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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엘리트주의

엘리트-포퓰리즘과 포퓰리즘-엘리트주의

2025년 8월 21일 by 이상한 모자

밥을 먹으면서 제로데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았는데 미국 사람들이 만들만한 전형적인 얘기다 싶으면서도 민주주의-포퓰리즘 대 독재-엘리트주의의 구도를 다루고 있어 흥미롭게 보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쓰진 않겠지만 자타칭 합리적-엘리트주의가 그 자신의 결함과 사건의 특수성 때문에 주어진 독재적 비상대권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플롯의 전개가 흥미롭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것보다 더 기만적인 데가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이해받기 어려운 얘기지만 그래도 쓴다. 언젠가 출판사 사장님이 다음 책은 뭘로 쓸 것이냐 하기에, ‘엘리트주의의 탈을 쓴 포퓰리즘’과 ‘포퓰리즘을 자처하는 엘리트주의’의 대결 구도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번 정권이 하는 일을 볼 때, 그리고 보수정치의 파국을 볼 때 이런 구도는 더욱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것은 이유가 있는데, 반대의 정치의 구도 속에서 주류 권력의 교체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가령 구 엘리트주의는 왜 포퓰리즘으로 전락하였는가? 포퓰리즘은 본질적으로 비주류 정치다. 과거 엘리트주의를 구현한 권력의 한 축이 연속된 파국을 맞으며 비주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에 경도되는 것이다. 그게 박근혜 이후 윤석열, 윤석열 이후 현재 국힘의 상황이다. 여기서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윤석열 이후 현재 국힘’이란 극우 유튜브에 포섭된 쪽이나 그들을 극우라 부르며 혁신을 자처하는 쪽을 모두 포괄한다. 이들은 모두 정권을 잡았을 때나 놓았을 때나 포퓰리즘적 논리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엘리트주의의 탈을 쓰는가? 가령 윤석열의 자유민주주의 타령이나 이른바 찬탄파들의 이재명 정권 공격은 자신들의 좌표를 엘리트주의 권력의 자리에 놓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들이 꼭 엘리트주의를 구현하고 있거나 그러고 싶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게 반대의 정치다. 내가 엘리트주의자이기 때문에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를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해야 하기 때문에 나를 엘리트주의의 자리에 갖다 놓는다.

하지만 엘리트주의는 본래 (굳이 제 식으로 표현하자면) 통치-책임성을 수반한다. 앞서 드라마 제로데이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인물이 권력자로서 과거 구현했고 구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윤석열과 그 후계자들(한동훈 포함)의 과거와 현재 행보는 그러한 것을 담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조건이 만나 ‘엘리트주의의 탈을 쓴 포퓰리즘’이라는 형태의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들이 상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것에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문재인 정권이 당선 직후 스스로 ‘피플파워’를 자처한 것에서 보듯(물론 이들은 그렇게 자처하였으나 이후 서술할 문제로 인하여 통치-책임성을 일부라도 가져야 했기에 실제 ‘피플파워’가 될 수 없었다), 이들은 과거 비주류의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포퓰리즘적 정치의 동원 논리가 작동했고, 한동안 한국 정치는 주류-독재-엘리트주의 대 반독재-민주주의-포퓰리즘의 구도 속에 있었다.

그러나 보수정치가 자멸하면서 비주류였던 이들 세력은 주류의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누군가는 통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권은 ‘포퓰리즘을 자처하는 엘리트주의’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내가 볼 때는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가 이미 만들어 놓은 포퓰리즘적 구도에 떠밀려 가면서도 어떤 대목에서는 통치 엘리트적 면모를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재명 정권 역시 같은 조건 하에 있다. 이들은 문재인 정권과 비교할 때 통치 엘리트라는 운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진보의제 일부로부터의 조직적(?) 퇴각과 ‘속도조절’, 세수확보 논리에 대한 고집 등은 이를 방증한다.

또 오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엘리트주의는 그게 뭐든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위상을 유지할 수 없다. 킹스맨 골든서클에서 해리 하트의 한쪽 눈이 작동 불능이었던 것처럼… 혹은, 앞서 제로데이로 풀자면 엘리트주의가 과거 저지른 부도덕을 더 이상 감출 수 없고 그 본질은 독재적 권력을 활용하지 않고서는, 또한 그 자신에 대한 결함을 내부에 품지 않고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이 구도 자체, 엘리트-포퓰리즘과 포퓰리즘-엘리트주의의 대립구도가 바로 이런 영화적 표현의 현실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뭐 어차피 이런 얘기 해봐야 다들 자기 할 말만 할테지만 나중을 위해 기록을 남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엘리트주의, 제로데이, 포퓰리즘

트럼프의 선거-통치 담론에 대한 짧은 생각

2024년 11월 13일 by 이상한 모자

전적으로 내식으로 말하는 거지만, 선거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통치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선거-통치 담론이다. 미국 대선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을 계속 보는데, 아직은 기존의 틀 혹은 인식에다가 우겨 넣는 식의 얘기가 많은 거 같다.

지난 번에 여기다가도 썼지만, 바이든 심판론에 트럼프 심판론으로 맞서는 거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대개 인정하는 거 같다. 그렇다는 전제 하에, 하여간 트럼프가 이겼으니 트럼프의 무엇에 사람들이 반응했고 해리스의 무엇에 반응하지 않은 건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번에 느낀 건 트럼프의 여러 선거용 논리 중 먹혔던 게 어떤 ’법치‘ 논리였다는 거다. 대표적으로 합법적 이민자와 불법적 이민자를 가르는 논리가 그렇다. 어차피 정치적 효과는 백인-남성-기득권 중심과 소수자 배제 및 혐오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 그러니까 포장지가 그랬다는 것인데, 이게 최근 ’이대남 정서’와 코드가 맞는 게 있다.

가령 ’이대남 정서‘라는 건 본질은 어떨지 몰라도 포장은 ‘팩트’, ‘논리’, ‘법치’로 자기들이 부르는 무언가로 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건 ‘선동’, ‘감성’, ‘생떼’이다. 가령 어느 시민단체가 ‘서민 보호를 위해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이를 위한 증세를 하자’는 주장을 내걸고 집회를 개최하면, 감성에 기초한 선동에 나선 좌파들이 생떼부리는 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들을 ‘참교육’ 하기 위하여 복지 혜택 줘봤자 놀고 먹는데 익숙해지기만 하는 사람 스토리 같은 걸 팩트라고 들고와 무슨 주장을 하면서 그걸 논리라 하고, 이런 시위대를 경찰이 당장 해산시켜야 한다며 법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태도를 냉소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령 마약정책이라고 해보자. 이런 팩트-논리-법치의 세계관 속에 2차 감염부터 막기 위해 미사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장기적 접근 같은 건 위선에 불과한 거다. 하물며 이민자 문제는 어떤가? 대외문제는? 젤렌스키 좋은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이들에게 트럼프의 대답은 이런 위선 같은 건 다 일소하고 선동, 감성, 생떼들의 설 자리를 없애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여기서 트럼프의 태도가 먹히는 게 있는데, 트럼프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고 사람들에게 ‘알아서 따라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됐건 해법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다. 실제 그렇든 아니든.

이에 반해 해리스는 해법 제시라기 보다는 공감형이었다는 인상이다. 트럼프에 대한 여러분의 우려를 안다, 그러니 우리 함께 트럼프 집권을 막자…. 그 와중에 오바마가 나와서 막 꾸짖고…. 트럼프가 이기게 생겼는데 흑인 남성 너네들 정신 못 차리고 도대체 뭐하냐! 다시 해리스가 와서 우리 흑인 남성들 뭐 좋아해… 마리화나? (물론 대마 소지에 대한 처벌 완화는 트럼프도 얘기했다. 다만 맥락이 해리스와는 다르게 보였을 뿐. 언제나 중요한 건 맥락…)

트럼프식 21세기 극우포퓰리즘의 시대가 지나면 엘리트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한 모습으로 본능을 드러내며 귀환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한 바 있다. 최근 상황에 대입해보면 정확히 바이든이나 해리스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였다. 비유하자면, 트럼프가 조커라면… 팀 버튼의 영화에서처럼 조커가 배트맨의 아빠 엄마를 죽이는 바람에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 귀환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 거 같다.

트럼프 이후에 귀환하는 것은 또다른 트럼프다. 트럼프는 그대로지만 대중과 시대가 트럼프 이후의 트럼프로 트럼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법치의 외양을 하고 있다. 조커가 그저 조커로서 환호를 받는 게 아니라, 배트맨으로서 환호를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마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도 엘리트처럼 부패하고 엘리트처럼 무너질 것이다. 트럼프처럼 부패하고 트럼프처럼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제 일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어서 급히 마무리 함…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미국 대선, 엘리트주의, 트럼프, 포퓰리즘, 해리스

흙뷁요리사의 결말 – 언더독 엘리트

2024년 10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계속 강조하지만,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다만 계속 기사가 나오고, 또 유튜브 등에 접속하면 숏폼으로 계속 뜨고, 어떤 사이트를 가도 이 얘기를 소재로 한 게시물이 올라오니 내용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걸 토대로 나만의 뇌피셜을 얘기해보면….

전에 쓴 메모에서 이 쇼는 대중과 엘리트의 대립을 재현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자조 얘기를 했는데, 호프스태터가 얘기한 자조라는 게 뭐냐면 이런 거다. 기득권이 말하는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이니 뭐니 이런 것은 필요 없고,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것 이게 진정한 지식이고 진정한 지혜이며 능력이다 라는…. 이게 산업시대 자본주의와 엮여 기업가 정신이니 하는 얘기로 표출된 거다. 당시의 자본가들 그러니까 기업가와 금융인들이 대학에서 길러졌나? 아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식과 이에 근간한 체계를 업신여기게 됐고, 이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토양을 형성했다는 게 호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지식과 결별한 상태인 기업가들의 활약상은 곧 새로운 기득권과 지식체계를 형성했는데 그게 현대 경영학이고 주식이론이고 금융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제가 흙수저 요리사가 이러한 조류에 대한 비유인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드린 것.

그에 반해 뷁수저 요리사들은(물론 그들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지만) 이 쇼에서는 이미지상 기득권-지식의 편(앞서의 구분법을 굳이 동원한다면)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것. 뷁종원과 안선생의 대립 구도가 그렇고 20대 80의 구도가 그렇고 이걸 굳이 ‘계급전쟁’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도를 갖고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에 대한 쇼(그게 아니면 엘리트-대중, 계급, 흑수저 백수저가 의도적으로 배치되는 이유가 뭐겠나)일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에서 흙수저 요리사의 우승은 사실 예견된 결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흙수저 우승자보다 많은 열광을 받고 있는 게 뷁수저 준우승자인 거 같다는 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거기서 주목해 볼 점은 이 뷁수저 엘리트의 경우 서러운 이민자 출신이라는 서사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분은 요리에 관한 능력에서부터 소위 말하는 ‘인성’, 그리고 구도자적 자세까지 모든 게 만렙인데 거기다가 언더독이다. 내가 볼 때는 언더독이라는 코드가 없었으면 앞의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전의 메모에도 조금 적었는데, 나는 이 쇼가 거칠게 말해 어떻게 대중이 포퓰리즘적 방식으로 주류화 되는지에 대한 얘기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적 정치의 성숙기(?)이기 때문에 그런 서사를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느끼는 것은, 그러니까 엘리트화 되는 포퓰리즘이라는 흐름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면, 동시에 언더독화 되는 엘리트주의라는 게 조명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현실정치에 한 번 대입을 해보시오). 그래서 언더독 뷁수저 요리사가 주목받는 세태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임.

제가 분명히 안 보고 쓰는 거라고 말씀드렸음. 그리고 여기다가 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넋두리나 하고 망상이나 적고 그러는 것이므로 좀 뭐라 하지 마시라.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반지성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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