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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오지 오스본

행복한 사람, 오지 오스본

2025년 7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매일 새벽 일어나면 뉴욕타임스 뉴스레터를 봐야 한다. 유튜브 방송을 위해서다. 오지 오스본 사망 소식은 이를 통하여 알았다. 뉴욕타임스 뉴스레터는 이틀째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비통하였다.

대학에 갔을 때 스쿨밴드에 건반으로 지원하려고 했다.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미스터 크라우리의 아웃트로 솔로 파트를 건반으로 쳤다. 밴드 선배들은 그런 거 칠 거면 그냥 기타를 치라고 했다. 그래서 만져본 적도 없는 기타 연주자가 되어야 했다. 추모의 의미로 기타 연주를 해보려 했으나 칠 수 있는 곡이 없었다. 언젠가는 칠 수 있겠지 했던 곡을 아직도 못 치는데 오지 오스본은 죽어버리다니… 나도 늙은 것 같고,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영원한 기타키드이다. 우리 기타 초보들에게 있어서 오지 오스본은 동경의 대상이다. 그는 랜디 로즈, 제이크 E 리, 로버트 트루히요와 함께 일했고 잭 와일드를 발굴했다. 그가 작곡에 얼마나 관여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가 부른 곡 대부분은 멜로디 중심이다. 멜로디에 탁월한 감이 있다. 영포티가 보기에 위대한 밴드의 조건은 역시 멜로디다. 블랙 새버스에서 사실상 쫓겨난 오지 오스본이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랜디 로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지 오스본이 랜디 로즈와 잘 맞았던 것은 멜로디 메이커로서의 감과 랜디 로즈의 클래시컬에서 오는 서정성의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업도시 버밍엄 출신이다. 이런 도시가 늘 그렇듯 버밍엄에는 낙관과 불안, 번영과 모순, 욕망과 체념이 공존했다. 오지 오스본은 희망보다는 비관 쪽에 가까운 계급적 입장이었다. 공장을 다니다 손가락 두 마디를 잃고도 기타에 전념하는 동네 친구 토니 아이오미와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오늘날엔 꽤 전형적인 스토리라고 할만한 일인지 모른다. 블랙 새버스라는 이름의 이 밴드는 예상을 깨고 성공을 거두었으나 술과 마약에 더해 음악적 고집과 자존심, 오기 등의 문제로 오지 오스본은 밴드에서 사실상 쫓겨났다.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쫓겨난 뒤에 오지 오스본은 상업적으로 더 크게 성공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사실 확인조차 안 돼 더 충격적으로 회자되었던 수많은 기행의 전설을 써내려갔다. 그러나 약 20년 정도 오지 오스본과 버밍엄 시절의 친구들은 냉랭한 상태로 지냈다. 1990년대 후반에 각자의 사정과 미디어의 필요에 의해 블랙 새버스 재결합 이슈가 나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복원되는 듯 했다. 관심도 꽤 모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어른의 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 풀리지 않는 복잡한 문제라는 것들이 있었다. 오지는 오지대로의 활동을 진행하고 토니 아이오미 등은 오지가 떠난 시절을 잠시 채웠던 로니 제임스 디오와 헤븐 앤 헬 활동을 하면서, 좀 흐지부지된 느낌이 있다. 더군다나 해결되지 않은 빌 워드의 계약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는 2017년 마지막 공연 때까지도 정리되지 못했다.

이들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병이었다. 오지 오스본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토니 아이오미는 그 훨씬 이전인 2012년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빌 워드는 심장 문제가 있다. 특히 오지 오스본의 상태가 문제였다. 그는 2020년에 진단 사실을 공개했는데, 이젠 걸을 수조차 없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버밍엄의 친구들은 오지 오스본의 마지막 음악 활동을 블랙 새버스의 보컬리스트로 마치게 해주는 것에 합의했다. 다른 복잡한 계산이나 자존심, 고집은 이제 필요없었다.

2025년 7월 5일, 버밍엄의 빌라 파크에서 열린 백 투더 비기닝이라는 이름의 공연은, 걸을 수 없게 된 오지 오스본이 ‘어둠의 왕자’에 어울릴 법한 거대한 왕좌에 앉은 채, 오지 오스본 공연 오프닝에 곧잘 나오는 오 포르투나의 배경음과 함께 무대에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첫 5곡은 오지 오스본 시절의 곡으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한 기타리스트 잭 와일드가 함께 했다. 잭 와일드는 킬트를 입고 ‘오디오 워해머’란 이름을 붙인 기타를 들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5곡을 연주했다. 오지 오스본의 노래는 힘겨웠지만, 상관 없었다. 크레이지 트레인이 끝나고, 블랙 새버스 원년 멤버들이 모두 올라왔다. 4곡을 했다. 기저 버틀러는 대단했다. 이때쯤 오지는 노래를 거의 부를 수 없는 지경인 것 같았다. 음정을 맞출 수 없었다. 그러나, 전혀 상관없었다. 마지막은 패러노이드였다. 그는 심지어 그 와중에 일어나 뛰어다니고 싶어했다. 버밍엄 친구들과의 갈등은 그렇게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 17일 후에 오지 오스본은, 그가 바랬던 대로 블랙 새버스의 보컬리스트로서, 고향 버밍엄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각해보면 7월 5일의 공연은, 굳이 삶을 싸움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나름대로 마지막까지 벌이는 싸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자기 자리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행복이다. 그는 행복했을 것이다.

다음은 뉴욕타임스가 꼽은 오지 오스본의 12개 대표곡이다. 제목을 누르면 유튜브 링크로 연결된다. 나는 음악적 특징이나 성취와 관계없이, 어디까지나 오늘의 분위기상 Changes와 Close My Eyes Forever를 추천한다.

Black Sabbath, ‘Black Sabbath’ (1970)

Black Sabbath, ‘War Pigs’ (1970)

Black Sabbath, ‘Iron Man’ (1970)

Black Sabbath, ‘Paranoid’ (1970)

Black Sabbath, ‘Changes’ (1972)

‘Crazy Train’ (1980)

‘Suicide Solution’ (1980)

‘Shot in the Dark’ (1986)

‘Close My Eyes Forever,’ with Lita Ford (1988)

‘Mama, I’m Coming Home’ (1991)

‘Ordinary Man’ (2020)

‘Patient Number 9’ (2022)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블랙 새버스, 오지 오스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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