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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윤석열

극우포퓰리즘 얘기하면…

2025년 9월 27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유튜브에서 극우포퓰리즘에 대한 얘기를 굉장히 많이 했다. 그러나 말을 할 때마다 못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나마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의 경우는 하도 얘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그런가보다 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다른데 가서 얘기를 하면 얘기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열에 아홉은 ‘내가 이 얘기를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결론으로 간다.

원인의 대부분은 극우포퓰리즘을 다들 지멋대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극우’만 따로 떼서 보면 어느정도 얘기가 되는데 ‘포퓰리즘’ 얘기를 붙이면 또 막 뭐 지멋대로 엉망진창이다. 내가 말해봐야 처듣지를 않으니 다른 훌륭한 분들의 정의를 통해 극우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아래는 과거 한겨레에 실린 한귀영(여러분들이 신뢰하는 명문대 출신)이라는 분의 글의 일부이다.

네덜란드 정치학자 카스 뮈더는 포퓰리즘을 “사회를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갈라치기 하고, 한쪽을 악마화해 서로 적대시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포퓰리즘은 다양한 얼굴로 나타난다. 소수의 사악한 엘리트와 다수의 선한 대중이라는 전통적인 포퓰리즘 문법을 따르는 좌파 포퓰리즘과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이 두 축 외에 난민, 이민자 등 사회적으로 배제된 별도의 집단을 설정한다. 이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자극하고 동원하는 것이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생존 방식이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64816.html

마! 한귀영과 카스 뮈더가 뭔데 포퓰리즘을 정의하나! 이럴 수 있는데, 그러면 참여연대의 월간 저작물에 실린 글에서 한 번 더 인용을 해보도록 하겠다. 동국대 교수님이 쓴 글이다. 무려! 교수님!이 쓴 글이니까 이 정도면 납득을 해야겠지.

30년 가까이 극우와 포퓰리즘에 천착한 카스 무데(Cas Mudde)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원제: The Far Right Today)에서 현대 극우 정치의 부상과 특징을 포퓰리즘, 권위주의, 민족주의/이민배척주의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한다. 극우 포퓰리즘은 ‘순수한 국민(the pure people)’과 ‘부패한 엘리트(the corrupt elite)’의 대립 속에서 자신들이 국민의 유일한 대표라고 주장하면서, 주류 정당과 전통적 언론에 반대하고 대중과 직접 소통하며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특히 극우 포퓰리즘은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혐오와 차별적 담론을 확산시키며 지지층을 결집한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호주 등 총 26개국 의원들이 2017~22년 작성한 약 3,200만 개의 SNS(트위터) 글을 분석한 결과, 미국과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좌파보다 잘못된 정보 확산 경향이 높으며, 민주주의 규범이나 사회문화적 문제에 집중하는 우파 포퓰리즘이 가짜뉴스로 보다 성과를 거둬왔다. 무데(Mudde, 2019)는 극우 포퓰리즘을 서구 주류 정당과 미디어가 수용하면서 한때 고립되었던 극우가 공식 정치의 주류로 진입하였고, 기존 보수주의와의 경계도 모호해졌다고 지적하였다.

https://www.peoplepower21.org/welfarenow/1989052

이게 적어도 극우포퓰리즘 논의를 하는 맥락에서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야 그걸 누가 모르냐 하실 수 있는데, 유튜브 해봐! 아무튼. 아래는 동아시아재단의 저작물에 실린 글. 글 전체의 논조와는 관계없이 해당 대목만 발췌해서 살펴본다.

한국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는 2000년대 초반이다. 당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들을 야당들이 비판하는 과정에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포퓰리즘은 정책이나 공약 혹은 정치적 공방의 수단이 아닌 통치 스타일과 변혁운동으로 정의된다.

먼저 포퓰리즘은 통치 스타일로서 정당이나 의회를 우회하여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정부의 정책을 추진하는 리더십의 한 변형이다. 대표적 사례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Alo Presidente (Hello, Mr. President)라는 TV토크쇼를 진행하면서 베네수엘라 사람들의 처지와 어려움을 직접 듣고 자신이 장관이나 관계자들에게 지시하면서 차베스주의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포퓰리즘은 기성정치나 엘리트 중심주의에 도전하는 변혁운동으로서 그 주체는 주로 주변부 정당이나 정치세력들이다. 포퓰리즘 정당들은 기성정치의 엘리트와 국민을 대립시키면서 전자가 후자를 버렸다는 선동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려는 정치운동으로서 유럽의 극우정당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https://www.keaf.org/book/EAF_Policy_Debates/Democracy_and_Populism_in_South_Korea_Quo_Vadis_Korea

더 있어야 돼? ‘포퓰리즘’ 개념의 변천에 대한 대우재단 학술사업 홈페이지에 실린 홍철기님의 글을 보자.

그렇다면 이 학자들은 포퓰리즘 개념을 어떻게 달리 정의하는가? 이들 각자의 입장 차이를 전제하더라도 공통적인 핵심이 존재하는데, 바로 포퓰리즘을 다원주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점이다. 무데와 칼트바서는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정의한다(무데·칼트바서 2019: 15). 그리고 그들은 포퓰리즘과 그에 적대적인 반포퓰리즘적인 엘리트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다원주의”를 제시한다. 그들이 보기에 “엘리트주의는 사회를 동질적인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로 나누는 포퓰리즘의 기본적인 이원론적 구분을 공유하면서도 두 집단의 덕성을 정반대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반다원주의적이다. 포퓰리스트와 엘리트주의자는 단지 엘리트와 민중의 선함과 악함에 대한 판단에서만 대립할 뿐 다원주의를 배척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사회가 다른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서로 어느 정도 겹치는 다종다양한 집단들로 나뉜다”고 전제하며 “다양성”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내세우고, “사회에 권력의 중심이” 복수로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정치적 의사결정은 “타협과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무데·칼트바서 2019: 18-19).

뮐러는 무데와 칼트바서가 포퓰리즘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을 다원주의에 대한 위협 혹은 공격으로 본다는 점에서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포퓰리스트가 반엘리트이면서 또 언제나 반다원주의자”라고 강조하는데, 그가 보기에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뮐러 2017: 11). 그런 점에서 포퓰리즘은 일종의 “정체성 정치”이며, 특히 “배제적 형태”의 정체성 정치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다원주의는 필수적”인데, 그 이유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단순화할 수 없는 다양한 시민들이 자유롭고 동등하게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정한 조건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퓰리즘은 “균질하고 진정한 단일 국민”이 존재한다는 위험한 “환상”을 조장한다는 것이다(뮐러 2017: 12). 요컨대 무데와 칼트바서, 그리고 뮐러에 따르면 무분별하게 정적을 비난하기 위한 정치수사적 무기로서의 ‘포퓰리즘’이 아닌 의미에서의 포퓰리즘이란 바로 반다원주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의 포퓰리즘은 입헌주의, 즉 성문헌법에 의거한 정부 운영이나 대의제, 즉 경쟁적 선거를 통한 정부 교체의 원칙에는 결코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이를 공격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고 파악하고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만일 현실의 포퓰리스트가 입헌주의나 대의제를 정말로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 원천은 헌법이나 선거 제도 자체에 대한 적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원주의에 대한 적대에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포퓰리즘을 반대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원주의를 지지한다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엘리트주의 또한 다원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포퓰리즘과 다원주의 모두의 반대편 자리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엘리트주의의 자리, 즉 민주주의에 본질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는 정치 자체에 대한 반대 입장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https://www.daewooacademia.com/horizon-of-knowledge/797/1836

특히 홍철기님의 글은 링크를 눌러서 전체를 한 번 읽어봐라. 글에 나오는 제닝스 브라이언의 얘기는 저의 저쪽이 싫은 책에도 나옴. 기억 안 나지? 그러니까 제가 거기 써있는 얘기를 다 그냥 쓴 게 아닌데, 여러분은 ‘이 새끼 또 분량 채우려고 이 얘기 저 얘기 구겨 넣었구만…’ 이렇게 보고 기억 안 하기로 하고 그냥 넘어간 거지. 물론 그렇게 보도록 쓴 저의 책임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얘기들을 내 식으로 정리하면 이런 거다. 극우포퓰리즘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1) 극우정치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통해 재생산 되는 것이든지 2) 포퓰리스트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충실히 따른 결과로 극우적 세계관이 확산 및 재생산되는 것이든지… 둘 중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왜 이렇게 열을 내면서 하느냐, 극우포퓰리즘 얘기를 하면, ‘그 포퓰리스트가 실제로 극우주의자는 아닐 수 있잖아요’, ‘극우포퓰리즘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다 극우는 아니잖아요’ 이딴 소리를 하기 때문. 왜 그냥 ‘극우’라고 안 하고 ‘극우+포퓰리즘’이라고 하고 있겠냐 지금!! 극우주의자가 포퓰리즘을 하는 거든, 포퓰리스트가 극우를 재생산하는 거든,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극우포퓰리즘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임. 그 당사자가 극우주의자이냐에 대해선 달리 평가할 수 있겠지. 가령 도널드 트럼프, 보리스 존슨 같은 타입과 조르자 멜로니, 마린 르 펜 같은 타입의 개인적 정치 지향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극우포퓰리즘 정치를 하고 있거나, 특정 시점에 했다는 것(특히 보리스 존슨)에는 부인할 수 없는 동질성이 있다. 그래서 그걸 극우포퓰리즘이라고 부르고, 불러왔다!

이러한 분류법으로 보면 윤석열은 극우포퓰리즘적 지도자에 정확히 들어 맞는다는 게 요즘에 계속 하는 얘기다. 2022년 대선 캠페인도 극우포퓰리즘의 도식이었던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 포퓰리즘적 방법론은 대다수의 정치 세력이 활용하고 있는데, 집권을 하고 나면 대개는 이 방법론을 버린다. 실제로 나라를 운영하려면 포퓰리즘적 문법, 시각, 논리만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우포퓰리스트들은 집권을 하고 나서도 포퓰리즘적 스타일과 틀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어느 글에다가 이렇게 썼다.

포퓰리즘 정치는 완결적 해법을 상정하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바를 상황에 끼워 맞춘 서사를 통해 수용하면서 자기 권력 기반을 강화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대중이 원하는 바’는, 통치 논리상 대개 ‘안 되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자신이 대중이 원하는 바를 모두 관철하겠다며 집권에 성공한다. 통치 논리와의 간극은 ‘상대가 대표하는 부패 기득권 대 내가 대변하는 선량한 민중’이라는 대립으로 메꾼다.

(…)

현대의 대의민주주의는 통치 과정 자체에서 대개 민중을 배제하지만 관행과 문화를 포함한 의회민주주의 시스템과 관료제는 최소한의 민주 질서를 유지한다.

그런데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관철한다는 서사를 쓰기 위해 ‘안 되는 이유’의 근거를 제공하는 의회민주주의와 관료제를 무력화해야 한다. 따라서 포퓰리스트 지도자는 권위주의적 방법론을 취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이러한 포퓰리즘 정치는 극우 정치의 재생산이라는 결과로 돌아오고 있다. 권력 유지 등 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시도가 극우 정치로 귀결되는 것이든 극우주의자가 포퓰리즘적 방법론을 취하는 것이든 극우 정치의 에너지가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결과는 같다. 우리는 이런 ‘극우 포퓰리즘’의 한국적 버전을 이미 윤석열 정권을 통해 경험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991.html

윤석열이 극우포퓰리스트라고 했더니, 어떤 사람들이 댓글에 쓰더라. 인기가 없는데 어떻게 포퓰리스트일 수 있나요? 앞서 논의에서 봤듯, 유권자로부터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가는 포퓰리즘인지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어떤 종류의 논리고 표현이다. 가령 어떤 나라에서 리틀 도널드 트럼프가 지지율 10%를 못 얻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고 그게 ‘극우포퓰리즘’이 아니게 되나? … 그리고 심지어 윤석열은 그걸로 집권을 했다니까!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겨…

쓰다 보니까 또 현타온다. 이걸 또 써서 뭐하냐… 그만합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포퓰리즘, 윤석열, 포퓰리즘

보충의견에 대해 더 설명해줌

2025년 4월 5일 by 이상한 모자

이거를 방송에서 막 얘기를 하니까 못 알아 듣고 장황하다는 둥 탄핵했으면 됐지 말이 많냐는 둥 하더라. 근데 또 그 와중에 그런 이유로 늦었다는 게 이유가 안 된다고도 하고… 아이 씨…

애초 윤석열의 주장을 보겠다. 왜 윤석열의 주장을 보냐? 윤석열이 주장을 하니까 쟁점이 된 거고, 쟁점이 됐으니까 보충의견을 쓴 것이기 때문이다. 정형식 재판관이 헌재법에 헌법재판의 본질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형소법을 준용하는 거고 그 판단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 답하고, 문형배 재판관이 이 변호인은 검찰 조사 때 조력한 그 변호인이냐고 묻던 장면 기억하실 것. 그게 이 연관 장면이다.

애초 윤석열의 주장은 오늘 신문들에도 요약돼있다. 아래는 동아일보.

검찰이 12·3 비상계엄에 가담한 군 수뇌부 등을 조사하며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헌재가 대통령 탄핵심판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을 윤 전 대통령 측은 반대해 왔다. 2020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에 따라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검찰 조서는 증거로 쓸 수 없기 때문에 형사소송법상 ‘전문법칙’에 어긋난다는 주장이었다.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50405/131353196/2

아래는 조선일보.

윤 대통령과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 등이 헌재 심판정에서 부인한 검찰 조서와 공소장 내용도 증거로 인정했다. 윤 대통령 측은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은 검찰 조서는 증거 능력이 없다’는 2020년 개정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들며 반발했지만, 헌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형사재판과 헌법재판은 성격이 다르다”는 이유로 탄핵 심판이 준용하는 형사소송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

경향신문.

윤 전 대통령 측은 헌재가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탄핵심판의 증거로 채택하자 강하게 반발했다. 2020년 개정된 형사소송법은 피의자 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내용을 인정할 때만’ 증거로 쓸 수 있도록 규정했다. 윤 전 대통령은 자신과 내란 공범 관계에 있는 증인들의 수사기관 진술 일부가 사실과 다르다며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들의 조서가 탄핵심판 증거로 쓰이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탄핵심판이 형사소송법 전문(증거) 법칙을 얼마나 엄격하게 준용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충돌로 이어졌으나, 헌재는 “헌법재판과 형사재판은 다르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하며 신문조서를 증거로 활용했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04050300145

윤석열 측 주장에 동조하는 일부 법조인사들은 헌재 결정문과 형사 재판 결론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었다. 이런 기류는 특히 윤석열 구속 취소 이후에 더 강해졌다. 내란죄의 유죄를 예단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이, 그것도 수사기관의 기록을 근거로 결정문에 담겼는데, 피신조서의 문제든 공수처 수사권 문제든 윤석열이 내란죄 무죄를 받을 경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석열쓰들이 와서 왜 헌법재판소는 내란죄가 무죄인데 근거도 없이 탄핵을 하였는가 막 이러지 않겠는가?

만일 이런 우려를 헌재가 반영한다면, 처음부터 다 조사하고 다 진술 받는 방식으로 하든지(공판중심주의 강화, 사실상 형사재판처럼 진행하라는 것), 아니면 형사재판에서 내란죄 결론이 나올 때까지 탄핵심판 결론을 내리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다. 근데 그게 말이 되겠냐? 어떤 경우든 4월 18일은 커녕 정해진 기일 내에도 탄핵심판을 끝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안 되는 걸 윤석열은 우긴 것이다.

이 사전 지식을 깔고 형소법상 전문증거의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라는 취지의 김복형, 조한창 재판관의 보충의견을 보라. 이 블로그에 앞서 작성한 메모는 보충의견 전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한 것이었는데, 전문을 보니 구도가 더 분명하다.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탄핵심판절차는 기본적으로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피청구인의 법적 책임을 묻고, 피청구인이 이에 대해 방어하는 구도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청구인이 소추사유에 대한 주장과 입증을 하고, 피청구인이 이를 반박하고 증거를 탄핵하며 상호 대립하는 구조로 진행되는 탄핵심판절차에서는 형사소송절차에서와 같이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

변론과정을 통하여 헌법재판관이 심판정에서 직접 증거를 조사하고 피청구인에게 의견진술 및 반대신문의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공정한 재판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나아가 헌법재판의 정당성과 신뢰성도 제고할 수 있다. 따라서 사건의 실체에 대한 심증 형성 및 소추사유의 인정은 가급적 형사소송절차와 같이 공개된 재판관의 면전에서 직접 조사한 증거를 기초로 하고, 전문증거에 대해서는 반대신문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된 민주적 정당성이 가장 큰 대의기관이자(헌법 제67조 제1항), 국가원수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며(제66조 제1항), 국군 통수권을 지니고(제74조 제1항), 5년의 임기가 보장된다(제70조).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절차는 이처럼 헌법상 막중한 지위에 있는 대통령에게 부여된 국민의 신임과 권한을 임기 중 박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로, 파면 결정은 그 직무수행의 단절로 인한 국가적 손실과 국정 공백, 국론의 분열현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등을 초래할 수 있고(헌재 2004. 5. 14. 2004헌나1 참조),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대통령 탄핵심판의 중대성과 파급력에 비추어 볼 때에도, 탄핵심판은 형사소송절차에 준하여 명확성과 공정성을 담보하고, 반대신문을 통하여 불리한 증거에 대한 피청구인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할 필요가 있다.

(…)

동일한 사실관계를 기초로 한 탄핵심판, 형사재판에서 각기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법질서의 통일성과 재판에 대한 신뢰가 저해될 것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탄핵소추사유가 형사범죄사실과 관련된 경우에는 형사소송법상 전문법칙은 탄핵심판절차에서도 가급적 엄격히 적용하여 탄핵심판과 형사재판 사이의 불일치를 가능한 줄일 필요가 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190765.html

반면 형소법상 전문증거의 법칙을 완화해서 적용하라는 이미선, 김형두 재판관의 보충의견은 현재 헌법재판소 방침에 대한 방어 성격이다. 이 보충의견에서 두 재판관은 탄핵심판은 수사-기소로 시작되는 형사재판과 시작되는 절차부터가 다르고, 따라서 피청구인과 피고인의 지위도 다르며, 신속한 결론이 필요한 탄핵심판의 절차가 장기화 된다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 또, 이 사건에 제출된 증거들은 전문증거 법칙을 완화 적용하는 걸 전제하면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

즉, 도식화 하면 이런 얘기다.

윤석열 주장: 1) 전문증거 법칙 완화하면 안 됨. 2) 따라서 수사기록 등 증거로 사용하면 안 됨.

이미선, 김형두 보충의견: 1) 전문증거 법칙 완화할 수 있음. 2) 완화 적용하면 수사기록 등 증거로 사용할 수 있음.

김복형, 조한창 보충의견: 1) 전문증거 법칙 엄격하게 적용하는 게 맞음. 2) 이번엔 판단 안 하고 앞으로 그러자는 것임.

그럼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건 뭐냐? 이미선, 김형두 재판관이 총대를 메긴 했지만 현재 헌법재판소 다수의 해석과 윤석열과 입장을 사실상 같이 하는 김복형, 조한창 재판관이 첨예한 논쟁을 벌인 게 아니냐는 것임. 그 의도가 뭔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 ‘별론으로 하더라로’를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있던데, 1) 법리적 완결성 추구, 2) 이재명 재판 의식, 3) 4월 18일 이후까지 끌어 보려다 행배 행님한테 롯데 자이안츠 빳따로 맞을뻔함, 이 셋 중 뭔지는 어차피 확인 안 되니까 넘어가지 이 말임.

자, 그리고 정형식 재판관 보충의견. 이거 전문 확인해보니까 선고 직후에 예상한 거보다 더 막장이던데. 이거는 한 마디로 하면 통치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회기 쪼개기를 통한 꼼수 연속 탄핵이 가능하니 그걸 막을 입법이 필요하다 그냥 그 논리다. 근데 내가 볼 때는, 그런 식으로 따지면 회기 쪼개기와 법안 처리가 다 마찬가지 아닌가? 탄핵소추될 경우 직무가 정지된다는 점이 있지만, 법안도 각각의 부정적인 어떤 효력이 있기는 다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까 뭐 이런 얘기 자체는 할 수도 있는데, 하려면 탄핵소추안이 다른 안건과 본질적으로 다른 기준에 의해 처리 되어야 할 당위를 논해야 하는데 그것보단 현실론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 이상하다 이 얘기다.

그래서 정형식 재판관이 이 보충의견을 낸 외적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배했다! 이렇게 주장한 것도 역시 윤석열 측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일사부재의는 법조인들이 생각하는 일사부재리와 다르다. 일사부재의는 일종의 회의규칙일 뿐이다. 회기 내에 같은 안건을 두 번 처리하지 말라는 얘기를 국회법에다가 써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걸 갖고 말도 안 되는 걸 윤석열 측이 우긴 게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인데, 결정문에 보면 국회법 위반 아니고 시끄럽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근데 정형식 재판관은 이걸 갖고 ‘일사부재의가 아니긴 한데,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권이 남용되면 안 되겠지… 입법적으로 뭔가 장치를 마련하자고 할 순 있겠지…’ 이렇게, 뭔가 억울한 바가 없는 건 아닌 것처럼…

그런데, 가장 나쁜 해석을 하면,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가장 나쁜 해석을 굳이 하면, 요새 하도 지들 멋대로 알아듣고 제대로 읽지도 않고 아무말이나 하니까 내가 다시 한 번 강조함. 가장 나쁜 해석을 굳이 하면, 이게 결국 보수재판관들이 자기들 쪽에 가까운 입장을 어떻게든 반영하려고 애를 쓴 것이지만, 그러면 결국 기각이나 각하로 소수의견을 낼 것이냐 라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그렇게는 할 수 없겠다 라고 결론낸 것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러니까 보충의견이나 쓰고 말자 이런 거지. 그러니까 애초에 8대 0은 흔들릴 수가 없었던 것임. 8대 0을 하긴 하는데, 앞서의 윤석열 쪽 가오를 살려주는 얘기를 자꾸 되풀이 한 거고, 그 얘기로 결국 보충의견을 쓰는 것이 한계였던 것이라는 걸 이 결정문의 보충의견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얘기를 제가 드린 것임.

이 비슷한 얘기를 어제 김변호사와 유튜브에서 서로 나눈 것임.

https://www.youtube.com/live/yofFWsTb2mc?si=JA1fZT2TQo0UVZty&t=2870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김복형, 윤석열, 정형식, 조한창, 탄핵, 헌법재판소

이제 뭘 가지고 시간을 끌었는지 알았을 것

2025년 4월 4일 by 이상한 모자

오늘 보면 보충의견들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쟁점이다. 첫째가 일사부재의 관련 정형식의 보충의견. 둘째가 전문법칙 완화 관련 1) 김형두 이미선, 2) 김복형 조한창의 보충의견. 1)은 완화 입장이고 2)는 엄격 입장.

일사부재의 입장부터 보면, 보충의견 전문을 봐야 알겠지만 정형식의 얘기는 국회법상 일사부재의 위반이 아닌 건 맞지만 탄핵을 이렇게 막 남발해가지고 안정적 국정운영이 되겠느냐, 반 정도는 사법적 성격도 있는 만큼 다른 회기라고 하더라도 한 번 부결됐으면 적어도 일정 한도 내에서는(제 추측은 임기 내가 아닐까 함) 재발의 안 되게 해야 한다 뭐 이런 논리 아닐까. 근데 내가 볼 때는 말이 안 되고, 탄핵소추안이든 뭐든 회의에서 안건을 처리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고자 하는 목적인 국회법상의 원칙을 달리 적용할 정당성은 없지 않나 한다. 근데 하여튼, 보충의견을 썼다는 것은 윤석열 측 주장인 이 얘기를 평의 과정에서 정형식이 막 주장을 한 것이다 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 말고 더 치열해 보이는 게 전문법칙 완화 관련인데, 이건 심지어 완화와 엄격이 둘 다 보충의견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복형 조한창이 상당히 강하게 주장을 했을 것으로 추정됨. 그러니까 완화가 같이 있겠지. 탄핵심판 과정에서 정형식이 밝혔듯 이미 헌법재판소의 디폴트는 전문법칙 완화 적용임. 법에 그렇게 돼있음. 그런데 문정권에서 형소법을 개정해 당사자가 동의 않으면 피신조서가 인정이 안 되게 된 상태에서 피신조서를 그냥 헌재가 증거로 인정하는 거는 위험성이 크다, 엄격 주장은 이런 논리겠지. 아마. 완화 입장은 그럼 우리는 형사법정에서 죄가 확정 판결이 안 나면 탄핵심판 결론을 못 내는 거 아니냐 이런 뉘앙스일 거고… 이 논리 역시 윤석열 측의 핵심 논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김복형 조한창 두 사람이 대변을 해준 형태가 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는 것이다.

결국 목적이 뭐든 이런 저런 이유를 논하면서 더 얘기를 해봐야 한다, 논의가 필요하다 이러니까 평의가 30분만이 끝나고 했던 거고,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참지 못한 문형배가 여보세요 이제 4월 4일밖에 안 남았어요(지난 번에도 썼듯 11일은 어려웠음) 제가 롯데자이안츠 야구 빠따를 꼭 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가면서 4월 4일로 확정하고, 선고 기일이 잡히고 평결로 넘어간 상태에서는 자기들이 주장한 걸 보충의견을 쓴다고는 해도 이걸 이유로 각하나 기각을 주장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는 게 이 결정문을 보면 대략 추정되는 사정이 아닐까 한다는 것.

또 어떤 SNS-인간이 이제와서 그런 말은 누가 못하냐 할까봐.

  1. 위의 내용 핵심은 오늘 유튜브에서 결정문 문형배가 낭독 끝내자마자 한 얘기임. 오늘 유튜브에서 다들 그렇듯 헌재 생중계 했음.
  2. 오늘 아니더라도 형소법 얘기 등등 역시 지금까지 유튜브와 라디오 등에서 다 해온 것. 엊그제 쓴 얘기에도 다 나옴. 일사부재의 말도 안 된다 이 얘기도 계속 해오던 거임. 글도 쓰고 떠들기도 하고 뭘 얼마나 더 했어야 되냐?
  3.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이재명 재판 기다린 거 아니냐~ : 야! 의도가 뭐든 이재명 재판이건 뭐건, 재판관들이 자기들끼리 말싸움을 하려면 명분과 꺼리가 있어야 될 거 아니냐! 머리를 좀 쓰라고! 머리를!

그리고 이런 얘기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내가 뭐 혼자 얘기했겠냐? 다들 기사로도 쓰고 떠들기도 떠들고… 다 했는데 그냥 님들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5대 3인가봐… 그냥 이 얘기만 들었을 뿐…

근데 봐봐라. 8대 0, 깔끔하잖아? 내가 일요일 빼고 매일 어디 나가서 떠들어야 되는 사람인데 지금까지 빠짐없이 무조건 누가 질문할 때마다 8대0 전원일치, 다만 보충의견 등은 나올 수 있다 라고 답해왔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랬다. 근데 그러면 또 벌떼 같이 와 가지고 나이브 하다는둥 방심하면 안 된다는 둥 왜 웃냐는 둥… 그러고 있다가 오랜만에 여기다 뭐 한마디 썼더니 너는 지금까지 뭘 했냐는 둥, 뭐가 빠졌다는 둥…

별 수 있나 웃고 말어야지.

추가: 정형식 김복형 조한창 합치면 3명이니까 5대 3 맞잖아요 잉잉 또 이럴까봐. 5대 3론의 핵심은, 5대 3이면 선고를 못 한다는 게 핵심이다. 선고를 하기로 한 시점에서 그거는 의미가 없고, 5대 3 데드록설이 신뢰성 있는 정보를 근거로 한 얘기가 되려면 적어도 선고일 고지 전날에는 5대 3 데드록설을 주장한 핵심 주체가 그걸 알아야 된다고! 근데 몰랐잖아. 전날까지 계속 5대3 데드록을 얘기를 했잖아. 언론사도 국힘도 윤석열도 몰랐잖아. 그니까 근거가 없었던 거잖아. 근거가 없었던 게 드러났다고 내가 여기다가 썼잖냐? 근데 그랬더니 SNS-인간이 또 개소리를 해서 제가 열받은 기록이 여기 남아있다 이겁니다. 보수 재판관이 애초에 3명인 걸 누가 몰라! 그 3명이 8대 0을 못하게 하느냐가 핵심인데, 보충의견 쓴 거잖아. 보충의견 쓰는 거를 5대3 데드록이라고 안 한다 이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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