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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진정한 극우?

2025년 6월 14일 by 이상한 모자

여러 글을 보는데, 결국 그런 얘기 아닌가 싶었다. 다들 관심 갖는 얘기. 그래서 한국 사회에 극우란 얼마나 되는 거고, 그들로부터 나의 삶은 얼마나 위협 당하고 있는 것이며, 향후에 이들을 어떻게 처리(배제든 분리든 설득이든 감화든…)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분석, 저런 통계, 이런 숫자, 저런 조사를 막 가져와서 이렇게 갖다 붙이고 저렇게 갖다 붙이는 일을 끝도 없이 반복하며 지 하고 싶은 얘기 계속하고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건데.

과연 그런 숫자로 ‘진정한 극우’의 정확한 퍼센티지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반대의 정치’라고 이름 붙인 개념을 계속 말해왔다. 그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정치 지향이  ‘진정한 ~’은 아니라는 개념이다. 따라서, ‘아직은 진정한 극우가 출현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개념은 나에게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는 원래 그런 거니까. ‘진정한 극우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결국 다수는 진보라든가, 중도라든가, 상식이라든가 뭐 이런 얘기를 증명하려는 것일텐데, 그 진보 중도 상식은 ‘진정한 진보’, ‘진정한 중도’, ‘진정한 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왜 극우에 대해서만 혹은 이대남의 보수성에 대해서만 그 자신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면서 안도를 얻으려 하는가?

그래서, 전국민 중에 ‘진정한 극우’가 몇 퍼센트 정도 되고, 그냥 보수는 몇 퍼센트고, 합리적 보수는 몇 퍼센트고, 범진보가 몇 퍼센트… 이따위 분류법은 중요치 않다는 거다. 그건 정치적 국면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 숫자들의 중요성은, 그러한 숫자들이 등장하는 국면에 현실 정치가 유권자를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조직하였는지를 동시에 분석할 때에야 유효한 데이터가 된다. 여기서 숫자들 즉 전자는 후자를 설명하기 위한 요소일 뿐이다. 전 국민 중 극우가 몇 퍼센트 되느냐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특정 국면에 특정 선택을 하도록 만드는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게 되었는지 그 동학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의 정치’를 얘기했던 나는 ‘개념의 사슬’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개는 관심이 없고 중요한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우는 몇 퍼센트고, 앞으로 뭘 해야 이들을 없앨 수 있느냐만 묻고 싶어 한다. 실상,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대단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치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관심이 없고, 누가 무슨 죄를 지었으며 그 죄를 책임지도록 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치 쇼핑하면서 상품을 둘러 보듯이 말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납득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답답해서 쓴 말이고 큰 의미 없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길.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젊은이들에 대한 몇 가지 얘기들

2025년 6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미국 교수님이 자기 블로그에 젊은 세대의 보수화에 대해 연달아 몇 개의 글을 올렸는데, 톤이 좀 세긴 하지만 기본 골격에 있어서는 그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였다.

https://sovidence.tistory.com/1298

https://sovidence.tistory.com/1299

https://sovidence.tistory.com/1300

https://sovidence.tistory.com/1301

그 글 중 하나의 표현을 좀 빌자면, 젊은이의 보수화는 1) 경제론적 설명, 2) 문화론적 설명, 두 가지 모두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1)은 경쟁을 통한 상층으로의 진입 기회 확보와 동시에 중산층으로서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양극화의 피해자, 즉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지위 하락으로 겪는 불안이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는 서구의 상황과는 양상이 다른 것이다.

2)는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인 심적 상태가 하필이면 여성주의에 대한 이런 저런 반감으로 특히나 심각하게 표출되는 이유가 뭐냐고 하는 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다. 나는 개중 하나를 능력주의와 경쟁지상주의랄까, 효율성과 손익관계의 세계관이랄까, 하여간 그런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도구로서의 게임과 그 게임을 소재로 한 담론을 공유하는 매체로서의 인터넷, 그리고 그것을 특정한 코드로 조직하는 정치의 관계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이런 설명에 대체적으로들 공감하고 동의하리라 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은, 그런 얘기로 나아가기 전에 아예 젊은이들의 보수화라는 의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담론적 흐름이 선거 이전에 나름대로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로 나타났다고 보이는데, 1) ‘이대남이 보수화 되었다’고 섣불리 평가하는 바람에 실제로 이대남이 보수화 되는 흐름이 더욱 가속화 된 것 아니냐는 반성적(?) 평가의 영향, 2) 이번 선거를 또다시 젠더 구도로 치러서는 20대 남성의 표를 충분히 끌어올 수 없다고 보는 정파적-공학적 판단의 영향이 그것이다.

1)에 대해서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김정희원 교수)을 통하여 반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더 말을 얹지 않겠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 및 극우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만의 특수성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 현상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담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년 세대를 비난하거나 구제불능의 집단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청년 세대는 극우화하지 않았다”라는 방어 논리에 집중해서도 안 된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며, 신남성연대를 비롯한 일부 청년은 이미 폭력에 가담하는 극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감정적이고 반사적인 담론 싸움을 끝내고 대안 모색에 나서야 한다.

사실 젠더를 불문하고 청년 세대는 보수화하고 있다. 이때 ‘보수화 경향’이 관찰된다고 해서 특정 인구집단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단일하고 고정적인 집단”이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20대 여성 및 남성 내부에는 다양성과 유동성이 존재하며, 이런 설명은 ‘이대남’뿐만 아니라 다른 인구집단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청년 남성 보수화 담론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들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은 너무나 두려운 역효과를 가져온다. “청년 남성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므로 보수화 진단을 경계하자”라는 주장은 우리가 실질적인 정책적 대응에 임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극우 세력의 성장에 대응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누차 강조해왔지만 나는 “남성 일반이 극우”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극우화 ‘경향’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을 보여주는 지표는 모두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8373&CMPT_CD=P0010

2)는 이번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된 바인데,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이대남’을 비난하기 보다는 ‘4050이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평가에 몰두하는 일부 조류의 경우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은 실제의 구도를 다분히 오해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새 정부는 다른 한편에서 위 구도로 포착되지 않는 ‘이준석의 득표 지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나 극우화라고 단정하고 깎아내리기엔 내란·반내란 정치가 모두 용인해오던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 등이 반영된 결과다. 정치가 외면하던 우리 사회 증상들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불평등이 정당화됐고 공정이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됐다. 새 정부의 진짜 과제는 41.15%의 득표율보다 8.34%의 득표율 뒤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새 정부의 두 번째 성패 포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갈지에 있을 것이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082101025

‘보수화’나 ‘극우화’를 말하면 일반화 하지 말라던가, 다른 이유가 있다던가 하면서 난리 난리를 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규정을 하는 이유는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지 특정인, 특정 세대를 배제하거나 내쫓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물론 배제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잘못된 행태이고, 또다른 증상이다. 그러나 이 메모에서 그런 얘기를 해봐야 네 잘못? 내 잘못? 그럼 누가 먼저 잘못? 네 책임? 내 책임? 이딴 얘기나 하게 되니까, 그런 얘긴 여기서는 치우자.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을 거부하지 않고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며,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우리는 ‘보수화’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왜 ‘보수화’가 뭔지에 대한 이런 혼동이 존재하는가? 같은 날, 같은 매체에 실린 아래 글은 같은 맥락에서 이 문제에 대한 1)의 문제와 혼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라는 주장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정하려는 입장과 이런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20대 남성의 최근 투표 성향과 이번 선거에서 74%가 보수 후보를 지지한 것을 근거로 이런 ‘경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보수화라는 프레임으로 가둘 것이 아니라 청년 남성들의 정치적 행위가 국면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유동성에 주목하자는 입장이다.

(…)

사회학자 최태섭은 청년 남성의 극우화를 ‘보수 정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차별시정에 대한 반발(‘공정’ 담론), 문화산업에서 PC(정치적 올바름)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에 대한 거부, 극단주의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주도 또는 동조’로 정의하고, 이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기보다는 ‘국면적 선택’에 가깝다고 보았다(‘내란 이후의 젠더 정치와 남성(성) 문제’ 발표문). 이런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청년 남성들은 보수화 경향을 보이지만 앞으로 면밀한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082103025

실제로 최태섭 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연구자 입장에서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앞서 잠시 언급한 ‘문화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의기투합 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도 말씀드린 바인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서술은 옳을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미국 교수의 글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진’ 계층 혹은 세대는 존재할 수 있는가? 86세대의 진보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면 ‘위선’을 말할 수 있을리도 없을 것이다. 또한,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는 건 어떻게 측정하고 결정하는가? 결국 유권자 성향이라는 것은 행동주의(behaviorism)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그 유력한 수단은 문재인 정권 때부터 다양한 기회를 통하여 제기되어 온 이런 저런 조사와 연구, 투표 행태를 종합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다음 글의 다음 대목을 논할 수 있는데…

김문수 후보 지지층에 대한 분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이준석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유를 이준석식 정치의 극악한 면모 몇 가지로 환원한다. 노골적 여성 혐오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가운데 여성들마저 이준석 후보에게 상당한 지지를 보낸 이유나, ‘반페미니즘’ 말고도 젊은 남성들이 이준석 후보를 지지한 또 다른 이유들은 시야에서 쉽게 삭제한다. 8%의 시민들은 졸지에 혐오로 무장한 ‘이준석주의자들’이 되고, ‘이준석주의자들’을 낳은 한국 사회는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치는 시민사회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자생적 ‘이준석주의자들’이 아래로부터 성장한 덕분에 이준석식 정치가 상승세를 탄 게 아니다. 무정형의 시민사회에 꼴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기능이다. 양대 정당 독점 구도에서 유일한 원내 제3세력으로 남은 혐오주의자 이준석이 존재하고 행동했기에, 다른 형태로 결집할 수도 있었을 시민사회 내 흐름들이 하필이면 혐오주의자 이준석 지지층으로 결집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생적 ‘이준석주의’의 요소들(가령 일베나 펨코식 부족주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극우 포퓰리스트 이준석 말고는 양대 정당 바깥에서 다른 대안이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현 정치 체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0910200008507

가령 이준석에게 투표한 유권자 중에는 언제나 나타나는 제3지대 선호층 역시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그 선택이 젊은 세대의 보수화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의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양당이 싫은 건 알겠는데 하필 왜 권영국이 아닌 이준석을 찍었나’란 추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극우 정치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근본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 있다. 반극우 정치라고 부르던 뭐라고 하던 이 국면에서 진보정치의 제 역할 찾기는 반드시 필요하고, 심지어 그것은 역사적 사명이다. 적어도 두 가지 지점에서 진보정치는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노동이고 둘째는 소수자 관련 쟁점이다.

이 정권이 선을 크게 긋는 개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다 떠나서 윤석열이 싼 똥 치우는 것만으로도…) 노동 문제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태도가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과거 지자체장 할 때의 일부 태도 등에서 그런 사례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노동 문제 전반이 아니라 ‘특정 부분’이다.

소수자 관련 쟁점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이 정권은 중도적 태도, 가령 ‘되도록이면 젠더 문제는 쟁점화 하지 말자’는 식의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령 성평등부는 남성의 불만도 담당하는 부서라는,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힌트가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무위원들과 질의응답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차관에겐 “남성들이 불만을 가진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느냐”는 취지로 물었다고 한다. 신 차관이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여성가족부가 아닌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해서 폭넓게 그런 것들을 좀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2716

진보정당으로서는 이런 대목에서 각 쟁점에 맞는 방식으로 자생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자기 어젠다 없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거리,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태도, 다른 정치세력과의 관계로만 평가 받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 얘기 길지만, 시간도 없고… 여기까지만 한다.

덤) 이 글을 보고 뭔가 덧붙일 말이 생각났다면, 다시 앞으로 가서 링크된 글까지 읽으신 후에 덧붙이는 것이 좋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보수화, 이대남, 이준석

우리 여성-신체-이미지-식민지 절대 지켜

2025년 4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자러 가기 전에 아까 본 거.

지난해 5월 한 만화 동호인 전시회에서 아동 성착취물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전시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동 성착취물을 제작· 유통할 경우 적용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이 아닌 형법상 음화반포죄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은 게임물과 영상물에 한정해 처벌하기에 적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회는 처벌 대상을 만화나 그림 등 인쇄 매체로 확대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개정안에 3만 건에 달하는 의견이 달렸는데 대부분은 법안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에나 있을 법이다”, “피해자가 없는데 어떻게 처벌하냐”, “표현의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등의 반발이었습니다.

(…)

취재팀이 입수한 국회 입법조사처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연방법은 성적 행위가 담긴 시각 묘사물이라면 만화라도 아동 음란물로 보고 처벌합니다. 독일과 일본도 영상물이든 그림이든 관계없이 아동 음란물은 무조건 처벌 대상입니다. 즉, 권위주의 국가들이나 만화로 표현된 아동 성착취물을 처벌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069235

SBS가 보도한 내용. 국회가 괴이한 내용의 만화도 아청법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하도록 하는 법 개정에 나서자 남-오타쿠들이 몰려가 3만건에 달하는 의견을 달면서 ‘중국’, ‘표현의 자유’ 운운 하였다는 내용이다. ‘중국’과 ‘표현의 자유’가 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게 지금 다듬고 있는 저의 긴 원고에서 다루는 세계관이기도 한데, 또 좋은 사례가 나왔다. 길게 추가하기는 뭐하고, 각주로 넣어야 겠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다룬 개념의 사슬과 반대의 정치에 대해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것. 상대를 ‘중국-북한-전체주의(권위주의/공산주의)-문재인-더불어민주당-진보-페미니즘-차별금지법’이라는 개념의 사슬에 집어 넣은 후, 이 사슬 전체를 반대하는 동맹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반대의 정치’ 문법을 가동한 보수정치에 대해… 이게 여성-신체-이미지의 식민화(여성-신체의 직접적 식민화는 이미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여성-신체-이미지의 식민화를 지키려는 것)를 사수하려는 남-오타쿠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인식임. 여기서는 다른 게 보수화가 아니고, 이런 게 보수화인 것.

그런데 SBS가 이런 보도를 하자 또 이들이 다들 SBS 보도에다가 무력시위를 한 모양이다. 다른 나라는 이렇게 처벌하지 않는다는 둥… 표현의 자유, 중국 운운의 연장선이다. 이에 대한 SBS의 애프터서비스가 있는데, 이 역시 볼만하다. 각 나라별로 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밝히면서 남-오타쿠들의 주장을 논파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이미 아청법 도입을 통해 아동 보호라는 가치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법 취지에 맞춰 우리 법원은 가상의 성착취물이라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일본 음란만화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유포했다가 아청법을 적용한 판례도 쌓이고 있습니다. 다만, 처벌 대상을 게임물 또는 통신 매체를 통한 화상‧영상 등의 형태로 한정하고 있어 입법 미비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국회의 법 개정안은 이런 기형적인 입법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한 만화인 동호회에서 ‘어린이 런치세트’라는 제목으로 아동 성착취물을 연상케하는 창작물을 전시하고 판매했음에도 현행 법체계에서는 아청법을 적용할 수 없어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것입니다. 기형적인 입법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지, 새로운 영역으로 처벌과 규제의 칼날을 확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에 반대한다면 이제는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어린이 런치세트’와 같은 아동 성착취물이 과연 서브 컬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로서 온전히 보호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과연 우리 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073081

추가. ‘이대남-오타쿠’라고 쓰려다가, 요즘 이대남을 혐오하지 마라 예단하지 마라 잉잉 이러는 분들이 많아서 그냥 남-오타쿠라고만 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성착취, 아청법,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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