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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아흐리만(한윤형)의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분 앞에 모두 공개합니다!


경희대학교 교지 고황에 보낸 원고. 잡지가 베포되었기에 블로그에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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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과 대선이 동시에 실시되는 2012년은 아마도 정치의 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선거 국면’이 1년도 안 남은 지금, 내년에 펼쳐질 정치적 격랑 속의 담론을 미리 선점하기 위한 각 정치세력들의 암투도 눈부시다. 복지국가 소사이어티 등 복지국가를 중심으로 한 야권단일정당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백만민란’과 같이 기존의 정당들을 그대로 두고라도 그 바깥에 야권단일정당의 성곽을 만들자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와는 조금 다르게 야권 내에서 비중이 압도적인 민주당과 제대로 경쟁하기 위해 민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연합해야 한다는 견해,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제3지대 정당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진보신당의 노회찬은 야권의 선거연대가 야권통합의 압력으로까지 번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설정당을 통한 선거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한 바 있으며, 이와 별개로 민주노동당/진보신당/사회당 등 진보정당들의 통합을 논의하는 흐름도 꾸준하다. 


야권연대 압력의 역사적 배경


현재 한국의 야권연대는 정치세력의 양대축인 보수정당의 ‘전횡’에 반대하여, 양대축을 이루는 다른 보수정당과 자유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지닌 군소정당들의 사이에서 폭넓게 논의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두 보수정당의 성격과 정책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도 야권연대 안에 수용하기 어려운 다양한 정치적 지향들이 상존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특히 해방 이후 좌익들이 시민들의 일정한 지지를 받고 있었음에도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역사와 관련이 깊다. 투박하게 구분하자면 20세기에 각국에서 발달한 민주주의 체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경쟁을 민주주의적 경쟁 내부로 흡수한 체제와 그렇지 못한 체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군정에 의해 실시되고 구현된 한국의 ‘민주주의’가 지향한 것은 물론 후자였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당관계로 설정된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진영의 이름으로 호명되었고 후자가 적으로 규정되었다.  


이념적으로 좌익이 금지되고 계층적으로도 서민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억압된 현실은 ‘야당’의 형성과정을 왜곡했다. 민주당은 보수적인 농촌 지주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민당을 그 역사적 기원으로 두었다. 초기에 이승만과 협력하다 그의 독재가 심화되면서 지배계급에서 이탈한 이 집단은, 1960년대 초 그 시대의 청년들에게 군부 쿠데타 세력이 ‘진보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은 아무런 정치적 지향없이 선거에 임했고 박정희가 남로당 출신의 ‘빨갱이’란 사실을 공격하는데에 치중했다. 그리하여 한국전쟁 당시 좌익색출 과정에 진절머리를 낸 영호남 농촌지역에서 박정희에게 몰표가 나오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민주당을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혁신시킨 것은 위대한 보수정치인 김대중의 공로다. 사실 그에게 ‘보수’의 호칭을 붙이는 것조차 성급한 지점이 있다. 1971년 대선에서 3선을 노리는 박정희와 대결한 김대중은 어쩌면 오늘날의 진보신당보다도 더 왼쪽에 있었을 것이다.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을 가진 운동권 내부의 논쟁은 주로 이 위대한 보수정치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발생했다. 


비판적 지지에서 노무현의 시대로 


사람들은 말하리라. 누가 또 ‘비판적 지지’를 말하겠느냐고. 누가 또 DJ 지지를 이야기하겠느냐고. 그러나 다음 대선에 DJ는 출마하지 않지만, 그 노선의 추종자가 여당의 후보로 나올 것이고 ‘비판적 지지’는 재생산될 것이다. 내가 조용한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야 할 수인(囚人)의 처지에 끙끙거리며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비판적 지지’라는 망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것은 악몽이다. 87년부터 97년까지 계속되어진 아편같은 기억,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노예 상태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는 무기력한 환각제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과거 우리 진보진영을 갈갈이 찢어놓았던 분열의 싹, 지긋지긋하게 우리를 괴롭혔던 ‘지옥 논리’의 당당한 등장이 예고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 박용진, <이론과 실천> 2001년 8월호 “ '비판적 지지'의 망령을 경계하라 -강준만의 [노무현과 국민사기극] 비판”



원래 ‘비판적 지지’ 논쟁은 ‘운동권’이라 불리는 집단 내부의 것이었다. 1987년 민주항쟁의 타협적 결과는 민주주의 체제 내에 이른바 ‘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 간의 공존을 강요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민주화 운동 거두 사이의 ‘단일화’의 실패는 노태우의 당선을 가져왔고 1990년 김영삼의 3당합당과 1997년 김대중의 정계복귀 및 DJP 연합 사이에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은 과거의 ‘재야’들이 민주당 혹은 한나라당에 합류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재야에 합류하지 않은 운동권들 사이에선 독자세력화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비판적 지지’를 말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진보정당 운동’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태를 서술하자면 이렇다. 1991년부터 대중적 진보정당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1996년 집권여당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선 민주노총의 총파업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주노총이란 대중조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1997년에 권영길은 국민승리21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권영길이 선거를 나왔다는 사실 자체를 비난했고 권영길이 TV토론에 나와 이회창보다도 김대중을 더 공격했다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잠깐 숨통을 튀어주었다. ‘민주당 정권’이 IMF로부터 수용한 정리해고와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한나라당으로부터 ‘사회주의 정권’이라 공격받는 현실은 민주당 왼쪽의 정치세력이 조직되어야 할 필요성을 민주당에 우호적인 유권자들에게도 확산시켰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이 양대정당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기 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대선에선 모르겠지만 총선에선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서 갈등하는 새로운 지지층의 등장은 2001년에서 2002년에 이르러 ‘노무현’이란 인물과 민주노동당의 동반 성장 및 갈등을 야기했다. 위에서 인용한 박용진의 글은 그 시대의 산물이다. 박용진은 김대중의 퇴장으로 종결된 비판적 지지 논쟁이 새로운 형태로 부활할 것을 염려한다. 2001년 8월에서 10월까지 민주노동당 기관지 <이론과 실천>에서 진행되었던 박용진/강준만/주대환 논쟁에서 민주노동당의 박용진은 “비판적 지지를 경계하라.”고 피맺힌 절규를 외쳤고 노무현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밀고 있었던 강준만은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자의 상생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진보정당 운동의 오랜 이론가인 주대환은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반파쇼 연대는 언제나 옳은 일이지만 이제는 자유주의자가 주류인 시대가 올 것이며 비판적 지지도 극우 헤게모니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견해와 예측은 제각각 조금씩 맞고 조금씩 틀렸다. 2002년 대선에서 ‘비판적 지지’는 부활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비판적 지지’와는 다른 것이었고, (당시) 2-30대의 (그러니까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3-40대의) 개혁성향의 유권자들이 민주당의 괜찮은 인물과 진보정당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사모와 개혁국민정당에 수만명의 386세대와 그보다 어린 청년세대가 몰려와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을 조직해낸 문성근, 명계남, 유시민 중에서 문성근과 명계남은 대선 전날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찾아와 권영길 후보가 사퇴해줄 것을 ‘읍소’했고, 선거가 끝난 후 유시민은 “권영길 후보는 얻을 건 다 얻었는데 마지막에 던지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에서 온 표는 별로 없다.”며 민주노동당원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야권 단일화론


오늘날의 야권 단일화론 역시 이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정치적으로 각성한 386세대와 그 이후 세대는, 2008년 촛불 시위 이후 정치적 각성의 압력을 느낀 오늘날의 10대와 20대와 만나게 된다. 새로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의 특징은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정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그들 집단의 공통된 감각을 ‘상식’이라 믿는다는 것, 그들 자신만을 ‘국민’이란 이름으로 호칭한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야권 단일화에 대한 ‘국민의 명령’은 ‘상식’이 되었고, 민주당과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은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생각에 ‘진보’나 ‘개혁’이란 가치는 그 특정한 가치를 표방한 정치세력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에 모호하게 동의하는 일군의 유권자 집단, 그들이 ‘국민’이나 ‘깨어있는 시민’으로 부르는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와 같은 매체의 호명은 2002년에 유시민이 2-30대 유권자들을 ‘신주류’라고 불렀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노무현 바람'은 기성 정치의 사각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연말 이후 봄까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노무현은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 학력별로는 대학 재학 이상의 고학력층, 소득 계층으로는 월수입 2백만원 이상, 성별로는 남자, 직업별로는 화이트컬러와 전문직 유권자들에게서 처음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받으며 출발했다. 이들은 정치에 냉소적이거나 무관심하며 투표율이 낮은 집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정치 거부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보다 효율적인 개혁'에 대한 그들의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이 열망을 지속적으로 배신한 낡은 정치를 거부했을 뿐이다.

이들이 노무현에게 높은 지지를 보낸 것은 그에게서 새로운 대안을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반면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생산직과 서비스직'의 서민들은 국민통합과 민족화해, 권력문화의 혁신과 새로운 동북아 질서 구축 등 그가 내세운 정치적 가치와 목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서민 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이 아니라 귀족 이미지를 가진 이회창이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역설은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다.“
-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개마고원(2002),p273-274 



인권, 언론자유, 경제정책 등 수많은 부분에서 역주행이 진행되는 이명박 정권의 시대에 일단 그들의 전횡을 멈추고 보자는 상식적인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971년의 김대중은 고사하더라도, 2002년의 노무현의 대선공약이 지금의 진보정당들보다 더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시대의 흐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말하자면 민주당은 집권했을 때 한나라당보다 ‘온건한 속도로’ 오른쪽으로 갔고, 한나라당은 그들을 빨갱이로 몰았기 때문에 집권했을 때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액셀레이터를 밟아야만 했다. 이 차를 멈추자는 것도 좋지만 방향을 바꿀 방법과 주체에 대해 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오른쪽으로 향하는 속도를 조절하는 문제에서나 싸울 수 있을 뿐이다. 


야권연대론의 다른 방식들


물론 현존하는 모든 야권연대론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야권연대론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정당 자체를 하나로 합치자는 버전이 있고, 다른 하나는 복수의 정당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연대를 하자는 버전이다. 전자는 복지국가를 내세운 야권 단일정당이 필요하다는 견해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연합하는 미국 민주당과 같은 종류의 무지개 정당이 필요하다는 견해로 이어진다. 이 제안을 하나의 문장으로 다듬자면, “야권단일정당이 가능하기 위해선 민주당이 보다 왼쪽으로 와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을 왼쪽으로 오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민주당에 합류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제안엔 의미가 없지 않지만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하나는 민주당이 지지층의 의사결정으로부터 이념/정책/정치행위를 구성하는 정당이 아니라 여의도에 입성하기 위한 ‘선거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향 집행하는 구조의 정당이기 때문에, 합류한 정치세력들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민주당을 통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이 복지국가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처럼, 앞으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변별점이 복지문제에서만 형성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며, 사실상 지난 세월 동안 맹위를 떨쳐왔던 대북정책의 변별점이 유효할 거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이것이 말하는 바는, 한나라당은 북한과의 교역을 바라는 자본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대북강경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고, 민주당은 복지정책을 바라는 서민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런 한나라당의 대북정책에만 반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민정당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왼쪽에 다른 정당이 없다면 “서민정책을 추구해야만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는 명제는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우리가 “일단 이명박부터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다면, 민주당은 그저 한나라당보다 조금 더 많은 서민정책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 혹은 차악”이란 이 논리구조는 비판적 지지 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달라진 구석이 없다.  


복수의 정당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연대를 하자는 주장은 연립정부론 내지는 모종의 정책연합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제안의 핵심은 야권의 맏형인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맏형인 민주노동당의 굳건한 연대다. 이 연대는 지금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한EU FTA 문제에서 보듯이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중반에 민주당이 아직도 약할 때에는 이 연대의 필요성이 높아졌겠지만, 레임덕이 심화되고 정권 자체가 흔들흔들하게 되면 민주당은 더 이상 ‘잡야당’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민주당이 한나라당으로부터 챙겨오고 싶은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은 이념/정책지향적으로 민주당과 군소야당들의 사이가 아니라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가능한가?


이렇게 군소정당들, 특히 진보정당의 입장에서는, 민주당으로의 합류나 민주당과의 연대 모두 뚜렷한 대책을 가진 선택지가 아니다. 물론 야권단일화의 압력이 거센 시대에 민주당과의 연대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2012년 총선과 대선을 독자생존할 수 있다는 전망을 말하기도 어렵다. 전반적으로 군소정당들은 야권연대의 키를 잡고 있지 못하며,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처지이지만 이왕 협상을 한다면 민주당이 받을 수 없는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민주당도 받아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요구를 하면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그런 요구들은, 비례대표제 확대, 결선투표제 실시와 같은 다당제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개혁의 차원, 그리고 진보정당들의 유력 후보가 있는 몇몇 지역에 대한 민주당의 양보가 될 것이다. 대신 진보정당들은 2012년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가 한나라당 후보에 맞설 수 있도록 협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막상 현실정치의 국면에서 2012년의 민주당이 이런 협상이라도 수용할 상황에 놓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정권심판론과 야권단일화론이 양날의 칼처럼 다가오는 시대엔 민주당 대권후보의 ‘욕심’에 진보정당들의 생존권을 맞바꾸는 식의 협상 이외엔 답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에서 무언가를 선택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선택할 수 있다고 결정된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선택의 폭이 협소해진 책임이 특수한 누군가에게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것은 일종의 구조적인 문제이며, 그것도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전에 결정된 구조의 효과다. 나는 십년 후 야권연대의 역사에 대해 쓰는 일이 없기를 희망하지만 십년 전에도 가졌던 내 희망은 오늘날에 와서 부정당하고 있다. 언제나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대해 “한 번을 참지 못해서” 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한 번’은 진보정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땐 ‘언제나’일 뿐이다. 2012년 이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양당제가 다시 한 번 고착화될지 변동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현실세계의 정치적 선택에서, 진보진영의 독자세력화가 언제나 정답이다, 혹은 민주당으로의 합치 후 내부 개혁론이 정답이다, 와 같은 고정된 답안은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정치적 타당성을 가진 복수의 답안을 상상할 수 있고, 그것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지난한 논쟁의 역사는 그 자체로 그 점을 드러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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