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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김진숙 



'크레인 85호'에서 내려온 김진숙의 절박한 트윗은,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을 서술한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체제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에서 '패배'한 이다. 당연히 그들은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체제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에 비해선 말이다. 김진숙이 감옥에 갇힌 것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금 상황에서 하나마나한 가정이지만 만약 한국 사회가 크레인 위에서 농성하는 노동자에 대해 더한 대우를 하는 사회가 된다면, 한국 사회의 수인에 대한 대우는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승리'할 수 있는가? 그녀의 승리조건은, '제 발로 내려오는 것'이다. (시사in에 보내온 김진숙의 육필원고 참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크레인에 올라간 이상은, 어지간한 타협적 결과물을 가지고 내려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퇴로를 막아버리고 벌이는 근본적인 투쟁이다. 김진숙이 크레인 위로 올라가는 걸 동료 활동가 모두가 말린 건 그 때문이었는데, 모두 알다시피 김진숙은 새벽에 조합원들 몰래 김주익 사후 채워져 있었던 85호 크레인의 자물쇠를 열고 고집스레 올라갔다. (당시 레디앙 기사 , 당시 김진숙의 편지) 그 후 반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승리가 힘겨운 조건은 여전하지만 여론은 극적으로 변했다. 김진숙이 김주익의 크레인 85호로 올라갈 때 그녀를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그녀를 지지한다. 김진숙이 지켜본 한진중공업 박창수와 김주익과 곽재규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오마이뉴스 기사) 송경동의 노력 때문이든 김여진의 활동 때문이든 SNS의 역할 때문이든 (나는 희망버스의 성황을 SNS의 진보성으로만 분석하려는 논의가 조금 불편하다. 이에 대해선 2011/07/10 - [정치/분석] - SNS의 진보성? 을 참고할 것.) 부산 영도에 1만 명의 사람들이 내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전경/용역들과 맞섰다. 


반값등록금 이슈가 그리 되었듯 이 사건이 다른 이슈에 밀려날 우려를 일단 제끼고 말하더라도, '1만 명'이란 건 엄청난 숫자이다. 그리고 운동단체들의 동원능력이 상실된 세태에서, 1만 명이 그곳에 내려갔다는 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김진숙의 추도사에 발끈하며 프레시안에 악플을 달았을 성향의 이들도 그곳에 잔뜩 몰려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는 김진숙의 그 추도사를 블로그에 소개했었다. 2009/06/09 - [정치/기타] - [펌/김진숙] 노무현 '동지'를 꿈꾸며... 그러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면, 그녀의 이 글을 게재한 프레시안 기사에 달린 덧글들을 봐야 하는데, 프레시안 서버가 리뉴얼되면서 덧글들은 남아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조금 순화된 표현으로 '결국 노동계도 시대를 앞서 나간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들은 차벽 속에 갇힌 진보였다.'라고 반응했으며 이러한 내용을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을 섞어 게시한 사람도 많았다.)


굳이 김진숙의 노무현에 대한 추도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SNS에서 그녀에게 성원을 보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어떠한 정치성향을 지녔는지는 조금만 둘러봐도 명약관화다. 이것은 한국 사회 '진보 세력'의 외연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보여준다. 진보신당 당권자가 1만명이라면 그 중에서 유시민을 진보신당과 함께 좋아하는 이들이 4천명은 될 거라고 예측하는 것처럼, 김진숙을 지지하기 위해 내려온 이들이 1만명이라면 그 중엔 진보정당 독자노선보다 야권 단일화론에 더 동감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거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거다.


나는 지금 야권 단일화론을 말하는 이들은 김진숙을 지지할 자격이 없다거나, 소위 '좌파'라 스스로를 칭하는 사람들이 그런 이들을 색출하여 단호하게 결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지하는 상황은 훨씬 더 비참하다. 혹시 이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가? 오늘날 김진숙에게 훨씬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한줌도 안 되는 '좌익'이 아니라, 인간다운 세상을 꿈꾼 노무현을 추모하면서 '나쁜 이명박'을 일단 몰아내기 위해 야권이 연합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라믿는 '자유주의자'들이 아닐까 하는?


어쩌면 희망버스의 '성공'이야말로 사실은 그 판단을 지지하지 않는가? 좌익들은, "민주당은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진보정당이 해결할 것이다."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정당들이 내세우는 임시방편들은 노동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근본적인 시도만이 노동문제를 해결할 것이다."라고 선언할 거다. 하지만 동조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 좌익들보다 '우리 시민들'이 훨씬 더 숫자가 많기 때문에, 우리들이 김진숙을 더 도와줄 수 있다."고 자부한다면 뭐라고 말할 것인가? 민주당이 진보정당보다 김진숙을 도와주지 못할 지라도, 야권 단일화를 지지하는 시민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김진숙을 훨씬 더 많이 도와줄 수 있다면 그런 판단에 대고 뭐라고 말해야 하나?  


사회운동에, 그것도 노동운동에 규합한 시민들이 진보정당 운동을 소멸시킬 가능성에 대해 '좌익'들은 사유해봤는가? 이 '딜레마'에 맞닥트린 어느 좌익청년에게는 두 가지 정도 선택지가 해결책으로 주어질 것이다. 하나는 '저 자유주의자'들보다 내가 훨씬 더 치열하게 실천하겠노라고, 그리하여 저 딜레마를 발생시키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이 아무리 윤리적일지라도 그의 행동은 저 딜레마를 해소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가장 성공할 때라도 김철수라는 청년이 또 다른 김진숙이 되어 김철수를 지지하는 이들에 대해 동일한 딜레마를 발생시키는 상황을 만들어낼 뿐이다.  


다른 선택지는 그렇게 합류한 사람들이 어떻게든 변하게 될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은, 결국 민주당이나 국민참여당이나 야권단일화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진보정당이나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두 가지 다른 버전의 입장이 가능하다. 노동문제가 우연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주의 세력과 좌익 세력의 견해의 차이를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거라는 현실정치적 견해가 있고, 원래 노동문제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집약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 이슈에 뛰어드는 이는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길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인 견해가 있다.


나는 이러한 견해들이 어떤 기대에 대한 의견표명이라면 이해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겐 그러한 기대가 필요하고 그 기대를 실현시키기 위해 각자 노력을 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진보는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의무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각고의 노력없이 하나의 사건이 저러한 변혁을 불러올거라고 믿는다면 그건 올바른 인식이라 보기 어렵다.



3년 전 한국에선 촛불행진이라 불리는 거대한 시민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촛불행진은 이명박이라는 악덕한 대통령에 대한 분노에 몰두함으로써 결국 모든 걸 이명박 탓으로 돌린 개혁정치 세력이 그 열매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러나 희망버스는 김진숙이 188일째 싸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싸우던 김주익이 129일째 되던 날 목을 맨 건 바로 그 개혁정권에서였다는 것, 개혁적 공권력과 개혁적 언론에서였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그들 역시 자본의 또다른 도구이자 하수인이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을 말이다.
- 김규항, <부산발 혁명, 희망버스 혁명>  




현실정치적 견해가 말하는 노동문제의 특수성은 다음과 같이 반박될 수 있다. 첫째,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노동문제와 분리해서 사고할 2008년 촛불시위의 구호나 반값등록금과 같은 의제들도 찬찬히 따져보면 '반이명박'이란 구호로 집약될 수는 없었다. 이 사건들에서도 한미 FTA를 체결하거나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시기가 "바로 그 개혁정권에서였다는 것, 개혁적 공권력과 개혁적 언론에서였다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다. 이 문제들과 노동문제 사이에 어떤 질적인 차이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환기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참여정부의 한미 FTA는 이명박 정부의 굴욕적인 대미협상과는 달리 이익균형을 이루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고, 등록금이 언제 많이 올랐는지를 환기하기보다는 이 정권의 경찰이 예전에 비해 얼마나 학생들을 더 탄압하는지를 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둘째, 아예 노동문제로 들어와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희망버스에 참여한 이들만큼의 숫자는 아니더라도, 2008년 기륭전자에 항의한 김소연 분회장의 단식농성이나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투쟁 등은 촛불시민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의 호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호응이 이루어질 때라도 '개혁정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환기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투쟁하는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해고당한 것은 참여정부 시기였고, 그들이 해고당한 사정이 참여정부 시기에 통과되었던 비정규직 보호법안과 관련이 있음을 환기한 이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쌍용자동차의 문제가 참여정부 시기에 있었던 상하이 자동차로의 매각에서 연유되었음을 환기한 이들은 또 얼마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정혜신이나 박혜경, 그리고 레몬트리 공작단 등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걸 '환기'한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일까 하는 자괴감이다. 내가 그들에 비해 더 왼쪽으로 치우친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일은, 바리새인이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지는 것과 얼마나 다를 것인가. 


구조적 견해가 말하는 노동문제의 특수성 역시 같은 방식으로 반박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사건이 정치적 주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사건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감각과 신념들을 새로운 사건에 참여하면서도 유지한다. 그리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새로운 사건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정치적 감각을 길러내거나 기존의 신념을 변경한다.


만일 희망버스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치신념을 더 왼쪽으로 바꾼 사람들이 있다면,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도 속에서 그들은 1만명이 참여하던 그 시위의 희열과는 전혀 다른 소수자의 소외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의 지지자로 살기 위해선 제 몸의 거죽처럼 달고 다녀야 할 어떤 감각이다. 그래서 타인의 입장에서 그 길을 선택하라고 윽박지르기가 힘들다. 2008년 기륭전자에 흘러들어온 몇몇 82cook 회원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었지만 한편으론 그 거대한 촛불의 무리에서 외딴 곳으로 떨어져 나왔단 사실이 심란하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 심란함과 불안함을 지우기 위해 기륭의 투쟁구호를 온건하게 바꾸자고 말하는 그분들에게 나는, "원래 지배계급이랑 싸울 때는 우리가 원하는 전장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싸울 수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희망버스에 타는 건 환영해야 할 일이다. 성공한 운동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운동이 성공했을 때라도 고스란히 남는 문제들이 있다. 희망버스에 참여하는 것 자체로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지거나 진보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당장 "사람이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나 "노동자의 생존의 문제는 보수 진보의 문제와 무관하다."는 어법들은 어떤 탈정치성이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나는 보수주의자라도 김진숙을 지지해야 한다 믿지만, "보수주의자라도 노동자 생존을 지지해야 한다."는 말과 "노동자 생존의 문제는 보수 진보와 무관하다."는 말은 또 다르다. 우리는 그런 감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이 활동에의 참여나 지지가 다른 감각을 만들어내길 기대해야 하고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는 가령 위에서 인용한 김규항의 한겨레신문 칼럼이 전적으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김규항이 글에서 말하는 사실판단이 현실과 사뭇 어긋나  있다고 보지만, 그 어긋난 현실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당위를 사람들에게 '환기'하는 차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김규항이나 어떤 좌익들이 현재의 상황과 본인의 실천의 의미를 인지하고 있느냐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제대로 해석해 내면서 실천의 영역을 호출해야 한다. 분명히 세상과 사람들은 조금씩 변하고 있고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치에 희소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변화는 우리의 사변 속에서 '무로부터 생성되어' 현실 속으로 틈입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희망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의 감각에 예전과 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그 이전의 사건들인 08년 촛불시위나 기타 사건들과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인지했다면  김규항의 글은 조금 더 세련되게 달라졌을 것이고, 그 이전에 '진중권이 촛불시위 때 자유주의자들을 데려와 진보신당을 망쳤다.'와 같은 주장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이 동의하는 시위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조리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졌을 것이라 야무지게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중권은 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의 3당합당이 필요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08년 촛불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이 이전의 대한민국의 맥락과 상관없이 땅속에서 솟아난 사람인 양 취급한다. 한편 김규항은 새로운 정치의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 희망버스에 참여한 이들이 이전의 맥락과 상관없이 우주에서 떨어진 사람인 양 말한다. 그렇게 본인의 신념을 위해 현실을 자의적으로 추출해낸다면 그런 평론은 '뇌내망상'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소위 좌익들이 희망버스를 바라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곤혹스러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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