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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작품 감상

어떡할래 이에야스

2026년 9월 27일 by 이상한 모자

밥 친구 드라마로 최근 이 드라마를 다 보았다. 전국시대 하면 대망을 많이 얘기하는데, 나 같은 녀석들은 역시 노부나가의 야망이다. 그래서 전국시대 지식이 혼노지의 변까지에 집중돼있다. 물론 전국시대 게임들이 대개 최소 1600년(세키가하라 전투), 혹은 1615년(오사카 여름의 진)까지 다루기 때문에 대략의 흐름은 안다. 다만 밀도가 노부나가 시대에 걸친 기간 동안에가 훨씬 높다는 거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좀 매력이 덜하기도 하고… 어쨌든 최후의 승리자이기 때문에…

그런 차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존의 너구리 이미지가 아닌, 보통 사람으로 묘사해 접근하는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 초중반까지는 마츠준이 마츠준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뒤로 가면 입체적인 인물 연기를 잘 보여준다. 츠키야마도노로 나오는 아리무라 카스미는 뭐 역시 그 다운 연기 톤이다. 나머지 캐스팅을 보면 이 시기(2023년) 핫했거나, 촉망받거나, 무게감 있는 고참이거나 했던 배우들이 골고루 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 모았지 싶은 생각도… 마지막에는 가마쿠라 도노의 13인의 주연이었던 오구리 슌의 깜짝 출연까지…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의 대단한 점 중 하나는 노인 분장이다. 어떻게 노인을 이렇게까지 잘 재현했는지?

아무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조건 좋은 놈으로 묘사해야 하다 보니 무리수가 상당히 있다.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틀지만 않으면 사료의 빈 공간을 창조적으로 메꿔가면서 서사를 살리는 게 사극의 묘미이므로 이해할 수 있는 범주다. 다만 몇 가지 대목은 아쉬움이 상당한데, 대표적으로 혼노지의 변에 대한 해석이다. 아케치 미쓰히데 개인의 원한으로 평이하게 넘어갔다. 마지막 싸움의 시빗거리가 되는 호코지 종명 사건도 마찬가지다. 훨씬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교과서적으로 넘어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해석도 특별할 건 없는데 이건 무로 츠요시의 거의 신들린 연기로 다 만회했다.

전체적인 주제 의식으로 보면 이전에 인상깊게 본 가마쿠라 도노의 13인과 비교할 때 차이가 명확해 보인다. 가마쿠라 도노의 13인은 권력과 타락에 대한 일반론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주제의식이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떡할래 이에야스는 말하자면 일본적이다. 가령 대표적으로 지적받는 무리수, 츠키야마도노가 나름의 평화 구상을 통해 오다 노부나가의 팽창주의(나아가서는 극 종반에 강조되는 ‘난세’의 정신…)를 견제하려 했다는 대목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 대목은 단지 대안적 역사 해석이 아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다. 따라서 1차적으로는 역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너구리로만 묘사하지 않기 위한 서사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건데, 사실 츠키야마도노의 구상은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자유무역으로 전쟁과 분열 및 고립주의에 대응한다는 현대 글로벌자본주의 정신의 재현이다. 전국시대에 뭔 소리냐… 라는 데에서 이질감이 있기 때문에 말들이 많았던 것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 구도(전쟁 대 자본주의)가 전형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반전평화는 왜 필요한가? 전쟁이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인가? 츠키야마도노가 둘 다, 혹은 후자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히 자유주의적인 이러한 시각이 시사하는 바, 이 드라마는 이데올로기적이다.

이제 이게 왜 일본적인지를 생각할 차례다. 드라마의 후반부에 요도도노가 자결 직전에 말하는 바, 유약한 비겁한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는 뒤에서 헐뜯는 일본이 된다는 식의, 푸념은 정확히 일본의 극우주의가 평가하는 현대 일본의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보통국가화해야 한다. 즉, 요도도노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옥쇄(?)는 일본식 국가주의-군국주의에 맞닿아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그것을 ‘난세의 망령’이라고 한다. 이 난세의 망령을 극복하는 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즉, 이 구도에서 오사카는 우리에게 기시 노부스케로 잘 인식되는 국가주의-군국주의-팽창주의를, 에도는 요시다 시게루-이케다 하야토로 대표되는 로우 폴리틱스, 즉 경제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일본 정치의 이 전통적 구도에서 후자가 승리하는 흐름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읽힌다.

그런데, 말하자면 일본식 리버럴의 문제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즉, 앞서 구도를 적용하였을 때, 그렇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해온 전쟁과 살육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현실정치로 말하자면, 2차대전기의 주변국 침략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자신도 난세의 망령이니 뭐니 하지만 어찌됐건 드라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싸움을 난세를 끝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로 포장한다. 마지막에는 츠키야마도노가 나타나 잘했다며 위로도 해준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었지만 결국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거친 과정으로서의 싸움… 그 정도의 인식인 것이다. 그 점에서 이 드라마는 착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한계를 벗어난 메시지를 담지는 않은(못한 게 아니라고 본다) 걸로 평가할 수 있겠다.

하여간 이 문제로 안드로메다로 가는 대목들이 좀 거슬렸지만, 의외로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마츠준이 갑질을 하고 대본에 개입해 수정하고 뭐 그랬다고는 하던데… 여튼 현대적 감각이 조화롭게 녹아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착한 드라마를 많이 만들겠다고 하면 좋겠는데, 비방이라는 우익 드라마의 새로운 시즌을 만든다든지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어 걱정이 된다. 남의 나라 걱정 할 때인가 싶기도 하지만…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가마쿠라도노의 13인, 어떡할래 이에야스

라라아는 내 어머니가 되어 줄 여성이었다

2026년 5월 28일 by 이상한 모자

요즘에는 밥을 먹으면서 제타 건담을 다시 보고 있다. 어릴 때 보던 것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다시 보면 볼 수록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명작이다. 너무 대단하다. 너무나 대단하다. 이 새끼들아 건담 그만 만들어! 제타 건담을 보면 되는데…

역시 나이를 먹으니까 샤아에 더욱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특히 제타 건담의 샤아에 대해서다. 비슷한 처지 아닌가 할 때가 많다. 샤아를 통해서 제타 건담을 재구성해보면 이게 로봇물의 탈을 쓴 정치극이라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년전쟁의 구도를 생각해보면, 지온공국은 거의 확실히 소련을 묘사했다는 생각이다. 지온 줌 다이쿤은 레닌, 데긴 소도 자비는 스탈린에다가 비유를 하면 딱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79년도 건담은 레닌의 아들(사상적으로든 뭐든)이 스탈린 일가에게 복수를 하는 복수극의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서 라라아의 존재가 중요한데, 여기서 라라아는 치정 관계를 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지오니즘의 구현이다. 샤아는 라라아를 통해 자기 아버지의 사상적 완성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아무로가 그것을 채간 후 심지어 죽여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라라아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샤아는 넘지 못할 벽을 갖게 되었다. 즉, 라라아의 죽음은 샤아로서는 단지 사랑의 실패가 아니다. 뉴타입으로서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흠을 남긴 것이다.

제타 건담은 이후 샤아의 시도가 좌절에 부딪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서사를 보려면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가 전공투 직전 세대라는 점과 제타 건담이 나온 연도가 1985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로서는 60년대 안보투쟁에서부터 80년대의 금권정치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감각을 갖고 정치극을 설계했을 것인데… 그 모티프는 독재, 냉전, 동구권, 자민당-사회당, 공산당-혁공동 등의 구도가 결합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구도를 전제해서 샤아의 행보를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제타 건담에서 샤아는 여전히 아버지의 이상(좌파)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지온의 아들로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스페이스노이드의 권리 보장과 인류의 혁신을 위해 지구권의 부패-독점 권력(시로코 이후에는 엘리트-능력주의)인 티탄즈(집권세력)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출신지인 액시즈(구 좌파)는 과거의 유물인 자비가 부흥에 매달리고 있다. 더군다나 자비가(스탈린주의자)는 원수지간이므로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반티탄즈 인민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에우고(개량주의+리버럴)에 몸을 의탁해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전면에 나서기는 껄끄러운데, 에우고도 결론적으론 지구연방의 일파이기 때문이다. 블랙스 포라가 사망하면서 샤아에게 지도자를 맡기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다카르 연설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부 혹은 빈객의 자리인 것이지 대표성을 갖는 입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샤아는 에우고에서 희망을 보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꿈꿨던 인류의 혁신이 자생적으로 이뤄지는 살아있는 사례, 즉 카미유 비단의 성장이다. 카미유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류의 혁신으로서 제대로 안착했더라면 샤아도 에우고로 상징되는 온건 노선을 통한 해법을 후대에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타 건담의 마지막에서 카미유는 망가져 버린다.

이제 샤아의 선택지는 크게 제한된다. 첫째, 자비가의 망령이 지배하는 액시즈는 여전히 선택지가 아니다. 둘째, 에우고는 이겼지만 지구연방의 기성 체제에 재흡수되었다. 셋째,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조건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를 택하는 것 뿐. 그래서 더블제타에서 망해버린 액시즈를 접수해 지온의 재흥을 내걸고 지구권에 전쟁을 걸어 강제로 인류를 우주로 끌어 올리는 강경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잖은가?

이 시점에 샤아는 충분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이코 프레임을 아무로에게 넘긴 것은 자존심이나 호승심 같은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체제에 굴복해 굴욕을 당하면서 애완견으로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샤아가 정답을 찾은 것도 아니다. 지구에 액시즈를 떨구는 게 어떻게 답이 되겠나. 그렇다면 적어도 동등한 기회를 줘야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맞든, 내가 맞든… 더군다나 ‘사이코 프레임’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꼴사나운 두 남자의 논쟁은 그런 차원으로 느껴진다. 두 남자는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기는 커녕,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조차(퀘스 파라야) 진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없다. 그저 전쟁-기계로 활용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둘 다 뉴타입을 자처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지속적으로 실패한다. 단, 아무로는 그래도 라라아와 그러한 경험을 나눈 일이 있다. 샤아는 없다. 앞에 본 것처럼 아무로가 라라아를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샤아가 자신을 비난하는 아무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라라아를 죽인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결국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인데! 나를 한계 속에 가둔 네가 뭔 인류에 따뜻한 빛을 보여주니 어쩌니 하는가!

그래서 그 결판의 결과는 다들 아는대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인류가 우주로 나와야 한다느니, 인류의 혁신이니 뭐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살고 싶고 서로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한 순간에, 인류는 서로를 이해해 네오지온의 병사들까지 액시즈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정반대의 진영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네오지온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갑자기 왜 액시즈에 달라 붙었겠는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이코 프레임이 이 모든 의지와 공명하고 있었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샤아 아즈나블, 역습의 샤아, 제타 건담

VIVANT을 보고

2025년 7월 3일 by 이상한 모자

밥 먹으면서 VIVANT이라는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를 보았다.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런 노골적인 군사팽창주의적인, 아베신조적인 열망을 숨길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는구나 라는…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보기 싫으면 적당히 끊고 가시기 바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별반’이라는 육상자위대 산하의 초법적 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이 드라마 소개와 더불어 ‘별반’의 모티프가 된 실제 ‘별반’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사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81901260000926

하여간 이 ‘별반’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대단한 녀석들인데, 주인공인 사카이 마사토는 국제적 테러 조직 ‘텐트’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어… 일부러 휘말린 건지 휘말리게 된 김에 개입하는 건지 아무튼 휘말리게 되어 ‘텐트’를 조사하게 된다. 이 과정에 일본 경찰의 멋진 정보분과인 외사과 소속의 아베 히로시와 사막을 건너는 등 대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얘기로 시작해서 뭐지 인디존스 같은 얘기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고 뒤에 가면 사카이 마사토가 ‘텐트’ 지도자인 야쿠쇼 코지의 어릴적 헤어진 아들이라는 걸 깨닫는 등 꽤 흥미진진한 전개로 이어진다.

여기서 이제 일본 국뽕과 대일본제국 만세 같은 얘기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게 뭐냐면, 사실 젊은 시절 하야시 켄토였던 야쿠쇼 코지는 아베 히로시와 마찬가지로 공안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공안 소속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가상 국가인 발카에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내전에 휘말리는데, 이래 저래 하다보니 발카인들과 용병집단을 형성해 군사 활동을 대신 해주고 돈을 벌어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일에 평생 몰두해 거대 테러조직을 만들게 되었고, 그 테러 조직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내전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등의 활동을 뒤에서 펼치고 있으며 전과가 없는 ‘깨끗한’ 후계자도 키워 가상국가 발카를 번영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더라 라는 것인데…

이게 뭐냐면, 결국 아베 시절의 적극적 평화주의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인 야쿠쇼 코지가 발카인들을 돕다가 무장세력화 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다. 그런데 거기서 비극으로 가지 않고 발카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실제 성과를 낸다는 것은 무슨 얘긴가?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평화도 가져오고 개발도 하고 부도 쌓게 만들고 다 해준다 이거다. 대동아공영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이렇게 하는 와중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이건 별반 소속인 아들 사카이 마사토가 해결해주게 된다는 것이다. 별반 사카이 마사토의 활약 덕분에 가상국가 발카에는 실질적 번영이 찾아온다. 근데 별반은 뭐다? 초법적 특수부대이다 이거다. 여기서 아베 시대의 특정비밀보호법, 안보법제 이런 걸 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결국 야쿠쇼 코지는 마지막엔 일본으로 돌아와 개인적 복수를 하려다가 사카이 마사토에게 죽는데, 그 순간에도 ‘역시 일본을 지키려고 아버지까지 죽이는 너는 역시 내 아들! 자랑스럽다!’라고 한다. 사카이 마사토는 눈물을 흘리고… 근데 야쿠쇼 코지가 하려던 개인적 복수가 뭐냐면, 자신과 가족이 발카에 파견됐을 때 희생되도록 내버려 둔 부패 정치인을 죽이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애국자… 였던 피해자 대 부패 정치인’, 이 구도는 극우정치를 보며 이미 익숙해졌다. 그러니까 구세대가 손에 피 묻히고 전쟁 일으키고 이런 게 다 외국에 번영을 안겨주고 이후 세대를 잘 살게 해주려고 한 거다, 책임은 뭐 지라면 어느 정도 지겠지만 잊지 말아야 한단다 알겠니? 뭐 그런 정서겠지.

그 외에도… 발카인들이 계속 일본 칭송을 하는 등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수가 있나 싶은 장면이 계속 나온다. 뒤로 갈수록… 극우 드라마 어쩌구 라고 해도 이건 정말 부인할 수 없겠군 싶은 생각이 강해진다. 아니 근데 요즘 극우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얘길 많이 보았는데, 2030 남성 얘길 하면서 말이다. 함부로 극우라고 하지 마시오! 이 얘기 엄청 봤거든? 근데 다들 일본 정치에서는 뭐 스스럼없이 무조건 다 극우라고 하더라고. 아무튼 군대도 없고 무언가가 거세?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일본 버전의 극우적 세계관을 느끼고 싶다면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VIVANT, 비반, 사카이 마사토, 아베 히로시, 야쿠쇼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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