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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잡감

심야노동을 할 거냐 말 거냐

2025년 11월 22일 by 이상한 모자

SNS에서 새벽배송 논쟁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굳이 찾아보지 않았다. SNS 입씨름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예를 보지 못했다. 논쟁의 당사자들은 자기들끼리 뭘 배웠다는 둥 진도를 나가자는 둥 하지만, 다 자기만족적 서사에 그칠 뿐이다. SNS 논쟁이라는 걸 한지 15년도 넘었을 텐데, 아직도 담론 수준이 이 모양 이 꼴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SNS는 공론장도 뭐도 아니고, 술자리에서 떠들다 사라졌을 옹알이들이 온라인에 그럴듯한 얘기처럼 나열되어 있는, 노이즈의 집합체일 뿐이다.

그러니 그냥 SNS에는 일기나 적고 만족하는 것이 좋다. 자기 생각 정리용으로는 괜찮다. 그러나 남의 일기에 관심을 가질 필연은 없다. 이게 내가 SNS 논쟁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유이다.

유일하게 SNS 논쟁이 효용이 있는 분야라고 한다면, 메타-SNS적 분석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SNS에서 떠드는 양상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유의미하다는 거다. 가령 필터버블이니 뭐 그런 얘기 있잖나.

하여간, 그런 와중에 이 얘기를 소재로 조선일보가 토요일자 칼럼에 떡하니 써놨기에, 여기다가 생각 정리용 메모를 남기는 것이다.

https://www.chosun.com/opinion/2025/11/21/5JUEK4CTHNCCRDZRPCERBLNEKA/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저 글의 등장인물들이 실제 어떤 주장을 했는지 난 정확히 모른다. 지금 쓰는 것도 저 사람들 주장에 대한 얘기가 아니고, 그간 언론에 등장한 새벽배송을 둘러싼 여러 얘기에 대한 거다. 그러나 나한테 와서 저 글에 등장하는 사람들 얘기는 하지 마시길 바라고.

새벽배송에 대한 토론이니 주장이니 보고 느낀 바는, 그래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점, 어떤 의미에서는 우선순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여러 우려를 할 수 있다. 심야노동을 금지하면 노동자의 임금 손해가 우려되지 않는가? 그렇다. 심야노동을 금지하더라도 노동자는 임금 보전을 위해 투잡을 뛰지 않겠는가? 그럴 수 있다. 그 외 여러 부작용이 있지 않겠는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심야노동을 금지하는 것은 오히려 퇴행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런 논쟁, 처음하는 게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 나온 노래를 보면, 이런 가사가 있다. “어느 새 탕뛰기의 노예가 되어 힘겨운 하루가 덧없이 저무네” … 이건 일전에 여기다가 기록을 남겨놓은 바 있으니 궁금하면 찾아보시고… (클릭). 아무튼 이 가사에 나오는 ‘탕뛰기’가 뭐냐면 돈을 일당으로 주는 게 아니고 건당으로 주는 거다. 한 번 왔다갔다 하는 걸 단위로 돈을 주기 때문에 건설기계를 다루는 노동자들이 잠을 줄여서 일을 한다. 한 탕이라도 더 뛰어야 기대수익을 채울 수 있으므로…

이때 노조 등의 주장은 탕뛰기를 거부하고 일당으로 받자는 거였다. 저 노래도 그런 바탕에서 나왔기 때문에 ‘탕뛰기의 노예가 되어’라는 대목이 있는 거다. 현장에서 당연히 볼멘소리들이 있지 않았겠나? 열심히 일한만큼 능력대로 가져가는 게 낫고 그게 더 이익이다 라는 식인데, 그게 사실인 부분도 있을 거다. 그럼에도 일당으로 받자고 한 이유가 뭐겠나? 대개의 사람은 돈이 걸리면 자기 몸을 제대로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운전을 하는 분야는 자기 혼자 불행해지는 게 아니라 남까지 불행하게 할 수 있다. 사고라도 내봐라. 실제 그런 불행이 있으니까 이런 결론으로 간 거다.

갑자기 탕뛰기가 왜 나오냐 할 수 있는데, 노동조건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가 반드시 노동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라는 얘길 갖고 입씨름 하는 이 구도 자체가 이미 고전이고 클리셰라는 거다. 때마다 나오는 거다. 주52시간 얘기 할 때도 똑같이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 결론이 대안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거냐로 가느냐에 있다. 가령 위의 조선일보 글에 나온 표현을 쓰자면, 쿠팡만큼 중소기업의 임금이 인상되어야 한다… 그런 얘기 할 수 있다. 그런데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를 추진할 수 있지만, 전반적인 노동조건 개선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대안도 제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전반적인 임금 인상이 어렵기 때문에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가령 주5일제든, 주52시간제든, 아니면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이든 그걸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영원히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업계의 전반적 임금 인상은 언제 달성되는가? 그것에는 전제가 없는가? 이런 저런 전제를 얼마든지 달 수 있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진보의 목표가 아니었던 적도 없다. 늘 모색하지만 잘 안 되는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이런 담론은 보통 조선일보가 썼듯 ‘현실을 모르는 책상머리 진보’, ‘선의의 부작용’, ‘감성에 의존하는 낭만적 진보’ 류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연결된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는 얘길 하기 위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분명히 서두에도 썼는데, 내 주요 관심사는 이런 식의 프레이밍에 있다. 진보가 뭘 하자고 주장을 하면 보수 이데올로그들이 보통 이런 구도를 형성한다. 주52시간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문통이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이 아닌 핵발전주의자들의 주장도 거의 사실처럼 보도하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같은 프레임(감성과 선의에만 기댄, 현실을 모르는 책상머리 낭만적 진보)에 속해 있다. 조선일보가 이번 일을 소재로 칼럼을 쓴 것도 정확히 여기에 들어간다. 이런 태도는 결국 ‘고통스러운 오늘이 최선’이라는 것으로, 애초에 진보의 주장과 행동을 무력화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심야노동의 제한 또는 금지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오히려 여러 절충안을 얘기하고 있다. 금지는 아니더라도 업무를 줄여 시간을 조정해보자, 정 어려우면 2교대를 해라, 일단 논의에 참여해라 등등… 이런 논의가 담긴 언론 보도와 칼럼을 유튜브에서 소개했는데, 내 나름대로의 노력이다.

상대편에서는 쿠팡 새벽배송이 무슨 택배기사의 축복인 것처럼 떠들기도 했는데, 실제 그렇지 않다는 주장과 보도도 꽤 있었다. 새벽배송 기사들을 대상으로 과거 조사한 결과가 그랬고, 사망한 기사의 유족이 밝힌 것처럼 남의 아이디를 빌려서라도 연속 근무를 대리점이 강요했다는 정황도 있다.

왜 쿠팡은 침묵하고 노동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소비자 간의 대립구도만 남았느냐에 대한 탄식도 있었는데, 당연하지 않나? 다들 이렇게 자본이 가려는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알아서 싸워주고 있는데 기업이 뭐하러 나서겠나?

계획을 최대한 신중하게 세워야 하는 문제가 많지만, 일단 행동에 나선 이후에 고쳐나갈 문제도 있을 것이다. 여러 대안을 통해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의 조건을 만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심야노동 제한 또는 금지로부터 시작해야 나머지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가령 여러 반대와 이런 저런 전제 조건을 거론하는 목소리에도 불구, 주52시간을 도입했기 때문에 생긴 긍정적 변화들이 있지 않는가. 물론 상대쪽에선 이런 저런 부작용을 열거하겠지만, 그건 주52시간의 토대 위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이게 뭐 그리 긴박한 문제냐 라는 공격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쿠팡이든 SPC든 심야노동을 제한하는 것은 긴박한 과제이다. 심야노동이 발암물질이라면 고등어는 왜 먹느냐 라는 비아냥도 보수언론에 많이 등장하지만, 고등어에는 적어도 선택권이 있다. 그 외 그럴거면 이것도 금지해라, 저것도 금지해라 이딴 소리도 하는데, 할 수 있으면 해야지. 하시죠 그럼? 아무튼, 이건 노동이 밤을 자본에게 속절없이 내주고 있는, 전선의 문제라는 게 본질이다. 많이들 보셨겠으나, 경향신문의 김승섭 교수 인터뷰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본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511192122005

앞에서 쓴 내용 다 관련 기사다 칼럼을 링크할 수 있는데, 어차피 읽지도 보지도 않을 것이므로 안 한다. 심야노동에 대한 얘기를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서구권도 다 한다. 다만 노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는 쪽과 아닌 쪽의 상황이 다른 거다. 이런 상황을 조망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면서 메신저에 대해서만 떠드는 일은 이제 피곤하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새벽배송, 심야노동, 쿠팡

하이퍼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

2025년 10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외국, 그러니까 주로 서구에서 민주주의니 능력주의니 하는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보면 이런 구도의 얘기를 많이 한다. 능력주의 세계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체제로부터 소외된 것에 모욕감을 느끼고 분노하여 자기들을 대변할 수 있는 이단아적 지도자를 찾게 됐고 그게 트럼프니 하는 극우포퓰리스트 집권으로 귀결됐다는 것이다. 너무 거칠게 요약한 것일 수도 있는데, 뭐 하여간 이런 구도다. 요즘 한겨레신문에 나온 몇몇 분들도 이런 구도의 얘기를 했다.

근데 이게 미국 등 서구 모델에는 맞는 설명일 수 있지만 한국에는 꼭 들어 맞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옛날부터 이런 저런 형태로 했는데, 최근 유튜브에서는 이 얘기를 ‘하이퍼 능력주의’라는, 내 나름의 유머를 섞은 명칭으로 몇 차례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이퍼화… 를 염두에 두고…

그게 뭐냐면, 이런 거다. 한국 능력주의의 낙오자는 서구와 같은 형태로 모욕감을 느끼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느끼더라도 다른 방식이다… 인데 제가 서구 전문가들의 입장을  오독한 것일 수 있으니 이해바란다). 오히려 한국 능력주의에서 낙오자는 자신이 낙오된 상황 자체를 더욱 강화되었으면서도 왜곡된, (즉 하이퍼화 된…!) 능력주의적 세계관으로 포섭한다. 그것은 뭐냐, 낙오와 배제를 능력주의 질서 자체의 부당함이 아니라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의 부당함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은… 나보다 위에 있는 녀석은 나보다 진정으로 실력이 좋아서 내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 부당한 수단을 썼든지 아니면 이 사회의 기준이 잘못됐든지 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진정한 능력주의적 기준을 공정하게 적용한다면 나는 50등이 아니고 최소한 15등은 하는 것이 맞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내 위에 있는 녀석이 부당하게 그 위치에 있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찾아내야 한다. 나보다 밑에 있는 녀석은? 그럴만해서 밑에 있는 것이다. 이 밑에 있는 녀석이 부당한 수단(가령 아빠찬스)을 쓰거나 잘못된 기준(가령 할당제)을 갖고 와서 우기는 걸로 내 등수를 위협한다면?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위에 있는 이가 트집 잡을 게 하나도 없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정이다. 인정! 이 서사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견결한 능력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정할 것은 또 인정한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신실한 능력주의자가 맞느냐? 그건 아니다. 이들은 종종 어차피 뭔가 부당하다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그냥 인정을 한다. 가령 이재용. 상대가 이재용인데 아빠찬스라는 둥 할 거냐? 그게 무슨 실익이 있냐? 이재용이 아빠찬스를 써서 회장이 됐으므로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무 실익이 없다. 따라서 이재용은 인정한다.

이러한 양상은 자신이 ‘부당한 기득권’의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가령 나보다 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그가 능력주의 질서 안에서 부당하게 경쟁의 우위를 점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내가 부당한 수단을 써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만약 신실한 능력주의자라면 이런 기회는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한 기회를 움켜 쥔다. 아빠찬스를 쓰면 15등이 아니라 5등이 될 수 있다? 무조건 해야지 임마! 다른 애들도 다 하는데! 꼬우면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그리하여, 내가 볼 적에 한국에 만연한 이러한 하이퍼-능력주의는 위에 대하여 ‘부당한 수단 혹은 잘못된 사회적 기준에 의하여 지위를 획득한 위선적 엘리트’라는 반대해야 할 대상을 쉽게 상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포퓰리즘과, 아래에 대하여 ‘너는 능력이 없으므로 그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하고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된다’고 한다는 점에서 혐오 즉 극우적 세계관과 쉽게 결합할 수 있다. 이걸 해내는 정치를 한 마디로 압축한 슬로건이 ‘공정과 상식’이며, 윤석열이 당선된 대선 전후의 보수는 그러한 방식으로 유권자를 조직-동원하는 정치(내가 볼 때는 한국형 극우포퓰리즘)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러한 정치로 조직된 유권자의 목표는 당연히 극우 이념의 관철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위의 상승 및 탈락 방지이다. 이 지위 상승 욕구와 상실 불안을 극우와 연결시키는 수단, 매커니즘이 극우포퓰리즘이다. 이준석이 만든(그가 그렇게 주장하므로) 윤석열의 승리는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경쟁, 극우 포퓰리즘, 극우주의, 능력주의

민주당에 화가 나면 뭐든지 해도 되나

2025년 10월 22일 by 이상한 모자

이런 글에 일일이 화를 내는 것도 이제 지친다.

https://www.chosun.com/opinion/chosun_column/2025/10/21/IMU5ZRBWFVEADEVXTQTIRPSIQ4/

그런데 쓴 사람이 그래놔서 한 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거 쓴 분은 남이 자신을 비판하면 자기가 맞는 얘기를 해서 비난을 받는다고 보통은 생각을 하니 생각을 고쳐 먹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슷한 스탠스인 다른 사람들이 정신을 좀 차렸으면 하는 생각에 기록을 남긴다.

얼마 전 다른 운동권 분들과의 티타임에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 이대남 이런 얘기하면 극우 낙인찍기 하지 말라는 얘기만 끈질기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난다… 거기서 내가 그랬다. 그게 결국 극우담론이 민주당에 정파적 이익을 안긴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아니냐… 즉, 이런 사람들은 세상만사 판단기준이 민주당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라는 점에서 그들이 그렇게도 미워하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과 별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제가 쓴 저쪽이 싫은 책을 읽어보면 이해하시겠지만, 상대가 싫어서 선택을 하거나 행동을 했다고 하는 거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일반 문법이다. 운동권들도 잘 생각해봐라. 뭔가에 반대하는 자신의 포지션이 먼저 있고 그걸 정당화 하기 위해 이념이든 이론이든 동원하는 게 먼저였지, 태어날 때부터 레선생님 이름 마빡에 새기고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게 윤석열이든 한동훈이든 장동혁이든 이재명이나 민주당을 막기 위해 뭔가를 하거나 했다고 말하는 거는 다 마찬가지란 거다. 그렇게 반대하는 포지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즉 어디까지 허용을 할 거냐가 문제인 거지…

현대 정치에서 극우정치의 문제는 이제 거의 극우-포퓰리즘의 문제로서 다뤄지고 있다. 극우정치는 이제 과거처럼 극우 이데올로그를 가두리 양식장에 가둬 놓고 상대를 안 해주는 것으로만 상대할 수 없다. 극우정치는 이미 집권을 했거나, 집권을 노리고 있다. 전세계가 같은 양상이다. 극우정치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이들이 현대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의 파훼법(내 표현법으로는 ‘해킹’이다)을 발견 하였기 때문이다. 그 공략법은 포퓰리즘과 결합하는 것이며, 그게 극우-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정의에 대해서는 이전 메모에서 다뤘으니 모르겠으면 찾아 보시고, 그러한 정의가 현실 정치에서 어떤 문법의 구현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바로 ‘반대의 정치’로 나타난다. 포퓰리즘을 압축하면 ‘엘리트를 반대한다’인데, 여기서 ‘엘리트’는 지금이 대안적 사실의 세계인 바 지 마음대로 구성하면 되는 것이므로 결국 ‘반대한다’가 남는 것이다. 여기서 반대의 대상인 ‘엘리트’가 어떻게 대안적으로(?) 구성되느냐는 ‘반대해야 할 개념의 사슬’에 대한 메모를 찾아봐라.

이게 그냥 포퓰리즘이 아니라 극우-포퓰리즘인 이유는 그 포퓰리즘적 접근의 결과가 극우정치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즉, 앞서 개념으로 하면 반대의 결과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가 그 정치의 성격을 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서구의 기준으로 하자면, 엘리트가 싫다고 인종차별 담론에 기대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다. 민주당이 싫다고 내란을 정당화해서 되겠나? 민주당이 싫다며 윤석열 구속에 항의한다며 서부지법을 때려 부수면 되겠나? 도대체 이걸 말로 해야되나?

일관된 이념을 갖추지 않으면 극우도 극좌가 아니라는 주장은 현재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그렇게 따지면 프랑스에서 마린 르 펜의 당이 지지를 얻는 것은 극우적 현상이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도 극우정치의 결과물이 아니다. 마린 르 펜이든 트럼프든 극우지도자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과거엔 진보도 지지하고 리버럴도 지지하고 했던 이들이다. 이런 기준이면 지구상에 유의미한 극우정치는 없다. 다들 기득권이 싫어서 일시적으로 탈선한 결과를 일으켰을 뿐이다. 즉, 아무도 아프지 않은데 지구 정치는 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보통 돌팔이라고 한다.

극우정치를 지지하는 한 개인을 분자 단위로 쪼개서 분석할 수 있다면, 극우 극좌 진보 보수가 섞여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념 농도를 측정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극우정치의 문제는 유권자를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하고 동원하며 이게 어떤 결과로 이어지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내가 일전에도 이 나라에 진정한 극우 유권자가 몇 퍼센트인지를 따지고 이런 거는 크게 의미 없다고 쓴 거다.

오히려 ‘기득권을 반대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여기까지는 해도 돼’라는 건 오늘날 극우-포퓰리즘이 가장 선호하는 자기 변명의 논리다. 극우정치에 동력을 제공하는 극우정치의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이 ‘내가 왜 극우냐’는 거다. ‘나는 여성혐오를 하는 게 아니다! 단지 위선적인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것 뿐이다!’ 앞서 글은 정확히 그런 기준에 들어 맞는다는 점에서 극우-포퓰리즘에 일조하는 논리를 보여준다. 이러면 글 쓴 사람은 ‘허~ 이제는 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친~ 나까지 극우주의자라네요~’라고 하겠지만, 다시 강조하는데 개인이 극우주의자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극우정치가 너님들이라는 정치적 자원을 ‘반대하는 것에 불과’라는 명분으로 어떻게 동원하고 있는지를 보란 말이다.

오히려 이 글은 본인 행보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것이 아닌가? 내가 한 일은 민주당의 행태에 화가 나서 한 일일 뿐이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었다. 전략적으로 민주당하고 협력하는 건 된다면서 왜 국민의힘하고 협력하는 건 안되냐! 뭐 그 시점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나 윤석열이 내란으로 간 다음에는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었다. 그런 명분으로 윤석열 정권과 뭘 한 사람들은 최소한 사과든 입장표명이든 뭔가 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일보에다가 이딴 똥글이나 쓰는 게 아니고…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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