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에 대한 두 가지 생각
이준석이 한 시간을 떠들었는데 사람들은 핵심 줄기엔 관심없고 그냥 누구를 어떻게 욕했다 정도만 기사를 쓰고 떠들고 그러고 있다. 뭐 거까진 그렇구나 싶은데 어떤 시사평론가가 썼다는 글을 보고는 한숨이 나왔다. 술 먹고 썼는지…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모르겠다. 평소 누구랑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이준석의 핵심 논리 요약하면 이런 거다. 석열왕이 음모론(부정선거)과 반공이데올로기 등으로 대표되는 구식 정치에 경도되고 있는데 당이 이걸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윤핵관들이 오직 사리사욕을 위해 대통령과 이준석 사이를 이간질하고 비대위 전환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럴 수 있는 이유는 전통적 보수층의 지지와 지역구도에 안주하면 정치적 미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당후사를 말하기 전에 최소한 서울 강북이나 수도권 열세지역에 출마를 해서 스윙보터를 잡아보시길 바라고, 그게 아니면 꺼져라… 언론 제목에 등장하는 자극적인 표현들은 다 이 논리 구조 안에 위치한다.
특징적인 것은… 기자회견 전문 잘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오로지 자유와 인권의 가치와 미래에 충실한 국민의 힘이 되어야 합니다. 보수정당은 민족주의와 전체주의, 계획경제 위주의 파시스트적 세계관을 버려야 합니다.
민족주의 전체주의 계획경제 파시스트는 이 분들이 원래 더블민주당에다가 갖다 붙이던 레떼르다. 이걸 통해 이준석 정치가 어디에 전선을 긋고 어떻게 자기 규정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자유와 인권이 고작 https 차단 해제 같은 걸로 귀결되는 게 이준석식 정치의 뭐 어떤 아기자기함인데, 그런 아귀자귀함 애귀재귀함은 차치하고 어쨌든 뭔가 나름의 가치지향적인 명분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태도는 아무 생각 없는 퇴행으로만 일관하는 상대쪽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이준석 정치가 상징하는 것은 합리적 보수의 변질이기도 한 것이란 점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책에도 쓰고 글에도 쓰고 방송에서도 얘기한 바와 같이 원래 합리적 보수란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 따뜻한 보수, 온건한 보수를 뜻하는 거였다. 한 얘기 또 하고 또 합니다만, 박근혜 때 유승민도 그랬고 영국의 데이빗 캐머런도 그랬다.
이준석대에 와서는 자유지상주의적인 급진화가 이 자리를 대신했다. 이럴 수 있었던 건 이준석이 대단한 정치철학자여서가 아니고, 그가 타깃팅하는 유권자층이 온건한 보수보다 급진화된 보수에 이끌리기 때문, 즉 장사가 더 잘 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유권자층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 누차 지적하지만 제가 책에 쓴 반대의 정치가 작용하는 이들 세계관의 맥락에서 온건한 보수는 ‘유사-진보’에 지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합리적 보수’가 ‘옛날 보수’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만 작용하고, ‘진정한 보수’가 ‘진보’를 명확히 반대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방식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랄까 그런 결말인 셈이다. 진정한 포퓰리즘과 ‘나는 포퓰리즘이 아니다’라는 포퓰리즘의 대결… 이런 딜레마는 뭐만 나오면 검찰반대 과일논쟁으로만 접근하는 더블민주당에도, 양당정치를 비판한다지만 사실은 별 할 말도 없는 진보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여러분들이 적는 SNS 메시지와 댓글에도 이게 다 반영돼있다.
그런 난국 속에서… 타산지석이라고 했는데, 방식과 내용을 둘 다 보시라. 우리는 이준석 정치의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런데 만일 이준석과 똑같은 방식으로 어떤 진보가 승부를 걸고자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실 과거에 좌파포퓰리즘 그런 얘기 할 때 그 비슷한 글을 여러 차례 쓴 일도 있다. 포퓰리즘적 시도는 대안적인 정치로 사람들을 이끄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뒤집어 말하면 대의명분이 분명한 포퓰리즘적 시도로부터 대안적인 정치로의 연결고리를 찾아가는 현실적 접근은 가능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준석의 난은 이중적 감상을 갖게 하는 사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