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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스가 요시히데

최근 하고 다닌 말

2021년 8월 27일 by 이상한 모자

요즘에 더 이상 이렇게 살다간 진짜 죽을 거 같아서 집에서 운동을 좀 하고 있다. 목과 어깨가 굳고 이게 두통으로 연결되는 증상이 심각… 운동을 심하게 하니 처음에는 이 증세가 더했는데 계속 하다보니 좀 나은 거 같기도… 몸을 혹사하니 잠도 더 쉽게 드는 것 같다.

뉴스가 너무 지긋지긋해서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데, 직업이 떠들고 다니는 것이다 보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다닐 수밖에 없다.

  1. 난민 문제

이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중심으로 팩트체크 좀 해드렸고. 다만 하려고 준비했으나 시간관계상 못한 얘기가 있었다. 난민수용에 있어서 무조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자, 이런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것. 아프간 재건 사업 왜 참여했나? 그게 미국과의 관계든 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이든 국익 차원에서 접근한 거다. 그리고 이 결정이 아프간 정세에 미친 영향이 미미하게라도 있다. 상황 좋을 때는 대아프간 수출액이 1억달러도 되고 한다. 특별기여자들 말고 난민 수용의 일반적 차원에서도 우리의 책임이라는 건 이런 맥락에서 생긴다는 것.

  1. 언론뭐시기 법 문제

이건 아래의 글로…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50016

쓴 글 다시 읽어보니 법안 내용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읽힐 여지가 있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건 다들 지적하고 있는 문제이고. 지적을 여당이 다 수용해 무리가 덜한 법안을 만들더라도 정치적 맥락이라는 점에서 뭐가 문제인지를 짚으려고 한 것.

  1. 윤희숙 문제

사퇴 주장 당일인 수요일에 한 얘기. 다퉈볼 수 있는 문제지만(벼 논 3천평하면 엄청난 땅 같지만 15마지기라고 하면 또 느낌이 다르기도 하고. 농사지으려고 알아보기 시작했지만 기왕 살 땅 돈 되는 데로 하고 싶었다는 할배 얘기가 맞을 거라고 봄. KDI 내부정보 이용은 아직까진 근거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생각.), 드라이하게 접근해도 될 것을 의원직 사퇴를 걸어버리는 건 바람직한 정치가 아니라고 본다. 이게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정사 때문에 정서적으로 과잉된 영향인지, 그냥 팔이 안으로 굽고 있는 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으로 철저히 계산한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의도는 모르겠으나 이게 가져온 효과는, 윤희숙이 이준석을 살렸다는 것이다. 이준석은 밖에서는 민주당보다 세게 한다더니 뭐냐, 안에서는 내가 왜 탈당해야 되냐… 샌드위치 되는 상황이었는데 윤희숙이 양쪽에 전선을 휙 그어버린 것이다. 이준석이 당일에 권익위 조사가 편향적이다 라고 한 건 궁색해보였지만 윤희숙이 이러기 시작하면서 비장한 얘기가 됐다. 당내에선 탈당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집단행동하기 어려워졌다. 누구는 사퇴도 한다는데… 또 사직안을 민주당에게 던짐으로써 처리할수도 안할수도 없는 딜레마를 만들었다. 지금 민주당이 열심히 윤희숙 사퇴론에 똥 바르는 게 이 영향이라고 본다. 사퇴쇼이므로 우리는 들러리 서지 않겠다=사직안 처리 안 할 거다 …

  1. 카불 테러

오늘 아침에 한 말. 탈레반이 하기에 달렸다. 원래 사이가 안 좋기도 하니 IS의 테러를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바이든이 공언한대로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작전을 하는 경우(안 할 수 없다) 협력 또는 용인하는 것도 부담이다. 일단 탈레반은 우리는 모르겠다는 분위긴데 실제 미군이 행동을 해도 그런 입장이 유지될지는 모르겠다.

  1. 생각만 하고 말은 안 한 스가 요시히데 문제

코로나19 상황이고 해서 거물들이 총재를 하겠다고 나서는 분위기는 아니고 대체적으로 스가로 계속 가자는 분위기다. 그러나 잘하는 게 없지 않느냐는 명분론과 이대로면 나는 우리 지역구에서 진다 라는 현실론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라 뭐 지켜봐야 한다. 기시다 후미오가 겨뤄보는 쪽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승부를 걸어볼 요인이 많지 않다. 파벌구도로 보면 일단 주류3파의 입장은 그대로 유지다. 호소다파는 자체 후보 밀기 어려운 상황이니 스가 지지로 갈테 아소파도 스가 연임으로 상황 정리하는 분위기다. 다케시타파는 모테기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 여기도 변동 없을 것 같고. 이시바는 여전히 공적이고. 그러면 변수가 별거 없다.

다만 이런 경우에 파벌담합과 교체여론이 충돌하면 세대교체론 등이 명분으로 작동해서 파벌 구조와 무관하게 선거구도가 짜여져 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니가키 사다카즈하고 고노 다로가 붙었을 때가 그런 모양새였는데, 이런 경우가 가능하다면 여전히 고노 다로가 나올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한다. 백신 사정 안 좋아서 어렵지 않나 했는데 좀 개선된 면도 있고… 다만 다니가키 시절은 야당이었고 지형도 달랐다는 점에서 총재가 될 가능성이 큰 걸로 보이진 않는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IS, 고노 다로, 난민, 스가 요시히데, 언론중재법, 윤희숙, 이준석, 카불, 탈레반

자민당 총재 선거 후보들에 대한 방송 내용

2020년 9월 5일 by 이상한 모자

한국 뉴스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을 지경이니 일본으로 도피를… (농담이니 제발 흥분하지 마시오. 시사펭론가가 뉴스로부터 어떻게 도망을 가…)

아래는 금요일 오전 방송 내용이다.

오늘은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 나서는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 이시바 시게루에 대해 알아보자. 14일 총재선거가 치러지고 16일 총재를 총리로 지명하는 임시국회가 열린다.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 레이와 아저씨로 알려져 있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다. 당내 다수 파벌이 지지하기로 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선 확정이라고 봐야한다.

스가 요시히데는 1948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농업에 종사했고 모친은 교사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도쿄에 상경해 골판지 공장과 쓰키지 시장 등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렇게 번 돈으로 당시 비교적 학비가 저렴했던 호세이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입학, 1973년 졸업 후에는 건설전기설비공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꿈을 품고 1975년에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오코노기의 선거구는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였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지만 11년간 비서로 일하면서 이 지역에서 정치경력을 쌓았다. 1987년 요코하마시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해 당선 이후 재선까지 됐다. 비록 시의원이었지만 지역구 의원 비서로 일하면서 지역의 정관계 인맥을 탄탄하게 해놓았었기 때문에 ‘밤의 요코하마 시장’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러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 마찬가지로 가나가와현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 진출 성공했다. 상대 후보 쪽에서 가나가와 사람이 아니라는 공격을 했지만 오히려 아키타현 출신이라는 사실을 공격적으로 밝혀 해당 지역 출신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 때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자민당이 부패스캔들 때문에 정권을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에서 파벌 간 분열이 극심했던 시기다. 스가 요시히데는 파벌을 옮겨 다니면서 굉장히 복잡한 처세를 했다. 원래 소속 파벌은 오늘날의 다케시타파였는데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적대한 자신의 정치 스승(가지야마 세이로쿠)을 따라 1998년 파벌을 탈퇴했고 오늘날의 기시다파인 굉지회로 옮겼다. 2000년 모리 요시로 총리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됐을 때 굉지회는 찬성파(가토파)와 반대파로 분열했는데 스가 요시히데는 불신임안 찬성 입장에 섰지만 정작 조직이 쪼개질 때는 반대파(호리우치파, 이후의 고가파)에 가담했다. 이러다가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를 지지하면서 1차 아베 집권기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대박을 친다.

이렇게 보면 양지만 찾아다닌 것 같지만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임하고 난 후 2007년 총재 선거에선 모든 파벌이 아소 다로 견제를 위해 후쿠다 야스오 지지 방침을 밝혔는데, 이때 소속 파벌 방침에 따르지 않고 아소 다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승자는 후쿠다 야스오였다. 그런데 후쿠다 정권 이후 아소 다로가 총리직을 이으면서 스가 요시히데는 다시 요직에 발탁됐다. 자민당이 정권을 잃은 이후인 2009 총재 선거에서는 고노 다로를 지지해 또 패배자가 됐는데, 2012년 총재 선거에선 아베 신조의 복귀를 위해 아소 다로와의 동맹을 성립시키는 등의 활약으로 정권 창출의 공신이 됐다. 이때부터 아베 신조 정권의 운영에 없어선 안 되는 인물이 됐고 이 덕에 8년간 관방장관직을 유지했다. 철새라기보다는 수완이 좋고 수에 능하다고 봐야하고 주로 그런 역할을 해왔다(관방장관으로서 관료 인사를 장악한다거나 앞서 가지야마와 오코노기의 아들들을 중용하는 등 파벌을 만들지 않았으면서도 조직가의 수완을 뽐내고 있다).

애초 아베 신조의 후계자란 말이 나왔던 사람은 기시다 후미오이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 사임 직후에 면담을 하고 지지를 요청했는데 사실상 거절당했다. 뒷통수를 맞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근거없는 기대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출마를 강행했다.

기시다 후미오는 1957년생이고 아베 신조와 마찬가지로 3세 정치인으로 볼 수 있다. 도쿄에서 나고 자라 1982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는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코스를 밟았다. 1987년 아버지 기시다 후미타케의 비서가 되면서 정계 입문했고 1993년 아버지의 출신지인 히로시마에서 출마해 중의원으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했다.

우리에게는 2015년 위안부 합의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아베 신조 1차 집권기에도 우리나라로 치면 특임장관인 특명담당대신으로 입각했고 후쿠다 야스오 때도 같은 직책을 유지했는데, 이게 중요한 직책은 아니다. 그러다 2012년 소속 파벌인 굉지회의 회장을 맡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됐다. 이후 2012년 말 외무상으로 입각, 2017년 1월까지 직을 유지했다. 외무상으로서는 2015년 한일위안부 합의와 군함도의 유네스코문화유산 등록 등을 추진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외무상을 맡았는데, 이 기록은 오히라 마사요시를 넘어 요시다 시게루에 이은 역대 2위라고 한다.

아베 신조가 기시다 후미오를 중용한 이유는 소속 파벌인 굉지회가 대외정책에 있어서 비둘기파로 알려져 있어 주변국들에 생색내기 좋은 인사라고 판단한 측면도 있을 듯 하다. 무엇보다도 당내 주요 파벌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입각을 시켜 자기 밑에 묶어두는 전략을 구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베 신조가 2차 집권 때 자민당 간사장으로 중용한 것도 굉지회 출신의 다니가키 사다카즈란 사람이었다(앞서 글에서도 썼듯 엄밀히 말하면 다니가키는 가토파, 기시다는 고가파 출신이다). 이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기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해 지금의 니카이 도시히로로 바뀐 건데, 아무튼 아베 신조가 굉지회와 여러모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알 수 있다(주요 파벌에 대한 정치적 안배, 이른바 총주류화는 아베 신조 2차 집권기의 주요 전략이었다).

기시다 후미오에게 항상 따라붙는 평가는 업적이라고 할만한 게 없고 무난한 인사지만 자기 의견이 확실치 않다는 인상이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총재 선거에서도 굉지회 내부에선 출마를 강행하자는 주전론이 있었지만 기시다 후미오가 아베 신조 총리 3선을 지지해 이후 선양을 기대하자는 신중론의 손을 들어줬다고 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닭 쫓는 개가 된 것이니 여러모로 결단력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나올 수 밖에.

이시바 시게루는 아베 신조가 이 사람만은 안 된다 라는 인사이다. 1957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곧바로 돗토리현으로 이사를 했는데, 아버지가 돗토리현 지사 출신이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1979년 게이오대 법학부 졸업하고 미쓰이 은행에 입사, 전형적인 엘리트 회사원 루트를 밟았다. 1981년 아버지가 사망하는데 이때 아버지와 친분이 깊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정계진출을 권유했다. 다나카파라고 불린 파벌 조직 목요클럽 사무국에 취직하는 걸로 정계에 입문했고 1986년에 돗토리에서 당선됐다. 이때가 28세로 전국 최연소 의원 기록이었다.

이후 행보는 그야말로 풍운아라고 할만 하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1985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나카소네파로 소속을 옮겼다. 1988년엔 정책모임 유토피아정치연구회 결성에 참여하는데 이때 함께 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이다. 1994년에는 비자민 연립정권이었던 호소카와 정권이 추진한 정치개혁입법에 찬성해 자민당에서 징계를 당하고 탈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자와 이치로가 창당한 신진당에 합류하게 되는데 1995년 안보정책에서의 이견(오자와 이치로의 구상은 유엔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이를 위해 유엔대기군을 창설한다는 것이었는데, 오늘날로 보면 해석개헌에 가깝다. 하지만 이시바 시게루는 평화헌법 9조에 직접 손을 대는 개헌이 지론이다)을 내세우며 다시 탈당, 1996년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다가 1997년 자민당에 다시 복귀했고 고이즈미 정권에서 방위청 장관을 맡으면서 주요 인물로 부상했는데 이때 방위청의 현안은 9.11 테러 발생에 따른 법안 제정과 육상 항공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등 민감한 현안들이었다. 이후에도 주로 농업 분야와 군사정책에서 역할을 맡아왔다.

아베 신조의 라이벌로 각인된 것은 201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하게 되면서다. 이때 지방조직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어 후보 5명 중 1등을 기록했다. 그러나 앞서 탈당 등 이력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로서는 당내 기반을 쌓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2차 투표에서 당내 파벌들이 복귀한 아베 신조를 지지하기로 합의하면서 이시바 시게루가 패배했다. 아후 자민당 간사장으로 기용됐고 2014년에는 지방창생상 등으로 입각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계속 아베 신조 총리와 마찰을 일으켰다. 2016년에는 직을 내려놓고 포스트 아베를 준비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2018년 총재 선거에 결국 출마했지만 아베 신조에게 패배했다. 이때도 지방 조직들의 지지세가 유지됐기 떄문에 아베 신조로서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가 여론조사로는 1등을 지켜왔는데 아베 신조 총리와 정치적 마찰을 일으켜 왔기 때문에 대척점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총리는 자민당 내 파벌들이 나눠먹기식으로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이번에도 기회는 없을 것이다. 본인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과거부터 파벌을 없애자는 취지의 주장을 해왔고 복당 당시 지금의 다케시타파로 복당했다가 당직을 맡으면서 탈퇴했고 그 이후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다 2016년 결국 본인의 파벌을 만들면서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인 셈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기시다 후미오, 스가 요시히데, 이시바 시게루, 일본 자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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