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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Author: 이상한 모자

싸나이 울리는 남성호르몬

2025년 1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최근 만난 싸나이 분이 이상하게 머리가 떡져 있는 것이었다. 머리는 감고 나왔느냐고 물어봤는데, 3일째 감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싸나이는 머리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 뭐 그런 건가? 그렇다기보다는, 얘기를 들어 보니 탈모 우려라고 했다. 탈모에 좋지 않다… 흠… 그런가? 그러고보니 주변에 비슷한 나이대에 탈모약을 먹는 사례가 많이 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너 이러다 대머리 되겠다”는 말을 함부로 했는데,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대머리’는 그들에게 실질적 위협이고, 대머리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은 나는 그들 입장에선 기득권?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탈모 우려로 머리를 감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으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대머리는 왜 되는가? 그것은 남성호르몬의 작용이다. 물론 남성호르몬이 많다고 해서 대머리가 되는 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적으면 대머리가 될 확률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물론 남성호르몬이 탈모를 결정하는 유일한 변수라고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얘기하는 건 과학적 근거가 아니고, 기분이다. 새삼 신경쓰게 된다. 이 녀석… 남성호르몬이… 대머리를 걱정할 정도잖아?

어렸을 적의 나는 스스로를 ‘의외로’ 싸나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어디까지나 의외로다. 내가 뭐 특별히 같은 시기에 똑같이 사회화 된 한국 남성들과 크게 다른 인식을 갖고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시기에는 그게 장점이라고도 생각했다. 싸나이다운 사람들에 대한 컴플렉스 같은 것은 가져본 일이 없다. 단기적으로 부러워해본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동석한 분 중에 데미 무어가 나오는 영화를 최근 본 여성이 있었는데, 남성은 절대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내용일 거라고 했다. 유튜브나 SNS에서 화제가 됐던, 노년의 데미무어가 화장 고치다가 폭발하는 그 장면이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왠지 약간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나를 만난 사람들은 잘 몰랐겠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이 꼴을 하고 밖에 나가도 될지에 대한 고민을 매일 많이 했다. 거울을 보면서, 남들이 보는 내 모습이 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웠다. 지금보다 훨씬 비만일 때, 107킬로그램일 때도 있었다. 밖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거듭 강조하지만 그게 여성들만큼은 아닐 것이다.).

사실 지금도 이런 습성은 약간 남아있어서, 씻지 않은 상태… 특히 머리를 감지 않은 상태라면 되도록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편의점도 안 간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포기하는 게 많아졌기에, 7시 방송인데 눈을 뜨니 6시 20분이다 이랬을 때는 씻지 않은 채로 옷만 입고 방송국으로 직행한 일도 있고 하긴 했지만… 먹고 살려면 존엄도 포기해야지 어쩔 수 없다.

즉, 남성호르몬 따위 신경 써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묘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얘기다. 남성호르몬이… 여전히 많겠구나?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거는 늙었다는 것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대머리를 걱정하는 싸나이를 약간,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부러워해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주로 일하는 영역에서 나는 아직 햇병아리 취급을 당한다. 언젠가 라디오 방송에서 나도 이제 40대고 나이를 먹었다는 걸 체감한다는 취지의 얘기를 했더니, 청취자로부터 ‘민하야 내가 네 나이면 수능을 다시 본다’는 문자가 날아오더라. 그 장문 얼마 단문 몇십원 어쩌구 하는 그 문자 말야(시사 라디오 청취는 고령층이 주력이다).

그러나 그 외의 영역에선 그렇지 않지. 내가 전업으로 뉴스의 세계에 파묻혀 산 것도 거의 13년? 그 동안 뉴스가 아닌 다른 기준으로는 늙었다는 걸 어떻게 부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육체적으로도 그렇다. 옛날만큼 밤을 새는 게 잘 안 되고, 옛날만큼 집중력을 발휘하는 게 어렵다. 조금 딴 생각 하다보면 1시간이 금방이다. 게임하다가 조는 경우도 늘었다. 눈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 옛날 같으면 생각하지 않았을… 근육! 운동능력! 강인한 남성의 상징! 이런 걸 생각하게 된 것이지. ‘싸나이’를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젊음으로서 부러워하게 된 거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 트리거가 탈모 얘기였다는 게 재미있는 점이다, 이게 오늘의 결론이고, 밥도 먹었으니 좀 휴식 후 일하러 간다는 게 이제부터 나의 계획이다.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남성호르몬

윤석열-파시즘을 떠받치는 반대 연합

2025년 1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역시 저쪽이 싫은 책을 읽으셨다면 훨씬 직관적으로 무슨 얘긴지 아실 것. 아래는 참세상에 실린 글의 일부. 급하게 적느라, 또 분량의 문제로 엄밀하지 않은 점은 양해 바란다.

이들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를 통해 관철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힘이 우위를 갖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공화정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무력화 되는 것도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거대한 백래쉬의 형성 과정을 짚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윤석열의 법원 공격이 이번 사태의 기원이 됐다는 점을 짚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실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둔 것에는 이미 그게 가능한 토양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적 색깔론의 고전적 형태는 ‘친북’을 거론하는 것이다. 이번 국면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근래에는 ‘친중’이 추가되었다. 앞서 잠시 다룬 극우 유튜브의 부정선거론에도 중국 정부가 등장한다. 윤석열이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중국은 ‘주권침탈세력’ 등의 표현으로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지구적 규모의 세계관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대중적 차원에서 ‘중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어떤 개념의 연합이 이미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극우 유튜브와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오히려 대중영합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뿌리가 깊지만, 최근 심화된 것은 문화적 경제적 이유에 기인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이들이 즐기는 콘텐츠 산업에서 중국의 자본 투자와 이에 의한 영향력 확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이들에게는 북한보다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윤석열 체포 구속 탄핵 찬성 집회를 두고 ‘차이나 머니’ 등을 언급하며 폄훼하는 목소리가 일부 극우화된 젊은층 사이에서 잘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이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중국에 대한 반감을 키운 계층의 눈으로 볼 때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무언가는 중국과 등치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다. 그런데 보수정치는 최근까지 포퓰리즘 문법을 활용해 상대를 권위주의로 규정하는 공세를 펴왔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분배’라는 포장지를 씌워 추진한 경제 정책, 가령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또는 가상화폐, 금융 자산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2015년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를 통해 분출된 여성주의적 활동 역시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등치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여성주의는 극우화된 인사들로부터 공격당하는 주제 중 중국 공산당 정부와 가장 관련이 없는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이게 된 것은 ‘젠더갈등’으로 포장된 여성주의에 대한 2030 남성의 백래쉬와 더불어 차별금지법 이슈에 대한 범기독교계의 전면적 반발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의 세계관 속에 ‘진보–더불어민주당–차별금지법–여성주의–권위주의(억압)-중국–공산주의–북한’이라는 하나의 반대해야 할 대상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뉴딜로 형성된 뉴딜연합에 반발해, 뉴딜 정책의 실제 성격과 성과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개혁’으로 규정하고 ‘반개혁’을 중심으로 자본가, 대외적 강경파, 기독교 근본주의, 문화적 보수파가 손을 잡은 ‘레이건 연합’이 형성된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주목할 것은 어쨌든 ‘레이건 연합’은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제도를 통해 백래쉬를 기도한 반면, 윤석열 정권의 퇴행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교착 정국에 대한 자본의 최종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지를 보려면 두 가지 요건을 평가해야 한다. 첫째, 민주적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이를 만큼의 폭력에 의존하는가? 둘째, 이러한 방법론을 지지하는 대중적 열광에 근거하고 있는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만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백래쉬라는 형태로, 사후적으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대중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라는 형태로 출현함으로써 이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되었다.

https://www.newscham.net/articles/111849

차별금지법 하니 생각나는 에피소드. 나는 그래도 좀 가격이 나가는 자전거를 한 대 갖고 있다. 나로서는 큰 결심을 하고 마련한 것인데, 자전거 정보를 얻기 위해 네이버 카페에 가입해있다. 이 카페의 이용자들 중에는 나는 큰 마음 먹고 산 자전거를 2대, 3대씩 막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재력이 없지는 않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얘기다.

여느 취미 카페가 그렇듯, 이곳도 정치적 글을 올리는 것은 금지가 돼있다. 그래서 대개는 평화롭게 자전거에 관한 글만 올린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광화문 집회에 다녀왔다‘는 글이 올라와 있는 거였다. 눌러보니 ’기독교인이라면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집회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적어놨다. 댓글이 줄줄 달렸다. 아멘! 할렐루야!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차별금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둥 하는 얘기가 달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작전 세력(?)인가 싶어 작성 글을 확인해보니, 다들 평소 멀쩡한 글 올리며 활동하는 회원들이다. 무서워졌다.

어느 용감한 회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치글은 금지인데 이게 뭐냐? 원 글을 쓴 이는 이건 정치 글이 아니라 종교 글이다! 라고 항변했다. 한심한 수준의 키배였다. 참전할까 고민했지만 평소 글을 올리는 등 활동을 하지 않기에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망설여졌다. 그 사이 글은 며칠이나 게시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결국은 지워졌지만…. 그러나 이제 왠지 자전거 카페엔 접속하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성소수자인 게 아닐까 하고 나 혼자 짐작한 회원이 있었다. 물론 외양만으로 예단을 가지면 안 된다.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는 거다. 약간 그런 생각을 할 일도 있어서 일부러 친절한 태도로 착한 댓글도 달고 했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글을 올리지 않는 듯 해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 글을 올리면서 찾아보니 최근 글이 남겨져있다. 다행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백래쉬, 자전거, 차별금지법

(거의) 운동권들과의 대화

2025년 1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오늘은 운동권 출신들이 많은 곳에 가서 떠들었다. 물론 운동권 또는 운동권 출신이라고 하기 어려운 분도 있었을 것이다. 양해바란다…. 윤석열 계엄 사태 왜 일어났나, 이런 주제인데, 일전에 여기다가 쓴 1987년 체제 해킹 얘기가 주가 되었다. 윤석열 정권에서 일어난 정치적 조건이나 개별 사건들로 계엄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하긴 어렵고(물론 김건희 특검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한 것이다), 오직 윤석열의 리더십에 대한 설명으로만 가능한 사건이라고 했다. 오로지 윤석열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거다.

다만,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떻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인데, 그건 1987년 체제에서 경향적으로 소수화 될 수밖에 없었던 보수정치가 ‘독재 대 반독재’ 구도를 뒤집어 자기들이 ‘반독재’ 자리를 꿰차고 상대에게 ‘독재’를 뒤집어 씌우는 바람에 가능했다는 거… 이 얘기로 시작해서 전에도 여기다 적은 1987 해킹 얘기로 죽 간 것이었다.

이외에 일본 정치 개혁 논의의 죽 쒀서 개 준 사례의 교훈,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박살의 교훈 같은 거를 얘기했다. 일본의 경우는, 지금 얘기하려고 택시에서 적어 놓은 메모를 보니까 ‘파벌 해체가 정치 개혁의 핵심이라는 정치적 구도, 즉 파벌 반대 전선에 제도가 하위 변수가 된 때문’이라고 써놨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얘기의 경우 ‘제도가 1) 양당의 상호반대, 2) 윤석열 반대 전선의 하위변수가 됐기 때문’이라고 써놨다. 메모를 보지 않고 떠들었기 때문에, 정확히 이 메모의 문구대로만 말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에 대해선 늘 말씀드리듯 심의민주주의 등의 확대를 얘기했다. 그냥 확대하자!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 맥락을 얘기하는 건데, 이것도 메모를 인용하자면 ‘선거제도 개혁과 좋은 정치 하려는 세력의 성장이 대중적으로 매칭돼야. 좋은 정치란? 선거제도 개혁으로 끝나는 게 아닌 민주주의 전반의 영속적인 심화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역시 메모를 보지 않고 떠들었기 때문에 이대로 말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제도의 정당성을 설득하거나 증명하는 건 어렵고 그 제도가 정당하다는 걸 주장하는 사람도 적용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니(연동형 비례대표제,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민주주의의 확대를 주장하고 시도하는 정치세력의 존재 의의와 필요성 자체에 대중이 동의하도록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얘기. 사실 이 비슷한 얘기 역시 저쪽이 싫은 책에 써있긴 한데, 오독하는 분들이 꽤 있었던 거 같은 기억이다. 뭐 쓴 사람 잘못이지…

질의응답 과정의 마지막에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정치권이 2030 남성을 스테레오타입화 해서 대상화 하는 건 문제라는 얘기였다. 나는 답했다. 그건 맞다. 정치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스테레오타입화 자체는 따지고 보면 다른 세대도 마찬가지다. 학생운동 하다 취직 쉽게 하고 돈 모아서 집 사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 교육에 투자해 재생산을 노리며 내로남불 한다는 86세대의 이미지는 사실에 부합하나? 제가 젊었을 때도 20대 개새끼론 같은 게 있었다(이 얘기 하면서 또 산수를 틀렸다). 그리고 학적으로 규명되는 대목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젊은 남성이 경향적으로 보수적이고 여성이 진보적인 것은 연구 결과로 확인된다…

그러자 이 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요약하면 이 세대가 보수적이라기 보다는 진보 보수로 나눌 수 없는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닌가? 트럼프나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들도 전형적인 보수는 아니지 않나? 그래서 다시 말씀드렸다. 2차원의 축에 일렬로 늘어 놓고 좌우를 논할 수 없는 경우는 많다. 논하기 쉽게 진보 보수를 나눌 뿐이다. 트럼프도 결국은 극우포퓰리즘으로 분류하지 않는가. 물론 일리있는 말씀이기도 한데, 저의 책을 보시면, 현대 대의민주주의 문법에서 진보는 보수를 반대하는 것, 보수는 진보를 반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고 썼다. 이게 오늘 논한 서로 반대하면서 유지되는 1987년 구도의 한계와도 무관치 않다. 이 한계를 극복하려면 더 미시적인 영역에서 ‘나’의 이념이 2차원의 축에 존재하는 좌표와 무엇이 다른지를 체제적으로 주장하고 반영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심의민주주의 운운 말씀드렸다…

의미있는 대화였다고 생각해서 따로 기록했고. 오늘 느낀 것은, 운동권들과 대화를 하면 이제는 대개 경청한다는 것이다. 원래는 안 그랬다. 옛날에는 오타쿠와의 대화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비슷하지… 자기 말만 하고…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유대감 같은 게 주위를 둘러싸는… 지금은 다들 힘이 빠지고 절망을 해서… 오늘 직접적으로 절망감을 호소하는 분이 있었다.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라고 했다. 슬픈 얘기였다. 뭘 잘못… 이라는 말이… 우린 잘못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인데…… 슬퍼져서 이만…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1987년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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