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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엘리트주의

트럼프의 선거-통치 담론에 대한 짧은 생각

2024년 11월 13일 by 이상한 모자

전적으로 내식으로 말하는 거지만, 선거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통치담론이라고 말하기도 그래서, 선거-통치 담론이다. 미국 대선에 대한 이런 저런 글들을 계속 보는데, 아직은 기존의 틀 혹은 인식에다가 우겨 넣는 식의 얘기가 많은 거 같다.

지난 번에 여기다가도 썼지만, 바이든 심판론에 트럼프 심판론으로 맞서는 거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에 대해선 대개 인정하는 거 같다. 그렇다는 전제 하에, 하여간 트럼프가 이겼으니 트럼프의 무엇에 사람들이 반응했고 해리스의 무엇에 반응하지 않은 건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번에 느낀 건 트럼프의 여러 선거용 논리 중 먹혔던 게 어떤 ’법치‘ 논리였다는 거다. 대표적으로 합법적 이민자와 불법적 이민자를 가르는 논리가 그렇다. 어차피 정치적 효과는 백인-남성-기득권 중심과 소수자 배제 및 혐오지만 거기에 이르는 방식 그러니까 포장지가 그랬다는 것인데, 이게 최근 ’이대남 정서’와 코드가 맞는 게 있다.

가령 ’이대남 정서‘라는 건 본질은 어떨지 몰라도 포장은 ‘팩트’, ‘논리’, ‘법치’로 자기들이 부르는 무언가로 한다. 그 대척점에 있는 건 ‘선동’, ‘감성’, ‘생떼’이다. 가령 어느 시민단체가 ‘서민 보호를 위해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이를 위한 증세를 하자’는 주장을 내걸고 집회를 개최하면, 감성에 기초한 선동에 나선 좌파들이 생떼부리는 게 되는 거다. 그리고 이들을 ‘참교육’ 하기 위하여 복지 혜택 줘봤자 놀고 먹는데 익숙해지기만 하는 사람 스토리 같은 걸 팩트라고 들고와 무슨 주장을 하면서 그걸 논리라 하고, 이런 시위대를 경찰이 당장 해산시켜야 한다며 법치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태도를 냉소주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가령 마약정책이라고 해보자. 이런 팩트-논리-법치의 세계관 속에 2차 감염부터 막기 위해 미사용 주사기를 나눠주는 장기적 접근 같은 건 위선에 불과한 거다. 하물며 이민자 문제는 어떤가? 대외문제는? 젤렌스키 좋은 일을 왜 해야 하는가?

이들에게 트럼프의 대답은 이런 위선 같은 건 다 일소하고 선동, 감성, 생떼들의 설 자리를 없애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여기서 트럼프의 태도가 먹히는 게 있는데, 트럼프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거고 사람들에게 ‘알아서 따라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찌됐건 해법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는 거다. 실제 그렇든 아니든.

이에 반해 해리스는 해법 제시라기 보다는 공감형이었다는 인상이다. 트럼프에 대한 여러분의 우려를 안다, 그러니 우리 함께 트럼프 집권을 막자…. 그 와중에 오바마가 나와서 막 꾸짖고…. 트럼프가 이기게 생겼는데 흑인 남성 너네들 정신 못 차리고 도대체 뭐하냐! 다시 해리스가 와서 우리 흑인 남성들 뭐 좋아해… 마리화나? (물론 대마 소지에 대한 처벌 완화는 트럼프도 얘기했다. 다만 맥락이 해리스와는 다르게 보였을 뿐. 언제나 중요한 건 맥락…)

트럼프식 21세기 극우포퓰리즘의 시대가 지나면 엘리트주의가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한 모습으로 본능을 드러내며 귀환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한 바 있다. 최근 상황에 대입해보면 정확히 바이든이나 해리스가 그렇게 하지 않을까 생각한 거였다. 비유하자면, 트럼프가 조커라면… 팀 버튼의 영화에서처럼 조커가 배트맨의 아빠 엄마를 죽이는 바람에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어 귀환하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는데, 현실은 그게 아닌 거 같다.

트럼프 이후에 귀환하는 것은 또다른 트럼프다. 트럼프는 그대로지만 대중과 시대가 트럼프 이후의 트럼프로 트럼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법치의 외양을 하고 있다. 조커가 그저 조커로서 환호를 받는 게 아니라, 배트맨으로서 환호를 받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아마 엘리트가 그랬던 것처럼 트럼프도 엘리트처럼 부패하고 엘리트처럼 무너질 것이다. 트럼프처럼 부패하고 트럼프처럼 무너지는 게 아니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이제 일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어서 급히 마무리 함…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미국 대선, 엘리트주의, 트럼프, 포퓰리즘, 해리스

흙뷁요리사의 결말 – 언더독 엘리트

2024년 10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계속 강조하지만,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다만 계속 기사가 나오고, 또 유튜브 등에 접속하면 숏폼으로 계속 뜨고, 어떤 사이트를 가도 이 얘기를 소재로 한 게시물이 올라오니 내용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걸 토대로 나만의 뇌피셜을 얘기해보면….

전에 쓴 메모에서 이 쇼는 대중과 엘리트의 대립을 재현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자조 얘기를 했는데, 호프스태터가 얘기한 자조라는 게 뭐냐면 이런 거다. 기득권이 말하는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이니 뭐니 이런 것은 필요 없고,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것 이게 진정한 지식이고 진정한 지혜이며 능력이다 라는…. 이게 산업시대 자본주의와 엮여 기업가 정신이니 하는 얘기로 표출된 거다. 당시의 자본가들 그러니까 기업가와 금융인들이 대학에서 길러졌나? 아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식과 이에 근간한 체계를 업신여기게 됐고, 이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토양을 형성했다는 게 호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지식과 결별한 상태인 기업가들의 활약상은 곧 새로운 기득권과 지식체계를 형성했는데 그게 현대 경영학이고 주식이론이고 금융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제가 흙수저 요리사가 이러한 조류에 대한 비유인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드린 것.

그에 반해 뷁수저 요리사들은(물론 그들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지만) 이 쇼에서는 이미지상 기득권-지식의 편(앞서의 구분법을 굳이 동원한다면)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것. 뷁종원과 안선생의 대립 구도가 그렇고 20대 80의 구도가 그렇고 이걸 굳이 ‘계급전쟁’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도를 갖고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에 대한 쇼(그게 아니면 엘리트-대중, 계급, 흑수저 백수저가 의도적으로 배치되는 이유가 뭐겠나)일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에서 흙수저 요리사의 우승은 사실 예견된 결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흙수저 우승자보다 많은 열광을 받고 있는 게 뷁수저 준우승자인 거 같다는 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거기서 주목해 볼 점은 이 뷁수저 엘리트의 경우 서러운 이민자 출신이라는 서사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분은 요리에 관한 능력에서부터 소위 말하는 ‘인성’, 그리고 구도자적 자세까지 모든 게 만렙인데 거기다가 언더독이다. 내가 볼 때는 언더독이라는 코드가 없었으면 앞의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전의 메모에도 조금 적었는데, 나는 이 쇼가 거칠게 말해 어떻게 대중이 포퓰리즘적 방식으로 주류화 되는지에 대한 얘기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적 정치의 성숙기(?)이기 때문에 그런 서사를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느끼는 것은, 그러니까 엘리트화 되는 포퓰리즘이라는 흐름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면, 동시에 언더독화 되는 엘리트주의라는 게 조명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현실정치에 한 번 대입을 해보시오). 그래서 언더독 뷁수저 요리사가 주목받는 세태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임.

제가 분명히 안 보고 쓰는 거라고 말씀드렸음. 그리고 여기다가 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넋두리나 하고 망상이나 적고 그러는 것이므로 좀 뭐라 하지 마시라.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반지성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흙뷁요리사

2024년 10월 7일 by 이상한 모자

요즘 흙뷁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이 유행이라는데, 안 봤다. 분명히 밝혔다, 안 봤다고. 안 봤는데 하도 여기저기서 흙뷁요리사 얘기를 하니까 안 봤는데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관련한 글이 신문에도 나오는데, 죽 읽다 보면 대략 그런 말씀들 많이 하시는 것 같다. 공정한 경쟁 표방하는 것 같지만 이미 흙수저 뷁수저를 나눈 것부터가 계급 격차를 내면화 하고 있는 거고, 이모님 뭐 이렇게 부르는 것도 여성혐오 아니냐…. 이런 얘기.

좋은 말씀에 100% 동의하면서, 흙뷁요리사라는 기획 자체의 의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흙수저 뷁수저라는 대립은 뷁종원과 안선생님의 대립 구도에서 보듯 대중과 엘리트의 대립이다. 원래 전통적으로 우리 음식-대중은 흙수저에 더 친화적이다. 맛있으면 됐지 뭘 자꾸 따지냐, 평가는 미식-평론가가 아니라 대중과 판매량이 한다, 미식-평론가가 뭘 아냐 이게 보통 하는 얘기 아닌가? 그래서 흙수저 뷁수저의 대립은 근본이 없어도 많이 파는 사람(이쪽 편에 속한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양쪽을 구분하는 구도가 그렇다는 거다)과 가게가 망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근본이 있는 걸로 유명한 사람의 대립구도라는 점에서 정확히 대중과 엘리트의 구도를 재현한다.

그런데 실제 양팀을 경쟁을 붙여 보면, 흙수저 심사위원도 뷁수저 만큼의 엘리트적 짬바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니까 흙수저도, 거기 나올라면 그냥 되는 게 아니예요. 엘리트적으로 평가받지는 못하지만 ‘실력'(즉 능력…. 이 개념에 대해서는 제가 몇 안 되는 읽은 척 할 수 있는 책인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등장하는 ‘자조(self-help)’와 연관지어 볼 수 있음)이 있어야 팔아먹을 수 있는 거지. 이것도 일정 이상이 쌓이면 뷁수저랑 개념과 논리로 다이다이 뜰 수 있는 것임. 기본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뷁수저가 흙수저를 일방적으로 무시하지 않고 서로 존중하고 그러면서도 사실 조금 깔봤지만 대한민국 대표 먹짱 뷁종원이 먹으면서 다 맞춰버리니까 깜짝 놀라며 다시 보고 뭐 그런 연출이 그래서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사실 출신은 흙수저와 뷁수저지만 이들의 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리, 그 근본을 관통하는 그런 거는 능력주의다 라는 게 기본 구도가 아닐까 하는 것.

이러한 구도를 성급하게 우리 사회의 모습에 갖다 붙여버려 본다면? 대중과 엘리트의 분열과 대립도 능력주의로 커버가 되는 거고, 그 ‘커버’의 과정에서 대중이 엘리트의 원리와 논리를 거부감 없이 학습한다는 것(가령 흙뷁요리사 보면서, 난 그냥 맛있으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요리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의도를 다 싣고 재료 크기까지 맞춰서 썬다는 걸 보고 감탄했다고 말하는 분들 있을 것임). 그걸 재현하는 쑈가 아닐까 하는 게, 제 머릿 속에 있는 뇌피셜적인 흙뷁요리사라는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렇게나 메모를 해놓는 것.

이렇게 쓰면 이제 숏폼 콘텐츠 같은 녀석들이 와서는 ‘응^^ 다음 뇌피셜’ 이런다고 인제. 그래서 블로그에다 썼잖아. 내가 이걸 쓰고 돈이라도 달라 그랬니? 진정하시고. 안 봤다니까 글쎄.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능력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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