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중지의 세상
비운의 졸저 냉소사회에 보면 ‘판단중지’의 현대적 버전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의 실체, 즉 진리를 따지려 노력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판단이 중지된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치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판단이 중지된 문제를 서로 유리한 대로 서사화 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이 ‘서사’는 사적이익의 추구라는 보편적 의구심(사유재산의 보편화가 이 의구심을 더 위력적으로 만들었다)에 크게 기댄다. 그리고 전에도 썼지만 이게 ‘찬성’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반대’를 조직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주요 문법이 돼왔다.
백서와 흑서의 논리는 대표적 사례가 될 것 같다. 백서는 조국 임명에 대한 반대를 검찰 입장에 대한 찬성과 개혁에 대한 반대로, 즉 ‘우리 편 아님’으로 규정한다. 흑서는 이 정권이 추진하는 모든 개혁을 선거나 정치자금 기타 정치적 이득 등의 ‘사익추구’로 규정한다. 즉 백서와 흑서는 서로를 ‘배신자’와 ‘사기꾼’으로 규정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게 기본이고, 이걸 ‘찬성’을 조직하는 얘기로 포장하려니 개혁가는 동서고금 원래 이중적 존재라는둥 사익추구를 위한 선전선동이 아닌 팩트와 논리라는 둥 서사를 동원하게 되는 거다. 이게 조장관님이 조광조가 되고 후니월드가 시대의 양심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이다.
이런 면에서 ‘배신자’와 ‘사기꾼’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를테면 ‘사기꾼’은 개혁에 동의하는 촛불시민에 대한 ‘배신자’이다. ‘배신자’는 금전이나 관심, 또 다른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기꾼’이다. 양쪽의 부족원들은 서로 의도가 불순하다는 걸 증명하려 할 뿐 여기에 도움이 되는 걸 제외하면 문제 그 자체에는 사실 무관심하다. 서로가 진정성을 거론하고 있음에도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진리에 대한 냉소를 증명한다.
애초에 왜 ‘반대’로 조직하는가? 그게 효율적인 동시에 유일하게 믿을만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기꾼’과 ‘배신자’가 아님을, 즉 ‘우리 편’임을 증명하는 일은 그저 신의성실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고 “나는 사기꾼 또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는 절차로만 된다. 주장은 믿을 수 없으니, 행동으로 증명하라! 짜르라! 집에 가야지!
그래서 나는, 그런 거는 웬만한 게 아니면 안 하기로 했다 이 말이다. 뭐에 반대하는 사람 모두 모이시오 이런 거.
얘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우리가 옛날에 민주대연합을 왜 반대했습니까? 그건 좌익소아병(childish disorder! 유치한 혼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뭔가 ‘찬성’을 근거로 조직하는 신의성실을 앞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거연대를 반대한 게 아니라, 선거연대에 이를 수 있는 여러가지 합의나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물론 그 합의 내용과 절차에 대해 합의를 못해 끝없는 주장을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전공의협의회 비대위가 이렇게 된 것도 리더십에만 국한해 보면 그런 아마추어리즘 때문이라고 본다. 안건 심의 방식이 그게 뭡니까… 회의의 프로들인 운동권들이 컨설팅을 해줬어야?
일하러 가기 싫고 별 생각 다 했는데… 그만 하고 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