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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잡감

작은 드루킹들

2022년 11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어젠가 그젠가 드물게도 친윤을 자처하시는 어떤 분이 한동훈 씨의 태도에 대해서 언제까지 국회의원에게 장관이 굽신거려야 하느냐며 국회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의거이다, 매우 고무적이다 라는 취지로 평을 한 것을 보았다. 크… 참신하다. 이런 참신함이 있어야지. 그 분 만나면 한 번 물어보려고 그런다. 그러면 군부독재는 군인들이 국회 권위주의를 깬 것인가요? 군부독재는 좀 너무 나갔나? 그지? 군부독재 비유는 내가 봐도 좀 너무해. 그럼 이건 어떠냐. 추미애 씨도 국회 권위주의에 항거한 인사인가요? 항간에 ‘남자 추미애’라는 평도 있는데 혹시 아시는지?

이 분이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해서 한 말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 바가 반영된 거지. 왜냐하면,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이 좀 바뀌어야 돼요. 선거도 하고 공천도 받고 해야 하는데, 지지층 만족 안 시키고 되겠어? 포털 댓글 같은거 보다가… 김순덕 씨가 오늘자에 칼럼 쓴 거 있잖아. 이상민 날리는(바이든?) 걸로 시작해서 윤석열 2기로 가자! 근데 거기에 누가 댓글 달아놨더라고. 윤석열 2기로는 안 될 거 같습니다, 한동훈 1기로 가야합니다… 그니까 지금 상황에서 핵심 지지층을 영끌하려면 친윤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친후니까지 해야 되는 거지. 이거는 집권 초기 이준석도 비슷한 전략이었지. 결국 저렇게 꾸겨졌지만…

이게 이제 여의도 우물의 계산법이고, 우물에서 나와서 한 번 생각을 해보자. 국회 권위주의에 대한 항거이다 이런 얘기나 하는게 장기적으로 이 말씀 하신 분, 국힘, 정권, 후니횽 누구에게 도움이 되겠냐? 근데 그런 건 관심이 없는 거지. 왜 관심이 없느냐, 정치는 어차피 이런 저런 수로 승부를 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임이라고 보는 거거든. 정치가 그런 면이 있지.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그 자신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면서 존재하는 것이란다. 정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임’이라고 인식을 하는 순간, 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게임’에서 패배하는 길이 열리는 게 정치다. 여야 막론하고,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지게 되는 정치만 반복하는 걸 정치의 본질이라고 떠드는 놈들이 오늘날의 이 상황을 만든 것이다.

한겨레 방송을 하러 갔는데… 1시간 내내 윤정권 책임지라고 떠들고 한 5분 한동훈-마약 음모론 자제하라고 했더니 몇 명이 댓글창에서 친검이니 뭐니 개지랄을 하더라. 뭐 맨날 있는 일이지. 어법도 맨날 똑같애. 대개 이런 식이다. 한겨레 창간 때부터 블라블라, 최근 모습에 너무 실망 블라블라, 구독 취소합니다… 가끔 나한테 와서 염병하는 사람들도 대개 비슷한 태도지. 뭐 언제부터 당신을 봐왔는데 어쩌구 저쩌구, 최근 모습이 어쩌구 양비론이 저쩌구, 변하셨군요 실망했습니다… 뭐 어쩌라고?

156명이 사망한 참사를, 물론 정부 책임을 철저히 묻고 날릴 놈을 날려야 겠지만, 꼭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윤정권 욕하는 용도로만 활용한다는 인상 줘야겠느냐, 이런 얘기를 하면 아주 뭐 쪼렙취급을 하더라고. 네가 무슨 정치를 아냐부터 시작해서… 한동훈이 시킨 증거가 다 있대. 무슨 증거가 있느냐니까 봐라 이렇게 발언도 하고 연설도 하고… 아니 그거는 마약 수사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발언한거고, 너네들 말대로 되려면 한동훈이 마약 수사 해야 되니까 경력은 배치하지 마라 이렇게 얘기한 게 있어야 된대니까! 그게 없는 한 이 문제는 경찰이 정권 입맛에 맞추려다 할 일 소홀히 한 거 이상의 얘기가 아니라고 몇 번을 얘기하니… 정권이 경찰을 장악의 대상으로만 보니 더 심화된 거 아니냐 라고는 할 수 있어도, 한동훈이 마약수사 강조한 게 문제다라는 거는 안 된다니까… 뭐 이런 얘기하니까 거의 왜 나만 안되냐, 음모론 우리만 하냐, 이 수준까지 가더라고.

드루킹이 댓글 다는 거 시킬 때 그랬어요. 보수들은 다 댓글부대 운용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냐. 이거는 전쟁이다. 전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다… 그런 취지. 근데 드루킹 결국 어떻게 됐니? 정권에 부담됐지? 무슨 드루킹이 못 이길 선거 이기게 해준 것도 아니야. 여러분이 조전장관님 사태 때 한쪽에서 막 그랬어. 조전장관님 잘못도 있다는 건 알지만 지금 밀리면 검찰이 이긴다… 검찰에 질 수 없다… 그래서 이겼습니까? 그래서 검찰에 정권 헌납이 안 됐습니까? 조전장관님 사태 때 여러분이 한 일 역시 정권에 부담이 됐지요…

물론 다 부정하는 분들도 있다. 조국이니 뭐니 때문에 선거 진 게 아니다! 그럼 뭐 때문에? 부동산 때문에 졌다! 근데 부동산 얘기가 정치적 아젠다로 가는 과정에 강남좌파니 내로남불이니 이 징검다리가 있었거든. 조전장관님 사태가 그것에 기여를 안 했을까? 이런 얘기 하면 또 딴 얘기 해. 부동산은 오를만 해서 오른 거다! 세계적으로 돈이 너무 많이 풀려갖고…

그러면 결론이 어떻게 되냐, 정권을 잃은 거는 그냥 잃을 때가 돼서 잃은 거지 무슨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는 아닌 거거든. 야 그럼 뭐하러 이렇게 아등바등하냐, 정권 찾을 때 되면 찾겠지. 왜 이렇게 열심히 살어? 결국 남는 거는 힘과 힘의 대결, 자기가 자기 발목 잡는 선택을 서로가 끝도 없이 하면서 먼저 자빠지는 쪽이 정권 잃는 뭐 그런 쳇바퀴나 굴리는 것만 남는 거지. 이런 저런 용을 쓰는 것도 뭘 이루거나 달성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정권을 잡아야, 즉 우리편이 이겨야 물질적인 거든 정신적인 거든 꿀을 빨 수가 있다 뭐 이런 세계관인 거 아니냐? 그리고 그게 정확히 드루킹의 세계관이다. 우리들은 작은 드루킹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 세계를 부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드루킹, 음모론, 이태원 참사, 한동훈

아무리 그래도 장관이 의원을….

2022년 11월 7일 by 이상한 모자

아니 뭐라고 횡설수설하고 다시 뉴스를 보니 우리 한동훈 장관께서 황운하 의원을 두고 직업적 음모론자라고 발언을…

이제 아껴뒀던 후니횽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얼마 전에 어떤 분이 또 전화를 해와서는 그랬다. 이거 첼리스트… 얘기 안 된다고 보는데 후니횽은 왜 저렇게까지 흥분하는 거냐… 이유가 뭐라고 보나? 사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아무말 대잔치가 열리면 아무말러는 아무말이나 하는 거다. 세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 원래 성격이 저렇다… 녹취록 등등 보면 특수부 검사인 걸 감안해도 뭘 못 참아하는 게 있다… 둘째, 처럼회 등에 강경대응하면 윤석열 지지층과는 또 다른 자기 지지층이 환호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는 것일 수 있다… 셋째, 첼리스트 얘기가 사실은 아니더라도 또 후니횽 본인이 참석한 술자리가 아니더라도 윤통이 참여하는 심야의 유사한 술자리가 있었을 수 있는데 미리 한자락 깔아놔야 쉽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일 수 있다… 그니까 이번에 이렇게 오바를 해놔야 대마를 잡혔을 때 지난번처럼 별거 아닌 얘기다, 또 음모론이냐 라고 할 수 있다는 것.

근데 이렇게 얘기하긴 했지만, 난 첫 번째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거든. 원래 성격 저렇다… 근데 지금도 보면 그래. 내가 털보와 그 주변 덤앤더머들의 주장에 전혀 동의를 안 하고 공감을 안 한다. 황운하 씨는 옛날에는 별 생각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악의적인 게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마약수사는 계엄령이고 이런 얘기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아무 말이다. 근데, 그렇다 해도 국무위원이 국회의원더러 직업적 음모론자라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니?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거지. 같은 편끼리도 어떻게 방어가 안 되잖아. 결국 사과해야 할 거거든? 뭐하러 그래? 스타일 다 구기고… 결국 성격 문제다 이렇게 봄.

그렇잖아도 처음에 국회 나왔을 때는 좀 쫄아서인지 말이 조리있게 나오고 그랬거든. 그런데 요즘에는 입이 뇌를 앞서가기 시작해서 흥분하면 문장이 구성이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젊어서, 혈기방장하여 그런가요? 그런 태도로 무슨 장관을 하는가. 제가 주제넘게 어드바이스 하나 합니다. 우리 후니횽이 앞으로 정치도 하시고 뭐 그럴라면 꼭 버려야 할 습관 중 하나. 자꾸 피해자를 자처하면서 피해자는 막 덤벼들어도 된다고 정당화 하는 거. 본인에도 정권에도 우리 사회에도 도움이 안 되니 본인의 위치와 역할을 자각하셔야…… 되는데 안 하겠지. 제가 뭐라고 여기다 이런 얘기를? 알아서 하시고… 이제 자자… 지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김어준, 직업적 음모론자, 한동훈, 황운하

참사와 정치 윤리

2022년 11월 7일 by 이상한 모자

어떤 훌륭한 분이 물었다.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맞느냐? 짧게 답을 했다. 사과 두 글자가 문제라기 보다는 권력이 법적 책임만 거론하니 그 이상의 것을 책임지라는 취지 아니겠느냐. 그러면서 그 얘기도 했다. 권력이 법적 책임만 말하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실제로 정책적 실패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는 처지에 놓여왔기 때문이다… 섬세한 구분은 아니지만 그냥 크게 나누기로는 1997년 위기부터 관료들 사이에 그런 공포가 커지지 않았나 한다. 가깝게는 국정농단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책을 쓰면서 했던 생각이기도 한데, 이런 거다. 그러니까 책의 표현을 빌자면 반기득권 투쟁의 일환으로 우리는 늘 법적 책임을 지라든지, 법을 만들라든지, 바꾸라든지 그런 요구를 해왔는데 그게 이뤄지고 나서 문제가 시원하게 해소된 일이 있던가? 선거법이 그렇고 중대재해법이 그렇고… 합법투쟁은 무용하고 혁명으로 가야 한다 그런 우스개를 하려는 건 아니다. 성에 안차는 법 개정이더라도 그게 다 우리 인생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다. 그런 문제라기 보다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기득권의 “법적으로 책임질 일 없다”는 기술적 항변은 반기득권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요구와 한쌍이라는 것이다. 반면 반기득권의 “사과하라!”는 요구는 기득권의 “도의적 사과는 할 수 있지만 책임질 일은 없다”는 답변과 한 쌍이다. 기득권의 기만과 파렴치는 제쳐두고 포인트를 반기득권에 맞춰 보면, 우리는 기득권의 도의적 사과, 법적 책임 모두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이걸 도식화하면 당연히 우리의 요구는 모순일 수 있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 포함되지는 않으면서 동시에 양쪽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을 상정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게 말하자면 윤리라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그걸 뭐라고 표현하든 윤리적 책임의 영역에 있다. 그러니까 이 참사에 대해서도 그 내용과 정도가 어떻든 권력이 정치적 영역에서 윤리적으로 책임을 지라는 거다.

이제 장을 정치의 영역으로 옮겨오면 윤리와 부딪치는 것은 이해관계이다. 그 중에서도 민주주의가 보편화됐다고 스스로 믿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윤리와 정파적 이해관계의 갈등이다. 정파적 이득 추구가 윤리를 압도하는 것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고 있다. 가령 절대로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역설적인 참사의 정치적 이용 사례는 어떤가? 국가 애도 기간은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참사를 탈정치화하는 방식으로 정권의 정파적 이해관계에 복속시킨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조처였다. 법적 책임을 거론하는 것의 이면에서 우리가 결국 찾아내는 것도 여론을 정파적 이해관계로서 다루는 통치의 기술이다.

이게 권력의 말하자면 눈가리고 아웅 식의 위선이라면 그 건너편에는 노골적인 뻔뻔함을 앞세운 정치 세력의 만행이 자리잡고 있다. 무책임한 음모론을 생산해내며 상대를 악마화하고, 그걸 근거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그러니까 서로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던가 하면서 동시에 얼마든지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뻔한 정치 기술의 향연이다. 이것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정파적 이득의 추구를 위해 윤리가 어디까지 짓밟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심지어 그러한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사람들의 흔적에는 어떤 즐거움 같은 게 묻어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과거에 신념윤리 책임윤리 이런 얘기를 속류적으로 하는 걸 보면, 질러 놓고 반발은 무시하고 가는 게 책임윤리라는 식의 표현을 보게 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윤리는 정파적 이득 추구와 반드시 대립하지 않는다. 책임을 지기 위하여 정파적 이득을 극한까지 추구해야 되는 일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것 역시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볼 때에는 윤리와 정파적 이득이 충돌하는 그 순간에 정파적 이득을 포기하는 것이 어떤 뭐랄까 책임윤리 그런 거다. 그리고 참사에 대해서,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가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 역시 그러한 윤리적 책임인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매료됐던 어떤 장면들, 민주당 지지자라면 바보 노무현이랄지 뭐 그런 것들… 운동권들이라면 우리 스스로 기억하는 그 숱한 수많은 사람들의 그러한 영웅적 순간들… 전태일 열사… 이런 것들… 어떤 포기-페티시가 아니다. 사건의 그 순간에 우리 각자는 어떤 윤리를 본 것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뭐 그러한 생각… 이것 저것 생각을 했다는 그러한 기록이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법적 책임, 사과, 윤리적 책임,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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