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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기사 제목이 참 좋아

2025년 3월 1일 by 이상한 모자

맨날 언론 욕하고 뭐 욕하고 하지만, 야 기사 제목이 참 좋아.

주간경향 / 극우가 됐다, 저쪽이 싫어서
https://www.khan.co.kr/article/202503010900021/

야 기사 제목이 좋잖아 일단. 그럼 된 거여. 응. 기사 제목이 이렇게 좋은데. 그럼 됐지. 암.

그냥 기사 제목이 좋다 그러고 끝나면 웃기니까. 여기 기사에 보면 대략 맥을 짚을 수 있는데, 주장하는 거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뭘 반대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임. 그래서 과거 투표 이력 같은 걸 보면 왔다갔다 하기도 하지. 그때 뭘 반대했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이런 이력과 몇 가지 사안에 대한 태도로, 젊은 남성은 보수가 아니라 스윙보터라든가 신념형 극우가 아니라든가 이런 얘기를 막 하는 건데, 사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임. 뭘 반대하는 가가 중요하고, 그 반대가 현실에서 어떤 동맹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그 동맹이 어떤 정치적 결과를 낳고 있는가가 핵심임.

나치를 지지한 독일 사람들은 다 신념형 극우였을 거 같음? 그때 거기도 유대인으로 상징되는 뭔가를 반대하면서 나치를 지지하는 결론에 이른 것이지. 더 얘기하고 싶으나 빨리 씻고 일해야 돼서 이만…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 극우주의

젊은 남성에 대한 극우화 착시

2025년 3월 1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어디서 이렇게 얘기했다. 1) 젊은 남성의 보수화 경향을 부정할 수 없다(이건 이전에 올린 메모 참조하시라). 2) 그런데 이게 극우집회에 참석하는 등의 극우화 경향으로 이어지는지는 살펴볼 문제다.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2030 여성은 뭐 진보적이냐! 트랜스젠더에 대한 태도를 봐라! 였습니다마는… (물론 여기다 올린 메모에도 몇 차례 썼듯 젊은 여성의 진보적 경향은 전세계적 트렌드이다.)

최근 시사인 보도를 보니 젊은 남성의 극우화는 사실이 아닌 거로 자기들이 확인했다는 대목이 있다. 아래의 기사 대목.

민주주의 규범과 관련한 여러 문항에서 2030 남성은 전체 평균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또래 여성들과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물론 한국갤럽 조사를 보면 20대 남성은 보수, 20대 여성은 진보 성향이 높게 나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와 극우는 다르다. ‘2030 남성 극우화’ 담론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집단에 존재하는 소수의 ‘계엄 옹호·탄핵 반대’ 세력이 과대 대표된 측면이 없지 않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045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다.

다만 2030 남성들의 버튼을 누르는 요인이 있다. 페미니즘이다. ‘지나친 페미니즘의 영향을 막기 위해서라면 법규칙을 어기거나 무력을 사용하는 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문장을 제시했다. 전체에서 14%가 동의한 반면, 20대 남자의 32%, 30대 남자의 25%가 동의했다. 이는 동세대 여자들과 16%포인트에서 27%포인트 차이 날 뿐 아니라 여타 세대 남자들에 비해서도 튀는 수치다. 즉 2030 남성 대부분은 민주주의적 규범을 대체로 존중하지만, 적어도 이 집단의 네 명 중 한 명은 페미니즘에 대한 강한 반감과 불신을 이유로 무력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게 극우화 아닌가?

그래서 나는 좀 더 연구를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최근 다른 데서도 가설을 얘기한 바 있는데, 이런 얘기다.

1) 젊은 세대의 민주주의 일반 규범에 대한 답변은 다른 세대와 비교해 전반적으로 원론적일 것이다. 전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어찌보면 당연한 건데, 원래 젊은 세대가 이상주의적 성향을 가진다. 뭐 아니던데!? 지극히 현실적이던데!? 그렇게 반응할 분들이 있을텐데, 젊은 세대가 이상주의의 전형이라는 게 아니고 어떤 사고의 흐름이나 방식에 그런 성향이 있다는 거다. 따지고 보면 당연하잖나? 어떤 방식으로든 학교 교육(당연히 오늘날의 학교 교육은 이상이 기준이다)의 과정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세대인데.

2) 보수화든 극우화든 그 기준은 뭘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뭘 반대하느냐를 기준으로 어떻게 동맹이 조직되는지를 봐야 한다. 가령 오늘날 극우화 된 인사들이 반대하는 것은 ‘진보-더불어민주당-차별금지법-여성주의-권위주의(억압)-중국-공산주의-북한’이라는 개념들의 연속된 사슬이다. 이 사슬을 묶는 과정이 지난 정권 내내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하나를 반대하면 나머지 전체의 사슬을 반대하도록 조직화 하는 게 최근 극우화의 방식이며 통로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젊은 남성의 응답을 보면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윤석열이 부정선거와 야당의 국회 권한 남용 등에 더해 페미니즘을 계엄 선포의 주요 이유로 주장 하였다면, 젊은 남성의 비상계엄 선포 찬성 응답은 증가 하였을 것이다.

그 외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1) 젊은 남성은 비상계엄 선포 초기 일반적으로 윤석열을 반대했을 것이다. 다만 보수화 경향(집회 등을 감정적 선동이라 치부하며 꺼리는 태도 등) 때문에 집회에 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다소 소극적이었을 것이다. 2) 윤석열이 적극 반박을 하고 극우유튜브가 일제히 반박 논리(어설프지만)를 내놓고, 민주당이 내란죄를 제외했고(사실이든 아니든) 헌법재판관들이 편향적이란 주장이 나오면서 보수적 젊은 남성의 일부는 판단유보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 중 일부는 아예 극우화(탄핵은 민주당에게 속는 것인데, 이들에게 있어 민주당은 곧 여성주의이므로) 되었을 것이다. 3) 이러한 ‘속는 것일 수도 있어, 일단 판단 중지!’의 태도는 반-여성주의의 신화(예를 들면 곰탕집 누명 어쩌구 사건) 등에 일부 기원을 두고 있을 것이다.

요즘 이런 저런 연구에 대한 보도를 보는데, ‘물어 봤더니 이렇게 답했고 그걸 보니 이런 거 같더라’ 수준이 아닌,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계속 강조하지만 젊은 남성을 나쁜 놈으로 만들고 젊은 여성을 ‘올려치기’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문제의 원인이 뭔지를 파악해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내려치고 올려치는 것으로 관심을 끌고 하는 것에는 아무 흥미가 없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화, 여성주의, 윤석열, 이대남, 젊은 남성, 페미니즘

공감과 레닌과 오타쿠

2025년 2월 17일 by 이상한 모자

박선생님이 논문을 다 쓰셨는지 여기 저기 좋은 말씀 막 써내시는데…

인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 저널리즘이 그 탄생에서부터 “같은 감정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의례”였다고 말했다. 언론학자 존 하틀리는 “근대 저널리즘의 진정한 기원”이 극소수 지식인의 고담준론이 실리던 ‘더 타임스’ 같은 신문이 아니라, 수십만부씩 팔려나갔던 18세기 영국의 ‘포퍼 프레스’(pauper press)였다고 밝힌다. 거기엔 가난한 인민의 기쁨과 슬픔이, 무엇보다 급진적 해방의 염원이 진솔하게 담겨 있었다. 언론이 아프고 힘든 이들을 위로하고 돌볼 때, 사람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고 자신 또한 타인을 돌보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모티브 뉴스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저널리즘의 ‘오래된 미래’(Old Futures)다. 그것은 진영 논리에 갇힌 부족주의적 저널리즘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극우주의에 맞설 효과적인 수단이면서 동시에 언론의 신뢰를 회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182413.html

분명한 건 해결의 열쇠가 논리가 아닌 ‘감정’에 있다는 점이다. 극우주의는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똬리를 튼 ‘감정 서사’이며 논리적 설득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감정은 이성으로는 통제될 수 없고 다른 강력한 감정으로만 제어될 수 있다’고 했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에 따르면 증오, 혐오 같은 타자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타자를 전혀 모르거나 자주 접촉하더라도 그 접촉이 피상적일 때 강해진다. 반면 타자와 ‘깊이’ 접촉하고 교류하게 되면 편견은 극적으로 줄어든다. 그것은 동질성 강화, 즉 같은 부족이 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타협의 여지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즉, 공감을 통해 세계 속에 각자의 의미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더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트랙터와 응원봉이 남태령에서 만났을 때 우리는 일상에서 늘 경험하던 ‘회원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누구나의 민주주의’를 목도했다. 그 기적을 가능케 한 건 깊은 접촉과 서로 돌보는 감정이었다. 다시 만들 세계는 바로 그 마음에서 시작돼야 한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858.html

박선생님도 나이를 자셔서 그런가… 옛날 같았으면 감정 이런 얘기는 바로 비웃고 그러셨을 분인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계급투쟁의 전선 뭐 그런 얘기 할 적에를 생각해보면… 하긴 그것도 이십 몇 년 전입니다 이제…

제가 이런 말씀 다 이해할 깜냥은 안 되고, 그냥 제 딴에 드는 생각을 끄적여 보면, 레닌이 말이다. 이스크라를 하던 시기가 있고 프라우다를 내던 시기가 있어요. 이스크라는 혁명가 이론가 조직가 중심의 신문이지. 이스크라 자체가 신문이자 신문보급망이자 당 조직망이다. 사상과 이론을 보급하는 역할이다. 편집국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치열했다. 플레하노프가 멘셰비키의 편을 들면서 레닌은 축출되었다.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노선은 세간에 이렇게 알려졌다. 멘셰비키의 당 조직론은 느슨한 연대에 기반하는 것이었으나 볼셰비키는 활동가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지하 조직을 원했다. 그런데 1904년 이스크라를 떠난 레닌은 1912년 프라우다를 창간한다. 프라우다의 지면은 노동자, 농민, 병사가 직접 투고한 기사들로 채워졌다. 1905년 혁명과 두마 설치 이후 변화된 정세에 맞춰 전술을 전환한 것이다. 그런데 멘셰비키는 여전히 잘난척 하는 이론가 중심의 체계를 유지했다. 1917년이 되었을 때, 특히 2월 이후 볼셰비키에 대중 조직의 무게 중심이 넘어간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게 표준적인 운동권 서사인데, 돋보기로 그 당시를 들여다 볼 수 있다면, 프라우다에 실린 글들도 위 첫 번째 글에 언급된 언론의 역할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글들을 보면서 1)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체감하고 2) 그러면서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교정하고 3) 남들에게도 같은 생각을 권하면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조직화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노동계급 안에서도 여러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차이가 있었겠으나, 이렇게만 말하고 끝내면 하나의 진영이 형성되는 과정에 불과한 것 같지. 그래서 두 번째 글의 인용된 대목에 대한 생각을 추가로 하게 되는 것인데, 타자와의 감정적 공감대를 논리와 이성과 설득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은 맞는 얘기 같다.

그래서 지난 번에 좌파-오타쿠 모임에서 취미를 더 열심히 즐기자 한 것이다. 오타쿠라고 한다면, 어떤 타자들과는 같은 취미라는 이미 훌륭한 공감대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그냥 서로 낄낄대는 것만으로는 취미와 현실을 연결시킬 수 없으니 비평적 활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이다. 꼭 좌파-오타쿠 프라우다를 만들자 이런 게 아니라고 해도… 프라모델 아니고 임마…

그냥 생각나는 걸 적어봤다. 여기 쓴 이야기는 박선생님의 생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저의 망상임을 밝힘.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이스크라, 프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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