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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제2의 조국 사태

2020년 9월 8일 by 이상한 모자

추다르크가 재산이 56억씩 되는 것도 아니고 사기꾼 5촌조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제2의 조국 사태인가. 그냥 아들 병역 문제지… 보좌관이 전화했다는 얘기 나온 날 누가 물어보기에 그랬다. 대한민국에서 군대 갔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뻔한 거 아닌가?

그날 라디오 방송 아이템도 이 문제였는데, 병가 연장이 어쩌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진행자가 말했다. 그런데 이 내용을 우리가 다 알아야 해요? 그래서… 뭐 시간도 없고 중간 건너뛰고 결론으로 바로 갔는데, 검찰이 수사를 빨리 해야되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후 정치권 논란이 어떨지 불을 보듯 뻔하다는 거라고 했다. 수사 결과 문제 있다고 하면 또 개혁에 저항하는 검찰이 어쩌고 할 것이고, 문제 없다고 하면 검찰은 못 믿으니 특검이나 이런 걸로 가야 된다고 할 거고… 얼마 전 무슨 글에도 썼지? 진상을 밝히라 하는 사람만 바보 된다…

또 며칠 전에는 대기실에 무슨 박사님이 있기에 하소연을 좀 했다. 요즘에는 진보가 뭐만 하면 다 해먹는다고 하고 무슨 말만 하면 양쪽에서 난리다. 무슨 통치의 합의구조가 있어야 될 거 아니냐… 의혹이 어느 정도 중한게 제기되면 일단 사퇴하고 명예회복을 노린다든지… 기사가 이 정도 나면 장관 임명은 포기한다든지… 대한민국 어디로 가는가.

어제는 또 한 명의 추씨, 추 전 의원님 엘지유플러스 문제에 대해 말했다. 그러면서 지도부 선거 얘기까지 갔는데… 옛날에는 진보가 뭐 한다고 그러면 시기상조이고 방법이 거칠 수는 있어도 방향은 맞다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다 없어졌다… 정파적 차원에서 선긋기도 좋지만 대의명분에서 우위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의 고민이 있어야 하고 추 전 의원 사례는 그런 근거가 될 때에야 쓴 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썩은 정치 종쳐라, 저녁 때 쏘주 한 잔 나눌 수 있는 구청장 후보 종철이횽이 출마했다. 이제 이 분들도 50세… 세월이 야속하다. 본인만의 재치와 임기응변으로 상황을 바꾸고 돌파할 수 있다는 그런 근자감은 이제 버렸으면 한다. 소속은 다르지만 뭐 하여간 잘 됐으면 하는데, 잘 안 될 것 같고, 된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 같고, 그럼에도… 이 분들 생각하면 마음이 늘 복잡하다. 그만하고 좀 자야겠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김종철, 조국, 추미애, 추혜선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에 대한 방송 내용

2020년 9월 5일 by 이상한 모자

한국 뉴스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니 일본으로 도피를… (농담이니 제발 흥분하지 마시오. 시사펭론가가 뉴스로부터 어떻게 도망을 가…)

아래는 금요일 오전 방송 내용이다.

오늘은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는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에 대해 알아보자. 14일 총재선거가 치러지고 16일 총재를 총리로 지명하는 임시국회가 열린다.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 레이와 아저씨로 알려져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다. 당내 다수 파벌이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 확정이라고 봐야한다.

스가 요시히데는 1948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업에 종사했고 모친은 교사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도쿄에 상경해 골판지 공장과 쓰키지 시장 등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당시 비교적 학비가 저렴했던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입학, 1973년 졸업 후에는 건설전기설비공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꿈을 품고 1975년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오코노기의 선거구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였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지만 11년간 비서로 일하면서 이 지역에서 정치경력을 쌓았다. 1987년 요코하마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재선까지 됐다. 비록 시의원이었지만 지역구 의원 비서로 일하면서 지역의 정관계 인맥을 탄탄하게 해놓았었기 때문에 ‘밤의 요코하마 시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러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 마찬가지로 가나가와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 진출 성공했다. 상대 후보 쪽에서 가나가와 사람이 아니라는 공격을 했지만 오히려 아키타현 출신이라는 사실을 공격적으로 밝혀 해당 지역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때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자민당이 부패스캔들 때문에 정권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에서 파벌 간 분열이 극심했던 시기다. 스가 요시히데는 파벌을 옮겨 다니면서 굉장히 복잡한 처세를 했다. 원래 소속 파벌은 오늘날의 다케시타파였는데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적대한 자신의 정치 스승(가지야마 세이로쿠)을 따라 1998년 파벌을 탈퇴했고 오늘날의 기시다파인 굉지회로 옮겼다. 2000년 모리 요시로 총리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됐을 때 굉지회는 찬성파(가토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불신임안 찬성 입장에 섰지만 정작 조직이 쪼개질 때는 반대파(호리우치파, 이후의 고가파)에 가담했다. 이러다가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지지하면서 1차 아베 집권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대박을 친다.

이렇게 보면 양지만 찾아다닌 것 같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임하고 난 후 2007년 총재 선거에선 모든 파벌이 아소 다로 견제를 위해 후쿠다 야스오 지지 방침을 밝혔는데, 이때 소속 파벌 방침에 따르지 않고 아소 다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승자는 후쿠다 야스오였다. 그런데 후쿠다 정권 이후 아소 다로가 총리직을 이으면서 스가 요시히데는 다시 요직에 발탁됐다. 자민당이 정권을 잃은 이후인 2009 총재 선거에서는 고노 다로를 지지해 또 패배자가 됐는데, 2012년 총재 선거에선 아베 신조의 복귀를 위해 아소 다로와의 동맹을 성립시키는 등의 활약으로 정권 창출의 공신이 됐다. 이때부터 아베 신조 정권의 운영에 없어선 안 되는 인물이 됐고 이 덕에 8년간 관방장관직을 유지했다. 철새라기보다는 수완이 좋고 수에 능하다고 봐야하고 주로 그런 역할을 해왔다(관방장관으로서 관료 인사를 장악한다거나 앞서 가지야마와 오코노기의 아들들을 중용하는 등 파벌을 만들지 않았으면서도 조직가의 수완을 뽐내고 있다).

애초 아베 신조의 후계자란 말이 나왔던 사람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 사임 직후에 면담을 하고 지지를 요청했는데 사실상 거절당했다. 뒷통수를 맞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근거없는 기대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출마를 강행했다.

기시다 후미오는 1957년생이고 아베 신조와 마찬가지로 3세 정치인으로 볼 수 있다. 도쿄에서 나고 자라 1982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코스를 밟았다. 1987년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 입문했고 1993년 아버지의 출신지인 히로시마에서 출마해 중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했다.

우리에게는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아베 신조 1차 집권기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특임장관인 특명담당대신으로 입각했고 후쿠다 야스오 때도 같은 직책을 유지했는데, 이게 중요한 직책은 아니다. 그러다 2012년 소속 파벌인 굉지회의 회장을 맡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이후 2012년 말 외무상으로 입각, 2017년 1월까지 직을 유지했다. 외무상으로서는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와 군함도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록 등을 추진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외무상을 맡았는데, 이 기록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넘어 요시다 시게루에 이은 역대 2위라고 한다.

아베 신조가 기시다 후미오를 중용한 이유는 소속 파벌인 굉지회가 대외정책에 있어서 비둘기파로 알려져 있어 주변국들에 생색내기 좋은 인사라고 판단한 측면도 있을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당내 주요 파벌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입각을 시켜 자기 밑에 묶어두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베 신조가 2차 집권 때 자민당 간사장으로 중용한 것도 굉지회 출신의 다니가키 사다카즈란 사람이었다(앞서 글에서도 썼듯 엄밀히 말하면 다니가키는 가토파, 기시다는 고가파 출신이다). 이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기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지금의 니카이 도시히로로 바뀐 건데, 아무튼 아베 신조가 굉지회와 여러모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알 수 있다(주요 파벌에 대한 정치적 안배, 이른바 총주류화는 아베 신조 2차 집권기의 주요 전략이었다).

기시다 후미오에게 항상 따라붙는 평가는 업적이라고 할만한 게 없고 무난한 인사지만 자기 의견이 확실치 않다는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총재 선거에서도 굉지회 내부에선 출마를 강행하자는 주전론이 있었지만 기시다 후미오가 아베 신조 총리 3선을 지지해 이후 선양을 기대하자는 신중론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닭 쫓는 개가 된 것이니 여러모로 결단력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이시바 시게루는 아베 신조가 이 사람만은 안 된다 라는 인사이다. 1957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곧바로 돗토리현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버지가 돗토리현 지사 출신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1979년 게이오대 법학부 졸업하고 미쓰이 은행에 입사,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루트를 밟았다. 1981년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이때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정계진출을 권유했다. 다나카파라고 불린 파벌 조직 목요클럽 사무국에 취직하는 걸로 정계에 입문했고 1986년에 돗토리에서 당선됐다. 이때가 28세로 전국 최연소 의원 기록이었다.

이후 행보는 그야말로 풍운아라고 할만 하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1985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나카소네파로 소속을 옮겼다. 1988년엔 정책모임 유토피아정치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는데 이때 함께 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이다. 1994년에는 비자민 연립정권이었던 호소카와 정권이 추진한 정치개혁입법에 찬성해 자민당에서 징계를 당하고 탈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자와 이치로가 창당한 신진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1995년 안보정책에서의 이견(오자와 이치로의 구상은 유엔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이를 위해 유엔대기군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로 보면 해석개헌에 가깝다. 하지만 이시바 시게루는 평화헌법 9조에 직접 손을 대는 개헌이 지론이다)을 내세우며 다시 탈당, 1996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다가 1997년 자민당에 다시 복귀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으면서 주요 인물로 부상했는데 이때 방위청의 현안은 9.11 테러 발생에 따른 법안 제정과 육상 항공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등 민감한 현안들이었다. 이후에도 주로 농업 분야와 군사정책에서 역할을 맡아왔다.

아베 신조의 라이벌로 각인된 것은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되면서다. 이때 지방조직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후보 5명 중 1등을 기록했다. 그러나 앞서 탈당 등 이력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로서는 당내 기반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2차 투표에서 당내 파벌들이 복귀한 아베 신조를 지지하기로 합의하면서 이시바 시게루가 패배했다. 아후 자민당 간사장으로 기용됐고 2014년에는 지방창생상 등으로 입각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아베 신조 총리와 마찰을 일으켰다. 2016년에는 직을 내려놓고 포스트 아베를 준비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2018년 총재 선거에 결국 출마했지만 아베 신조에게 패배했다. 이때도 지방 조직들의 지지세가 유지됐기 떄문에 아베 신조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가 여론조사로는 1등을 지켜왔는데 아베 신조 총리와 정치적 마찰을 일으켜 왔기 때문에 대척점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총리는 자민당 내 파벌들이 나눠먹기식으로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이번에도 기회는 없을 것이다. 본인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과거부터 파벌을 없애자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고 복당 당시 지금의 다케시타파로 복당했다가 당직을 맡으면서 탈퇴했고 그 이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2016년 결국 본인의 파벌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인 셈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이시바 시게루, 일본 자민당

자기들 좋을대로

2020년 9월 4일 by 이상한 모자

조광조님이 재판에서 증언거부권을 행사했다. 오늘 그 얘기를 했는데, 이게 오히려 판사의 유죄심증 형성할 수 있고 여론이란 측면에서도 좋지 않다… 검찰이 질문한 내용은 다 내일 신문에 날 건데… 검찰에선 진술 거부하고 재판에서 진실을 밝히겠다더니 증언 거부하면 누가 그걸 받아들이겠냐… 그랬다. 중요한 건 이걸 다 알면서도 했다는 거다. 법정에선 법적리스크 최소화만 신경쓰고 여론은 SNS로 때우겠다 이거 아니겠나. 뒤집어 말하면 일부 혐의는 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다.

백서들은 체제의 모순까지 조국이 책임져야 되느냐 이러는데, 여러 차례 썼지만 죄가 되느냐 여부와 이런 일을 한 사람을 법무부 장관시키는 게 맞는거냐는 다른 문제이다. 조광조의 SNS 세계에선 아니겠지만, 재판은 여기에 죄까지 되는 거냐의 문제이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광조님은 주요 혐의에서 무죄가 예상된다고 하는데, 그래서 관계없다. 검찰 수사에 의도가 있고 거칠게 진행됐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겨레의 어떤 분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그럼 이재용 부회장 수사는 어떤가. 삼성 변호인단은 무엇보다 검찰이 이 부회장을 목표물로 삼은 동기를 적시하지 못한다. 변호인단뿐 아니라 그 누구도 검찰의 부당한 동기를 논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50여차례의 압수수색과 몇백차례의 임직원 소환조사를 과잉수사라고 주장하는 축도 있는데, 사건의 중대성과 복잡성에 비춰보면 최선을 다한 수사였을 뿐이다.

잭슨의 연설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은 그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다. 검찰개혁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기 분석이 나오고, 70여차례 압수수색으로 상징되는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아무리 봐도 기소된 혐의와 수사 규모·강도가 비례하지 않는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0671.html

이재용 수사는 맞고 조국 수사는 틀렸다… 근데 시중에 의혹이 제기되는 사안에 대해 수사에 착수를 하지 않으면 실체를 어떻게 파악하나? 그마저도 수사를 무력화할 수 있는 여러 수단을 이미 갖추고 있는 대상에 대해서? 권력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지 않고 기소를 하지 않는 게 문제이지, 수사를 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흑서들이 계속 언급하는 일본인의 수사지휘권 발동… 그것도 불구속 수사를 하라는 거였다. 그 대상자는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였고 둘 다 수상이 됐다.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원투펀치로 이미 거물들이었다.

개혁은 개혁이고 통치는 통치다. 이 정권도 엘리트 통치를 하시잖아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아니잖아. 그러면 통치에 무슨 컨센서스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수사 재판에 비협조, 그러면서 언론 통해서는 하고 싶은 말만… 이게 가리키는 모델은 전에도 지적했지만 분파별 이익공유가 통치를 대체한 남미형 정치다.

언론이 논조를 달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윤총장 말마따나 정론지면 체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한 얘기를 이리 저리 재단해서 구미에 맞게 써먹을 일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요즘 습관화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가령 아래의 글을 보라.

박원순 서울시장 사건은 한국에서도 이에 관한 논쟁의 장을 열고 있다. 사건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는 또다른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 아닌가. 86세대의 ‘내로남불’도 안 되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남용도 안 된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60127.html

(물론 나는 위와 같은 서술 방식 또는 견해에 반대하는 한겨레 기자 몇몇을 알고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조국,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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