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백서 흑서 얘기를 했다. 백서에 대해선 그랬다. 조국 씨가 억울한 게 있을 수 있고 검찰과 언론의 만행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가가 실제로 한 일들만 따진다 하더라도, 그걸 기득권이면 모두 하는 일로 일반화하고 정당화 하는 게 옳은가? 우리 사회의 기준은 그 정도면 되는 것인가? 흑서에 대해선 그랬다. 분명 새겨들을 말이 있다. 특히 이 정권 지지자들 사이에 ‘대안적 서사’가 만연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은 그러한 ‘대안적 서사’에 또다른 서사로 대항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게 아닌가 의문이라고 했다. 물론 권력이 기획을 하다시피한 백서와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어댄 얘기를 책으로 만들고 흑서랍시고 하는 걸 동렬에 놓고 비교할 일은 아니긴 하다.
아무튼, 그럼에도 세상 만사 다 똑같아서 지겹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횡행하는 논리… 조국이 미워서 윤석열을 지지하겠다든지, 윤석열이 미워서 조국을 지지하겠다든지… 정권에 속았다 이러면서 사뭇 비장하게… 이런 게 말이 되나? 조국 윤석열이 선거 나갔습니까? 지지하고 말고 하게? 걔네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고 억울한 건 억울하다고 하고, 그와 별개로 정권의 성격을 평가하고… 그러면 그만 아닌가?
이제는 뭐만 하면 박근혜랑 뭐 다르냐, 최순실이랑 똑같다 이러는데 물론 굳이 같은 점을 찾자면 찾을 수도 있다. 그걸 근거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도 그걸 성실히 하면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냥 인상 하나를 단편적으로 떼서 봐라 박근혜랑 최순실이랑 뭐가 다르냐, 이러는 건 그럼 뭐 다른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더 낫다’는 게 아니고,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이걸 앞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이해를 못해. 더블민주당에 실망했으니 난 이제 보수정치를 지지… 이게 상품논리라고 얘기를 해도… “문정권이 박정권보다는 낫다”는 단순비교로 받아들인다. 빼빼로에 실망했다고 새우깡을 사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게 아니고 원래부터 새우깡을 살 생각이었고 난 새우깡이 좋다… 그러면 새우깡을 사세요 누가 뭐라고 합니까?
왜 이런 세상이냐? 원래 이게 근대 민주주의의 문법이다. ‘지지한다’는 게 핵심이 아니고 ‘반대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모양 이꼴로 사는 것이다. 이거 처음 하는 얘기 아니야. 작년에도 했지. 서초동 촛불 어쩌고 할때. 봐라.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은 무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반대’하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명확한 반대논리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2017년 조기 대선을 가능케 한 촛불집회 역시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운동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의제를 말하며 “촛불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야말로 이러한 반대 논리의 실천적 결론이었다. 28일의 시위도 마찬가지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검찰의 과잉수사와 이를 주도하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전횡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이의 실천적 결론이 ‘조국 수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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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과 남는 것은 오로지 이해득실과 손익계산이 정치의 본질이 되는 냉소적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어떤 가치판단이나 대의명분이 설 자리가 없다. 다들 어떤 당위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 가치와 명분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 세계관에서 앞서의 ‘열광’은 ‘각자도생’과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546
글을 하나만 쓴 게 아니예요. 지겨워.
대중이 직접 거리로 나오는 ‘투쟁’은 대개 비주류 의식의 발현이다. 기성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기득권에 대항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서초동’과 ‘광화문’은 서로를 가리켜 기득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신의 기득권적 속성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따라서 이것은 텅 비어있는 대중투쟁이며 양쪽의 대립은 기만적 포퓰리즘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배후가 되고 있는 정치세력들은 각자 이런 상황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정치적 이득을 재생산하기 위한 정치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실종된 것은 ‘대의정치’가 아니라 기만적 대립구도에 파열을 낼 ‘대안적 정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 중 하나는 ‘서초동’이냐 ‘광화문’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대중투쟁의 ‘스펙터클’이다. 200만이니 300만이니 하는 데에만 몰두해서는 이 함정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 언론과 기성 정치는 빠져 나가긴커녕 오히려 스스로 함정 속으로 몸을 던지는 상황을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다. 이런 자해적 몸짓이 아니라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이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3224
이런 똑같은 관계가 백서와 흑서 사이에도 성립한다고 본다. 이제 또 그러겠지… 무슨 얘긴지 다 아는데 난 더 이상 이 정권을 지지할 수 없다… 난 처음부터 지지 안 했으니까 그건 맘대로 하시라고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