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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보수화

극우와 보수 구분하기

2025년 7월 9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주욱 보니, 청년세대 논의에 대한 반응으로 몇 가지 전형적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보수후보 지지만으로 젊은 남성 보수화 진단은 억지 운운 하는 것이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최소한 찾아볼 의지도 없다는 점에서 논할 가치가 없다.

둘째는 젊은 남성이 아니라 세상이 문제 아닌가요 라는 반응이다. 이 주장에는 진실이 담겨있지만 논점이탈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온정주의적이다. 젊은 남성 얘기를 굳이 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자본가 얘기를 하는 것은 자본가 개인을 미워하기 위해서인가, 자본주의를 얘기하기 위해서인가(이건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혁명의 커튼 뒤에는 언제나 혁명에 돈을 대준 고마운 자본가들이 있었다)?

셋째는 극우화와 보수화는 다른 것인데, 보수화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극우화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거다. 이건 보수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경우에 대해선 보수화와 극우화를 면밀히 가르는 일이 부질없는 일일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보수화 된 젊은 남성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전망하는데에 있어서는 보수화와 극우화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즉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보수화와 극우화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둘을 추동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 한국 정치에서 같은 정치-조직화 내지는 논리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면 ‘중국-북한-전체주의(권위주의)-더불어민주당-문재인-진보-페미니즘-차별금지법’이라는 개념 혹은 가치의 연쇄적 사슬을 전부 반대해야 한다는, 보수정치의 반대-정치의 조직화 논리다. 보수냐 극우냐를 여기서 굳이 나눈다면, 이걸 반대하기 위해 어디까지 실천할 수 있느냐의 차이에 불과한 거다(물론 그건 중요한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근본적 사상과 이념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다).

가령 페미니즘 반대를 위해서라면 법치를 무시하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답변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것. 과거에도 인용했던 아래의 기사.

민주주의 규범과 관련한 여러 문항에서 2030 남성은 전체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또래 여성들과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물론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은 보수, 20대 여성은 진보 성향이 높게 나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와 극우는 다르다. ‘2030 남성 극우화’ 담론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집단에 존재하는 소수의 ‘계엄 옹호·탄핵 반대’ 세력이 과대 대표된 측면이 없지 않다.

다만 2030 남성들의 버튼을 누르는 요인이 있다. 페미니즘이다. ‘지나친 페미니즘의 영향을 막기 위해서라면 법규칙을 어기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문장을 제시했다. 전체에서 14%가 동의한 반면, 20대 남자의 32%, 30대 남자의 25%가 동의했다. 이는 동세대 여자들과 16%포인트에서 27%포인트 차이 날 뿐 아니라 여타 세대 남자들에 비해서도 튀는 수치다. 즉 2030 남성 대부분은 민주주의적 규범을 대체로 존중하지만, 적어도 이 집단의 네 명 중 한 명은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불신을 이유로 무력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045

나는 과거에도 이 기사 내용의 이 대목이 의아하다고 했고, 이 그래프에서 드러난 답이 의미심장 하다고 했다. 보수정치 특히 이준석류가 결합한 형태의 보수정치는 얼마든지 ‘페미니즘 반대’를 ‘민주당을 포함한 진보 일반의 반대’로 확장시킬 수 있다(앞서 개념 혹은 가치의 연쇄적 사슬을 전부 반대하는 정치 문법에 따라서). 그때 ‘법 규칙을 어기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답변의 이 수치가 유지될 것인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다른 세대 다른 성별의 그것보다는 확실히 높을 것이라는 점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이게 뭐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신념화 된 극우는 아니다… 페미니즘을 잠깐 반대할 뿐이다… 등등 얘기를 하지만, 그게 21세기의 극우 포퓰리즘이라고 지금까지 합의해 온 것이 아닌가? 가령 유럽의 진화하는 극우 포퓰리즘은 어떤가? 마린 르 펜이 난민을 거부하자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신장을 얘기한다는 점을 들어 ‘신념적 극우는 아니고 스마트한 스윙보터’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잘 못 봤다. 어느 극우 정당이 여성-성소수자를 대표로 뽑았다고 해서 같은 평가를 하는 것을 들어본 일 없다. 아마 그들이 ‘우리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 정치와 좌익과 권위주의와 위선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전형적 주장을 할 것인데도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건 그들은 여전히 ‘극우 포퓰리즘’으로 분류되고 평가된다.

시사인에 실린 아래의 글은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물론 아마도 위의 얘기를 하면 그래도 한국의 이대남은 유럽 극우와 다른 이념 지향의 지도를 그린다고 하겠지만 그건 그 사회의 정치적 조직화와 연관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럽의 난민이 여기서는 페미니즘이나 중국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07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글 중간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시사인은 위 글과 견해를 달리 하는 글도 이전에 실은 바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2030 남성, 극우, 보수화, 이대남

젊은이들에 대한 몇 가지 얘기들

2025년 6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미국 교수님이 자기 블로그에 젊은 세대의 보수화에 대해 연달아 몇 개의 글을 올렸는데, 톤이 좀 세긴 하지만 기본 골격에 있어서는 그 전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차였다.

https://sovidence.tistory.com/1298

https://sovidence.tistory.com/1299

https://sovidence.tistory.com/1300

https://sovidence.tistory.com/1301

그 글 중 하나의 표현을 좀 빌자면, 젊은이의 보수화는 1) 경제론적 설명, 2) 문화론적 설명, 두 가지 모두를 적용해야 한다고 본다.

1)은 경쟁을 통한 상층으로의 진입 기회 확보와 동시에 중산층으로서의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이것은 양극화의 피해자, 즉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지위 하락으로 겪는 불안이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는 서구의 상황과는 양상이 다른 것이다.

2)는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인 심적 상태가 하필이면 여성주의에 대한 이런 저런 반감으로 특히나 심각하게 표출되는 이유가 뭐냐고 하는 것에 대한 여러 설명이다. 나는 개중 하나를 능력주의와 경쟁지상주의랄까, 효율성과 손익관계의 세계관이랄까, 하여간 그런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도구로서의 게임과 그 게임을 소재로 한 담론을 공유하는 매체로서의 인터넷, 그리고 그것을 특정한 코드로 조직하는 정치의 관계를 말하려고 한 것이다.

나는 이런 설명에 대체적으로들 공감하고 동의하리라 봤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당혹스러운 것은, 그런 얘기로 나아가기 전에 아예 젊은이들의 보수화라는 의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는 담론적 흐름이 선거 이전에 나름대로 강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의 이유로 나타났다고 보이는데, 1) ‘이대남이 보수화 되었다’고 섣불리 평가하는 바람에 실제로 이대남이 보수화 되는 흐름이 더욱 가속화 된 것 아니냐는 반성적(?) 평가의 영향, 2) 이번 선거를 또다시 젠더 구도로 치러서는 20대 남성의 표를 충분히 끌어올 수 없다고 보는 정파적-공학적 판단의 영향이 그것이다.

1)에 대해서는 최근 다음과 같은 글(김정희원 교수)을 통하여 반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더 말을 얹지 않겠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 및 극우화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만의 특수성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 현상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담론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청년 세대를 비난하거나 구제불능의 집단으로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되고, 동시에 “청년 세대는 극우화하지 않았다”라는 방어 논리에 집중해서도 안 된다. 청년 세대의 보수화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며, 신남성연대를 비롯한 일부 청년은 이미 폭력에 가담하는 극우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제는 감정적이고 반사적인 담론 싸움을 끝내고 대안 모색에 나서야 한다.

사실 젠더를 불문하고 청년 세대는 보수화하고 있다. 이때 ‘보수화 경향’이 관찰된다고 해서 특정 인구집단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단일하고 고정적인 집단”이라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20대 여성 및 남성 내부에는 다양성과 유동성이 존재하며, 이런 설명은 ‘이대남’뿐만 아니라 다른 인구집단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청년 남성 보수화 담론에 유보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들의 다양성과 유동성을 우선시하는 입장은 너무나 두려운 역효과를 가져온다. “청년 남성은 다양하고 유동적이므로 보수화 진단을 경계하자”라는 주장은 우리가 실질적인 정책적 대응에 임하지 못하도록 손발을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극우 세력의 성장에 대응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누차 강조해왔지만 나는 “남성 일반이 극우”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극우화 ‘경향’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경향을 보여주는 지표는 모두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138373&CMPT_CD=P0010

2)는 이번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확인된 바인데, 선거 결과에 대해서도 ‘이대남’을 비난하기 보다는 ‘4050이 나라를 구했다’는 식의 평가에 몰두하는 일부 조류의 경우가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글은 실제의 구도를 다분히 오해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새 정부는 다른 한편에서 위 구도로 포착되지 않는 ‘이준석의 득표 지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나 극우화라고 단정하고 깎아내리기엔 내란·반내란 정치가 모두 용인해오던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 등이 반영된 결과다. 정치가 외면하던 우리 사회 증상들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불평등이 정당화됐고 공정이 차별과 혐오의 근거가 됐다. 새 정부의 진짜 과제는 41.15%의 득표율보다 8.34%의 득표율 뒤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새 정부의 두 번째 성패 포인트는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갈지에 있을 것이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082101025

‘보수화’나 ‘극우화’를 말하면 일반화 하지 말라던가, 다른 이유가 있다던가 하면서 난리 난리를 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규정을 하는 이유는 원인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지 특정인, 특정 세대를 배제하거나 내쫓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물론 배제에 가까운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잘못된 행태이고, 또다른 증상이다. 그러나 이 메모에서 그런 얘기를 해봐야 네 잘못? 내 잘못? 그럼 누가 먼저 잘못? 네 책임? 내 책임? 이딴 얘기나 하게 되니까, 그런 얘긴 여기서는 치우자.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승자독식의 원리, 능력주의, 힘의 지배에 대한 숭배, 각자도생’을 거부하지 않고 삶의 원리로서 받아들이며, 그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을 우리는 ‘보수화’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왜 ‘보수화’가 뭔지에 대한 이런 혼동이 존재하는가? 같은 날, 같은 매체에 실린 아래 글은 같은 맥락에서 이 문제에 대한 1)의 문제와 혼동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보인다.

‘청년 남성의 보수화’라는 주장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정하려는 입장과 이런 프레임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20대 남성의 최근 투표 성향과 이번 선거에서 74%가 보수 후보를 지지한 것을 근거로 이런 ‘경향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보수화라는 프레임으로 가둘 것이 아니라 청년 남성들의 정치적 행위가 국면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 그 유동성에 주목하자는 입장이다.

(…)

사회학자 최태섭은 청년 남성의 극우화를 ‘보수 정당에 대한 높은 지지율, 안티 페미니즘, 소수자 차별시정에 대한 반발(‘공정’ 담론), 문화산업에서 PC(정치적 올바름)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에 대한 거부, 극단주의적 사상과 행동에 대한 주도 또는 동조’로 정의하고, 이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기보다는 ‘국면적 선택’에 가깝다고 보았다(‘내란 이후의 젠더 정치와 남성(성) 문제’ 발표문). 이런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청년 남성들은 보수화 경향을 보이지만 앞으로 면밀한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6082103025

실제로 최태섭 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어 보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연구자 입장에서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되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앞서 잠시 언급한 ‘문화론적 설명’에 대해서는 의기투합 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많았다. 아무튼 그 자리에서도 말씀드린 바인데,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서술은 옳을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미국 교수의 글에도 나오는 얘기지만, 그렇다면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진’ 계층 혹은 세대는 존재할 수 있는가? 86세대의 진보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면 ‘위선’을 말할 수 있을리도 없을 것이다. 또한, ‘경향성이 사상으로 굳어졌다’는 건 어떻게 측정하고 결정하는가? 결국 유권자 성향이라는 것은 행동주의(behaviorism)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그 유력한 수단은 문재인 정권 때부터 다양한 기회를 통하여 제기되어 온 이런 저런 조사와 연구, 투표 행태를 종합해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기준으로 다음 글의 다음 대목을 논할 수 있는데…

김문수 후보 지지층에 대한 분석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들은 이준석 후보를 선택한 유권자들의 다양한 이유를 이준석식 정치의 극악한 면모 몇 가지로 환원한다. 노골적 여성 혐오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 가운데 여성들마저 이준석 후보에게 상당한 지지를 보낸 이유나, ‘반페미니즘’ 말고도 젊은 남성들이 이준석 후보를 지지한 또 다른 이유들은 시야에서 쉽게 삭제한다. 8%의 시민들은 졸지에 혐오로 무장한 ‘이준석주의자들’이 되고, ‘이준석주의자들’을 낳은 한국 사회는 구제불능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정치는 시민사회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다. 자생적 ‘이준석주의자들’이 아래로부터 성장한 덕분에 이준석식 정치가 상승세를 탄 게 아니다. 무정형의 시민사회에 꼴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정치의 기능이다. 양대 정당 독점 구도에서 유일한 원내 제3세력으로 남은 혐오주의자 이준석이 존재하고 행동했기에, 다른 형태로 결집할 수도 있었을 시민사회 내 흐름들이 하필이면 혐오주의자 이준석 지지층으로 결집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생적 ‘이준석주의’의 요소들(가령 일베나 펨코식 부족주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은 극우 포퓰리스트 이준석 말고는 양대 정당 바깥에서 다른 대안이 성장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현 정치 체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5060910200008507

가령 이준석에게 투표한 유권자 중에는 언제나 나타나는 제3지대 선호층 역시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그 선택이 젊은 세대의 보수화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의 반론이 되지는 않는다. ‘양당이 싫은 건 알겠는데 하필 왜 권영국이 아닌 이준석을 찍었나’란 추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극우 정치의 실천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근본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은 동의할 수 있다. 반극우 정치라고 부르던 뭐라고 하던 이 국면에서 진보정치의 제 역할 찾기는 반드시 필요하고, 심지어 그것은 역사적 사명이다. 적어도 두 가지 지점에서 진보정치는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노동이고 둘째는 소수자 관련 쟁점이다.

이 정권이 선을 크게 긋는 개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지만(다 떠나서 윤석열이 싼 똥 치우는 것만으로도…) 노동 문제의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태도가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과거 지자체장 할 때의 일부 태도 등에서 그런 사례가 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노동 문제 전반이 아니라 ‘특정 부분’이다.

소수자 관련 쟁점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이 정권은 중도적 태도, 가령 ‘되도록이면 젠더 문제는 쟁점화 하지 말자’는 식의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령 성평등부는 남성의 불만도 담당하는 부서라는,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힌트가 있다.

이 대통령은 이번에도 국무위원들과 질의응답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신영숙 여성가족부 차관에겐 “남성들이 불만을 가진 이슈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느냐”는 취지로 물었다고 한다. 신 차관이 “없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는 여성가족부가 아닌 성평등가족부로 확대·개편해서 폭넓게 그런 것들을 좀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대통령실 관계자는 전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42716

진보정당으로서는 이런 대목에서 각 쟁점에 맞는 방식으로 자생의 기회를 찾아야 한다. 자기 어젠다 없이 다른 정치세력과의 거리, 다른 정치세력에 대한 태도, 다른 정치세력과의 관계로만 평가 받는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 얘기 길지만, 시간도 없고… 여기까지만 한다.

덤) 이 글을 보고 뭔가 덧붙일 말이 생각났다면, 다시 앞으로 가서 링크된 글까지 읽으신 후에 덧붙이는 것이 좋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보수화, 이대남, 이준석

보수화

2025년 2월 15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그제 등등 젊은 세대의 보수화 이런 거를 얘기하는 데 정말 답답해 환장한다. 기준과 팩트를 뒤섞어서 얘기하면 안 된다. 그런데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다 뒤섞어서 되는대로 얘기한다. 이러면 아무것도 얘기를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두 가지를 부정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1) 젊은 세대 중 상대적으로 여성은 진보적, 남성은 보수적 경향을 띈다는 것은 전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2) 그 중에서도 한국은 젊은 세대 남성의 보수화 경향은 특별히 강조할만한 정도로 관찰된다.

근데 이제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과연 보수란 무엇인가 수준으로 간단 말이지… 예를 들면 기성세대가 잘못해서 거기에 반발하는 것 뿐이지, 그걸 보수화라고 부를 수가 있느냐 등등… 아니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진보 보수 이렇게 부를 때, 그게 다들 진보적으로 또는 보수적으로 사상적 트레이닝이 아주 잘 된 사람들만 그렇게 부르는 거요? 상대적으로 진보화됐다, 보수화됐다 라고 할 때는 이유가 뭐에 대한 반발이든 반대이든 경향적으로 그렇게 된 결과를 갖고 말하는 것이지. 물론 진보가 진보가 아니고 보수가 보수가 아니어서 생긴 여러 왜곡에 대해 비판할 수는 있어. 그래서 제가 책에다가 썼잖습니까? 오늘날 진보는 보수를 반대하는 것, 보수란 진보를 반대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라고! 근데 이것과 이거는 다른 문제다 이거다.

또, 다른 나라 극우를 판별하는 기준을 갖다 대면 또렷하게 차별화되지 않는다 라는 얘기도 종종 하는데, 가령 기후변화나 이민자에 대한 태도 등등이 기준이어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그 정도까지는 보수화 된 태도가 나타나지 않으니, 보수화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식이지. 그런데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기후변화나 이민자에 대한 태도는 보수화의 결과이지 그 자체가 보수화가 아니다. 보수화의 지표를 뭘로 판단할 거냐라는 건 그 시기의 정치와 조응한 결과인 것이지, 애초에 국내 정치적 맥락에서 기후변화와 이민자 문제가 쟁점화가 안 되어 있는데 그걸 갖고 보수화를 판단하자고 하면 그게 말이 되겠는가?

그럼 뭘 갖고 판단해야 하느냐? 그러니까 종합적인 분석과 비평이 필요한 거지. 가령 최근에 강원택류 얘기를 중앙일보가 계속 쓰고 있는데, 오늘은 뭘 쓴 거냐. 이 얘기 아니냐.

동아시아연구원(EAI)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지난달 22~23일 성인 1514명을 대상으로 웹서베이(web survey)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다. 이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는가’(0~10점)라는 질문에 20대(18~29세)는 5.08점으로 전 연령대에서 60대(5.07점) 다음으로 낮은 점수를 줬다. 전체 평균(5.36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20대 남성은 4.89점으로 가장 낮았다. 반면 이들의 부모 세대라 할 수 있는 50대 남성은 5.81점으로 가장 높았다. 2017년 조사에선 20대 남성(만족 48.6%)이 40·50대 남성(37.3%, 43.6%)보다 우호적이었다.

‘민주주의가 다른 제도보다 더 낫다’는 데 대해서도 20대 남성의 62.6%만 동의했을 뿐이다. 30대 남성(64.3%), 60대 여성(71.5%)이 뒤를 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4165

다른 때 같으면 더 많은 분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윤석열이가 계엄을 선포하고 그게 정당했다는 근거로 야당이 국회 권한을 남용했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젊은 세대 남성만 이런 반응을 보인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뭐겠나?

그니까… 이런 결과에 자꾸 눈을 감으면 안 된다는 거다. 항상 문제는 해법이지 현상이 아니다. 여기서 해법을, 해법이랍시고 말려 죽이자 이런 얘기나 하면 안 된다는 거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보수화, 이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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