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법치, 노동계급
토요일에 읽은 인터뷰 기사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안병진 교수 얘기다. 이거를 중앙일보에서 읽었다고 토요일날 유튜브 방송에서 잘못 말했는데, 한국일보였다. 한국일보에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경제 문제가 핵심이었다는 거는 여러 군데서 얘기하지만 ‘법과 질서’ 역시 중요한 한 축이었다는 게 중요한 거 같다. 이거는 제가 얼마 전에도 여기다가 적은 트럼프와 법치 얘기랑 비슷한 말씀인 거 같다.
“시대정신이 트럼프에게 있었다. 선거 초반부터 해온 얘기인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먹고살기 팍팍하다는 거다. 식료품 물가상승으로 치명타를 입은 저소득층에게 임금 수준이 나아졌다는 통계치를 줘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이제 반성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 문제니까 넘어가자. 다른 하나는 한국에 덜 알려진 ‘법과 질서’, 즉 로 앤드 오더(law & order) 문제다. 미국 정치의 핵심 키워드인데 너무 간과됐다.”
-법과 질서라는 건 어떤 건가.
“미국 내 ‘진보의 아성’이라 불리는 뉴욕,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의 민주당 정치인들은 엄청 곤혹스럽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 같은 사람이 ‘너희 진보가 그렇게 훌륭하다고? 어디 한번 당해봐’ 이러면서 불법 이민자들을 버스, 비행기에 태워서 진보 도시에다 보냈다. 진보 도시들은 이민자를 수용하느라 정신없다. 그 결과 뉴욕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이라는 브롱스, 퀸즈 같은 곳에서도 트럼프 표가 2~3배 이상 늘었다. 또 하나는 펜타닐 문제다. 서부에 가보면 약물 오남용 중독자들이 길거리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이런 혼란상이 싫으니 정리해달라는 게 법과 질서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은 1968년 대선 당시 리처드 닉슨의 승리와 동일하다.”
-그러고 보면 닉슨도 그 유명한 ’68혁명’ 와중에 승리했다.
“묘한 평행이론이다. 그때도, 지금도 현직 대통령 린든 B 존슨과 조 바이든이 재선 출마를 포기했고 현직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와 카멀라 해리스가 출마했다. 험프리도 전임 존슨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가운데 닉슨은 ‘법과 질서’를 내걸었다. 닉슨에겐 케빈 필립스라는 탁월한 전략가가 있었다. 그는 ‘사회 진보, 민권 신장 다 좋은데 이렇게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건 싫다는 이들, 침묵하는 다수를 공략하자’고 했다. 이 전략이 1968년 유혈사태로 치달았던 민주당 전당대회 등과 맞물리면서 미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올해 민주당 행보, 대선 흐름과 판박이다.”
-해리스도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 경력을 내세웠다.
“너무 안이했다. ‘검찰총장하면서 마약 카르텔, 아동 성 착취범들을 단호하게 처벌했다’고 했는데 그뿐이었다. 사실 해리스는 민주당 진보파들에겐 의심의 대상이었다. 사형제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선 것 등 여러 요인들이 있다. 그 때문에 해리스는 검사로서의 커리어를 내세우면 법과 질서에서 뒤지지 않는다 생각한 것 같은데, 그건 민주당 내에서나 통할 이야기다.”
(…)
-해리스가 ‘법과 질서’란 이름 아래 내놓을 수 있는 제안은 무엇이었을까.
“공화당이 초당적 이민법을 안 해줘서 그렇다, 라고 변명하기보다 여러 혼란과 불편함에 대해 일단 사과하고 그다음에는 이민 담당자로 강력한 인물을 내세워야 했다. 박근혜 후보 시절 경제민주화를 생각해보라. 복잡하게 설명하느니 ‘김종인 영입’으로 그냥 보여줬다. 그게 대선 캠페인의 기본인데 그걸 못했다.”
인터뷰 전문을 보면 그 외에 이대남 얘기도 있고 지난 번에 메모로 적어 놨던 거랑 겹치는 얘기가 이래 저래 있다. 이외에 또 눈길이 가는 대목은…
-한때 인구구성 변화 등으로 미국의 ‘백인 정체성’이 옅어지면 민주당이 장기집권하는 거 아니냐는 분석도 있었다.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승리 이후 민주당에서 나온 주장이다. 흑인, 히스패닉계에 이어 청년, 여성까지 끌어들였으니 이제 ‘레이건 민주당원’은 중요하지 않다는 목소리다.”
-레이건 민주당원이란 어떤 이들인가.
“말 그대로 민주당원인데 대통령으론 레이건을 찍는 백인들을 말한다. 사회경제적으론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뉴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만 문화적으론 보수적인 백인들을 말한다. 오바마 승리 이후 ‘흑인 히스패닉 여성 청년, 4개의 카드만 있으면 레이건 민주당원이 없어도 우리가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농촌, 백인, 노동자의 분노가 2012년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중이 줄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다수다. 거기다 흑인, 히스패닉, 여성, 청년이 무조건 진보적이라는 것도 착각이다. 특히 히스패닉의 경우 백인 주류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해리스의 패배’라는 건가.
“만약 트럼프가 좀 더 온건한 후보였다면 훨씬 더 크게 이겼을 거라고 본다. 민주당의 오만함이 너무 싫은데 트럼프라서 차마 찍지 못한 이들도 많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는 극단성 때문에 이긴 게 아니라 되레 손해를 본 경우라고 봐야 한다.”
이걸 버니 샌더스 등의 지적과 연결해서 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나는 버니 샌더스 등의 지적을 ‘민주당이 보다 좌파적이 되지 못해 패배했다’는 식으로 연결하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유권자가 ‘좌파적인 민주당’을 원하는 그런 판인지 의문이고, ‘좌파적인’ 게 뭔지조차에 합의하지 못하는 게 오늘날 전 세계 진보쓰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레이건-민주당에 대한 위 규정이 그런 건데, 1) ‘뉴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만 2)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인 백인이라는 거 아닌가? 1)로 보면 진보적인데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2)로 보면 중도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오바마 이후 민주당은 1)에서는 뉴딜 이후 그래왔던 것처럼 (그게 자의든 타의든) 사실상 답이 없거나 더디거나 말 뿐이거나 하고, 2)에서는 급진화 되었다. 그러니 안 교수가 말하는 ‘레이건 민주당’은 오바마 이후의 민주당을 지지할 이유가 없는 거고, 이번 대선에도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 레이건-민주당을 잡을 해법은 뭘까? 이들이 2)에 대해 갖는 거부감은 낮추면서 1)에 대해선 대안적 해법 제시가 필요하다. 이걸 버니 샌더스식으로 말하면 노동계급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되는 거다. 사실상 똑같은 얘긴데, 이렇게 얘기하면 중도층 잡으라는 얘기가 되고 저렇게 얘기하면 노동자 계급 잡으라는 얘기가 된다. 즉 우리는 중도층을 잡는 것과 노동계급에 대안을 제시하는 게 비슷한 얘기인 세상에 살고 있다.
그게 그렇게 된 이유는 뭐다? 주류 정치가 세상에 대한 총체성, 즉 통치를 전제한 어떤 상을 잃어버린 탓이다… ‘나는 뭘 하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뭘 해주겠다’고 말하는 것에 그치고 있는 것. 그런데 트럼프는 그나마 ‘뭘 하겠다’에 가까운 것처럼 보였고, 그게 승패를 가른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든다는 그런 얘기를 계속 드리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