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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잡감

극우와 보수 구분하기

2025년 7월 9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주욱 보니, 청년세대 논의에 대한 반응으로 몇 가지 전형적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보수후보 지지만으로 젊은 남성 보수화 진단은 억지 운운 하는 것이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최소한 찾아볼 의지도 없다는 점에서 논할 가치가 없다.

둘째는 젊은 남성이 아니라 세상이 문제 아닌가요 라는 반응이다. 이 주장에는 진실이 담겨있지만 논점이탈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온정주의적이다. 젊은 남성 얘기를 굳이 하고 있는 것은 세상이 잘못됐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이 아닌가? 자본가 얘기를 하는 것은 자본가 개인을 미워하기 위해서인가, 자본주의를 얘기하기 위해서인가(이건 우스개로 하는 말이지만, 혁명의 커튼 뒤에는 언제나 혁명에 돈을 대준 고마운 자본가들이 있었다)?

셋째는 극우화와 보수화는 다른 것인데, 보수화는 인정할 수 있지만 극우화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거다. 이건 보수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떤 경우에 대해선 보수화와 극우화를 면밀히 가르는 일이 부질없는 일일 수 있다고 본다.

가령 보수화 된 젊은 남성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전망하는데에 있어서는 보수화와 극우화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즉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보수화와 극우화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 둘을 추동하는 것은 적어도 현재 한국 정치에서 같은 정치-조직화 내지는 논리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즘을 반대한다면 ‘중국-북한-전체주의(권위주의)-더불어민주당-문재인-진보-페미니즘-차별금지법’이라는 개념 혹은 가치의 연쇄적 사슬을 전부 반대해야 한다는, 보수정치의 반대-정치의 조직화 논리다. 보수냐 극우냐를 여기서 굳이 나눈다면, 이걸 반대하기 위해 어디까지 실천할 수 있느냐의 차이에 불과한 거다(물론 그건 중요한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근본적 사상과 이념의 차이는 아니라는 거다).

가령 페미니즘 반대를 위해서라면 법치를 무시하고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답변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것. 과거에도 인용했던 아래의 기사.

민주주의 규범과 관련한 여러 문항에서 2030 남성은 전체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또래 여성들과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물론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은 보수, 20대 여성은 진보 성향이 높게 나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와 극우는 다르다. ‘2030 남성 극우화’ 담론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집단에 존재하는 소수의 ‘계엄 옹호·탄핵 반대’ 세력이 과대 대표된 측면이 없지 않다.

다만 2030 남성들의 버튼을 누르는 요인이 있다. 페미니즘이다. ‘지나친 페미니즘의 영향을 막기 위해서라면 법규칙을 어기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문장을 제시했다. 전체에서 14%가 동의한 반면, 20대 남자의 32%, 30대 남자의 25%가 동의했다. 이는 동세대 여자들과 16%포인트에서 27%포인트 차이 날 뿐 아니라 여타 세대 남자들에 비해서도 튀는 수치다. 즉 2030 남성 대부분은 민주주의적 규범을 대체로 존중하지만, 적어도 이 집단의 네 명 중 한 명은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불신을 이유로 무력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045

나는 과거에도 이 기사 내용의 이 대목이 의아하다고 했고, 이 그래프에서 드러난 답이 의미심장 하다고 했다. 보수정치 특히 이준석류가 결합한 형태의 보수정치는 얼마든지 ‘페미니즘 반대’를 ‘민주당을 포함한 진보 일반의 반대’로 확장시킬 수 있다(앞서 개념 혹은 가치의 연쇄적 사슬을 전부 반대하는 정치 문법에 따라서). 그때 ‘법 규칙을 어기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답변의 이 수치가 유지될 것인가는 장담할 수 없으나, 다른 세대 다른 성별의 그것보다는 확실히 높을 것이라는 점은 내가 장담할 수 있다.

이게 뭐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신념화 된 극우는 아니다… 페미니즘을 잠깐 반대할 뿐이다… 등등 얘기를 하지만, 그게 21세기의 극우 포퓰리즘이라고 지금까지 합의해 온 것이 아닌가? 가령 유럽의 진화하는 극우 포퓰리즘은 어떤가? 마린 르 펜이 난민을 거부하자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여성의 권리신장을 얘기한다는 점을 들어 ‘신념적 극우는 아니고 스마트한 스윙보터’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잘 못 봤다. 어느 극우 정당이 여성-성소수자를 대표로 뽑았다고 해서 같은 평가를 하는 것을 들어본 일 없다. 아마 그들이 ‘우리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 정치와 좌익과 권위주의와 위선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전형적 주장을 할 것인데도 말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건 그들은 여전히 ‘극우 포퓰리즘’으로 분류되고 평가된다.

시사인에 실린 아래의 글은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물론 아마도 위의 얘기를 하면 그래도 한국의 이대남은 유럽 극우와 다른 이념 지향의 지도를 그린다고 하겠지만 그건 그 사회의 정치적 조직화와 연관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럽의 난민이 여기서는 페미니즘이나 중국이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07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글 중간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시사인은 위 글과 견해를 달리 하는 글도 이전에 실은 바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2030 남성, 극우, 보수화, 이대남

비난을 위해 남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

2025년 7월 7일 by 이상한 모자

유튜브 세계에 살다 보니 부쩍 그런 느낌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원래 그런 사람들이 많은 건지, 아니면 많아진 건지, 그동안 그냥 내가 무시하고 살아왔던 건지 모르겠다. 그건 오로지 자기가 올바로 살고 식견이 있고 고민이 깊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만 남의 처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건설노조에 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때가 많았다. 협상이나 교섭을 위해서야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저 일상에서 마치 ‘힘들게 사는 사람’의 전형처럼 건설노동자가 다뤄지는 것은 좋은 일인가? 물론 그럴만한 맥락이면 괜찮다. 기획기사를 쓴다든지… 근데 그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인식과 대화의 과정에서 말이다. 어떤 녀석이 “땡볕에서 땀 흘리는 건설노동자도 있는데, 이 정도로 불평하면 안 되겠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좋은 일이냐는 거다.

하물며 비난을 하는 맥락에 동원한다면 어떨까? 오늘은 ‘유튜브 방송도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어떤 분이 ’30도 넘는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에 비하면 에어컨 바람 쐬면서 입 터는 것 정도는 꿀 빠는 일 아니냐’라고 하는 거였다. 내가 말한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건 기계의 조작 등 신경쓸 게 많아 정신이 없어 속보를 놓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혼자서 방송과 내용 준비, 조작을 다 하다 보니 시청자가 화면에서 보는 것보다 실제로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하고 있다는 점을 가리키는 거였다. 여기다가 ‘꿀 빠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맥락이 맞지 않는 것으로, 즉 이 말 하신 분은 남의 말을 못 알아 듣는 사람이다. 근데 이런 분이 많다. 그냥 자기 혼자 생각한 바를 화면에 나오는 사람에 적용을 해가지고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결론내고 하는 분들이 천지다.

그냥 못 알아 먹고 마는 거면 크게 상관이 없는데, 거기서 30도 넘는 바깥 운운 하니까 성질이 나는 거다. 이게 처음 보는 지랄이 아니다. 지금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입으로만 싸우고 어쩌고 하는 것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두 가지 맥락. 첫째로 건설노동자와 같이 ’30도 넘는 야외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신성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둘째로 이러한 태도를 남을 도착적으로 깎아내리는데 동원함으로서… 결과적으로 노동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태도의 결과가 진보(학출 노출의 대립이나 학출의 기만적 자기연민)나 보수(계급연대 해체)를 가리지 않고 각자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연상하게 되어, 입 털어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도 전-직업적 운동권으로서도 현재진행형의 정신적 운동권으로서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다른 것 다 떠나서.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노동이 힘들어서 신성한 게 아니다. 노동자가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실현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조직하는 수단이기에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건설노동자에게는 뉴스 해설이 필요 없겠느냐’라고 했다.

아무튼 꿀 빤다느니, 이런 현실 인식에도 작용하는 구조라는 게 있어 보이는데… 그런 건 나중에 또 논해보자.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노동

VIVANT을 보고

2025년 7월 3일 by 이상한 모자

밥 먹으면서 VIVANT이라는 넷플릭스 일본 드라마를 보았다. 보면서 느낀 것은 이런 노골적인 군사팽창주의적인, 아베신조적인 열망을 숨길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는구나 라는… 아래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보기 싫으면 적당히 끊고 가시기 바란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별반’이라는 육상자위대 산하의 초법적 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있다.  이 드라마 소개와 더불어 ‘별반’의 모티프가 된 실제 ‘별반’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사 참고.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81901260000926

하여간 이 ‘별반’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지 하는 대단한 녀석들인데, 주인공인 사카이 마사토는 국제적 테러 조직 ‘텐트’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어… 일부러 휘말린 건지 휘말리게 된 김에 개입하는 건지 아무튼 휘말리게 되어 ‘텐트’를 조사하게 된다. 이 과정에 일본 경찰의 멋진 정보분과인 외사과 소속의 아베 히로시와 사막을 건너는 등 대모험을 하게 되는데… 이런 얘기로 시작해서 뭐지 인디존스 같은 얘기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고 뒤에 가면 사카이 마사토가 ‘텐트’ 지도자인 야쿠쇼 코지의 어릴적 헤어진 아들이라는 걸 깨닫는 등 꽤 흥미진진한 전개로 이어진다.

여기서 이제 일본 국뽕과 대일본제국 만세 같은 얘기로 흐르기 시작하는데, 이게 뭐냐면, 사실 젊은 시절 하야시 켄토였던 야쿠쇼 코지는 아베 히로시와 마찬가지로 공안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는 공안 소속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가상 국가인 발카에 비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내전에 휘말리는데, 이래 저래 하다보니 발카인들과 용병집단을 형성해 군사 활동을 대신 해주고 돈을 벌어 고아들을 먹여 살리는 입장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일에 평생 몰두해 거대 테러조직을 만들게 되었고, 그 테러 조직을 통해 벌어들인 돈으로 내전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수많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고 빈부격차를 해소하는 등의 활동을 뒤에서 펼치고 있으며 전과가 없는 ‘깨끗한’ 후계자도 키워 가상국가 발카를 번영의 길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더라 라는 것인데…

이게 뭐냐면, 결국 아베 시절의 적극적 평화주의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인 야쿠쇼 코지가 발카인들을 돕다가 무장세력화 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다. 그런데 거기서 비극으로 가지 않고 발카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실제 성과를 낸다는 것은 무슨 얘긴가? 일본인이 다른 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서 평화도 가져오고 개발도 하고 부도 쌓게 만들고 다 해준다 이거다. 대동아공영권?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이렇게 하는 와중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데, 이건 별반 소속인 아들 사카이 마사토가 해결해주게 된다는 것이다. 별반 사카이 마사토의 활약 덕분에 가상국가 발카에는 실질적 번영이 찾아온다. 근데 별반은 뭐다? 초법적 특수부대이다 이거다. 여기서 아베 시대의 특정비밀보호법, 안보법제 이런 걸 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결국 야쿠쇼 코지는 마지막엔 일본으로 돌아와 개인적 복수를 하려다가 사카이 마사토에게 죽는데, 그 순간에도 ‘역시 일본을 지키려고 아버지까지 죽이는 너는 역시 내 아들! 자랑스럽다!’라고 한다. 사카이 마사토는 눈물을 흘리고… 근데 야쿠쇼 코지가 하려던 개인적 복수가 뭐냐면, 자신과 가족이 발카에 파견됐을 때 희생되도록 내버려 둔 부패 정치인을 죽이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애국자… 였던 피해자 대 부패 정치인’, 이 구도는 극우정치를 보며 이미 익숙해졌다. 그러니까 구세대가 손에 피 묻히고 전쟁 일으키고 이런 게 다 외국에 번영을 안겨주고 이후 세대를 잘 살게 해주려고 한 거다, 책임은 뭐 지라면 어느 정도 지겠지만 잊지 말아야 한단다 알겠니? 뭐 그런 정서겠지.

그 외에도… 발카인들이 계속 일본 칭송을 하는 등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수가 있나 싶은 장면이 계속 나온다. 뒤로 갈수록… 극우 드라마 어쩌구 라고 해도 이건 정말 부인할 수 없겠군 싶은 생각이 강해진다. 아니 근데 요즘 극우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는 얘길 많이 보았는데, 2030 남성 얘길 하면서 말이다. 함부로 극우라고 하지 마시오! 이 얘기 엄청 봤거든? 근데 다들 일본 정치에서는 뭐 스스럼없이 무조건 다 극우라고 하더라고. 아무튼 군대도 없고 무언가가 거세?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일본 버전의 극우적 세계관을 느끼고 싶다면 이 드라마를 추천한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VIVANT, 비반, 사카이 마사토, 아베 히로시, 야쿠쇼 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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