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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Author: 이상한 모자

이딴 걸 선거라고

2026년 6월 5일 by 이상한 모자

바둑은 두는 것만큼 복기가 중요하다고 했다. 여론조사부터 투표용지 매수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도대체 뭔 소리를 하며 살고 있나 복기하기 위해 남긴다.

오늘 오전부터 모 유튜브에 가서 여러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 유튜브를 위스퍼X로 화자 분리 자막 추출해가지고 AI한테 내가 한 얘기만 내용 요약을 시켰더니 이렇게 뽑아왔다. 다소 거칠게 정리했고 중간에 그냥 넘어간 부분도 있어 보이지만 대체로 결은 맞는 거 같다.

김민하 평론가는 이번 선거 결과를 전체적으로는 민주당 및 집권 세력의 ‘대승’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서울, 부산 북구 갑, 평택 등 핵심 격전지에서 패배한 것을 두고 “시험은 다 잘 봤는데 국영수를 망친 격”이라며 뼈아픈 결과라고 분석합니다. 유권자들이 집권 세력에 힘을 실어주면서도, 특정 지역에서는 보수 진영의 공세를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김민하 평론가가 제기한 세부적인 주장과 분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서울시장 선거 패배 원인 분석

서울은 본래 여론조사 추이 상 민주당에게 불리하고 오세훈 후보가 앞서가는 어려운 판이었습니다. 정원오 후보는 전통적인 민주당의 색채(세금 부과, 이념적 접근 등)를 지우고 ‘유능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부각하는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세훈 시장을 반드시 심판해야 한다는 ‘반(反)오세훈 전선’을 강하게 형성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도봉, 관악, 금천 등 민주당 전통 지지층의 투표율을 충분히 끌어올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반면 오세훈 후보는 정원오 후보를 ‘제2의 박원순’으로 규정하는 프레이밍 전략을 썼고, 이것이 강남권 등 보수 유권자들에게 부동산 규제와 세금 폭탄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여 보수층의 높은 결집과 압도적인 투표율을 이끌어냈다고 지적합니다.

2. 20대 남성 및 보수 유권자의 심리 분석

20대 남성 일부가 보수화되거나 극우적 담론에 동조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지위 박탈에 대한 위협’과 ‘피해자성’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지 않았더라도, 한정된 자리를 두고 다른 불이익을 받던 존재(여성 등)들이 치고 올라와 자신이 도태될 수 있다는 공포를 느낍니다. 보수 진영은 재개발·재건축을 막는 세력을 ‘자유를 억압하는 좌파’로 이념화하여 이들의 공포와 불만을 성공적으로 포섭했다고 분석합니다.

3. 국민의힘 당내 권력 지형과 향후 전망

장동혁 체제는 선거 과정 내내 지역 거부 반응과 역효과를 낳았으므로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봅니다. 반면 한동훈 후보는 선거 막판 장동혁과의 거리를 두며 정권 견제론을 흡수하는 전략을 썼고, 당선 이후 영남과 부산 지역의 지분을 바탕으로 당내 영향력을 키울 것으로 전망합니다. 특히 서울시정에 묶여 운신 폭이 좁은 오세훈과 달리, 한동훈은 당 밖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하며 반(反)장동혁 전선 안에서 임시 동맹을 구축해 나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4. 부산 북구 갑 및 평택 선거 실패 요인

부산 북구 갑의 하정우 후보에 대해서는 애초에 색깔이 옅은 후보를 내세워 중도 스윙보터층을 흡수하려던 전략이 한동훈의 영리한 캠페인에 막혀 실패했다고 분석합니다. 한동훈은 하정우를 지역 기반이 강한 전재수(시장 후보)와 철저히 분리시켜 하정우의 무능함을 부각했고, 결과적으로 유권자들이 ‘시장은 전재수, 국회의원은 한동훈’을 뽑는 교차 투표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평택 선거에서 벌어진 조국혁신당과 민주당의 갈등은 시기가 적절치 않았던 섣부른 합당 제안과 선거 연대 결렬이 낳은 ‘외통수’라고 비판합니다. 조국혁신당이 독자적인 제3당으로서의 비전을 증명하지 못한 채 민주당 지지층을 빼앗기 위해 네거티브 캠페인에 몰두하는 모순을 보였다고 지적합니다. 김민하 평론가는 정치인 조국이 이번 선거를 통해 이른바 ‘조국 사태’에 대한 대중의 평가를 긍정적으로 반전시키는 기회로 삼았어야 했으나, 오히려 과거의 부정적 인식을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고 꼬집습니다.

5. 선관위 논란 및 부정선거 음모론에 대한 시각

투표 용지 부족 사태 등으로 불거진 선관위 부실 관리 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시스템 개편이 현실적으로 매우 꼬여있는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업무 감사를 거부하는 논리, 즉 민감한 정치 자금 및 후원금 내역이 집권 세력에게 넘어가 정치 탄압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우려를 무작정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이 사안에 끼어들면서 합리적인 제도 개선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세훈 측의 ‘제2의 박원순’ 프레임 전략에 대해서는 선거 과정에서 좀 심각하다고 봤는데, 이 얘기를 글로도 썼었다. 아래 글이 5월 21일 입력으로 되어 있으니까 실제 쓴 거는 그 이틀 전이나 그럴 것이다. 물론 글로 쓰기 전에 이미 말로도 떠들었다.

‘정원오는 제2의 박원순’ 프레임의 최종 기착지는 부동산 문제다. 유권자가 보기에 두 후보는 부동산 대책 철학에서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 같지는 않다. ‘착착개발’이냐 ‘신통기획’이냐 등의 레토릭, 공공과 민간의 역할 등 세부 정책 차이가 있을 뿐 세금으로 집값 잡는 데 반대하고, 공급 중심 대책을 앞세우며, 1주택자 세부담 완화를 주장하는 방향은 유사하다. 이러면 실행 의지나 실적이 쟁점이 되는 게 당연한데, 이 경우 현직 시장에 아무래도 불리한 논쟁 구도가 형성된다. 직전까지의 시정 평가 위주로 논의가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 후보가 “박원순 시장 시절 재개발 재건축 사업 구역 389군데를 해제했다” “박원순 전 시장 시절 부동산 시장이 완전히 빙하기에 접어들었다”고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은 이 구도를 뒤집기 위한 시도다. ‘오세훈 시정’에 대한 평가 구도를 ‘박원순 시정’ 평가로 뒤집어 자신의 위치를 ‘디펜딩 챔피언’(전 대회 우승자)이 아니라 ‘도전자’에 놓이도록 해서 ‘언더도그’(약자)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박원순=운동권=성추문=민주당=부동산 정책 실패’라는, 반대의 대상으로서 개념 사슬은 이를 위해 고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슬이 ‘이재명=문재인 정권’ 프레임과 연결되면 오세훈식 포퓰리즘 동원 논리가 완성된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9356.html

이대남 얘기는, 또 이 얘기 하면 할 말들 많아 가지고 이 얘기 저 얘기 하겠지만, 얘기가 나와서 한 얘기니 그냥 넘어가시고, 피해자 정체성이 극우포퓰리즘의 연결 고리 중 하나가 된다는 얘기는 최근 한겨레에 실린 신진욱 교수의 글에도 나온 바 있다.

오스트리아 언어학자 루트 보다크(Ruth Wodak)에 따르면, 신극우 전략은 ‘도발-부인-피해자화-전치-주류화’의 패턴을 보인다. 계산된 모호성으로 도발적 메시지를 던지고, 비난에 처하면 의도성을 부인한다. 제재가 가해지면 ‘전체주의’, ‘파시즘’을 비난하며 자신을 억압받는 피해자로 만들고, 쟁점을 ‘표현의 자유’로 전치하여, 자신들의 도발을 사회가 관용하게 만든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60540.html

이스라엘 인사가 쟁점을 전치하는 과정에 좌파 혹은 리버럴 이론을 왜곡해 갖다 쓰는 현상이 일어난 바 있는데, 그 피해자 중 하나가 심지어 지젝이었다는 점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감정을 느끼게 된 바도 있었다.

충격적이게도 고프만은 정책 결정자를 위해 불법적 폭력을 대신 저지를 수 있다는 논리에 대한 지적 근거로 나를 꼽았다. 물론 비판 이론이 반동 세력에 의해 전유되는 현상이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이스라엘군은 오랫동안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포스트구조주의 개념을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도시전 수행의 작전 이론에 활용해왔다. 디지털 신봉건주의의 설계자라고 할 수 있는 피터 틸은 르네 지라르를 왜곡하여 전유한다. 우파 포퓰리스트들 역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좌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혹시 내 이론 안에 고프만이 전유할 만한 요소가 있을까? 단호하게 말해 없다. 나의 작업은 현대 국가권력이 자신의 법질서를 위반해가며 불법적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이었다. 고프만은 이를 국가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뒤집어 권력이 법을 위반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전략으로 사용한다. 억압자가 자신과 같은 이들을 비판하는 이론을 왜곡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범죄적 활동을 정교화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아이러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61248.html

놀랍게도 우리 역시 이러한 일을 이미 겪었는데, 그게 바로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타령이다. 문재인을 반대하는 것이 곧 자유민주주의라는 타령을 하고 염병을 하더니 지가 사실상의 독재인 내란으로 달려갔다.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론으로 내란을 정당화 한 셈이다. 근데 이런 방식의 접근(커피를 선택할 자유 등)이 아직도 젊은이 일부에는 먹힌다. (먹히는 이유가 있는데 그 얘기는 많이 했으니 생략.)

한동훈 씨가 보수 재건을 한다는데 그 내용이 2022년 윤석열(상대를 반대하기만 하면 저절로 뭐가 된다는…)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오늘 어느 방송에서 2024년 윤석열 반대로만 보수 재건이 되지 않는다, 2022년 윤석열까지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 얘기를 오늘 낸 글로도 썼다.

물론 대부분의 뉴스 콘텐츠 소비자들에게는 선거 진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포퓰리즘, 오세훈, 정원오, 지방선거, 한동훈

엘리트 운동권 활동가 의식

2026년 5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김변호사님하고 유튜브 방송 하는데 핀트가 잘 안 맞는다고 느낀 부분이 유시민 등의 저 행보의 본질이 뭐냐는 거였다. 나는 집권세력 내 노선갈등 문제로 설명했는데, 김변호사님은 차기 대권주자 살리기 아니냐고 했다. 난 둘 다일수도 있고, 그게 그거일수도 있다는 입장이어서 사실 상관은 없는데, 핵심은 김변호사님이 ‘노선 갈등으로 보기엔 부족하다’란 주장의 차원으로 저 얘기를 꺼냈다는 거다.

노선갈등론은 이런 구도다. 이재명 정권의 중도보수론이 주류화 노선이라는 건 나도 여러 글을 통해 수차례 설명한 바 있다. 검찰개혁 국면에서 그게 원래 더블민주당-시민사회의 포퓰리즘 노선(이 노선에선 비주류를 자처하는 게 기본이다)과 충돌했다고 본다는 시각도 여러 글로 나타냈다. 이재명 정권은 완벽한 건 아니어도 어쨌든 주류화로 가자는 거고, 유시민 등은 이유가 뭐든 포퓰리즘적 정치 스타일을 유지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구도가 아니라 ‘그냥’ 권력싸움으로 보면 모든 해석이 훨씬 쉬울 것이다. 명청대전, 충정로 대통령, 조국 살리기, 친명 대 친문… 누가가 누구를 미워해서, 옛날에 악연이 있어서, 지역 공천 등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서… 뭐 등등. 맞다. 여의도 정치가 대개 그렇게 돌아간다. 그렇다면 노선 갈등이란 어떤 경우에 쓸 수 있는 말인가? 순수하게 노선 대결로만 사안을 설명할 수 있을 때 써야 할 말이다. 좌측으로 가야한다! 아니다 우측으로 가야한다! 또는? 강경파로 가야 한다! 아니다 온건파로 가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지금 우리가 노선 대결이었다고 평가하는 모든 이벤트를 다 ‘순수한 노선 대결’로만 평가할 수 있는가? 1917년이 되어서야 볼셰비키에 합류한 트로츠키의 행로에 그 개인의 명예욕이나 허영심, 개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일까? 더 갈 것도 없이, 윤교수님과 ‘절윤’을 못하는(아직 있다면…) 일부 구 AMC 인사는 인간적으로’만’ 그런 것인가? 어떤 면에선 노선적으로도 그런 것 아닌가?

하다못해 자전거 동호회에도 노선은 있다. 정치 얘기를 허용하자는 노선, 금지하자는 노선… 음주 게시물을 올려도 된다는 노선과 안 된다는 노선… 하루에 게시물을 5개만 올리라는 노선과 제한을 두지 말자는 노선… 거기에는 동호회의 미래를 둘러싼 진지한 고민과 전략의 차원도 있겠지만, 개인의 욕망과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 동호회 내부의 권력다툼이라는 맥락 또한 모두 결합되어 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도 다 노선 다툼이 있다. 이건 나보다 여러분이 더 잘 알 테니 길게 안 쓰겠다.

하여간 이런 걸 다 역사는 노선 경쟁으로 기록한다. 왜? 그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평론도 마찬가지다. ‘쟤네들이 아귀다툼한다’고 하고 끝내면 남는 게 뭔가? 의미를 추출해낼 수 있어야 생산적인 전망도 할 수 있고 방침도 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집권세력이 ‘중도보수’를 자처하며 주류화를 감행할 때와 유시민 주장처럼 포퓰리즘적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왜 연대연합을 안 하느냐’라고 할 때 진보들의 대응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나?

그런데 이게 왜 어떤 이들에게는 절대로 노선 문제가 아닌 것일까? 1) 노선 논쟁은 좋은 것이므로 좋은 것을 기성 정치에 줄 수 없다? 2) 노선 논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유도 있겠지만… 일단 셀프반론 해보자면 1)이라면 노선 논쟁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런 개념 때문에 생산적으로 진행이 안 되는 논의가 너무 많다. 2)라면 이건 엘리트-활동가 의식의 발로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특히 2)에 대해서 일반론적인 접근? 또는 회고를 해보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 대중은 노선을 가질 수 없다는 인식이다. 노선은 훈련되고 단련된 활동가가 부단한 노력을 통하여 연마하는 종류의 것이다. 쁘띠부르주아들이 뭔 노선은 노선이냐? 하루 하루 살면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면서 오늘 얘기 다르고 내일 얘기 다르고 그러는 거지. -> 제가 지금 괜히 호들갑떨며 오버해서 표현한 것이지만 어쨌든 이런 느낌적 느낌인데, 하여간 활동가라는 주체에 대한 엘리트적, 특권적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진정한 활동가 되지 못함’에 대한 자기 비하, 자기 반성, 자기 학대가 이어지며 ‘진정한 활동가’로 자리매김 한 선배 세대에 대한 존경과 어떤 종류의 섬김이 지배하는 모종의 운동권 문화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중운동을 함께 한다고 생각한다기 보다 대중운동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말로는 또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정작 활동가적 견해가 필요할 때는 대중운동의 뒤로 숨는다. 그리고 나서는 ‘진정한 활동가 되지 못한’ 다른 활동가를 막 꾸짖는다. 그러나 이 ‘진정한 혹은 그것을 지향하는 활동가’들의 삶을 실제로 들여다 보면 그들이 대상화 하는 ‘대중’과 별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며, ‘운동권’을 벗어나면 이들의 취향과 행동양식도 뭐 당연한 것이지만 대중 그 자체이지 뭐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도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부끄러워 한다.

뭐 각 개인이 그러고 사는 것은 상관없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이러다보니 예를 들면 요즘 극우 담론 분석 같은 게 안 된다. 왜냐면 이들이 보기에(물론 뭐 꼭 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극우란 이념적으로 단련된 극우-활동가가 늘어나는 문제이지, 대중이 이리 저리 휘둘리며 어느 시기에 불만을 극우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걱정은 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뭐 이런 다음에 별 관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를 휩쓸며 좌파를 KO시킨 극우포퓰리즘은 이들이 진지하지 않게 보는 단면을 진지하게 보지 않으면 분석이 안 된다. 그것은 주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원의 문제이며, 담론 구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메모의 대부분은 김변호사님에 대한 얘기가 아니며, 운동권 일부를 대상으로 한 내 편견에 대한 얘기다. 근데 그 편견에 대해 말하자면,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NL과 대장정 출신들에 많지 않았는가 하는 개인적 경험이… 말했잖아! 편견이라고.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운동권

라라아는 내 어머니가 되어 줄 여성이었다

2026년 5월 28일 by 이상한 모자

요즘에는 밥을 먹으면서 제타 건담을 다시 보고 있다. 어릴 때 보던 것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다시 보면 볼 수록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명작이다. 너무 대단하다. 너무나 대단하다. 이 새끼들아 건담 그만 만들어! 제타 건담을 보면 되는데…

역시 나이를 먹으니까 샤아에 더욱 감정 이입을 하게 된다. 특히 제타 건담의 샤아에 대해서다. 비슷한 처지 아닌가 할 때가 많다. 샤아를 통해서 제타 건담을 재구성해보면 이게 로봇물의 탈을 쓴 정치극이라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년전쟁의 구도를 생각해보면, 지온공국은 거의 확실히 소련을 묘사했다는 생각이다. 지온 줌 다이쿤은 레닌, 데긴 소도 자비는 스탈린에다가 비유를 하면 딱 떨어진다. 그런 면에서 79년도 건담은 레닌의 아들(사상적으로든 뭐든)이 스탈린 일가에게 복수를 하는 복수극의 요소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봐도 될 것이다.

여기서 라라아의 존재가 중요한데, 여기서 라라아는 치정 관계를 넘는 무언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건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지오니즘의 구현이다. 샤아는 라라아를 통해 자기 아버지의 사상적 완성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아무로가 그것을 채간 후 심지어 죽여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라라아의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에 샤아는 넘지 못할 벽을 갖게 되었다. 즉, 라라아의 죽음은 샤아로서는 단지 사랑의 실패가 아니다. 뉴타입으로서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흠을 남긴 것이다.

제타 건담은 이후 샤아의 시도가 좌절에 부딪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서사를 보려면 감독인 토미노 요시유키가 전공투 직전 세대라는 점과 제타 건담이 나온 연도가 1985년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토미노 요시유키로서는 60년대 안보투쟁에서부터 80년대의 금권정치에 이르기까지, 동시대의 감각을 갖고 정치극을 설계했을 것인데… 그 모티프는 독재, 냉전, 동구권, 자민당-사회당, 공산당-혁공동 등의 구도가 결합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구도를 전제해서 샤아의 행보를 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제타 건담에서 샤아는 여전히 아버지의 이상(좌파)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지온의 아들로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스페이스노이드의 권리 보장과 인류의 혁신을 위해 지구권의 부패-독점 권력(시로코 이후에는 엘리트-능력주의)인 티탄즈(집권세력)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출신지인 액시즈(구 좌파)는 과거의 유물인 자비가 부흥에 매달리고 있다. 더군다나 자비가(스탈린주의자)는 원수지간이므로 함께 할 수 없다. 따라서 반티탄즈 인민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에우고(개량주의+리버럴)에 몸을 의탁해 활동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전면에 나서기는 껄끄러운데, 에우고도 결론적으론 지구연방의 일파이기 때문이다. 블랙스 포라가 사망하면서 샤아에게 지도자를 맡기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힌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다카르 연설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감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부 혹은 빈객의 자리인 것이지 대표성을 갖는 입장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샤아는 에우고에서 희망을 보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꿈꿨던 인류의 혁신이 자생적으로 이뤄지는 살아있는 사례, 즉 카미유 비단의 성장이다. 카미유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인류의 혁신으로서 제대로 안착했더라면 샤아도 에우고로 상징되는 온건 노선을 통한 해법을 후대에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타 건담의 마지막에서 카미유는 망가져 버린다.

이제 샤아의 선택지는 크게 제한된다. 첫째, 자비가의 망령이 지배하는 액시즈는 여전히 선택지가 아니다. 둘째, 에우고는 이겼지만 지구연방의 기성 체제에 재흡수되었다. 셋째,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조건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한계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를 택하는 것 뿐. 그래서 더블제타에서 망해버린 액시즈를 접수해 지온의 재흥을 내걸고 지구권에 전쟁을 걸어 강제로 인류를 우주로 끌어 올리는 강경책을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잖은가?

이 시점에 샤아는 충분한 자기확신을 갖고 있을 수 없다. 사이코 프레임을 아무로에게 넘긴 것은 자존심이나 호승심 같은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체제에 굴복해 굴욕을 당하면서 애완견으로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샤아가 정답을 찾은 것도 아니다. 지구에 액시즈를 떨구는 게 어떻게 답이 되겠나. 그렇다면 적어도 동등한 기회를 줘야 결판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맞든, 내가 맞든… 더군다나 ‘사이코 프레임’ 아닌가.

마지막 장면에서 꼴사나운 두 남자의 논쟁은 그런 차원으로 느껴진다. 두 남자는 인류를 혁신으로 이끌기는 커녕, 바로 앞에 있었던 사람조차(퀘스 파라야) 진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없다. 그저 전쟁-기계로 활용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다. 둘 다 뉴타입을 자처하지만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에는 지속적으로 실패한다. 단, 아무로는 그래도 라라아와 그러한 경험을 나눈 일이 있다. 샤아는 없다. 앞에 본 것처럼 아무로가 라라아를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샤아가 자신을 비난하는 아무로에게 말하는 것이다. 나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 라라아를 죽인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결국 내가 이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인데! 나를 한계 속에 가둔 네가 뭔 인류에 따뜻한 빛을 보여주니 어쩌니 하는가!

그래서 그 결판의 결과는 다들 아는대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인류가 우주로 나와야 한다느니, 인류의 혁신이니 뭐니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다. 살고 싶고 서로를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실한 순간에, 인류는 서로를 이해해 네오지온의 병사들까지 액시즈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정반대의 진영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네오지온 병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갑자기 왜 액시즈에 달라 붙었겠는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언가를 느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이코 프레임이 이 모든 의지와 공명하고 있었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샤아 아즈나블, 역습의 샤아, 제타 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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