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안내
  • 이상한 모자
  • 야채인간
  • 김민하 공화국
  • 신간 안내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차별금지법

복음주의

2025년 2월 1일 by 이상한 모자

김준우님의 유튜브… 김준우여 신화가 되어라! 에서 명절에 신문도 안 나오고 하니 이런 저런 얘기를 두서없이 했는데, 갑자기 얘기가 기독교 복음주의까지 간 거였다. 복음주의라고 하니 김준우님이 그게 에큐메니컬이냐 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에반게리온이다 라고 했다. 영어가 생각이 안나서… 에반게리온이 아니고 에반젤리컬이라고 하나 그렇지.

김준우님이 말한 에큐메니컬은 교회일치운동인데 쉽게 말해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간의 공통분모를 찾고 연합하자는 취지의 운동이다. 성향상 온건파적이고, 그러다보니 자유주의적인 것 아니냐 이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지. 우리는 NCCK라고 있잖나. 옛날 정치인들 보면 이쪽이랑 가까운 사람들 종종 있음. 손학규? 언론사 중에는 CBS… 근데 지금은 차별금지법 이슈 이런 거 때문에 꼭 옛날 같지만은 않단다. 여기서 한숨 한 번 쉬고.

여기서 자 갑자기 삼천포로 빠지자면, 여러분이 크루세이더 킹즈 3를 하다가 보면 종교를 창시하게 되는데, 아무래도 유럽 중심의 게임이니까 기독교 계열로 창시를 하게 되겠지. 근데 교리를 막 마음대로 하게 될 거다. 그러면 아무리 기독교 계열로 해도 천주교 녀석들은 너를 이단으로 볼 거란 말야. 그러면 적대적이 되고 성전을 선포하고 이런다고.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가 없어요. 그런 때에는,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잖은가? 치트를 써야지. 일단 디버그 모드 진입해서 콘솔을 여시고 add_doctrine special_doctrine_ecumenical_christian을 입력한다. 그러면 네가 만든 종교에 세계교회주의 옵션이 붙고, 주변의 천주교 녀석들은 너를 미혹된 신앙으로 여기지만 적대적 신앙으로는 보지 않는단다…

아무튼. 복음주의가 긴 얘긴데, 올타임 레전드 호프스태터 횽님의 미국의 반지성주의에 다 나온다. 아니 그거 한 권 읽고 도대체 얼마나 울궈먹는 거여!!! 미안합니다… 그럼 뭐 어떡해 내가 뭐 교수도 아니고… 아니 제가 다른 책을 안 읽은 건 아닌데… 복음주의의 핵심은 영상에서도 얘기했는데, 신도가 성직자를 거쳐서 신과 만난다는 개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주의에서는 신도가 신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 이게 핵심이다. 가령 천주교에서는 신부가 중요하다. 비유하자면 유권해석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해성사도 하고 미사에서 특정한 형식과 역할에 맞춰서 집전을 하고 하는 거다. 반면 복음주의에서 목사는 신앙공동체의 촌장 같은 거다. 성경에 대해 좀 더 잘 알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 구원은 신도가 개인 차원에서 회심을 하였느냐의 문제이다. 성직자의 보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복음주의 운동의 확산은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관계가 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폐해가 커지자 ‘기본으로 돌아가자’ 같은 기분으로 대각성 운동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복음주의자들이 반대의 대상으로 성공회와 카톨릭을 찍으면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논리인 즉슨, 사회의 부패와 혼란은 엘리트 때문인데 성공회와 카톨릭 시스템이야 말로 엘리트 시스템 아니냐, 왜 하나님 믿는데 성직자의 위계에 의존해야 하느냐, 하나님 앞에 우리는 평등하다… 이렇게 된 것. 심지어 평신도가 설교를 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왜? 신도 개인에 성령이 임할 수 있는데, 설교를 목사가 한들 평신도가 한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그러니까 왕과 귀족을 반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꺼내들었던 젠틀맨 후예들의 움직임과 맞물려 민주주의+복음주의라는 거대한 에너지가 되었던 것.

그러니까 이 시기의 복음주의는 엘리트와 비교하자면 언더독이지. 종교적 무관심과 싸우면서(즉 예수의 길을 따라 전도에 열정을 바치면서), 개인의 구원을 추구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차별화 해야 했다.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해야지. 이게 사회복음 운동이다. 가령 레드데드리뎀션2를 생각해보자. 더치네 갱단에 짐만 되는 스완슨 목사라고 있다. 애초에 의문은 여기 목사가 왜 있냐는 거다. 목사도 처음에는 어려운 사람들하고 좋은 일 하려고 한 거 아니겠어? 하여간, 복음주의가 그래도 여기까지 하던 시대가 있었다고.

그러나, 20세기가 되면 종교 전반에 양자택일의 순간이 와버린다. 모던이냐, 고집이냐. 시대의 흐름은 거부할 수 없는 거여서 종교 전반이 모던에 굴복하는 현상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러면 그 반동형성으로 종교적 위기감은 더 커지는 거지. 1925년에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텨 테네시 주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교사에 대한 이른바 ‘스콥스(교사 이름) 재판’이라는 게 전국에 라디오(그렇다. 이제 기술의 발전으로 미 전역에 라디오가 보급된 거였다!)로 생중계 되는데, 이때 테네시 주 측 변호사가 제 책에도 나오는 그 이름도 유명한 거물급 정치인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이었다. 젊은 시절엔 민중주의자였는데, 그 때는 복음주의와 개혁(모던)이 같이 갈 수 있었지만, 이 때는 이제 그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 양반은 복음주의를 택한 거지. 그리고? 완전 개발려버림. 완전 처참하게… 다만 법 위반은 사실이므로 판결은 유죄였다. 그러나 복음주의-근본주의가 아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본주의 진영의 위기감은 아주 심각해졌다. 앞서 본 것처럼 복음주의 교리에서 성경은 매우 중요한데, 이제 성경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던과 충돌할 수밖에 없게 됐고, 그러한 조류에 복음주의자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걸 인정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여전히 성경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자로 변모할 수밖에 없게 된 것.

그리고 나서 혁신주의와 대공황을 거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시대가 열리고, 전쟁을 겪고, 뉴딜이 등장하고, 모던이 전면적으로 사회를 근본부터 바꾸고, 이 덕에 뉴딜연합이 조직되고, 이 위력이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으로 인한 반전시위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이 시기 동안 복음주의-근본주의 진영은 뉴딜의 반대편에 있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게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이 때까지 코너에 몰리게 된 기업가, 부유층, 신자유주의자, 대외적 강경파, 사회문화적 보수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말하자면 반뉴딜연합을 구성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다. 이것을 조직한 것은 사실상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미는 흐름으로 이어졌기에, 이 연합은 레이건 연합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복음주의는 전세계적으로 전근대적 퇴행과 비합리의 정치운동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 시대의 차별금지법 이슈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자장 안에 있는 국내 기독교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짚어낼 수 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미국의 반지성주의, 복음주의, 차별금지법

윤석열-파시즘을 떠받치는 반대 연합

2025년 1월 24일 by 이상한 모자

역시 저쪽이 싫은 책을 읽으셨다면 훨씬 직관적으로 무슨 얘긴지 아실 것. 아래는 참세상에 실린 글의 일부. 급하게 적느라, 또 분량의 문제로 엄밀하지 않은 점은 양해 바란다.

이들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를 통해 관철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오로지 힘이 우위를 갖는 사회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공화정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무력화 되는 것도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그러한 비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거대한 백래쉬의 형성 과정을 짚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윤석열의 법원 공격이 이번 사태의 기원이 됐다는 점을 짚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실제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둔 것에는 이미 그게 가능한 토양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적 색깔론의 고전적 형태는 ‘친북’을 거론하는 것이다. 이번 국면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근래에는 ‘친중’이 추가되었다. 앞서 잠시 다룬 극우 유튜브의 부정선거론에도 중국 정부가 등장한다. 윤석열이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에도 중국은 ‘주권침탈세력’ 등의 표현으로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내세운 ‘자유민주주의 대 권위주의’라는 지구적 규모의 세계관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대중적 차원에서 ‘중국’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어떤 개념의 연합이 이미 형성돼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극우 유튜브와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오히려 대중영합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중국에 대한 반감은 뿌리가 깊지만, 최근 심화된 것은 문화적 경제적 이유에 기인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이들이 즐기는 콘텐츠 산업에서 중국의 자본 투자와 이에 의한 영향력 확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최소한 이들에게는 북한보다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이 훨씬 더 직관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윤석열 체포 구속 탄핵 찬성 집회를 두고 ‘차이나 머니’ 등을 언급하며 폄훼하는 목소리가 일부 극우화된 젊은층 사이에서 잘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권위주의 체제이다. 뒤집어 말하면 앞서 중국에 대한 반감을 키운 계층의 눈으로 볼 때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무언가는 중국과 등치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거다. 그런데 보수정치는 최근까지 포퓰리즘 문법을 활용해 상대를 권위주의로 규정하는 공세를 펴왔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이 ‘분배’라는 포장지를 씌워 추진한 경제 정책, 가령 최저임금 인상, 부동산 또는 가상화폐, 금융 자산에 대한 과세 강화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2015년을 기점으로 시민사회를 통해 분출된 여성주의적 활동 역시 이러한 흐름의 일환으로 등치되었다. 냉정하게 말해 여성주의는 극우화된 인사들로부터 공격당하는 주제 중 중국 공산당 정부와 가장 관련이 없는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이게 된 것은 ‘젠더갈등’으로 포장된 여성주의에 대한 2030 남성의 백래쉬와 더불어 차별금지법 이슈에 대한 범기독교계의 전면적 반발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들의 세계관 속에 ‘진보–더불어민주당–차별금지법–여성주의–권위주의(억압)-중국–공산주의–북한’이라는 하나의 반대해야 할 대상이 형성된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추진한 뉴딜로 형성된 뉴딜연합에 반발해, 뉴딜 정책의 실제 성격과 성과가 어떻든 간에 그것을 ‘개혁’으로 규정하고 ‘반개혁’을 중심으로 자본가, 대외적 강경파, 기독교 근본주의, 문화적 보수파가 손을 잡은 ‘레이건 연합’이 형성된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주목할 것은 어쨌든 ‘레이건 연합’은 선거를 통해 집권했고 제도를 통해 백래쉬를 기도한 반면, 윤석열 정권의 퇴행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은 교착 정국에 대한 자본의 최종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지를 보려면 두 가지 요건을 평가해야 한다. 첫째, 민주적 제도를 붕괴시키는 데 이를 만큼의 폭력에 의존하는가? 둘째, 이러한 방법론을 지지하는 대중적 열광에 근거하고 있는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지만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나 백래쉬라는 형태로, 사후적으로 윤석열을 지지하는 대중이 서울서부지법 테러라는 형태로 출현함으로써 이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되었다.

https://www.newscham.net/articles/111849

차별금지법 하니 생각나는 에피소드. 나는 그래도 좀 가격이 나가는 자전거를 한 대 갖고 있다. 나로서는 큰 결심을 하고 마련한 것인데, 자전거 정보를 얻기 위해 네이버 카페에 가입해있다. 이 카페의 이용자들 중에는 나는 큰 마음 먹고 산 자전거를 2대, 3대씩 막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재력이 없지는 않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얘기다.

여느 취미 카페가 그렇듯, 이곳도 정치적 글을 올리는 것은 금지가 돼있다. 그래서 대개는 평화롭게 자전거에 관한 글만 올린다. 그런데 몇 달 전에 ‘광화문 집회에 다녀왔다‘는 글이 올라와 있는 거였다. 눌러보니 ’기독교인이라면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집회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고 적어놨다. 댓글이 줄줄 달렸다. 아멘! 할렐루야!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차별금지법을 막아야 한다는 둥 하는 얘기가 달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작전 세력(?)인가 싶어 작성 글을 확인해보니, 다들 평소 멀쩡한 글 올리며 활동하는 회원들이다. 무서워졌다.

어느 용감한 회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정치글은 금지인데 이게 뭐냐? 원 글을 쓴 이는 이건 정치 글이 아니라 종교 글이다! 라고 항변했다. 한심한 수준의 키배였다. 참전할까 고민했지만 평소 글을 올리는 등 활동을 하지 않기에 오해를 받을 수 있어 망설여졌다. 그 사이 글은 며칠이나 게시된 상태로 유지되었다. 결국은 지워졌지만…. 그러나 이제 왠지 자전거 카페엔 접속하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성소수자인 게 아닐까 하고 나 혼자 짐작한 회원이 있었다. 물론 외양만으로 예단을 가지면 안 된다. 혼자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는 거다. 약간 그런 생각을 할 일도 있어서 일부러 친절한 태도로 착한 댓글도 달고 했었다. 그런데 그 사건 이후 글을 올리지 않는 듯 해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이 글을 올리면서 찾아보니 최근 글이 남겨져있다. 다행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백래쉬, 자전거, 차별금지법

최근 글

  • 이단이 되어야
  • 주식 투자를 10억씩 하는 사람들의 훈계
  • 행복한 사람, 오지 오스본
  • 극우와 보수 구분하기
  • 비난을 위해 남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

분류

누적 카운터

  • 1,487,363 hits

블로그 구독

Flickr 사진

추가 사진

____________

  • 로그인
  • 입력 내용 피드
  • 댓글 피드
  • WordPress.org

Copyright © 2025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Omega WordPress Theme by Theme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