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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역습의 샤아

라라아는 내 어머니가 되어 줄 여성이었다

2026년 5월 28일 by 이상한 모자

요즘에는 밥을 먹으면서 제타 건담을 다시 보고 있다. 어릴 때 보던 것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다시 보면 볼 수록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명작이다. 너무 대단하다. 너무나 대단하다. 이 새끼들아 건담 그만 만들어! 제타 건담을 보면 되는데…

역시 나이를 먹으니까 샤아에 더욱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특히 제타 건담의 샤아에 대해서다. 비슷한 처지 아닌가 할 때가 많다. 샤아를 통해서 제타 건담을 재구성해보면 이게 로봇물의 탈을 쓴 정치극이라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년전쟁의 구도를 생각해보면, 지온공국은 거의 확실히 소련을 묘사했다는 생각이다. 지온 줌 다이쿤은 레닌, 데긴 소도 자비는 스탈린에다가 비유를 하면 딱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79년도 건담은 레닌의 아들(사상적으로든 뭐든)이 스탈린 일가에게 복수를 하는 복수극의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서 라라아의 존재가 중요한데, 여기서 라라아는 치정 관계를 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지오니즘의 구현이다. 샤아는 라라아를 통해 자기 아버지의 사상적 완성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아무로가 그것을 채간 후 심지어 죽여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라라아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샤아는 넘지 못할 벽을 갖게 되었다. 즉, 라라아의 죽음은 샤아로서는 단지 사랑의 실패가 아니다. 뉴타입으로서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흠을 남긴 것이다.

제타 건담은 이후 샤아의 시도가 좌절에 부딪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서사를 보려면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가 전공투 직전 세대라는 점과 제타 건담이 나온 연도가 1985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로서는 60년대 안보투쟁에서부터 80년대의 금권정치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감각을 갖고 정치극을 설계했을 것인데… 그 모티프는 독재, 냉전, 동구권, 자민당-사회당, 공산당-혁공동 등의 구도가 결합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구도를 전제해서 샤아의 행보를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제타 건담에서 샤아는 여전히 아버지의 이상(좌파)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지온의 아들로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스페이스노이드의 권리 보장과 인류의 혁신을 위해 지구권의 부패-독점 권력(시로코 이후에는 엘리트-능력주의)인 티탄즈(집권세력)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출신지인 액시즈(구 좌파)는 과거의 유물인 자비가 부흥에 매달리고 있다. 더군다나 자비가(스탈린주의자)는 원수지간이므로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반티탄즈 인민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에우고(개량주의+리버럴)에 몸을 의탁해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전면에 나서기는 껄끄러운데, 에우고도 결론적으론 지구연방의 일파이기 때문이다. 블랙스 포라가 사망하면서 샤아에게 지도자를 맡기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다카르 연설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부 혹은 빈객의 자리인 것이지 대표성을 갖는 입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샤아는 에우고에서 희망을 보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꿈꿨던 인류의 혁신이 자생적으로 이뤄지는 살아있는 사례, 즉 카미유 비단의 성장이다. 카미유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류의 혁신으로서 제대로 안착했더라면 샤아도 에우고로 상징되는 온건 노선을 통한 해법을 후대에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타 건담의 마지막에서 카미유는 망가져 버린다.

이제 샤아의 선택지는 크게 제한된다. 첫째, 자비가의 망령이 지배하는 액시즈는 여전히 선택지가 아니다. 둘째, 에우고는 이겼지만 지구연방의 기성 체제에 재흡수되었다. 셋째,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조건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를 택하는 것 뿐. 그래서 더블제타에서 망해버린 액시즈를 접수해 지온의 재흥을 내걸고 지구권에 전쟁을 걸어 강제로 인류를 우주로 끌어 올리는 강경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잖은가?

이 시점에 샤아는 충분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이코 프레임을 아무로에게 넘긴 것은 자존심이나 호승심 같은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체제에 굴복해 굴욕을 당하면서 애완견으로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샤아가 정답을 찾은 것도 아니다. 지구에 액시즈를 떨구는 게 어떻게 답이 되겠나. 그렇다면 적어도 동등한 기회를 줘야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맞든, 내가 맞든… 더군다나 ‘사이코 프레임’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꼴사나운 두 남자의 논쟁은 그런 차원으로 느껴진다. 두 남자는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기는 커녕,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조차(퀘스 파라야) 진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없다. 그저 전쟁-기계로 활용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둘 다 뉴타입을 자처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지속적으로 실패한다. 단, 아무로는 그래도 라라아와 그러한 경험을 나눈 일이 있다. 샤아는 없다. 앞에 본 것처럼 아무로가 라라아를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샤아가 자신을 비난하는 아무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라라아를 죽인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결국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인데! 나를 한계 속에 가둔 네가 뭔 인류에 따뜻한 빛을 보여주니 어쩌니 하는가!

그래서 그 결판의 결과는 다들 아는대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인류가 우주로 나와야 한다느니, 인류의 혁신이니 뭐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살고 싶고 서로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한 순간에, 인류는 서로를 이해해 네오지온의 병사들까지 액시즈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정반대의 진영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네오지온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갑자기 왜 액시즈에 달라 붙었겠는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이코 프레임이 이 모든 의지와 공명하고 있었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샤아 아즈나블, 역습의 샤아, 제타 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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