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교수님이 자기 블로그에 젊은 세대의 보수화에 대해 연달아 몇 개의 글을 올렸는데, 톤이 좀 세긴 하지만 기본 골격에 있어서는 그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였다.
https://sovidence.tistory.com/1298
https://sovidence.tistory.com/1299
https://sovidence.tistory.com/1300
https://sovidence.tistory.com/1301
그 글 중 하나의 표현을 좀 빌자면, 젊은이의 보수화는 1) 경제론적 설명, 2) 문화론적 설명, 두 가지 모두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1)은 경쟁을 통한 상층으로의 진입 기회 확보와 동시에 중산층으로서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양극화의 피해자, 즉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지위 하락으로 겪는 불안이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는 서구의 상황과는 양상이 다른 것이다.
2)는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인 심적 상태가 하필이면 여성주의에 대한 이런 저런 반감으로 특히나 심각하게 표출되는 이유가 뭐냐고 하는 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다. 나는 개중 하나를 능력주의와 경쟁지상주의랄까, 효율성과 손익관계의 세계관이랄까, 하여간 그런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도구로서의 게임과 그 게임을 소재로 한 담론을 공유하는 매체로서의 인터넷, 그리고 그것을 특정한 코드로 조직하는 정치의 관계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이런 설명에 대체적으로들 공감하고 동의하리라 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은, 그런 얘기로 나아가기 전에 아예 젊은이들의 보수화라는 의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담론적 흐름이 선거 이전에 나름대로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로 나타났다고 보이는데, 1) ‘이대남이 보수화 되었다’고 섣불리 평가하는 바람에 실제로 이대남이 보수화 되는 흐름이 더욱 가속화 된 것 아니냐는 반성적(?) 평가의 영향, 2) 이번 선거를 또다시 젠더 구도로 치러서는 20대 남성의 표를 충분히 끌어올 수 없다고 보는 정파적-공학적 판단의 영향이 그것이다.
1)에 대해서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김정희원 교수)을 통하여 반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더 말을 얹지 않겠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 및 극우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만의 특수성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 현상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담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년 세대를 비난하거나 구제불능의 집단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청년 세대는 극우화하지 않았다”라는 방어 논리에 집중해서도 안 된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며, 신남성연대를 비롯한 일부 청년은 이미 폭력에 가담하는 극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감정적이고 반사적인 담론 싸움을 끝내고 대안 모색에 나서야 한다.
사실 젠더를 불문하고 청년 세대는 보수화하고 있다. 이때 ‘보수화 경향’이 관찰된다고 해서 특정 인구집단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단일하고 고정적인 집단”이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20대 여성 및 남성 내부에는 다양성과 유동성이 존재하며, 이런 설명은 ‘이대남’뿐만 아니라 다른 인구집단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청년 남성 보수화 담론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들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은 너무나 두려운 역효과를 가져온다. “청년 남성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므로 보수화 진단을 경계하자”라는 주장은 우리가 실질적인 정책적 대응에 임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극우 세력의 성장에 대응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누차 강조해왔지만 나는 “남성 일반이 극우”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극우화 ‘경향’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을 보여주는 지표는 모두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8373&CMPT_CD=P0010
2)는 이번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된 바인데,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이대남’을 비난하기 보다는 ‘4050이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평가에 몰두하는 일부 조류의 경우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은 실제의 구도를 다분히 오해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새 정부는 다른 한편에서 위 구도로 포착되지 않는 ‘이준석의 득표 지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나 극우화라고 단정하고 깎아내리기엔 내란·반내란 정치가 모두 용인해오던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 등이 반영된 결과다. 정치가 외면하던 우리 사회 증상들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불평등이 정당화됐고 공정이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됐다. 새 정부의 진짜 과제는 41.15%의 득표율보다 8.34%의 득표율 뒤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새 정부의 두 번째 성패 포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갈지에 있을 것이다.
‘보수화’나 ‘극우화’를 말하면 일반화 하지 말라던가, 다른 이유가 있다던가 하면서 난리 난리를 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규정을 하는 이유는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지 특정인, 특정 세대를 배제하거나 내쫓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물론 배제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잘못된 행태이고, 또다른 증상이다. 그러나 이 메모에서 그런 얘기를 해봐야 네 잘못? 내 잘못? 그럼 누가 먼저 잘못? 네 책임? 내 책임? 이딴 얘기나 하게 되니까, 그런 얘긴 여기서는 치우자.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을 거부하지 않고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며,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우리는 ‘보수화’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왜 ‘보수화’가 뭔지에 대한 이런 혼동이 존재하는가? 같은 날, 같은 매체에 실린 아래 글은 같은 맥락에서 이 문제에 대한 1)의 문제와 혼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라는 주장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정하려는 입장과 이런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20대 남성의 최근 투표 성향과 이번 선거에서 74%가 보수 후보를 지지한 것을 근거로 이런 ‘경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보수화라는 프레임으로 가둘 것이 아니라 청년 남성들의 정치적 행위가 국면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유동성에 주목하자는 입장이다.
(…)
사회학자 최태섭은 청년 남성의 극우화를 ‘보수 정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차별시정에 대한 반발(‘공정’ 담론), 문화산업에서 PC(정치적 올바름)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에 대한 거부, 극단주의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주도 또는 동조’로 정의하고, 이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기보다는 ‘국면적 선택’에 가깝다고 보았다(‘내란 이후의 젠더 정치와 남성(성) 문제’ 발표문). 이런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청년 남성들은 보수화 경향을 보이지만 앞으로 면밀한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최태섭 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연구자 입장에서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앞서 잠시 언급한 ‘문화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의기투합 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도 말씀드린 바인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서술은 옳을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미국 교수의 글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진’ 계층 혹은 세대는 존재할 수 있는가? 86세대의 진보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면 ‘위선’을 말할 수 있을리도 없을 것이다. 또한,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는 건 어떻게 측정하고 결정하는가? 결국 유권자 성향이라는 것은 행동주의(behaviorism)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그 유력한 수단은 문재인 정권 때부터 다양한 기회를 통하여 제기되어 온 이런 저런 조사와 연구, 투표 행태를 종합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다음 글의 다음 대목을 논할 수 있는데…
김문수 후보 지지층에 대한 분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이준석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유를 이준석식 정치의 극악한 면모 몇 가지로 환원한다. 노골적 여성 혐오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가운데 여성들마저 이준석 후보에게 상당한 지지를 보낸 이유나, ‘반페미니즘’ 말고도 젊은 남성들이 이준석 후보를 지지한 또 다른 이유들은 시야에서 쉽게 삭제한다. 8%의 시민들은 졸지에 혐오로 무장한 ‘이준석주의자들’이 되고, ‘이준석주의자들’을 낳은 한국 사회는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치는 시민사회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자생적 ‘이준석주의자들’이 아래로부터 성장한 덕분에 이준석식 정치가 상승세를 탄 게 아니다. 무정형의 시민사회에 꼴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기능이다. 양대 정당 독점 구도에서 유일한 원내 제3세력으로 남은 혐오주의자 이준석이 존재하고 행동했기에, 다른 형태로 결집할 수도 있었을 시민사회 내 흐름들이 하필이면 혐오주의자 이준석 지지층으로 결집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생적 ‘이준석주의’의 요소들(가령 일베나 펨코식 부족주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극우 포퓰리스트 이준석 말고는 양대 정당 바깥에서 다른 대안이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현 정치 체제다.
가령 이준석에게 투표한 유권자 중에는 언제나 나타나는 제3지대 선호층 역시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그 선택이 젊은 세대의 보수화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의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양당이 싫은 건 알겠는데 하필 왜 권영국이 아닌 이준석을 찍었나’란 추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극우 정치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근본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 있다. 반극우 정치라고 부르던 뭐라고 하던 이 국면에서 진보정치의 제 역할 찾기는 반드시 필요하고, 심지어 그것은 역사적 사명이다. 적어도 두 가지 지점에서 진보정치는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노동이고 둘째는 소수자 관련 쟁점이다.
이 정권이 선을 크게 긋는 개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다 떠나서 윤석열이 싼 똥 치우는 것만으로도…) 노동 문제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태도가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과거 지자체장 할 때의 일부 태도 등에서 그런 사례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노동 문제 전반이 아니라 ‘특정 부분’이다.
소수자 관련 쟁점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이 정권은 중도적 태도, 가령 ‘되도록이면 젠더 문제는 쟁점화 하지 말자’는 식의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령 성평등부는 남성의 불만도 담당하는 부서라는,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힌트가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무위원들과 질의응답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차관에겐 “남성들이 불만을 가진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느냐”는 취지로 물었다고 한다. 신 차관이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여성가족부가 아닌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해서 폭넓게 그런 것들을 좀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했다.
진보정당으로서는 이런 대목에서 각 쟁점에 맞는 방식으로 자생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자기 어젠다 없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거리,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태도, 다른 정치세력과의 관계로만 평가 받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 얘기 길지만, 시간도 없고… 여기까지만 한다.
덤) 이 글을 보고 뭔가 덧붙일 말이 생각났다면, 다시 앞으로 가서 링크된 글까지 읽으신 후에 덧붙이는 것이 좋다.
Comments are closed, but trackbacks and pingbacks are op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