상 진보언론들을 정부와 공기업 광고 수주에서 배제하고 있다. 셋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중소기업의 광고가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2009년 이후 전반적으로 전체 신문광고에서 대기업 광고의 비중이 늘어났다. 특히 삼성은 2008년 비자금 특검 이후 광고를 줄였다가 2009년에 광고를 크게 늘렸다. 삼성그룹 계열사 광고는 2008년에는 646건에 그쳤던 반면 2009년에는 1066건으로 늘어났다.[footnote]『한국 대중매체사』, 강준만, 인물과사상사(2007), p368 [/footnote] 진보언론들이 삼성 광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기업이 언론 위에 군림하고, 그 기업의 정점에 삼성이 서 있는 것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적 접근은 삼성을 구체적인 악의 화신으로 만들고, 삼성에 대한 찬반여부로 사회문제의 전선을 그어야 한다는 주장의 효용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런 주장의 대표자라 볼 수 있는 김상봉의 주장을 한번 검토해보자. 


“군사독재가 자본독재로 바뀌었을 뿐,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할 일은 비슷하다. 삼성 휴대폰과 노트북은 바꾸고, 삼성카드는 자르고 가맹점 해지하고, 삼성에 든 보험은 해약하고, 삼성을 비판하는 경향신문은 정기 구독하면 된다. 부수 늘수록 적자라는 간첩들의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footnote]『경향신문』,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은 까닭”, 김상봉, 2010년 3월 10일 [/footnote]



“삼성 불매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삼성만 갖고 그러는가? 다른 재벌 기업들이 아니 다른 중소기업들이 삼성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이다. 그것은 마치 40년 전에 왜 '박정희'만이 문제인가, 모든 군인들이 또는 모든 공화당 정치인들이 다 같이 나쁘지 않은가 하고 묻는 것이 어리석은 물음이었던 것과 같다. 박정희 씨를 제거하고서야 유신독재가 끝날 수 있었고, 전두환 씨를 권좌에서 추방한 뒤에야 비로소 신군부의 독재를 끝낼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역시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그 권력에서 추방하지 않고서는 기업독재를 끝낼 수 없다.

왜냐하면 삼성과 이건희 전 회장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최고 권력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삼성은 단순히 하나의 기업 집단이 아니라, 국가 권력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다. 지금 재벌 기업이 과거 군사 독재 시절의 군부와 같다면, 삼성은 군부의 실세였던 하나회와 같고, '회장님'은 '각하'와 같다.“[footnote]『프레시안』, "지금 당장 '삼성 불매 운동'을 제안합니다!", 김상봉, 2010년 3월 10일 [/footnote]



나는 철학자 김상봉의 사회참여활동이 매우 빛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설령 그의 견해에 일부 오류가 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김상봉 이전에 먼저 김상봉보다 ‘사회’를 훨씬 잘 알면서도 이해관계에 묶여 침묵하는 여러 사회과학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이 ‘수사적 단순화의 효용’을 상쇄하는 어떤 악덕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상봉의 글에서 ‘이건희’=‘박정희(혹은 전두환)’이며 ‘삼성’=‘하나회’이고 나머지 재벌기업은 군부다. 그러므로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권력의 머리를 타격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의 도식에서 ‘신자유주의’는 곧 ‘기업독재’이며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삼성독재’에 다름 아니다. 이런 비유에는 장점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볼 때는 절대악을 상정하는 ‘반독재투쟁’ 담론에 익숙해진 시민들을 위해 새로운 ‘절대악 퇴치 운동’의 서사를 공급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령 민주화 이전에 독재자를 겨냥하는 ‘반군부독재’ 투쟁이 있었듯 김대중 노무현 시대엔 ‘밤의 대통령’인 조선일보 사주를 겨냥하는 ‘반수구언론’ 투쟁이 있었고 이제 이명박 시대엔 이건희 회장을 겨냥하는 ‘반기업독재’ 투쟁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이를테면 알맹이는 그대로 둔 채 포장지만 반독재투쟁에서 안티조선 운동으로, 다시 삼성불매운동으로 바꾸면 된다는 식이다. 여기에선 독재권력 붕괴 이후 훨씬 더 복잡해진 사회갈등의 양상을 조망해야 하는 사회과학자의 시선이 사라진다. “권력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스스로 거세시켜 놓고 남들에게 “권력의 본질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물음”을 던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안티조선 운동을 이와 같은 프레임으로 사고할 때, 참여자들은 조선일보만 비판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진보개혁 언론들의 공정성과 당파성을 점검하고 언론의 질을 높여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일보의 폭력에 집중하기 위해 진보개혁 언론들의 작은 폭력에는 눈감아야 한다는 논리가 당연시되었다. 안티조선 운동을 진영논리적으로 단순화시킨 그 프레임을 ‘삼성을 생각’할 때도 써먹자는 얘기일까? 


이 단순화된 논변에선 설령 ‘신자유주의 반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건희 회장 일가의 전횡을 비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시되고야 만다. 또한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기업독재라는 것이 한국 재벌기업에 관철되는 ‘오너 경영’이나 한국 산업계에 관철되는 재벌기업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측면이 무시되고야 만다. 


그렇기 때문에 간과되는 것은 언론에 대한 ‘자본 지배’의 다른 측면이다. 만일 칠팔십년대의 언론이 군부독재자에 대한 단호한 반대의 의사를 표명했다면 그건 그 언론이 독재체제 전체에 항거한다는 사실을 의미했을 거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삼성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결코 『경향신문』이 자본권력 일반에 대해 대항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가령 『경향신문』은 삼성에 대해 단호하면서도 건설회사의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보도를 하지 못할 수가 있다. 부동산 보도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이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진보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footnote]『미디어오늘』, “경향·한겨레도 부동산 열풍에 동반승차”, 이정환 기자, 2009년 12월 9일 [/footnote]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삼성과의 관계가 아니라 모든 광고주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면, 결국 광고주 눈치 보지 않고 진보언론이 생존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고민하지 못한다면 ‘독립언론’의 꿈은 성사되기 힘들다는 것이다. 권력에 대한 세밀한 비평은 이처럼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모색을 가능하게 해준다. 


삼성을 극복하는 방법론의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언론권력→자본권력”이라는 변환의 도식은 어느 정도는 쓸모가 있는 것 같다. 먼저 언론권력과 자본권력의 균형이 깨진 사연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다. 사실 언론권력과 자본권력의 유착은 자본권력에게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일개 기업보다는 독재자가 훨씬 더 무서운 존재였던 시대, 또는 1988년 올림픽 특수 이후 광고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신문산업 호황의 시대에는 신문의 전체 논조가 ‘친자본적’일망정 일개 기업에 대해 쩔쩔매야 할 이유까지는 없었다. 오히려 신문이 기업 비판보도를 통해 기업광고를 유치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있었다. 


1970년대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가령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해서 삼성을 마음껏 비판했다. 밀수 사건 이면에 있는 군부독재자는 비판할 수가 없어서이기도 했고, 신문시장에서 『중앙일보』와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까지도 상황은 비슷했다. 사실 삼성이 ‘고만고만한 재벌기업 중 하나’를 넘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기업이 된 건 IMF 위기 이후 근 십년 동안의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다르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김용철이 양심선언을 하기 전 언론에 대해 고민을 하는 부분이 나온다. 대검찰청에서 일하는 후배 검사가 “『조선일보』나 공중파 방송사 한 곳 정도가 일주일쯤 삼성 비리를 집중적으로 다뤄준다면, 검찰 수뇌부도 수사를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것”[footnote]『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사회평론(2010), p30 [/footnote]이라 말해서 『조선일보』에 삼성 비리를 제보했다는 얘기다. 『중앙일보』는 사실상 삼성 계열사이고 『동아일보』는 삼성 오너가와 혼맥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택했다는 건데, 과거라면 가능했던 얘기다. 하지만 신문시장이 내리막길인 세상에서, 이제는 『조선일보』도 삼성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던져주는 광고를 통해서만 존속할 수 있다. 신문기업이 한국 사회의 방향을 설정하던 시대는 갔으며,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지배체제의 ‘머리’가 아니라 ‘꼬리’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문제에 관한 얘기는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참여정부는 ‘개혁’을 말했고 ‘수구기득권세력’과 대립한다고 말했으며, 그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말하기로 그 ‘기득권세력’의 핵심은 바로 『조선일보』였다. 하지만 『삼성을 생각한다』나 참여정부 시절 정권에 참여했던 이정우나 정태인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참여정부가 삼성에 대해선 지나치게 무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와 삼성의 유착관계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겠으나, 참여정부의 개혁의 한계가 삼성 문제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듯하다. 즉 자본권력 문제에 대한 단순화의 위험은 있을지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삼성 문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는 인식은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당연히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논쟁도 있다. 삼성을 극복하는 방법론의 문제에 관한 논쟁의 논점을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추상적인 것으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성불매운동’은 삼성을 개혁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둘째, ‘소액주주운동’은 삼성을 개혁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셋째, ‘삼성해체’라는 지향은 올바른 것인가? 이건희와 그 가신들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넷째, 삼성 등 재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인가?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통한 합리화인가? 아니면 오너 가문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되 사회척으로 책임을 지우는 ‘사회적 대타협’인가?


이 논쟁들이 이루어졌던 역사를 간략히 정돈하자면 다음과 같다. 1990년대 이후 참여연대와 경실련을 중심으로 재벌의 경영권을 공격하는 방향의 재벌개혁 운동이 이루어졌다. 소액주주운동은 그 운동을 위한 하나의 구체적인 방책이었다. 그러나 2005년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와 정승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의 대화를 엮은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이 이들의 노선이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답습하는 것이라 비판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넷째 논점의 대립구도가 생긴 것이며, 둘째 논점이 탄생한 것이다. 이 논점들에 대해서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김상조 한성대 교수와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홍종학 경원대 교수 등이 2007년에 출간한 『한국경제 새판짜기』라는 책이 반론을 제기하면서 논쟁은 더욱 흥미로워졌다. 이후 2010년 ‘양심고백’의 주역이었던 변호사 김용철은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삼성이라는 기업 전체가 아니라 이건희와 그 가신들의 문제를 구별해서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프레시안』에서 긴급 제의한 ‘삼성불매운동’에 대해,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은 그 주장에는 동의하나 김상봉의 글에 깔려있는 ‘삼성해체’라는 지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세 번째 논점이 탄생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삼성불매운동’이 삼성을 개혁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삼성불매운동’이 ‘삼성해체’라는 지향을 품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첫 번째 논점도 나온다. 


‘삼성 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내 생각은 이렇다. 첫째, 삼성불매운동은 삼성을 개혁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둘째, 소액주주운동 역시 삼성을 개혁하는 올바른 방법이다. 셋째, 이건희와 그 가신들의 문제를 구별해서 비판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올바르다. 하지만 ‘삼성해체’라는 수사가 이와 다른 특정한 무언가를 의미하는, 실체가 있는 수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따라서 이에 반대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넷째, ‘경제민주화’ 담론과 ‘사회적 대타협’ 방책 중 어느 것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선 더 많은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두 진영의 인식의 차이가 현 시점의 실천에서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고 보기는 어렵다. 


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이런 논쟁의 문제는 구체적인 실천의 영역에 지향의 대립을 너무 과도하게 투사한다는 거다. 사회적 대타협론자들이 ‘소액주주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이라 비판하는 것이 한 예다. 이에 대해선 김상조 한성대 교수의 반론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경제개혁연대에서 했던 소액주주운동 방식이 유일한 운동방식이라고 저는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우리 국민들이 삼성의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 사회를 정상사회로 나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권리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하고 내 권리가 침해를 받았다면, 내 목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비용을 치를 수 있을 때, 대중 다수가 자기 권리를 지키겠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원칙으로 섰을 때, 비로소 변화를 일으킵니다.”[footnote]『프레시안』“삼성이데올로기ㆍ이건희 신화를 극복해야 -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과의 대화 (하)”, 김상수, 2010년 4월 11일 [/footnote] 소액주주 권리 강화를 재벌개혁의 지렛대로 삼는 태도가 반드시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지지를 의미한다고는 볼 수 없다. 


반대의 사례로는 삼성불매운동이 이건희 일가와 삼성을 분리하지 못하고 삼성 전체를 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을 들 수 있다. 다시 김상조의 말을 옮긴다. “불매운동은 회사를 타격주는 것인데, 이는 국민 다수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 데서 한계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건희 일가와 가신들 문제입니다. 이건희 일가의 탈법 불법을 바로 잡는 것에 저는 역점을 두는 게 효과적인 삼성 탈법 제어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보이콧 캠페인은 독과점 산업구조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중략) 의사를 결정하는 총수와 가신들의 문제이고 지배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에 불매운동은 그 한계가 있습니다. (중략) 삼성 문제는 경제영역 문제만이 아니고 정치, 사회, 행정, 사법, 문화, 이데올로기까지 모든 영역에 다 퍼져있습니다. 단칼에 해결하는 방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성문제가 해결되면 정상사회 선진사회가 됩니다. 삼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은 이것만이다, 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footnote]같은 곳 [/footnote] 김상조의 비판에는 일리가 있지만, 그가 소액주주 운동을 옹호한 그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삼성불매운동 역시 옹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내가 가진 권리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하고 내 권리가 침해를 받았다면, 내 목소리를 내면서 그것을 회복하는 것에 비용을 치를 수 있을 때, 대중 다수가 자기 권리를 지키겠다는 마음 자세가 중요한 원칙으로 섰을 때”를 만들어내기 위한 운동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희를 군부독재자에 비유하는 김상봉의 인식이 무리가 있음은 이미 지적했다. 그리고 김상조의 지적처럼 독과점 산업구조에서 불매운동은 분명 한계가 있다. 가령 삼성 휴대폰을 쓰지 않으려면 SK나 LG의 제품을 써야 하는데, 이 재벌기업들이 삼성보다 윤리적인 기업이라고 말하기는 난망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불매운동이 삼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아님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매운동이 소액주주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방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반대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불매운동을 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삼성이 망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질문에 대고 “삼성이 변한다면 망하지 않는다. 소비자가 기업에 정치적 책임을 지울 수 있다. 그 책임을 지는 기업이 우리 사회에 더 큰 도움을 주는 기업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김상봉 교수에 대한 이태경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의 비판은 다소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이태경은 불매운동에는 찬성하지만 삼성해체에는 반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삼성해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삼성해체’라는 방책은 ‘사회적 대타협론’과 구별되는 ‘재별개혁’으로 이해되었을 때는 의미가 생긴다. 가령 장하준은 시사in에서 삼성이란 재벌 그룹을 해체하느니 차라리 국유화하려는 상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삼성 해체란 오너 경영체제 해체인 셈이다. 


하지만 삼성이란 기업 전체를 적으로 돌리지 말자는 의미의 ‘삼성해체 반대론’은 의미가 모호하다. 왜냐하면 오너 경영체제가 해체된다 하더라도 삼성이란 기업군이 가지고 있었던 생산력이나 기술력이 증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삼성해체’라는 말은 구체적인 의미는 없지만 삼성을 비판하면 세상이 잘못 될 수 있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인 공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소액주주 운동도, 불매운동도 필요하다. 그리고 실은 사회적 대타협론의 실천과 재벌개혁론의 실천조차 양립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대타협이든 재벌개혁이든 가능할 수 있다. 스웨덴의 사회적 대타협은 좌파정권이 집권하여 재벌그룹을 국유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서야 가능했다. 한국에서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장은 힘들다. 그러므로 재벌경영권을 해체하려는 재벌개혁론자들의 실천이 없이는, 사회적 대타협론도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실천들이 맞닥트리는 것은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방책이 아니다. 삼성을 비판하지 말고 힘을 몰아주어야 삼성이 잘 된다는, 삼성이 잘 되어야 내가 잘 된다는, 그리고 삼성이 잘 되어야 공동체가 잘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지 못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이데올로기는 한국 사회의 상식인의 수준에서 크게 세 가지 유비의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다.  


첫 번째 유비는 가부장적 가정의 유비다. 말하자면 아버지가 기업이고 어머니가 정부이며 노동자는 자녀들이다. 자녀들에게 용돈을 많이 주느라 아버지가 힘이 빠지면 밖에서 돈을 벌지 못하게 되고 가계는 도탄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의 몫을 축소해서라도 아버지가 밥을 든든하게 먹고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게 하는 쪽이 낫다. 어머니가 해야 하는 일이 그러한 일이다. 국민의 몫을 제한하여 (재벌)기업에게 재화를 몰아줘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나온다. 여기에는 내수경제의 개념이 없다.
 

두 번째 유비는 험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하는 부족의 유비다. 말하자면 추운 겨울에 부족의 양식이 떨어졌다고 치자. 이럴 때 모든 부족원들을 다 먹이려다가는 부족 전체가 몰살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족장은 허약한 부족원들 몇몇을 얼음구덩이 속에 버려두고 남은 부족원들을 데리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한다. 그 외엔 아무런 방법도 없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노동운동가들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정리해고를 올바른 것으로 내면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서 나온다. 부족(=기업)이 망하는 것만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기업 역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야 하는 존재이며, 노동자들에게 훌륭한 복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을 키워내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없다. 재벌그룹들이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해 사내 보유금을 수백조씩 쌓아 두고 있다는 현실인식도 없다. 


마지막 유비는 국가대표선수의 유비다. 한국 스포츠선수가 해외에서 승리하면 내가 기쁘다. 국가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을 모아 그 스포츠선수를 지원해야 한다. 삼성이 해외에서 물건을 많이 파는 걸 보고 뿌듯해 해야 하며, 그런 삼성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 한국인들은 현대자동차를 비싸게 사면서 그들의 수출을 도와야 한다. 이 유비에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의 질의 문제에 대한 개념이 없다. 


이러한 유비들은 삼성이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기 이전에도 작동하던 것이다. 그리고 삼성의 영향력은 그 엄청난 자본의 힘 이전에, 바로 이 이데올로기의 힘에 기초해 있다. 삼성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건희를 권좌에서 끌어낸다는 것이 아니라 이 유비를 넘어서는 것이다. 불매운동이든, 소액주주 운동이든, 사회적 대타협이든, 재벌해체든, 현실세계에서 주장될 때는 동일한 것, 바로 이 이데올로기에 대면하게 된다. 20세기 대한민국 경제의 성공을 통해 고착된 이 유비들을 넘어서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삼성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린 설령 삼성이란 기업이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파산하게 되더라도,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hwal-in

2011.07.14 13:54:34
*.48.234.26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서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

다만, 담담한 소회를 하나 말씀드리자면-

'총수 일가를 끌어내리는 것'보다, 윤형님이 말씀하신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것이 수십배는 힘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총수일가의 힘은 '삼성' 정도가 아니면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부'는 커지고 있으나, 사회적 영향력은 계속 줄고 있죠. 사실, 이건희의 영향력은 분명히 그의 업적에 많은 부분 기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집에서 다른 새끼들 밥 빼앗아서 뒷바라지 했다고는 하지만, 사시 전국 1등 정도 한건 대단한거니까요. (집에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건 별개의 얘기로 하고)

다만, 문제는 그겁니다. 윤형님이 말한 '저 이데올로기'의 대안이 무엇이냐는거죠. 저 이데올로기를 구체화하는 걸, 이쪽 용어로 '지배구조'라고 하는데, 현재 한국식 시스템의 대안으로 언급되는 건 다음과 같습니다. 1. 영미식 주주자본주의 2. 대타협 (쉽게 말해 오너 경영 대대손손해먹기) 3. 노동계급의 컨트롤 4. 은행의 컨트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이 4가지 다 맞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말이죠. 지금의 오너가 주도하고 언론과 정부가 견제하는 형태의 지배구조(그리고 이걸 떠 받치는게 윤형님이 말한 이데올로기) 보다, 이 4가지 각각이 과연 더 나은 시스템인지 전 회의적입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저 4가지가 섞인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데, 아니, 이미 찾아지고 있지만-(1을 주로 하고 3과4가 조금 섞인 정도) 전 그 균형점이 과연 지금의 시스템보다 나은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문제죠.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이데올로기는 가족주의+무한경쟁인데, 최소한 일본의 그것-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08/2011070801077.html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이데올로기가 한국에 맞나하는 의문도.

에고, 시간이 없다보니 중언부언했네요. 그럼 건필하시길.

하뉴녕

2011.07.14 18:40:30
*.152.7.251

말씀하신 부분들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너무 체제에 집중하시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홍종학 교수 같은 분이 한국 재벌 문제는 미국식으로 갈 거냐 유럽식으로 갈 거냐를 결정해야 할 문제라기 보다는 미국식이든 유럽식이든 기업집단에 대한 제재조치를 들여와야 하는 상황이라 말씀하셨는데 그에 동감하는 편이구요. 미국의 경우 기업집단을 별도로 통제하진 않지만 소비자 집단소송이 활성화되어서 견제를 하는 면이 있고 독일 같은 경우는 아예 지주회사를 실체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견제조치를 마련해 놓고 있지요. 기본적으로 한국 재벌구조를 지탱하는 요소에 탈법이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잘 아실 것이고...


그래서 지배구조를 어떻게 바꾸냐의 협의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제재조치를 들여오는 문제에서부터 저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고 말하려는 것이거든요. 사실 한국 실정에서 기업집단에 대해 어떤 지배구조가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그들이 오너경영을 위해 저 정도로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지금 시점에선 명확하게 판단하는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0-;; 물론 지금 상황에서 판단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다른 판단 간의 논쟁은 실제로 재벌에 대한 규제조치가 작동되면서부터 더 실천적인 맥락을 지닐 수 있겠지요.


그와 별개로 총수일가의 힘이 점점 더 약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죠. 사회가 그들을 통제하지 않더라도, 자녀 숫자대로 기업이 쪼개지고 그들끼리 경쟁하기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삼성의 경우 이창희와 이맹희가 축출당하는 바람에 특이하게도 '북두신권 일자전승'이 유지된 것이구요.근데 그 삼성조차 3대에는 일자전스이 되지 않겠죠. 프랑크 왕국이 될 거라고 생각됩니다. ㅎㅎㅎ

hwal-in

2011.07.18 22:15:22
*.48.234.49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다시 댓글을 달려다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못 달았는데, 오늘 좀 어이없는 기사를 읽고, 급하게 시간내서 댓글을 답니다. 글에 계속 두서가 없네요. 요즘 너무 정신이 없어서ㅠㅠ

기사의 내용은 어윤대 kb 회장이 자사주매각해서 생긴 대금을 'ROE'를 낮추기 위해 '주주배당'에 쓰겠다는 내용인데요. (ROE란 쉽게말해 주주가 준 돈에서 수익률을 얼마나 내냐를 말합니다). 전 이게 전형적인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주주 중심주의 - CEO 경영'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분이 좀 골때리게 단순무식하긴 하죠..보고 한 5분 멍하게 있었습니다..ROA면 그나마 이해할 여지가 있는데..이건 정말..전문적인 파이낸스 얘기는 제외하도록 하죠.)

오너 경영이나, 다른 이해관계자 지배구조에서는 '분자'를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걸, '분모'를 줄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세. 이게 모가 문제냐라고 하겠지만, 그 분모를 늘여서 돈을 버는 사람들 절반이 외국인 주주고, 나머지 절반이 기관투자자이며 (그 기관에 돈을 맡긴 자산층과) 또 나머지 절반이 직접투자한 자산을 일정 부분 보유한 계층이라는게 문제죠.

그럼, 또 분모를 어떻게 낮추느냐. 아시다시피 7000명 구조조정하고, 비정규직 미친듯이 늘리고- 이런다는 겁니다. 그래서 장하준 교수가 늘 주장하듯, '오너 경영'보다 '주주중심주의 CEO 경영'이 사회의 건전성을 위해 나을게 하나 없다는거죠. '재벌일가'는 사회적으로 컨트롤 가능하지만, 하루살이 CEO와 뒤에있는 '불특정 다수의 주주들'은 어떻게 컨트롤할 방법이 없거든요. 재벌은 분자를 늘기- 즉 형이 나가서 돈 벌어올께!, 고용도 좀 해줄께! - 의 자세라도 있지, 이런 행태는 정말 한국 사회의 관점으로 보면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거죠.

그럼 일각에서 말하는대로 '노조가?' 제가 보수적이라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 노조 꼴로는 불가능하다고 보구요.

그래서 제가 '그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나면?"을 말씀드린겁니다. '형이 나가서 돈 벌어올께! 넌 좀 굶고 있어!'보다 더 나쁜 '일단 독 안에 있는 쌀부터 옆집이랑 나눠먹고 보자.넌 여전히 먹지말고'가 현재 이 바닥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이동하는 방향이거든요.

쓰다보니, 반박도 아니고, 첨가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닌 글이 되었는데. 여튼 먼가 엄청 답답한 상황입니다. '재벌 신화' -> '주주 중심주의' ->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이동해야 하는데, 2-3단계에서 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얼마나 많은 '교조주의자' (어윤대 회장 같은)들이 피바람을 몰고 올지. 걱정이네요.

울트라맨

2011.07.22 23:00:41
*.152.94.42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권력 순위가
정치=언론>자본
언론>정치>자본
자본>언론>정치
로 이동했다고 봐도 되나요? ;;

하뉴녕

2011.07.23 01:32:32
*.171.89.66

현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머리 속에서 공식처럼 외울 일은 아니겠죠. 군부독재 시절엔 정치권력을 지배권력의 대표로 보고 투쟁할 수 있었다면 최근에는 그 양상이 복잡다단하게 변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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