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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참여소득

2021년 3월 6일 by 이상한 모자

참여소득에 대해서는 일전에 일면식도 없는(방송국서 지나가다 한 두번 스친 일은 있다) 홍기빈 씨가 라디오에서 얘기하는 걸 듣고 여기에도 메모를 남긴 바 있다. 한겨레TV가 만드는… 김완 기자가 진행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기본소득을 다룰 때에도 단어를 언급했는데 설명할 기회는 없었다. 그리고 나서 어제 오늘 전환사회 콤비가 쓴 글을 읽게 되니 다시 반갑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060300035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5402.html

두 사람의 포지션은 말하자면 이게 ‘순한맛 기본소득’이라는 듯이 느껴진다. 나는 이론에는 무지한데, 이전에 남긴 메모에도 적었듯 참여소득의 의미가 확장되는 것에 주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가령 홍기빈 씨는 이렇게 썼다.

기본소득은 국가와 사회가 모든 개개인에게 일정한 소득을 ‘무조건적’으로 주는 책임을 이야기할 뿐, 그 돈을 개인들이 어떻게 쓰고 활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개인의 재량에 맡기자고 한다. 반면 참여소득은 어떤 활동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인지 또 그 활동의 가치, 즉 참여소득의 액수를 어떻게 계산할 것인지 제반의 문제를 사회라는 실체가 결정할 문제라고 본다.

여기서 “사회라는 실체가 결정”이라는 대목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서 과거 언급했던 참여계획경제 등이 끼어들 틈이 생기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참여계획경제 등에 대해선 2013년 장선생님 글을 참고… 다들 머리를모아 누구의 어떤 활동에 얼마를 주는 게 옳은지를 결정하는 이런 모델에서 실패가 없으리라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실패가 퇴적될 수 있는 구조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반대와 반대에 대한 반대를 거듭하는 손바닥 뒤집기 같은 정치가 아니고… 일하러 가야되어서 그만 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장석준, 참여계획경제, 참여소득, 홍기빈

어제 쓴 글과 오늘의 생각

2021년 3월 5일 by 이상한 모자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0035.html

윤석열 씨가 훌륭한 검사라는 거랑 정치를 해도 된다는 거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하지 말라고 썼다. 혼자 생각으로는, 대한민국 정치가 검찰이냐 아니냐 하는 수준까지 가지도 못할 걸로 본다. 하여간, 잘 돼도 못 돼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이러고 있노라면 괜히 일본 생각을 하게 된다. 해외 사례를 갖고 어쩌구 저쩌구 하지만 우리랑 제일 유사한 건 역시 일본이다. 거기나 여기나 검찰이 봐주는 게 제일 큰 문제다. 권력은 봐주면서 약자에겐 가혹하다는 비판은 독재와 민주 구도에서 독재에 부역하면서 민주주의는 탄압한다는 개념으로 모습을 바꿨다. 이는 곧 독재=보수, 민주주의=리버럴의 정파 구도로 둔갑했다. 그래서 리버럴이 집권한 이 정권에서 검찰의 폐해는 ‘권력은 봐주고 약자에겐 가혹하다’는 게 아니라 ‘보수 야당에 부역하면서 집권 세력을 탄압한다’는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권력 기관의 일부인 검찰이 어떻게 집권 세력을 탄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민주적 통제’라는 구원투수가 등장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똑같지만, 이런 개념적 장난이 일본에도 있었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할 때 슬로건이 관료가 아니라 정치! 라든가 뭐 그런 거였다. 사실 이건 한일만 그런 게 아니고 역사가 긴데 어쨌든, 그 근본은 ‘무언가에 대한 반대'(일본의 경우는 족의원-관료-자본의 삼각동맹)로 구성된 정파 논리를 통치에 적용하다 보니 생기는 문제이다.

재미있는 건 수상 관저의 권한 강화를 추진해 온 자민당이 재집권한 이후에도 똑같은 얘기가 나왔다는 거다. 내가 선거로 선출됐으니깐 내 말을 들어! 가령 ‘용과 같이 7’은 의회에서 선출한 수상에 비해 직접 선출된 도쿄도지사가 무시무시한 권력 남용을 할 수 있다는 경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아베 신조의 부패 스캔들에 대하여 우익 정치인들이 전문가-관료를 무시하고 찍어 누르며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다 생긴 일이라고 아사히 신문이 비판하는 걸 봐라. ‘관료가 아니라 정치!’가 유행일 때에는 어떻게 했니? 그러니까, 역시 ‘반대’가 핵심인 것이다.

오늘은 이런 글을 보았는데, 뭐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305/105729956/1

그러니까 내 말은, 거칠게 말해서 막번체제가 천황 중심 중앙집권체제로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은 천황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중앙 권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분산된 권력이 상호간 격렬한 투쟁 없이 중앙집권화되는 것은 어떤 경우든 쉽지 않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오래 전 폐기한 천황의 직접통치라는 대안이 있었다.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개발하는 것보다 대정봉환을 하는 것이 쉬운 길인 것이다. 이게 기껏 근대화라며 메이지 유신을 해놓고 전면적 대의제가 아니라 절충적 천황통치가 부활한 이유이다. 즉 막부는 천황의 대립항이었고, 천황은 막부의 대립항이었던 거다.

책을 써야 되니까 여기까지만 하고… 빨리 좀 끝내자…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메이지 유신, 민주적 통제, 윤석열

허무한 일들

2021년 3월 4일 by 이상한 모자

얼마 전에 인터넷 방송에 나갔는데, 끝나고 나서 그만 둔다고 했다. 제작진이 ‘재미있게 하라’고 한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행자는 매번 왜 방송에만 들어오면 뚱하냐는 둥, 불평 불만이 많다는 둥 해왔다. 재밌자고 하는 얘기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기분이 좋을 일도 아니다. 그래서 적당히 반발하는 척 하면서 분위기를 이어가면 될 걸로 생각했다. 이 대목에 대해선 기분의 문제는 있겠지만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준비도 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평하라고 한 거다. 심지어 내 분야도 아니었다. 정치나 정책 어떤 사회현상에 대한 거면 상관없다. 하지만 개인에 대한 건 잘못된 얘기를 할 수 있다. 김동성 씨의 인생에 대해 내가 준비도 없이 갑자기 논할 수 있는 게 뭔가? 안타깝다고 했다니 그게 전부냐며 또 면박을 주려는 태도이다. 준비해오란 건 다른 주제 아니었냐 했더니, 의견을 달랬는데 당신이 의견을 안 주지 않았냐 한다. 사실이 아니다. 그랬더니 또 SNS를 안 해서 이 소식을 잘 모르시는가보다 한다. 그럴 수 있지만, 그게 본질인가? 진행자는 이전에도 당신은 카톡을 안 해서 일이 어렵다 라고 방송 중에 말했다.

이 모든 문답은 생중계되었다.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하는데, 답을 하면 바보가 되는… 이게 뭐지??? 아무튼. 결국 내가 계속 해봐야 프로그램에 누가 될 뿐이니 그만 하겠다고 했다. 아마 거기서는 계속 이상한 캐릭터로 남을 것이다.

시사평론가라는 게, 그냥 생계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만 갖고 사나. 뭔가 공적 목표를 갖고 살아야지. 뉴스 볼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맥락을 해설해주고 이게 사실은 이런 거요, 이건 이런 문제요 하는 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들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걸 내가 잘하진 못하지만 그래도 그런 삶에 좀 충실하고 싶다.

글을 쓸 때도 그런 생각을 종종 하는데, 지난 주에는 이런 글을 썼다.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0012.html

오늘 이 코너에 들어갈 글을 쓰는 날인데, 윤석열 씨가 직을 던지는 바람에 그 얘기를 또 썼다.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다. 이 정권의 괴상한 정치가 또 다른 괴물 같은 정치를 낳고 있다. “윤석열은 잘할지 모르지만 검찰이 언제나 윤석열 검찰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논리로 검찰개혁이든 뭐든 말했어야 하는데 윤석열 윤석열 타령하다 이게 뭐냐? 이제 검찰개혁! 하면 다들 비아냥 대기만 한다. 대검찰강경파분들은 단견으로 대업을 망친 사람들이다.

기자협회보에는 이번 주에 이런 글을 썼다. 백신 얘기 같은 건 어차피 전문가 또는 준전문가 분들께서 SNS에서 활약을 하고 계시겠지만, SNS라는 게 자기들끼리나 물고 빠는 플랫폼이니 다양한 기회를 살리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8983

이런 글들을 쓰면서도,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일의 연속이다. 응원과 애도… 어떤 분노와 항의… 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고 필요하다는 생각도 있지만, 결국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건 ‘나 자신’이 아닌가. 애도하는 나, 슬퍼하는 나, 이런 사태를 염려한 나… 나라고 크게 다르지도 않지만, 어쨌든 ‘나’에 대한 관심이 회피가 아니라 책임으로 이어져야 하고, 이 가교를 만드는 게 정치이다.

근데 차별금지법이나 퀴퍼 참여를 말하면서, ‘척’만 하는 세력이 아닌 ‘척’조차 하지 않는 세력으로 힘을 몰아 주자고 하는 건 무슨 정치인가. 그 정치인에 대한 실망은 집권 세력을 이탈한 것에 있지 않다. 이탈하고 나서 하는 일이 문제다. 최근의 말은 퀴퍼는 교외에서 하라는 분의 꽃길을 깔아준다는 것이다. 時事의 評論이라고 하면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백신, 시사평론,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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