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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이건 2년 전에 썼고 황해문화 2009년 가을호에 실렸던 원고입니다. 잠깐 까먹고 있었는데 2년쯤 지났으니 넷에 풀어도 되겠죠... 예전에 블로그에 도입부분만 소개한 적 있었고 전문 공개는 처음입니다...

...50매 쓰면서 각주 하나 없다니 흠좀무. (이게 대충 계간지 데뷔작 쯤 되었던듯...) 뭐 이후에 보낸 원고들은 각주들이 생겨났죠....;;; 



루저는 ‘세상 속의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비트>에서 “싸구려 커피”로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인터넷 커뮤니티 여기저기서 울려 퍼질 때 문득 나는 90년대 후반 사춘기 소년들의 막막함과 갑갑함을 대변했던 허영만의 <비트>를 떠올렸다. 이 만화는 98년에 완결되었고, 완결되기 전인 97년에 영화화되어 그 당시 극장에 걸린 한국 영화로서는 꽤 인기를 끌었다. 영화는 성인관람가였지만 당시의 수완좋은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은 어떻게든 비디오를 빌렸다. 그리곤 무공비급을 얻은 젊은 협객의 심정으로 부모님이 안 계시는 친구 방에 삼삼오오 모여 숨죽이며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중학생 때 기말시험이 끝난 직후 흔히 수업을 하지 않고 반 전체가 비디오를 보는 그 며칠의 느슨한 시기에 반의 소위 ‘일진’이 빌려온 그 영화를 단체관람했던 것 같다. 


김성수의 영화는 곧 잊혀졌지만 만화의 여운은 오래 남았다. 영화의 이민(정우성)은 처음부터 기성질서를 거부하려는 듯한 눈빛으로 로미와 사랑에 빠졌고 죽어갔다. 반면 만화의 이민은 강남에서 ‘내신 4등급’을 벗어나기 위해 강북으로 전학 온 아이였고 머리는 적당히 있었지만 결국 입시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돈다. 그는 친구 태수나 좋아하는 여자인 로미와 자신 사이에 계급의 격차가 엄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만화의 이민이 ‘가늘고 길게 살겠다.’고 말할 때 그건 쿨(cool)한 표현이 아니라 체념의 대사였다. 그리곤 결국 그는 우여곡절을 겪지만 로미를 포기하고 자주 가던 밥집의 딸과 결혼해서 길거리에서 테이프를 팔고 살아간다. 루저(loser)가 세상 속에서의 자신을 파악하고 적당한 위치에서 소시민이 되어 삶을 지속하는 모습을 만화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학벌사회의 잉여인간들


이민이 살아남은 시대와 그로부터 십 여년을 격한 오늘날 우리의 시대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참 미묘하게 다르다. 가장 다른 것은 ‘루저 정서’가 발생하는 위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과거의 루저가 학벌구조의 바깥에 위치했다면, 오늘날의 루저는 바로 학벌구조 안쪽에 있다. <비트>의 이민과 로미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기에 자신들의 삶을 비난받는다. 비록 집이 잘 사는 로미에겐 해외유학을 통해서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는 식의 계급적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 세계에서 ‘잉여인간’의 규정은 대학진학 여부다. 그러나 오늘날의 잉여인간들은 ‘학벌사회의 잉여인간들’이다. 대학에 진학한 이들이 좌절에 빠져드는 정서가 오늘날의 루저문화인 것이다. 디시인사이드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아 1만장 이상의 앨범 매출을 올리는데 성공한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는 물론이거니와 최근 개인 블로그에 자주 소개되는 언더 힙합 뮤지션 FANA(화나)의 “잉여인간”을 봐도 그렇다. “싸구려 커피”의 화자는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살았다고 말한다. 대학을 다니고 취업 준비를 한 사람이 아니라면 오히려 공감할 수 없을 만한 내용이다. 이를테면 아르바이트 자리를 바꿔가며 그냥저냥 간신히 살던 이들도 그 반복되는 일상을 “세숫대야에 고여있는 물”로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개는 그렇지 못하다. “방학도 아닌데 오늘도 방안에만 처박힌 내 모습”이라는 “잉여인간”의 서술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대학생의 정서를 드러낸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일까. 물론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의 변동과 큰 관련이 있다. 고등학생 이민이 삐삐를 차고 다니며 또래들과 싸움을 하다가 로미의 호출을 받고 달려갈 무렵 한국 사회는 IMF를 맞이했다. 90년대 초반 학번의 대학생들은 IMF 이전에 취업을 한 ‘운 좋은’ 동기들과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취업을 유예하던 ‘운 없는’ 자신 사이에 심연의 간극이 생기는 것을 체험했다. 특히 군대를 다녀오자 세기말이 닥쳐온 남학생들에게는 여자 동기들과의 비교가 살인적인 스트레스였다. 선배들은 수월하게 취업하는 것을 보다가 눈앞에서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본 이들 또래는 386세대로부터 ‘정치의식이 없다’는 핍박을 받으며 그 세대의 논리를 철저하게 내면화하거나 그 세대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20대 망국론’을 공개적으로 떠드는 김용민이나 386 패거리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규탄하는 변희재를 그 연배의 대표로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IMF를 ‘극복’해내는 동안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IMF 이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빚을 졌지만 개인들은 저축을 하는 사회였다. IMF 이후의 한국 사회는 기업들은 돈을 쌓아두지만 개인들은 빚을 내어 돈을 굴리는 사회로 변모했다. 이제 개인은 안정된 직장에서 받는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알콩달콩 삶을 꾸리는 소소한 행복의 권리를 박탈당했고, 기업가적 마인드를 장착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인생역전을 노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삐삐를 버리고 삼성 휴대폰을 샀다. 사람들의 인생이 팍팍해지는 십 년 동안 삼성은 다른 모든 재벌을 따돌리고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자라났다. 다른 기업 총수들이 감옥에 갈 때에도 검사들에게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주며 국민국가를 쥐락펴락하는 그런 ‘글로벌 기업’으로 말이다. 벤처 기업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있다고 정부가 선언하자 돈이 그곳으로 몰리고 무분별한 창업이 시작되었다. 벤처 열풍을 믿고 공대에 진학한 젊은이들은 졸업하기 전에 그 열풍의 거품이 빠지고 미풍이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어느 포털사이트에 연재되던 “공대녀 라이프”란 웹툰이 있었다. 여성이 별로 없는 공대에서의 여학생의 소소한 생활들을 그려 인기를 얻던 만화였다. 만화가를 사적으로 아는 건 아니니까 이 ‘공대녀’가 왜 만화가가 되었는지를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어느 회에선가 그녀와 친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벤처 열풍 끝났대...우리 이제 취업 다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학벌사회는 균질화된 학벌 엘리트들의 대다수를 대기업들이 안정적으로 고용해줄 수 있을 때에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체제다. 그러나 IMF 이후 이 체제는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이전과는 달리 고등학생 때보다도 더욱 치열한 경쟁의 공간에 노출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의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간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이전 시대의 이민과 로미들이 한없이 부러워하던 명문대생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말하자면 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했고, 그래서 경쟁에서도 승리를 거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희망이 없는 그런 열패자들이다. 학벌사회의 승자이면서 잉여인간이 된 것이다. 이들의 열패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수월하게 취직했던 몇 학번 위의 선배들이나 얼마 안 되는 자리를 잡아 채는데 성공한 친구들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정말로 힘든 사람들은 ‘희망’을 말할까
 

그러나 생활세계에서 열패감을 강하게 내뿜는 이들은 담론의 영역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얘기할 수 없을까. 그럴 수 없다. 사회의 ‘어른’들은 스스로 비정규직 현장에 뛰어든 20대나 학자금 대출을 메우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세월을 보내는 지방대생들 정도를 제외하면, 부모의 자산을 축내며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20대들 일반을 여전히 ‘팔자 좋은데 무능한 놈들’ 정도로 치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의 학벌이 ‘인 서울’(in 서울, 서울 소재 대학들을 말함) 정도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실 사회의 규탄 이전에 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내면화하고 있다. 사회와 부모와 자기 자신이 협력하여 그린 셀프이미지(self image)에 훨씬 못 미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네들이 특별히 잘난 척을 한 것도 아니고 사회가 말해왔고 부모가 기대한 수준에 비해 바닥을 기고 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요즘 보이는 루저 문화라는 것은 이 부끄러움을 그나마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서는 정치적인 각성과 자기 학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루저 정서를 가지고 루저 문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은 아니라는 그런 역설 말이다. <88만원 세대>의 공저자 박권일의 말을 빌리자면 88만원 세대 담론을 명문대생들이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그런 역설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주위를 돌아봐도 취업의 문이 좁아진 세상에서 가장 자신의 미래를 심각하게 회의하는 것은 명문대생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미래의 낙차가 ‘하늘과 땅’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들이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명문대생에게 이 목표는 “달성되거나 안 되거나”다. 그리고 양자 간에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 그는 명백히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주위에는 그 목표를 이미 달성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 그 목표에 안달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의 친구들 혹은 선배들이 이미 겪고 있는 그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것도 자신이 바라던 삶이 아님을 인지한다. 금융권 취직이 가장 수월하다는 서울대 상경계열 학생들을 만나보면 자신이 얻게 될 직장에 대해서도 고민과 회의가 많은 것이 보통이다. 회사에 가봤자 영업직이고 자신이 원하는 종류의 관리직이 되려고 욕망하면 또 그 위에 미국 명문대학 MBA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학벌의 피라미드가 있음을 발견한다. 집에 돈이 많지 않으면 공기업을 지망하는 것이 낫다고 그들은 말한다. 경쟁이 너무 극심한 체제에서 ‘자유경쟁’과는 거리가 먼 직장을 갈망하게 되는 이런 현상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경쟁체제를 찬양하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들 명문대생은 천재적인 창의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까지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줘야 할 사람들이지만,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드디어 SKY 학생들까지 9급 공무원 시험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사례는 개인적인 체험의 차원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전해지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이들은 ‘하늘과 땅’의 현격한 차를 인지하거나 ‘하늘’도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한 여력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의 목표는 일단 저 명문대생들과 동등한 레벨에 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만 되면 뭔가 길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고 그 희망에 맞춰 열심히 살아도 모자랄 이들에게, 그 ‘희망’ 너머에도 별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다. 가끔 명문대에는 음악이 좋다고 홍대 주변을 배회하다가 몇 년만에 돌아와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고학번 친구들이 있다. 이 친구들은 명문대에 왔기 때문에 그 몇 년을 허비할 기회를 만들 수 있었던 거다. 물론 대개는 그 허비한 시간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강의실에 앉아 있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출발선에서 그들보다 뒤진다고 느끼는 다른 대학생들은 그 시간에 편입을 준비하거나 학점, 토익, 자격증 등에서 최대한 불리함을 상쇄하려고 애를 쓴다. 시간을 허비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대개는) 다른 것을 추구해 보겠다는 욕망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고졸들의 경우는 어떨까.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으로 유명한 어느 업체의 해고 노동자들 중에 나보다 조금 어린 20대 여성이 있었다. 고졸로 노동자가 되어 꽤 오랫동안 이곳저곳에서 일한 바 있던 그녀는 그곳에서 오랜시간 동안 복직투쟁에 함께하다 그 투쟁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질 무렵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붙들려 집으로 끌려갔다.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최근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 때, 그녀는 그렇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거다. 그냥 일하면서 돈을 약간씩 모으면서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서 애 낳고 살기를 바랐을 거다. 그러나 그런 평범한(?) 소망이 충족이 안 되는 상황에 던져졌던 거다. 그녀에게 누가 “어차피 대학을 졸업해도 비정규직이 되기 십상이니, 에너지 낭비하자 마라.”고 충고(?)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감히 그렇게 충고할 수는 없을지라도, 현실은 잔혹하다. 명문대생들의 고난은 도미노처럼 지방대생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전가된다. 서울에서 밀려난 수도권 명문대생들은 지방에 존재하던 소수의 괜찮은 일자리에 유입되었고 지방대생들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가 되었다. 지방의 공장에 취직하는 20대들 중엔 대졸자나 대학 중퇴자가 꽤 있지만 애초부터 학력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회사측에서 지방대 졸업생을 고졸보다 경쟁력이 없는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취직걱정을 하는 지방대생들은 차라리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다. 출발선상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토익 점수 따고 자격증 따면 명문대생과 비슷한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위안하거나, 그게 안 되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을 때에도 살다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위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포함될 수도 포함되지 않을 수도 없는 현실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지만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게다. 강사들의 증언을 들으면, <88만원 세대>를 가지고 수업을 하면 오히려 학생들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저자들이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문화평론가 이택광이 미디어오늘에서 한 말을 빌리자면, “현실을 비참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도 ‘특권’이라는 사실을 장기하 현상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말은 그 ‘특권’을 진짜 ‘특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비참함은 특권의 눈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가짜 비참함’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의 비참함이니 말이다. 


우리는 정말로 엄친아를 부러워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열패자들 위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처지가 다른 학벌사회의 잉여인간들과 잉여는 아니지만 공장에서 부속품 취급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위에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승자들이 있는 것일까.  

2005년 웹툰 골방환상곡 8화에 나온 이후 일반명사로 등극한 ‘엄친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엄친아’는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로 부모가 자식과 대화를 하는 문맥에서 튀어나오는 “너(자식)보다 잘 났고 완벽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이 ‘매우 잘난 타인’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몇 가지 세태를 추론할 수 있다. 첫째, 자녀의 취업 문제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가정 전체의 팀플레이의 문제다. 둘째, 취업 준비를 하는 자녀는 여전히 부모의 눈을 거쳐 세상을 바라본다. 셋째, 부모의 욕망과 자녀의 욕망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엄친아라는 말의 의미를 자조적으로 수용하는 젊은이들의 문맥에서, 부모의 욕망에 저항하는 자녀의 욕망은 이 시대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세태 위에서 다시 엄친아라는 말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엄친아라는 말이 그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 하지만 어디에도 존재하지는 않는 대상이면서도, 실은 그 실체가 ‘별 것 아닌’ 것이라는 데에 주목한다. 그 완벽한 존재는 알고 보면 “최고 명문대에 다니고 잘생기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그런 그에게 지금 취업난은 장난일뿐”인 존재다. 그러니까 그는 고액연봉자, 즉 노동자다. 하다못해 엄친아의 규정은 그가 그 고액연봉으로 어떻게 즐겁게 사는지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시 한번 이 조어가 탄생한 대화의 문맥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왜 생기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되었다거나 벤츠를 몰고 다닌다거나 따위의 서술은 엄친아에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부모가 자식을 갈구는 문맥에서 작동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식이 자신이 부르주아가 아님을 자각하고 부르주아를 시기하도록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엄친아에서 허용되는 ‘사장’은 인터넷 쇼핑몰 사장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엄친아가 그 번다는 돈으로 뭘 어떻게 사는지 당연히 부모는 관심이 없으며 자식과의 대화에서 그런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실은 자식들도 그 고액연봉자가 요트를 타고 다니기는커녕 매일 회사에서 과로로 찌들어 지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이를테면 시기라는 감정은 상대방이 내가 잘 모르는 어떤 쾌락을 누리고 있을 거라는 의구심에서 발생한다. 상대방이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나보다 더 잘 누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부러움은 심각해지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는 가령 이등병이 병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러움은 시기는 아니다. 이등병은 병장이 부러운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장들은 끊임없이 후임들의 처지를 자신과 비교하면서 자기자랑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쾌락은 다른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더 처지가 나쁜 이들과의 비교의 문맥에서만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군대에서 혹은 과외를 하다가 강남 중산층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이 언제나 부러운 것은 아니었다. 가령 돈이 많아도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나 다니겠지, 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상황이 부럽지는 않다. 어차피 나는 여자 나오는 술집에는 안 가는 걸. 그러나 그가 양주맛을 감별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때부턴 얘기가 다르다. 그가 나보다 더 가진 자원으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이 있고, 그 일이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이 지각되면 미칠 듯이 부러워지는 것이다. 물론 더 모호한 사례도 있다. 이를테면 내가 내무반에서 철학책을 눈을 반짝이고 보고 있으면 고참이나 동기들은 호기심에 모여 들어 이것저것을 물었다. 바깥에서 그런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이를 봤다면 그들은 ‘읽지도 않는 걸 들고 다니기는!’이라고 냉소하면서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누군가 그런 걸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들은 호기심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시대의 ‘승리자’인 엄친아들에겐 바로 이런 지점이 결여되어 있다. 엄친아들이 승리자인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완벽하게 이해가능한 세상이다. 세상엔 신기한 것도 내가 모르는 것도 없고 다만 나의 욕망, 아니 부모님의 욕망에 엄밀하게 조응하여 움직이는 삐에로들이 있을 뿐이다. 


루저들 간의 연대는 가능한가?


승리자에게 ‘다른 욕망’이 없기 때문에 루저들은 가끔 그 ‘다른 욕망’이란 것을 환상적으로 욕망한다. 가령 장기하 1집의 타이틀곡 “별 일 없이 산다.”는 듣는 사람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노래다. 그러나 장기하 본인에겐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대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나 “별 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사는 게 재밌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루저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을 잘 알고 있고 고작 그것만으로 사회 전체가 돌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를 냉소한다. 시기할 것이 없는 곳에서 냉소는 싹튼다. ‘젊은이들의 보수화’라는 것도 이런 문맥 위에 있다. ‘다른 것’을 보여주겠다는 ‘좌파 어른’들에게 젊은이들은 세상에 다른 게 어딨냐고 되묻는 것이다. 


시기할 만한 사람이 10만명, 아니 1만명만 있어도 다른 정치성이 나올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둔한 진술이다. 존재론은 경제구조를 넘어설 수가 없다. ‘다른 것’이 싹트지 않을 만큼 경제적으로 팍팍한 곳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없는 곳이다. 가끔 세상에는 다른 것이 있다고 믿고 싶은 여학생들이 글쟁이나 예술가들의 커뮨을 좇아 떠도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네들은 거기서 속물을 만나고는 다시 상처받는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나는 웃으면서 “조금만 더 벌이가 좋았다면 그들도 충분히 그걸 가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한다.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저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다. 1990년대에 일본의 사회학자인 미야다이 신지는 길거리에서 원조교제를 하는 블루세라 여고생들이 새로운 삶의 방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가족, 학교, 지역사회를 넘어서는 길거리라는 제4공간에서 여고생들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나름대로 후기 근대에 적응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학자는 십년 후에 그 여고생들이 정신치료를 받게 되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일자리나 수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새로운 공간’에서 안도감을 얻는 이들이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는 없다. 


루저 문화의 시사점이 있다면 루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애매하고 환상적인 ‘새롭다’는 규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루저는 새로운 것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엄친아나 심지어 어른들보다 명료하게 인지하는 이다. 어른들이 말하는 꿈이나 희망 열정 등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다. 앞에서 나는 루저 감성이 정치적인 각성과 자기학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고 썼다. 하지만 자기학대와 루저 감성과 정치적인 각성은 다른 문맥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기 힘든 사회라면 그 새로운 것이 없음을 지각하는 ‘냉소’라는 정서에서 정치성도 발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엄친아의 균열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루저라고 한다면, 그 루저와 루저들 간의 만남은 어떻게 될 것인가? 루저 감성의 소유자들은 숫자는 많지만 구매력은 없다. 하지만 장기하와 굽시니스트의 소략한 성공에 이르러 그들은 ‘1만명’ 정도의 소비자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루저 문화가 존속될 수 있는 틀 정도는 마련된 것이다. 이제는 ‘주류’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으로서의 ‘나-루저’가 아닌 다양한 루저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서로의 모습을 발견해 가는 시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 시도가 진행될 때에 루저들은 “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담론의 영역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특히 포탈사이트의 웹툰들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계층과 세대가 그럭저럭 일치하는 특이한 문화상품으로, 지속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2011.07.15 12:54:45
*.143.73.116

한운형님 사적인 질문인데 책을 보면 어느 대학 나오셨다거나 이력 같은걸 쓰지 않던데 이유가 먼가여? 어느대학 나오시고 무슨과였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mah0140

2011.07.15 17:46:09
*.38.137.196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를 읽어주세요
하다못해 서점에서 잠시 앞부분만 읽어도, 아니 네이버 책에 들어가서 본문검색만 좀 해봐도 알수있습니다. 사서 읽으시면 훨씬더 좋고요

...

2011.07.17 18:45:31
*.224.172.129

서울대 철학과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Kclj&articleno=7686717&_bloghome_menu=recenttext#ajax_history_home

하뉴녕

2011.07.18 17:50:12
*.171.89.66

십년 째 졸업도 못했고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것도 없어서 (학교에서 안 가르친게 아니라 제가 학교를 별로 안 나갔습니다.) 언급을 회피하는 편입니다. 다른 분들이 설명해주셨으니 제가 더 보탤 건 없겠죠...

거님

2011.07.15 13:28:47
*.63.35.214

거님, 조금만 검색해보시면 하뉴녕님이 어느대학에 입학했는지는 아주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왜 안적으시는지는 제게 '관심법'이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죠. (뭐 대략 성향으로 추측을 하고는 있긴 합니디만, 그거야 제 추측인거고.)

2011.07.15 14:45:35
*.143.73.116

검색해봤는데 안보여서요 제가 못보는건지 몰라도요. ㅠ

이친구요

2011.07.16 19:28:05
*.208.114.70

고졸입니다

Re

2011.07.16 20:18:45
*.180.213.149

제가 알기론 고등학교 제대로 졸업 못하셨습니다. 명문대에서 인터뷰하자고 했는데 안티학벌 커밍하시고 진학거부한걸로 유명하심ㅋㅋ

wonik sokal

2011.07.16 22:49:50
*.153.171.210

고졸 아닌데요-.-;;;; 도대체들 왜 스탠퍼드 영문과 수석졸업했다고 말을 못하는거야

2011.07.17 10:49:11
*.146.36.209

위에 병/신들 깝치고들 있구만..쓰레기 새끼들

으흐흥

2011.07.17 17:17:14
*.205.71.210

정확히 말하자면 대학재학중일텐데(그러니 고졸맞죠 ㅎㅎ)... 주인장 요번학기 막 학기라고 주워들었음. 본인이 학교타이틀 안 밝히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를텐데 굳이 다른 사람들이 말할 필요는 없지 싶고요.

몇년 전에 조선일보 주최 논술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고도 안티조선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유로 인터뷰를 거부해 제법 유명해진 사건의 주인공임 ㅋ

....

2011.07.17 20:54:07
*.141.218.33

굳이 적자면 그 논술대회 성적으로 서울대에 가시기도 했죠.

2011.07.18 06:16:39
*.222.114.243

예능과 다큐, 비유와 풍자를 구분 못 하는건가? 찾아보게 만들어야지...

hwal-in

2011.07.18 20:26:44
*.48.234.49

이번 글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많이 공감되는 글이였습니다. 짠하네요ㅜㅜ

outis

2011.07.19 23:12:00
*.148.190.159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별개로 그 시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표한다는 측면에서는 만화가 아닌 영화 비트가 그 시대의 대표를 맡을만 하다고 봅니다.

IMF 직전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었던 시대를 표류'하는 청춘을 비트에서 본다면 장기하에게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래를 기대하지 않는 시대를 받아들인' 청춘을 본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디로든 가고자 하는데 방향을 잡지 못하는 4등급과, 싸구려 커피를 마시면서도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생가하지 않고 별일 없이 사는 서울대생은 괜찮은 대조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인 랜드가 Fountainhead 서문의 인터뷰에서 '낭만주의는 되었어야 할 현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었는데, 저는 비트에서 묘사된 IMF 이전 젊은이는 비록 '되어야 할 현실의 모습'을 알지 못하나 현실 그 자체를 정착지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젊은이라는 면에서 당시 우리의 정서는 낭만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현재를 대표하는 장기하는 이런 면에서는 낭만주의가 아니고 오히려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 사회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보수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비교는 윤형님의 분석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것이지만 단순한 것이 명료함으로 이어진다면 단순하다는 것에도 미덕이 있다고 봅니다. 제 글이 그런 것이기를 바라구요.

....

2011.07.21 17:53:33
*.141.214.111

그냥 일반인들은 진보신당 자체를 모를 겁니다. 한윤형씨도 훈련소에서 유빠 한 명 만나고 너무 기뻤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솔까 진보신당이 가진 고학력 명문대생 입좌파라는 재수없음이나 트위터 사용자들이 가진 존나 재수없는 힙스터 도련님 이미지도 어느 정도 여기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어야나 느끼는 거지요.


그냥 일반인들은 진보신당이고 뭐고 무능력자로 보던가 동호회 정도로 볼뿐임.

[HEE]

2011.07.22 06:12:40
*.246.68.41

"비밀글입니다."

:

하뉴녕

2011.07.23 04:39:34
*.171.89.66

제가 고생이 많습니다...(먼산)

gggqpdlqp

2011.07.22 23:41:54
*.254.197.139

100을 생산하는 기계가 있다 100만 생산하자는 보수 기계에 기름쳐서 120을 생산하자는 중도 다만 기계는 무리가 갈것이다 . 주요부품 교체해 150을 생산하자는 진보

이나이크

2011.07.27 03:24:17
*.234.162.87

글 좋네요. 살아는 있나 보구려. ㅎㅎ

용공폭도

2011.07.27 22:58:34
*.89.32.91

예로 드신 88만원 세대 같은 경우는, 그게 20대에게 많이 읽히긴 했다는데... 그걸 읽은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읽은 것 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독자의 상당수가 그 책의 내용 중에서 한두 문장만을 떼어내서 줄 긋는 모습을 자주 봤거든요. 제가 읽기에 그 책은 성공의 불가능함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그걸 성공론의 한 형태, 그러니까 시크릿이니, 부자아빠 가난한아빠니.. 그런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있더라구요.

ㅇㅇ

2011.09.09 17:04:10
*.179.248.6

그런가...난 나 말고 그걸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난 그런 식으로 읽히진 않던데. 고만고만하던 2년 전이구나 그걸 읽은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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