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안내
  • 이상한 모자
  • 야채인간
  • 김민하 공화국
  • 신간 안내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포퓰리즘

윤석열 이재명이 없어지면 뭐가 해결되나

2024년 11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오늘은 아침에 그나마 있던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좀 여유가 있다. 이제 12월 중순이 되면 그나마 매일 오전에 있는 일도 없어질 것이다. 이유가 다 있는데, 그건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할 일 없는 주말이 됐다는 것은 아니고, 마감을 코 앞에 둔 글쓰기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토일간 글쓰기에 집중해야 한다. 소재는 유머이다. 대략의 골조는 구상했다. 유머의 조건, 거리두기, 냉소, 시니시즘과 키니시즘, 이상을 잊지 않는 것의 소중함 등에 대해서 쓸 것이다.

하여간 어제는 이런 글을 보았다.

이재명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정치의 구조적 변혁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두 반민주적 독재적 지도자에게 온 국민이 포획돼 피로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다. 한 사람은 마땅한 국민적 요구에도 마이동풍 식으로 잘못된 제 길만 고집하고, 또 한 사람은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철옹성을 쌓은 채 오직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제1당의 정치력을 허비하고 있다. 어느 쪽도 틈새는 보이지 않는다. 대안도 거론할 수 없는 이 절망적 정치 상황은 최소한 민주화 이후 최악이다.

국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지는 지금, 내부의 변화가 무망하면 외력에라도 눈길 줄 수밖에 없다. 그 외력(이 대표로 한정하자면)의 하나가 사법 리스크일 것이다. 정상 사법절차에 따른 그의 불가피한 후퇴가 강고한 정치구조에 균열을 내는 계기가 되리란 기대를 숨기진 않겠다. 누차 강조했듯 이 대표가 사법리스크를 벗을 길은 처음부터 없었으며, 여태껏 그래왔듯 방탄 외의 운신이 어려워 그 막강한 다수의 힘으로도 윤 정권을 제대로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전에 쓴 문구를 다시 소환하자면, 법적 판단은 판사 개인의 소신에 따른 것이나 그 무게는 종종 시대적 흐름을 좌우할 만큼 무겁다. 어쨌든 새 정치에 대한 희망은 또 아득히 멀어졌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12816270001212

이런 얘기를 나도 종종 듣고는 하는데, 이재명이 없어야 윤석열도 혼내줄 수 있고, 그래야 나라가 똑바로 된다 뭐 이런 식의 얘기다. 정치에 대한 얘기, 판결에 대한 얘기도 다 좋고, 이재명 물러나라 윤석열 탄핵하자 이런 얘기도 다 좋은데, 그 결과가 뭔가가 해결되는 것일까?(주장할 수 있고, 이재명 사퇴나 윤석열 탄핵이나 각각의 의미가 있지만, 이 글에서 얘기하는 대로 그게 시대적 흐름을 바꾸고 새로운 정치를 만드는 어떤 대단한 뭐가 되느냐는 거다. 아래의 얘기는 이 전제에서 하는 얘기임.)

오늘은 이재명-윤석열-한동훈이 삼각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모 주간지의 기사를 읽었다. 여의도와 그 근방의 사람들이 그런 얘길 한다는 것이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411300900011/

요약하면 이재명 핑계로 윤-한 갈등이 봉합돼있던 게, 공직선거법 1심 판결로 이재명이 위험해지니까 바로 친윤에서 한동훈 죽이기에 나선 거고, 이재명이 특검을 다시 들고 나오니까 또 친한이 이걸로 친윤에 반격하니 당분간 봉합 구도로 가고 뭐 그런 건데, 역시 이재명 사법리스크에 사법부가 뭔가 대못을 딱 찍는 순간 이 균형이 무너지지 않겠느냐 그런 전망.

이 타임라인이 팩트냐에 대해 좀 의문이 있긴 한데, 삼각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평가 자체는 그럴듯한 얘기다. 다만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거는, 여의도 얘기를 그런 식으로 풀면 서로 적대적 공생이 아닌 사람들이 지금 어디있나? 셰미래 뭐라는 분들은 어떤가? 이준석의 개혁신당은? 여의도 사람들이 어떻게 얽히고 섥히는지는 이번에 미륵불 말씀의 연대기를 정리해나가다 보면 그 일부를 알게 된다.

이 얘기를 뒤집으면 어떻게 되느냐, 이재명 윤석열을 제거해봤자 짧은 열광과 실망이 있을 뿐, 그 뒤의 상황은 비슷하다니까. 더블민주당에선 누구 말마따나 ‘이재명이 손들어 주는 인물’이 바통을 이어 받는 거고, 범보수권에선 한동훈과 팀 미륵불(오세훈 이준석 등등)이 헤쳐모여 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뭐 달라지나? 아까 앞에 글 쓰신 분은 또 똑같이 한탄할 거고…

그런 점에서 이건 어떤 악당들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를 이렇게 만드는 시스템의 문제라고 늘 말씀드리는 것임.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게, 그렇지 않고서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똑같이 될 수가 있는가? 아래는 최근 일본 선거 관련 얘기 누가 쓴 거. 이런 글 자체가 비슷한 증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12808010001724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윤석열, 이재명, 이준석, 포퓰리즘, 한동훈

트럼프의 선거-통치 담론에 대한 짧은 생각

2024년 11월 13일 by 이상한 모자

전적으로 내식으로 말하는 거지만, 선거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통치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선거-통치 담론이다. 미국 대선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을 계속 보는데, 아직은 기존의 틀 혹은 인식에다가 우겨 넣는 식의 얘기가 많은 거 같다.

지난 번에 여기다가도 썼지만, 바이든 심판론에 트럼프 심판론으로 맞서는 거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대개 인정하는 거 같다. 그렇다는 전제 하에, 하여간 트럼프가 이겼으니 트럼프의 무엇에 사람들이 반응했고 해리스의 무엇에 반응하지 않은 건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번에 느낀 건 트럼프의 여러 선거용 논리 중 먹혔던 게 어떤 ’법치‘ 논리였다는 거다. 대표적으로 합법적 이민자와 불법적 이민자를 가르는 논리가 그렇다. 어차피 정치적 효과는 백인-남성-기득권 중심과 소수자 배제 및 혐오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 그러니까 포장지가 그랬다는 것인데, 이게 최근 ’이대남 정서’와 코드가 맞는 게 있다.

가령 ’이대남 정서‘라는 건 본질은 어떨지 몰라도 포장은 ‘팩트’, ‘논리’, ‘법치’로 자기들이 부르는 무언가로 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건 ‘선동’, ‘감성’, ‘생떼’이다. 가령 어느 시민단체가 ‘서민 보호를 위해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이를 위한 증세를 하자’는 주장을 내걸고 집회를 개최하면, 감성에 기초한 선동에 나선 좌파들이 생떼부리는 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들을 ‘참교육’ 하기 위하여 복지 혜택 줘봤자 놀고 먹는데 익숙해지기만 하는 사람 스토리 같은 걸 팩트라고 들고와 무슨 주장을 하면서 그걸 논리라 하고, 이런 시위대를 경찰이 당장 해산시켜야 한다며 법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태도를 냉소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령 마약정책이라고 해보자. 이런 팩트-논리-법치의 세계관 속에 2차 감염부터 막기 위해 미사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장기적 접근 같은 건 위선에 불과한 거다. 하물며 이민자 문제는 어떤가? 대외문제는? 젤렌스키 좋은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이들에게 트럼프의 대답은 이런 위선 같은 건 다 일소하고 선동, 감성, 생떼들의 설 자리를 없애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여기서 트럼프의 태도가 먹히는 게 있는데, 트럼프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고 사람들에게 ‘알아서 따라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됐건 해법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다. 실제 그렇든 아니든.

이에 반해 해리스는 해법 제시라기 보다는 공감형이었다는 인상이다. 트럼프에 대한 여러분의 우려를 안다, 그러니 우리 함께 트럼프 집권을 막자…. 그 와중에 오바마가 나와서 막 꾸짖고…. 트럼프가 이기게 생겼는데 흑인 남성 너네들 정신 못 차리고 도대체 뭐하냐! 다시 해리스가 와서 우리 흑인 남성들 뭐 좋아해… 마리화나? (물론 대마 소지에 대한 처벌 완화는 트럼프도 얘기했다. 다만 맥락이 해리스와는 다르게 보였을 뿐. 언제나 중요한 건 맥락…)

트럼프식 21세기 극우포퓰리즘의 시대가 지나면 엘리트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한 모습으로 본능을 드러내며 귀환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한 바 있다. 최근 상황에 대입해보면 정확히 바이든이나 해리스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였다. 비유하자면, 트럼프가 조커라면… 팀 버튼의 영화에서처럼 조커가 배트맨의 아빠 엄마를 죽이는 바람에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 귀환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 거 같다.

트럼프 이후에 귀환하는 것은 또다른 트럼프다. 트럼프는 그대로지만 대중과 시대가 트럼프 이후의 트럼프로 트럼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법치의 외양을 하고 있다. 조커가 그저 조커로서 환호를 받는 게 아니라, 배트맨으로서 환호를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마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도 엘리트처럼 부패하고 엘리트처럼 무너질 것이다. 트럼프처럼 부패하고 트럼프처럼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제 일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어서 급히 마무리 함…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미국 대선, 엘리트주의, 트럼프, 포퓰리즘, 해리스

흙뷁요리사의 결말 – 언더독 엘리트

2024년 10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계속 강조하지만,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다만 계속 기사가 나오고, 또 유튜브 등에 접속하면 숏폼으로 계속 뜨고, 어떤 사이트를 가도 이 얘기를 소재로 한 게시물이 올라오니 내용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걸 토대로 나만의 뇌피셜을 얘기해보면….

전에 쓴 메모에서 이 쇼는 대중과 엘리트의 대립을 재현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자조 얘기를 했는데, 호프스태터가 얘기한 자조라는 게 뭐냐면 이런 거다. 기득권이 말하는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이니 뭐니 이런 것은 필요 없고,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것 이게 진정한 지식이고 진정한 지혜이며 능력이다 라는…. 이게 산업시대 자본주의와 엮여 기업가 정신이니 하는 얘기로 표출된 거다. 당시의 자본가들 그러니까 기업가와 금융인들이 대학에서 길러졌나? 아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식과 이에 근간한 체계를 업신여기게 됐고, 이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토양을 형성했다는 게 호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지식과 결별한 상태인 기업가들의 활약상은 곧 새로운 기득권과 지식체계를 형성했는데 그게 현대 경영학이고 주식이론이고 금융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제가 흙수저 요리사가 이러한 조류에 대한 비유인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드린 것.

그에 반해 뷁수저 요리사들은(물론 그들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지만) 이 쇼에서는 이미지상 기득권-지식의 편(앞서의 구분법을 굳이 동원한다면)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것. 뷁종원과 안선생의 대립 구도가 그렇고 20대 80의 구도가 그렇고 이걸 굳이 ‘계급전쟁’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도를 갖고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에 대한 쇼(그게 아니면 엘리트-대중, 계급, 흑수저 백수저가 의도적으로 배치되는 이유가 뭐겠나)일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에서 흙수저 요리사의 우승은 사실 예견된 결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흙수저 우승자보다 많은 열광을 받고 있는 게 뷁수저 준우승자인 거 같다는 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거기서 주목해 볼 점은 이 뷁수저 엘리트의 경우 서러운 이민자 출신이라는 서사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분은 요리에 관한 능력에서부터 소위 말하는 ‘인성’, 그리고 구도자적 자세까지 모든 게 만렙인데 거기다가 언더독이다. 내가 볼 때는 언더독이라는 코드가 없었으면 앞의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전의 메모에도 조금 적었는데, 나는 이 쇼가 거칠게 말해 어떻게 대중이 포퓰리즘적 방식으로 주류화 되는지에 대한 얘기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적 정치의 성숙기(?)이기 때문에 그런 서사를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느끼는 것은, 그러니까 엘리트화 되는 포퓰리즘이라는 흐름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면, 동시에 언더독화 되는 엘리트주의라는 게 조명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현실정치에 한 번 대입을 해보시오). 그래서 언더독 뷁수저 요리사가 주목받는 세태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임.

제가 분명히 안 보고 쓰는 거라고 말씀드렸음. 그리고 여기다가 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넋두리나 하고 망상이나 적고 그러는 것이므로 좀 뭐라 하지 마시라.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반지성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1 2 … 5 다음 »

최근 글

  • 이단이 되어야
  • 주식 투자를 10억씩 하는 사람들의 훈계
  • 행복한 사람, 오지 오스본
  • 극우와 보수 구분하기
  • 비난을 위해 남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

분류

누적 카운터

  • 1,486,782 hits

블로그 구독

Flickr 사진

추가 사진

____________

  • 로그인
  • 엔트리 피드
  • 댓글 피드
  • WordPress.org

Copyright © 2025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Omega WordPress Theme by Theme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