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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 책 http://www.yes24.com/24/goods/5425848?scode=032&OzSrank=3 에 실린 원고.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 대한 리뷰다. 보너스로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에 대한 김민하 님의 리뷰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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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의 물꼬가 ‘20대 논객’이란 조어를 만들어내면서 세대문제에 대한 발언권이 생길 즈음, 나는 내 처지가 픽사의 걸작 애니매이션 영화 <토이스토리>에 나오는 장난감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세대에게 한국 사회의 경제문제와 정치문제를 떠넘기는 (이를테면 그들의 눈높이가 높아서 실업률이 높고 경제에 활력이 없다거나, 그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의 보수화를 만들어 냈다는 식의 견해들) 세대론의 틀을 고스란히 고수한 채 ‘너희들도 한마디 해봐.’라는 식으로 내게 마이크가 던져지기 일쑤였고, 내 반박은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다른 시선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청년세대의 항변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푸념은, 푸념 이전의 질문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나 스스로도 지금의 덜 여문 내가 ‘발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우길 수도 없었다.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운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건 고마운 일일 수 있겠지만, 나는 후배의 인생을 괴롭히는 그러한 요행에 내 글쓰기의 의미를 결부시킬 만큼 뻔뻔한 사람은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몇몇 친구들은 다른 길을 선택한 듯 했다. 자신의 글쓰기가 보편적인 진리탐구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기, 혹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그들은 나에게 본인이 우주방위군의 일원임을 주장하는 ‘버즈 라이트이어’처럼 보였고, 나는 그들 옆에서 스스로 장난감임을 자각하는 ‘우디’였다. 세대론의 틀 안에서 ‘항변’을 하며 거기에 사회상을 담으려는 나나, 세대론 따위는 의미가 없다며 단죄하는 이들이나 장난감이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들의 단죄 역시 그들이 청년인 한에서 ‘어른’들에게 울림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이 책엔 여러 가지 미덕이 있지만 내게는 ‘청년 글쟁이의 발언’이란 게 어떤 맥락에서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한 모종의 답변을 준 귀중한 사례로 남을 것 같다. 저자는 전작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에서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부제)을 폭로한다. 이 전작의 각 챕터는 우리 주변의 사례에서 시작하지만 곧 이 사례를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저작들이 저자의 해설을 거쳐 사례 속에 틈입한다. 그런데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저자는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대학, 혁명, 교육, 가족, 사랑, 소비, 돈, 열정 등의 키워드를 던지며 이 키워드들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감각을 드러내고 재서술하면서 우리 시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을 선보인다.


저자의 작업에 대한 긍정적인 ‘반향’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났다. 하나는 이렇게 청춘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는 세심한 강사-글쟁이를 본 적이 없었다는 반응이었다. 다른 하나는 대학생들이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줄 몰랐다는 모종의 경탄 내지는 푸념이었다. 책에 등장하는 저자의 수강생들이 ‘김예슬 선언’을 보면서 그 사건의 의의를 염두에 두기보다 김예슬의 글쓰기 솜씨에 질투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이 책을 보는 독자들에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재연된 일이었다. 오죽하면 프레시안 2010년 올해의 책으로 이 책을 선정한 안은별 기자가 “나는 그들의 글을 읽으며 ‘김예슬은 무슨, 지들이 훨씬 잘 쓰는구먼. 어떻게 대학생들이 이렇게 글을 잘 쓰지’ 싶었다.”(프레시안 2010-12-24, <오늘의 ‘개념’ 20대 : 김예슬? 아니 너희들!>)란 말로 리뷰를 시작했겠는가.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책을 ‘한 세심한 지식인이 이끌어낸 어떤 20대 당사자들의 올곧은 목소리에 관한 기록’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대론 종결자’로서의 이 책의 가치를 충분히 조망하지 못하는 일인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한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또박또박하고 똘망똘망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이들이 지리멸렬한 다른 동년배들과는 다르게 비범하다거나, 혹은 지리멸렬한 줄로 알았던 이 세대가 사실은 속으로 꽉찬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저자가 수업 초기에 학생들에게 “우리 교실 안에 부처 몇 명, 칸트 몇 명, 그리고 예수 몇 명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나는 나다, 다른 어떤 말로 나를 규정짓지 말라. 나는 나 자체로 고유하다”라고 주장하는 학생들은 “야훼”라고 이름 붙여 준다는 것(p254)은 그들의 말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훌륭하지만 그 자체가 학생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아니다. 오히려 저자가 가감 없이 이끌어낸 학생들의 ‘말’은 그것이 드러내는 감각이 후기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에 도달한 한국 사회가 구성해낸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의 주체의 혼란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모든 세대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게 되지만, 청년세대는 그 변화된 세상을 가장 먼저 드러낸다는 점에서 적어도 다른 세대만큼은 그 시대를 드러낼 수 있다.


우연히 저자에게 주어진 이들이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이었기에 ‘발언하고 주목받는 명문대생’과 ‘발언권이 배제되었다고 가정되는 고졸’ 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척박한 청년세대 담론 지형에서 독특한 지점을 드러내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테면 명문대생과 같은 집단이 선택되었다 하더라도 저자의 작업과 비슷하게, 그에 못지않게 의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물론 우석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의 말미에 나오는 연세대학생들의 레포트가 이 책의 내용에 비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명문대생이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뭔가 ‘당사자 운동’을 하겠다는 이들을 추려낸 레포트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해석하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학문’도 아니고 ‘운동’도 아닌, 청년들의 어떤 발언이 의미를 지니게 될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부는 물려받았고 또 다른 일부를 물려주게 될 그들 자신의 편견과 감각에 대한 서술은 그 자체로 시대에 대한 비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적나라하게 증명하듯 그런 작업조차 ‘청년세대 당사자’가 아닌 이에 의해서 수행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청년세대 당사자의 발언이 “우리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라는 세대론의 틀거리에 포박된 함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소중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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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여, 냉소하라 더욱 냉소하라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한윤형 지음, 텍스트, 2009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자아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 사회가 만든 최소한의 틀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 되었다.


한윤형이 쓴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20대의 오늘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책이다. ‘자전적 에세이’라는 것은 보통 ‘자기 자랑’으로 귀결되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냉소주의가 느껴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 저자의 이런 태도도 사회적 맥락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도대체 이 냉소주의는 어떤 맥락에서 온 것인가? 그에 대한 답도 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바로 그 시점이 책에서 설명하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어떤 ‘여정’의 끝이라는 게 힌트다.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한윤형’이라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아 형성 과정에는 세 가지 정도 특별한 지점이 발견되는데 그 첫 번째 지점은 저자를 설명할 때에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조선일보 논술대회 대상 수상 인터뷰 거절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남들이 쉽게 생각하지 못할 만한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그에게 이 사건은 자신이 몰래 키워온, 오프라인과 구별되는 온라인에서의 자아가 공식적으로 세상 질서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거기에서 오는 불안감이 이후에 이어진 사회적 활동의 감정적 측면을 지배했다고 고백한다.


그의 부모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단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취미를 가졌을 뿐, 크게 반항하지도 않던 우리 집 아이가 알고 보니 인터넷에서는 꽤 유명한, 어떤 불순한 집단의 핵심 인사였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동시에 얼마나 많은 고뇌를 되풀이해야 했을지 알 만하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통제 밖에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식이 훌쩍 커버렸다는 사실을, 자식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부모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하루아침에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니 이 얼마나 슬픈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상황 자체를 다시 분석해보면 이렇다. 저자가 안티조선 운동의 일원이 되어야만 했던 것은 자신이 그것을 간절하게 원했다기보다는 당시에 존재하던 사회적 조건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조건들은 1987년 이후 사회의 주류로 발돋움하기 시작한 소위 민주화 세력과 386세대가 함께 만들어낸 것이었다. 즉, ‘한윤형’이라는 정치적 주체는 이전 세대가 남긴 짐을 짊어지고 탄생했다. 안티조선 시절 그의 필명이었던 ‘아흐리만’이 이후에 보여준 정치적 행위들 역시 이러한 짐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일 ‘선배들’을 잘 따라가는 것으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설움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아흐리만’은 냉소적 시선을 가진 논객이었지만 ‘동지들’에 대한 신뢰가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열정을 바친 안티조선 운동이 ‘정치인 노무현’으로 표상되는 정치세력의 도구로 변질되는 과정에서도 그것 때문에 모두에게서 신뢰를 거두지는 않았다. 그가 모든 것을 냉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참여정부 시절 이라크 파병 국면에서 벌어진 ‘김선일 피살 사건’이었고 이것이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저자의 자아 형성 과정의 두 번째 중요한 지점이다.


이 사건에서 국가는 개인을 헌신짝 버리듯 버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어떤 정부기관도 이 참사를 막기 위한 책임 있는 노력을 다하지 못했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어떤 정치세력도 이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국가의 무책임으로 인한 한 개인의 죽음은 ‘이라크 파병 찬성/반대’라는 정치적 프레임에 가려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이라는 정책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국가가 개인을 희생시킨 이 사건에 대해 당연히 제출되었어야 할 ‘대통령 탄핵’이라는 실천적 지침이 그 누구에게서도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저자는 희망을 버린다. 언제나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선배’는 없다. ‘아흐리만’을 탄생하게 한 안티조선 운동의 양대 축인 참여정부 지지자와 진보정당 지지자 모두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즉, 세상을 바꾸는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아흐리만’은 존재 의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중요한 지점. 그것은 ‘군대’다. 군대에서 저자는 ‘수양’을 했다고 말한다. 무슨 도를 닦았다는 얘기가 아니다. 특정한 입장을 갖고 세상사를 바라보던 눈을 그저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로 돌렸다는 의미다. 군대는 정말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 지식인과 글쟁이와 명문대 엘리트로 가득한 평상시 삶에서 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군대에 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세상의 일부가 되는 체험을 한다.


이제 그는 전 세대가 물려준 운동의 자산과 부채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조건이고 참고사항일 뿐이다. 남은 일은 그가 ‘아흐리만’이었던 시대를 책임지는 것과 전 세대가 남겨놓은 빚을 청산하는 데 힘을 보태는 것뿐이다.


그의 이러한 성장기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했던 20대들이 이미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어야 할 일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일종의 ‘도구적 냉소주의’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20대를 중심으로 한 세대 담론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사실은 그것이다. 20대가 전 세대의 지침에 따라 투표를 열심히 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자신의 입으로 발언하며, 자신의 손으로 투쟁을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20대는 전 세대가 만들어낸 ‘20대여, 정신 차려라’라는 식의 담론조차 냉소해야만 한다. ‘한윤형’이라는 자아의 길지 않은 삶의 기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다.



김민하 『레닌을 사랑한 오타쿠』 저자 


파두

2011.09.05 13:13:09
*.122.74.225

한윤형님의 글이 요즘은 뜸하네요. 애독자로서 아쉽네요.
항상 시의성있는 글을 쓰셨던 것 같은데..
곽노현이니, 안철수니, 진보신당 당대회니..
떡밥은 많은데 안무시니(?) 한윤형님의 입장이 궁금한
독자로서는 아쉽네요.

글과 상관없는 댓글 죄송.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

하뉴녕

2011.09.06 13:39:17
*.118.59.215

돈없고 몸아프고 우울하다 보니 글을 쓰기가 힘듭니다. 지금 하는 일들만 대략 정리하면 앞으로는 잘 안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곽노현은 설령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더라도 공직선거법의 판례에 비추어 볼 때 유죄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한 그것이 공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시민과 김어준이 하는 말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안철수야 뭐 아직까지는 남들하는 말대로 '탈정치의 정치'를 하고 있다는 얘기 정도 밖에 할 말이 없을 거 같구요. (그런데 이 분석은 그게 안철수 현상의 원인이란 것이기 때문에, 안철수가 탈정치를 한다고 비판받아야 할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안철수가 그 현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니까요.) 박권일 님이 최근 시사in에서 강남좌파 담론을 비판하며 사용하신 '표준시민'이란 개념을 통해 파악하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넷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1-2주 정도는 기다리셔야 할듯.) 진보신당 당대회는...솔직히 말하면 나올 얘기 다 나왔고 파당 정국인데 표결은 왜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통합파는 2/3 찬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건데... 그나마 진보신당은 구 민노당 시절로부터 이어진 진성당원제 전통은 있어서 유시민에 의해 주도된 "개혁당, 마지막 순간"과는 좀 다른 결론이 나온 셈인데, 그것과 별개로 독자파가 당을 유지할 역량이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2012년까지는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구요. 하지만 그 후에는 또 다른 국면이 올 수 있으니, 그동안 다들 책을 읽든지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만나든지 뭔가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저 자신조차 그걸 실천하는게 쉽지가 않네요. 왜 살아야 하는지 제가 쓰는게 대체 무엇인지 존재의의를 찾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파두

2011.09.06 15:07:59
*.122.74.225

위에 언급한 것들에 일일이 코멘트를 달아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궁금증이 조금 풀렸습니다. 앞으로 글을 더 안 쓰게 될지도 모른다니 저로서는 안 좋은 소식이네요. 우울한 상황은 잘 해결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윤형님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금보다 더 글을 안쓰는 일은 없길 바라게 되네요.^^

super-nova

2011.09.08 14:55:27
*.37.27.180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9.08 09:19:10
*.118.59.159

괜찮습니다. 원래 글쟁이는 조울조울하면서 울지요.

123

2011.09.07 22:19:14
*.190.177.81

제발 블로그 폭파시키지만 마시기 바랍니다ㅠㅠ 이거 보고 복습하는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하뉴녕

2011.09.08 09:20:51
*.118.59.159

제가 여기에 쓴 포스트 1천여개를 거의 다 읽었다는 분이 쓴 덧글들을 읽고 나니, 블로그를 유지한다는게 뭔 일인가 싶긴 했습니다. 그래도 성격이 보수적이라서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테니 너무 염려마세요. 그리고 나중에도 다시 읽고 싶은 글은 미리미리 스크랩해서 챙겨두시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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