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안내
  • 이상한 모자
  • 야채인간
  • 김민하 공화국
  • 신간 안내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지젝

이단이 되어야

2025년 8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맞춰주는 것이 직업이 된 상태지만, 내가 왜 그러는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한겨레의 지선생 글에 대해 잠시 소개를 했다. 일반인(?)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했다. 문장 하나 하나를 잘 읽어야 진의가 이해되는 글일 게다. 사실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글이란 다 그렇다. 남이 쓴 글이란 대개 항상 제대로 읽지도 않고서 내용을 재단하고 떠들만한 것이 아니다. 쓴 사람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은 그래서는 안 된다. 제대로 읽는 것이 우선이다. 제대로 읽으면 글이 뭐가 잘못됐고 뭐를 하자는 얘긴지 다 보인다.

가령 지선생은 이렇게 썼다.

“희망 없음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테의 지옥 입구에는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진정한 급진 정치는 바로 이 지점, 현 체제에서는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는 데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책은, 저로서는 이러한 인식을 갖고 쓴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읽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그렇게 읽지 않았다. 최근에도 그러한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뭐 상관없다. 내가 쓴 글, 내가 하는 말을 전세계인이 잘 읽고 귀담아 듣고 기억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은 어차피 없다. 다들 멋대로 생각해도 괜찮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희망은 없고 무엇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 들여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집단자살이라도 해야 할까? 글을 이렇게 읽으면 안 된다. 앞서 문장에는 “현 체제에서는 변화가 불가능”이라고 돼있다. “현 체제에서는”이라는 단서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선생은 이렇게 썼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원칙을 지닌 실용주의다. 인류의 생존이라는 핵심 목표에 집중하되,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사용하지만, 필요하다면 국가 통제나 대중 동원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는 양가적인 것들이 한 바구니에 들어가있다., 원칙과 실용, 국가 통제와 대중 동원, 그리고 양자 모두와 대비되는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가령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두 적은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 양자가 모두 대안이 아닌 것을 익히 안다. 그 사이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성과는 없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도 봤듯 이 체제에서는 희밍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 정치를 통하여 체제를 넘기 위해서는 엘리트-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을 둘 다 멀리하는 게 아니라, 둘 중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지선생은 이런 예를 들었다.

“최근 일론 머스크가 트럼프와 결별한 뒤 아메리카당 창당을 선언했는데, 이런 시도는 사실 좌파가 먼저 해야 했을 일이다. 버니 샌더스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와 같은 미국 민주당 내 좌파는 썩어 문드러진 민주당에서 나와 새 정당을 만들어야 했다.”

아하, 신당이라는 고루한 선택지인가? 그러나 이게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왜 하필 머스크의 아메리카당인가? 거기에 대중적 에너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저런 입장의 차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에너지를 따라 실용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선생은 다음 문단에서 그 점을 확실히 한다.

“티에스(T. S.) 엘리엇은 믿음을 위해 이단을 저질러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레닌이 전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그렇게 했고, 오늘날에는 좌파가 뭉그적거리며 이단적 결별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역설적이지만 트럼프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렇게 했다. 이제 좌파는 선입견을 버리고 애국심이나 가족과 같은 가치조차도 적에게서 가져올 수 있어야 한다.”

글에도 나오지만, 레선생은 이론에 현실을 맞추지 않고, 현실에 이론을 맞췄다. 멘셰비키와의 분열은 적어도 이론적 차원에서는 그러한 이유로 일어났다. 러시아 혁명은 당시의 정통적 마르크스주의 해법이 아니다. 그러나 레선생은 갖가지 이론 투쟁을 벌여, 러시아 혁명이 정통적인 해법이라고 우겼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좋든 나쁘든 세계가 바뀌었다. 실제 마르크스는 괴테를 인용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오직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레선생의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의 부정을 속에 품을 때에 비로소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그것이 이단적 결별이다. 트럼프를 레선생에 비교하면 좌파로서는 기분이 나쁘겠지만, 어쨌든 트럼프네 식구들이 WTO체제 종료를 선언한 것은 그러한 순간을 잠시 연상케 하는 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애국심이나 가족과 같은 가치”가 핵심이 아니고 “이단을 저질러야 하는 순간”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신당을 무작정 창당하면 이단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는 것일까? 이것은 지선생식 신당 창당 노선인 것일까? 지선생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이단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진실을 외치고 있다는 사실에만 자족하는 신생 소수 정당이나, 선거 때마다 의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떨어야 하는 정당으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헤게모니를 쟁취할 가능성이 있고 실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이단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 지선생의 글이 레선생주의적 실천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는 알 수 있다’고 썼지만 사실 자신은 없다. 또 딴소리들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당위는 주장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는 어려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가령 코빈의 ‘당신의 당’은 레선생적인 무언가가 될 수 있겠는가? 독일의 BSW은 실패한 레선생적 시도의 찌꺼기인가?

이단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과 고통은 그 자체가 구심의 해체, 즉 원심력의 심화를 불러 온다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령 4월 테제 이후 상당 기간 레선생은 왕따였다. 우리는 과거 secret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뭘 어떻게 공유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된 상태에서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하면서 상대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있다. 이미 우리 자신의 중심으로부터 우리 모두는 멀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남을 통해서만 규정할 수 있다. 이단을 자처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기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야 말로, 이단을 자처하기 조차 어렵기 때문에, 이단이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레닌주의, 지젝

지선생 글로 보는 교훈

2021년 7월 19일 by 이상한 모자

https://m.hani.co.kr/arti/opinion/column/1003999.html

모든 글은 자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식으로 이해하는 거다, 나는.

가령 자본주의를 반대하면 공산주의가 되는 것인가? 중국의 사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를 반대한 것의 실천적 결론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마치 더블민주당에 대한 반대가 현실에선 국힘이나 윤석열로 귀결되듯, 끝도 없이 반복돼온 반대의 정치는 대안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혁명의 외피를 뒤집어 쓴 자본주의 내의 핑퐁게임으로 귀결되어 왔다. 진보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쟁취해왔지만 결국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였다.

현실 정치를 돌아봐도 그렇다. 미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심지어 이란도 그렇다. 일국의 정치 내에서는 각각의 정파가 서로를 반대하는 정치적 내전을 벌이지만, 그 결론은 언제나 글로벌 자본주의로의 편승이었다. 좌파를 반대하는 우파와 우파를 반대하는 좌파, 다들 마찬가지다. 양당을 반대하는 진보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교수인 나카노 고이치 씨는 일본 정치의 극우화 경향에 대해 진자운동의 축이동 이라는 틀을 갖다 댄다. 무슨 얘기냐면, 일본의 리버럴 정치가 진자를 왼쪽으로 아무리 밀어도, 한쪽으로 쏠렸던 진자가 진자운동의 원리에 의해 다시 돌아올 때는 진자의 축 자체가 우측으로 이동하고 있는 탓에 그 결과는 우측으로의 더 심화된 백래시가 된다는 것이다.

나카노 고이치 씨는 실천적 결론으로 제대로 된 리버럴 정당의 건설을 주장하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다. 그러나 진자운동의 축이동이라는 개념 자체는 쓸만한 데가 있다. 축은 좌에서 우로 움직이고 있다기 보다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글로벌 정치경제체제의 경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애초 자본주의는, 그걸 뭐라고 부르든, 그러니까 군주제라 부르든 봉건제라 부르든 뭐든 간에 전근대를 반대하는 것의 맥락으로서 발명되었다. 권력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근대로의 이행으로서 긍정적으로 해석되었다. 이 덕에 지금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는 많은 경우에 동일시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본주의적 모순으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필요를 부정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종 정치적 자유의 제한으로 오도된다.

중국이 보여준 것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의 분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 권력은 과거와 같은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더 교묘하고 더 세련된 방식으로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미 그것은 현실이다.

현실 정치에서 권력을 쥐고 있지 않은 쪽이 오로지 반대만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흐름을 반대하는 좌파의 기획은 무엇인가? 이 가능성을 중국이 아이러닉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마디를 더 보태자면,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면서 경제적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러한 체제의 최대 수혜자들이 직접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실효적으로 만들 때에야 가능하다. 중국은 그게 오도된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당 체제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이만…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공산주의, 반자본주의, 중국, 지젝

분당 얘기, 지젝 얘기

2021년 5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1.

잇슈예언해줌인가 그런 한겨레의 동영상 코너가 있는데 평론가 김수민 씨와 함께 하고 있다. 이번 주 나간 영상에 국민의힘 분당 관련 발언이 있는데 황교안 얘기하다 갑자기 나와서 쌩뚱맞게 느껴진다. 아마 편집하시는 분도 무슨 얘긴지 정확히 몰랐으리라 생각된다. 편집의 문제인지, 줌의 문제로 일부 발언이 전달이 안 된 것인지, 내가 막 떠들다보니 논리 점프를 한 것인지 잘 알 순 없는데, 아무튼 이런 얘기였다.

황교안 홍준표 등등 나오는데… 국민의힘의 구심점이 없는 상태에서 윤석열이 밖에서 신당 창당으로 가면 분당될 수 있다. 마크롱식 신당의 위력은 한국 정치에선 지금 어렵다. 다자구도가 될 것이기에, 이것은 윤석열에게도 국힘에게도 좋은 그림이 아니다. 그래서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황교안이 조기 등판해서 열심히 움직이는 이유엔 나름 이런 판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얘기였다.

그담에 안철수 관련 발언을 뭔가 했는데 짤린 건지 아니면 다른 데서 하고 여기서 했다고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안철수 입장에선 제3지대에서 윤석열이랑 먼저 붙는 그림보다 국민의힘부터 접수하고 윤석열과 대결하는 그림이 좋다. 밖에서 윤석열이랑 붙으면 무조건 진다. 국민의힘을 업고 싸워야 그나마 유리하다. 그래서 유리한 합당을 위해 줄다리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합당의 마음은 국힘보다 안철수 쪽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2.

오늘 지선생이 재미있는 글을 썼던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4476.html

이 글에서 더블민주당들과 유튜브언론인을 연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본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가령, 그러한 행태의 기원이라든가 중간의 징검다리 같은 것은 명백히 이런 것들이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피해가 발생하면 그것을 보상하라고 하고, 가해자를 잡아 넣으라고 하고, 무슨 법을 제정하라고 하고 기타 등등 무슨 요구를 열심히 한다. 불행히도 이것은 통치의 차원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수용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그것은 기득권의 음모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슨 합리적인 다른 사정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곧 죽어도 전자를 고집한다. 후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피해자들의 단결에 도움이 된다거나, 뭔가 결국은 이익이 된다거나, 후대에 남길 사례가 된다거나 뭐 그런 이유를 들면서. 그러한 비주류들의 역사적 경험이 탈진실적 태도의 수용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음은 내 생각에 분명하다.

다만 그것과 이것을 본질적으로 가르는 기준은 있다. 그것은 비록 지금은 몰라서 이러고 있지만 1) 앞으로 더 알려고 노력할 것인가? 2) 안다면 태도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 여전히 열린 태도를 유지하느냐 하는 거다. 탈진실의 사도들은 1) 더 알려는 노력은 불필요하거나 상대의 의도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2) 어떻게 알게 되었다 해도 우리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감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진실이라는 무슨 가치라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한 것이다.

여기에 맞서는 우리의 싸움은 벗을 탈이라기 보다는 아닐 미에 가깝다. 우리가 영원히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 지라도,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 뿐이다. 물론 탈과 미를 가르는 벽은 종종 회색지대이지만 적어도 내게 이것은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 냉소사회는 읽었니?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안철수, 윤석열, 지젝, 탈진실
1 2 다음 »

최근 글

  • 이단이 되어야
  • 주식 투자를 10억씩 하는 사람들의 훈계
  • 행복한 사람, 오지 오스본
  • 극우와 보수 구분하기
  • 비난을 위해 남의 노동을 이용하는 사람들

분류

누적 카운터

  • 1,486,726 hits

블로그 구독

Flickr 사진

추가 사진

____________

  • 로그인
  • 엔트리 피드
  • 댓글 피드
  • WordPress.org

Copyright © 2025 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Omega WordPress Theme by Theme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