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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반지성주의

흙뷁요리사의 결말 – 언더독 엘리트

2024년 10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계속 강조하지만,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다만 계속 기사가 나오고, 또 유튜브 등에 접속하면 숏폼으로 계속 뜨고, 어떤 사이트를 가도 이 얘기를 소재로 한 게시물이 올라오니 내용을 모를 수가 없다. 그런 걸 토대로 나만의 뇌피셜을 얘기해보면….

전에 쓴 메모에서 이 쇼는 대중과 엘리트의 대립을 재현 했다고 썼다. 그러면서 자조 얘기를 했는데, 호프스태터가 얘기한 자조라는 게 뭐냐면 이런 거다. 기득권이 말하는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이니 뭐니 이런 것은 필요 없고,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경험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것 이게 진정한 지식이고 진정한 지혜이며 능력이다 라는…. 이게 산업시대 자본주의와 엮여 기업가 정신이니 하는 얘기로 표출된 거다. 당시의 자본가들 그러니까 기업가와 금융인들이 대학에서 길러졌나? 아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지식과 이에 근간한 체계를 업신여기게 됐고, 이게 미국의 반지성주의의 토양을 형성했다는 게 호선생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들, 기득권-지식과 결별한 상태인 기업가들의 활약상은 곧 새로운 기득권과 지식체계를 형성했는데 그게 현대 경영학이고 주식이론이고 금융이고 그런 거지. 그래서 제가 흙수저 요리사가 이러한 조류에 대한 비유인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씀드린 것.

그에 반해 뷁수저 요리사들은(물론 그들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지만) 이 쇼에서는 이미지상 기득권-지식의 편(앞서의 구분법을 굳이 동원한다면)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것. 뷁종원과 안선생의 대립 구도가 그렇고 20대 80의 구도가 그렇고 이걸 굳이 ‘계급전쟁’이라고 이름 붙여 놓은 것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도를 갖고 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포퓰리즘에 대한 쇼(그게 아니면 엘리트-대중, 계급, 흑수저 백수저가 의도적으로 배치되는 이유가 뭐겠나)일 수밖에 없는 이 프로그램에서 흙수저 요리사의 우승은 사실 예견된 결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흙수저 우승자보다 많은 열광을 받고 있는 게 뷁수저 준우승자인 거 같다는 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거기서 주목해 볼 점은 이 뷁수저 엘리트의 경우 서러운 이민자 출신이라는 서사를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분은 요리에 관한 능력에서부터 소위 말하는 ‘인성’, 그리고 구도자적 자세까지 모든 게 만렙인데 거기다가 언더독이다. 내가 볼 때는 언더독이라는 코드가 없었으면 앞의 다른 요소들이 충분히 부각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전의 메모에도 조금 적었는데, 나는 이 쇼가 거칠게 말해 어떻게 대중이 포퓰리즘적 방식으로 주류화 되는지에 대한 얘기처럼 보인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포퓰리즘적 정치의 성숙기(?)이기 때문에 그런 서사를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느끼는 것은, 그러니까 엘리트화 되는 포퓰리즘이라는 흐름이 각광을 받을 수 있다면, 동시에 언더독화 되는 엘리트주의라는 게 조명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현실정치에 한 번 대입을 해보시오). 그래서 언더독 뷁수저 요리사가 주목받는 세태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임.

제가 분명히 안 보고 쓰는 거라고 말씀드렸음. 그리고 여기다가 쓴다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뭘 해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넋두리나 하고 망상이나 적고 그러는 것이므로 좀 뭐라 하지 마시라.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반지성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인생의 목표

2023년 1월 18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한겨레 인터넷 방송하러 갔는데 김완님이 그랬다. 당신은 무슨 한 번 나간 방송에 대한 욕을 그렇게 하고 그러는가… 그래서 그랬다. 아직 안 나갔는데요…

방송 출연 이런 것을 꿈꿔본 일은 없다. 사실 어릴적부터 이루고 싶었던 일 중 하나는 일간지에 고정 칼럼을 쓰는 거였다. 주간지까지는 해봤는데 늘 시기가 안 좋고 하여 롱런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칼럼 쓰던 분이 나는 짤린 잡지에 아직도 글을 싣고 있는 것을 보면 괜히 화가 난다. 근데 그런 이유로 무슨 화낼 입장이 아니지… 반성하면서…

그래도 어떻게 이번에 기회가 되어 경향신문에 여럿이 쓰는 칼럼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아직 부담이 있다. 앞으로 더 잘해보려고 한다. 이제 앞으로의 목표는 일간지에 이름이 들어간 코너를 갖는 것이다. 한겨레의 강준만 칼럼… 이런 것처럼… 이러면 너무 엄청난 거 같으니 약간 유연하게…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이런 것처럼… 20년 내에 꼭 이룰 것이다. 이것을 이룬 다음에는 글을 실어주는 언론사 앞에 가서 1인시위를 할 것이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8030

넌 이게 장난같애!? 라고 할라고 그랬지? 저는 슬픈 얘기일수록 웃으면서 합니다. 제가 심리학과임. 이게 방어기제야. 알겠어!? 나도 나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요.

하여간 이 얘기 꺼낸 이유가 이건 아니고, 오늘 경향신문 보면서 좋은 글 읽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다.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1180300065

인간관계가 좁은 저로서는 전혀 모르는 분이 쓴 글인데, 반지성주의를 선거판에서 얘기하는 나라의 국민이라면 생각을 해봐야 할 방향의 실마리가 들어있다고 본다. 언급된 논문을 구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어룩소에 이 글 얘기하고 우리 윤통의 말이 자꾸 문제가 되는 현상하고 묶어서 생각을 한 얘기를 썼는데, 여기서 리바이벌은 안 하는 걸로…

늘 말씀드리는데, 호프스태터 선생의 미국의 반지성주의 읽으시라면 미국사를 다룬 책을 먼저 통독하시는 것을 꼭 추천드린다. 문외한인 제가 그런 방식으로 비로소 저 책의 상당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음. 제가 읽은 건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1, 2, 3 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경향신문,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라는 돌아온 유행

2022년 5월 11일 by 이상한 모자

윤통이 모처럼 또 쓰셔갖고 다들 한 마디씩 하는 분위기겠지. 신문만 봐도 그런데, SNS가 어떨지는 뻔하다.

반지성주의는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어쩌구 저쩌구… 막 그러는데, 이 책을 다 읽기는 하고 기사 칼럼들 쓰시는지. 나는 거의 외운다. 저의 졸저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를 보시면, 거기도 반기득권 정치 논리의 하나로 묘사가 돼있다.

어제 저녁 때 방송에선 보수 인사와 이 주제로 얘기를 했는데, 탈원전과 소득주도성장을 두고 반지성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더라.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탈원전이나 소득주도성장은 오로지 반기득권 정서(그런 게 완전히 없을 순 없는거지)에만 기대고 있는 게 아니고 나름대로의 지식과 이론체계가 근거가 되는 주장이다. 그래서 그러한 이론과 과학과 합리와 뭐 그런 것에 근거해서 그게 옳다든지 틀리다든지 논쟁을 할 수 있겠지.

근데 반지성주의라는 건 대체로 특정한 정책이나 철학에 대한 얘기라기 보다는 그걸 다루는 태도에 대한 거다. 가령 탈원전, 소득주도성장 또는 검찰개혁 얘기하면서 원전마피아, 기재부 관료, 정치검사만 얘기한다면 그런 지적이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것 뿐일까? 그런 지적을 하면서 탈원전은 판도라라는 영화의 정서적 영향 때문이고 소득주도성장은 철지난 이념의 반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도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적 논리이다. 지난 대선에서 윤통이 철지난 이념 얘기하고 문정부가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일부러 집값을 올렸다고 그런 거… 그게 다 반지성주의적인 태도지. 그런데 방송에서 그걸 뭐 내로남불이다 너나 잘해라 이런 얘기로 가기 보다는, 이제부터는 그런 국정운영은 안 한다는 믿음을 줘야 된다 라는 교훈적인 얘기로 끝맺었다 이거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는데, 방송에서는 좀 안 한 얘기도 있다. 반지성주의적 세태를 가능하게 하는 건 뭐냐? 정치적 선동이니 뭐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지성, 지식인, 전문가의 타락이 실제 그렇다는 사실도 반지성주의적 세태를 강화하는 요소이다. 윤통은 본인은 법-전문가인데 그렇지 않은 세력으로부터 공격받은 사실로부터 반지성주의라는 키워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러한 법-전문가들도 본인이 공격을 받을 때에는 심지어 그게 정당한 비판과 문제제기라도 ‘불순한 의도’를 맨 먼저 거론하며 반격하지 않는가. 채널A와 고발사주, 후니월드 문제가 대표적이지.

이거 후니횽도 마찬가지. 윤우진 문제 같은 거, 그냥 검찰에 대한 공격이라고 하잖아. 그런 세계관으로 일관하는 거지. 조국 수사는 문통 정권에 대한 공격이고, 검언유착은 그것에 대한 반격이고, 그러니 여기에 다시 고발사주로 반격하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반지성주의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거다. 윤통이 단순한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그러한 통찰에까지 도달한 결과로 취임사에 반지성주의란 단어를 쓴 거라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잘 알겠지. 잘 알겠어? 아니겠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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