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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Author: 이상한 모자

뉴스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다

2023년 7월 18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야채인간에서 잠시 드럼도 쳤던 모님을 마주쳐 인사를 했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우연이? 옛날 생각이 나고 해서 인스타그램의 옛날 계정에 잠깐 들어가봤다. 다들 잘 살고 있는 거 같고… 생각하는 중에, 세기의 기타리스트 유미키 에리노씨가 서울에!? 아~~ 그런데 이미 귀국을 했다고 한다. 체류하는 동안에는 여의도에 거점을 두고 움직였다는 얘기 같은데, 이 분도 마주칠 수 있었을지도… 아쉽다.

그렇다면 또 생각난 김에 유미키 에리노씨의 유튜브 계정에 들어가 근황을 살펴보려 했는데, 언젠가부터 전면 유료화라는 방침인지 멤버십 전용 영상들만 업데이트 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참에 인생 최초 멤버십 구독을 해볼까 했는데 한 달에 4천얼마라는 거다. 이 돈을 지불하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올라와 있는 영상의 대부분이 기타 교습이다. 라이브 연주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내가 보고 싶은 게 과연 기타 교습 영상인가? 모르겠다.

이런 시대에 적응하는 게 너무 어렵다. 명색이 평론가인데 뉴스에 적응을 못하겠다. 방송국 갈 때마다 죄인이 된 심정이다. 누구도 하지 않는 가스라이팅을 스스로 당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는 1인시위 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하는 어떤 분이 ‘너네들 봐라’ 라는 듯 퇴근(?)하는 우리 좌파패널들을 향해 홍위병 어쩌고 써있는 판넬을 들이밀었다.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건지 그냥 기계적으로 지나가는 모두에게 하는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뉴스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뉴스에 관심갖는 사람들도, 뉴스를 만드는 녀석들도, 다 너무 피곤하다. 요즘은 머리가 덜 아플까 싶어서 카페인을 줄이고 있다. 디카페인 커피만 먹는다. 맥모닝을 시켜먹으려는데, 디카페인 커피는 없지 않나. 그래서 커피는 빼고 제로콜라를 선택했는데 생각해보니 제로콜라는 칼로리를 줄였을 뿐 카페인은 그냥 콜라 그대로잖냐. 사는 게 다 이런 식이다. 그래도 이런 얘기나 하고 그러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뉴스 얘기를 하려고 하면 일단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이딴 것들이 무슨 뉴스라고… 뉴스를 다 죽여버리고 싶다. 그리고 너네들 내가 나중에 다 폭로할거야!

지금은 그냥 유미키 에리노 씨의 기타 연주나 감상하자. 기타 줄 갈어야 되는데… 에휴…

https://youtu.be/5e1GlKzr_Go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뉴스

새만금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메모

2023년 7월 17일 by 이상한 모자

어쩌다 새만금과 관련한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NL적인 영화였다. 감독이 NL출신이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인터뷰 등을 찾아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NL적인 영화라는 것은 내가 이걸 보면서 NL을 연상했다는 것이며, NL적인 한계가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NL을 어떻게 하자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갑자기 NL이 왜 나오냐 하실 수 있는데, 제가 운동권 출신이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카레를 보면서 똥을 연상했다고 해서 실제 카레가 똥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과 비슷한 뭐 그런 거다. 그냥 내가 뭔가 똥 생각 나는 카레라고 하는 거지…

먼저 영화를 본 분이 그런 불평을 했다. 세간의 평도 좋고 실제로도 좋은 영화이지만 감독 본인이 너무 많이 등장해 몰입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보니까 정말 비슷한 느낌이 받는 장면이 곳곳에 있었다.

거기에 또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영화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주의적이고 감상적이라는 거다. 가령 등장인물이 조개들이 이제나 저제나 바닷물이 들어오길 기다리다 빗물에 모처럼 갯벌 위로 올라왔지만 말라 죽고 말았다는… 그 얘길 하면서 어떤 실망과 낙담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이건 전형적인 인간주의적 방식의 설명이다. 조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라는 거다. 새들이 먹이를 찾는 모습을 민간 전문가의 생업과 교차편집하는 씬도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새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그게 감독이 조개껍질을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오고 죽은 새를 어루만지는 손이 나오는 이유인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거고, 그게 무엇일까 라는 게 영화 초반에 내가 가졌던 의문이다.

후반부에 미군기지와 전투기가 나오면서, 무릎을 쳤다. 아~~~ 이거구나~~~ 그러니까 이런 거다. 만약에 새만금 사업을 둘러싼 비극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 대 자연의 대립구도로 그려질 것이다. 이 구도라면 본래 자연과 공생했거나, 자연의 편에 의식적으로 서려고 하거나, 자연에 정서적으로 연민을 느끼는 인간이 등장할 수는 있지만 그게 내러티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이런 구도에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잘못을 했으니 반성하고 속죄하는 주체이지 자연과 근본적으로 한 편이 될 수는 없다. 근데 미군기지와 전투기가 등장하는 세계관에서는 권력과 민중의 대립구도가 강화된다. 여기서 민중과 자연은 부당한 권력에 핍박받고 맞서 싸우는 같은 편으로 묶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다루는 새와 조개와 고둥과 게의 이야기는 인간주의적이고 감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 죄란 ‘아름다운 것을 본 죄’로 묘사되는 거다. 그리고 이게 말하자면 NL적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을 덮거나 희석하는 것은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영상과 음향이다. 새와 조개와 게들의 영상이 대단하다. 갯벌의 드론샷도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묵음으로 그것만 보여주는 것도 좀 과하다 싶긴 한데 아무튼 굉장하다. 옛날 같았으면 독립PD? 인디다큐멘터리 제작자? 정도 수준에선(물론 국제적 대기업이 펀딩을 했더라마는…) 촬영할 수 없거나 어려운 장면이다. 물론 옛날에도 어떻게든 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도 사실인데, 아무튼 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세상이 돼서 이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도 수준의 영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들의 날갯짓 만으로도 전해져 오는 그런 게 있다. 몇 번이나 감탄했다.

아무튼… 이러한 세계관의 스토리에서 주인공은 ‘뭔가 막연한 의문을 갖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근본적 모순에 눈을 뜨고 투사로 거듭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감독 본인 뿐이다. 그러니 나레이션은 1인칭이어야 하고 감독이 주요 장면마다 등장할 수밖에 없다. 가령 감독이 카메라로 새가 아니라 전투기를 쫓는 장면이 한 순간 나오는데, 이 장면이 주인공이 거듭나는 어떤 전환점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전반부의 의문은 이런 방식으로 풀렸다.

그게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다. 원래 정체성은 곧 한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 하는 것도 운동권 출신의 한계 아니겠는가.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그런 감상을 가졌다는 것을 개인적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수라

핵폐수라고 하면 왜 안되냐?

2023년 7월 11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정부가 자기들이 처리수라고 잠시 말했던 게 문제라면 유념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핵폐수란 말은 쓰지 말라고 했다. “지나치게 자의적 해석을 하거나 국민께 근거 없는 불안감만 주는 내용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다.

첫째, 정부가 공식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오염수’가 공식 용어다. 그러므로 정부는 공식석상에서 ‘오염수’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공무원도 사람이기에 말하다 보면 헛갈릴 수 있다. 그러니 지적을 하면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둘째, 그런데 언론이나 정당 혹은 단체에서 무슨 용어를 쓰든 그건 정부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처리수, 오염수, 핵폐수 뭐라 쓰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핵폐수가 왜 문제인가? 핵발전에 관계된 작업에 쓰고 남은 물인데 핵폐수라고 부르는 게 뭐 문제인가?

그러고 보면 우리 멋진 자유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은 다 ‘처리수’라고 쓰고 ‘오염수’라고 쓰는 건 중국이나 러시아 놈들이다(따라서 오염수 방류 반대하는 놈들은 친중이다) 라는 취지의 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는데, 놀고 자빠졌다. 얼마 전에 네이처 인터넷 사이트에 실린 기사를 인용한 일이 있다. 거기서 “Fukushima wastewater”라고 쓴다. 내셔널지오그라피 기사도 마찬가지다. BBC 들어가서 Fukushima로 검색해봐라. 이 말 저 말 되는대로 쓴다. 당연히 wastewater도 쓴다. nuclear water도 있고 radioactive water도 있다. 뭐라고 쓰든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라파엘 그로시가 water라고 한 게 그것 자체로 문제라고 생각 안 한다. 뭘 설명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어 의아할 뿐… 원전 추종자 집단이 곧 죽어도 ‘처리수’라고 쓰는 것도 문제삼고 싶지 않다. 남에게 강요만 안 하면.

이름을 뭐로 부르냐 보다 훨씬 중요한 얘기가 많다고 생각한다. 가령 ‘과학 대 괴담’의 구도는 뭘 의도하는 건가? 원전의 최대 약점은 사고나면 수습 불가라는 점이고 이거 탈원전의 가장 중요한 고리다. 그런데 오염수 방류는 사고 원전도 과학적 일상의 범주에 집어 넣는 일이 된다. 사고나도 수습할 수 있다고 하면 원전은 (어디까지나 그들 생각에) 천하무적이다. ‘과학 대 괴담’은 그 얘길 하고 싶은 거다. 양보할 수 있겠냐? 그래서 글도 좀 썼는데 내용 이해가 어려웠던 거 같다. 제목이 마치 AI의 자동 요약처럼 돼있다. 추천 제목을 적어서 보낸다는 걸 깜빡했다. 두통 때문에…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7110300045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탈원전, 후쿠시마 오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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