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오타쿠 행사에서 한 말
좌파 오타쿠 행사에서 두서없이 떠든 내용을 주최측이 정리해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떠들면서 망설임이 많았다. 평론가질을 하고 다니면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덧없음을 계속 체화하던 차이기 때문이다. 말을 해봐야,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표현으로 나오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않는 시대다. 더군다나 오타쿠들을 상대로? 오타쿠란 대체로 자기 영역에서 자기가 최고 오타쿠고 최고 잘 알고 최고 맞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과거에는 가난해서(이렇게 말하면 돈 없어도 얼마든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거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은 평론가질을 하느라 오타쿠를 제대로 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많지 않다. 이건 사실이다.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전에도 썼듯, 단지 모여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주제 넘게도 여러 말씀을 떠들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Gr7oRm5cS_TgqYvSa36Zw3X_5q5RoEMn11wlkeTOqY4/edit?tab=t.0
사실 내 생각에는, 제대로 말하려면 더 긴 시간이 주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얘기였다. 하나를 말해도 말이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여러 생각을 담을 수밖에 없다. 가령 우주세기 건담은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다만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이며, 모든 건담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대개의 사람은 그냥 웃고 말텐데,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많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니겠나?
건담의 아버지가 굳이 턴에이건담을 만들어서 그 때까지의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를 하나의 역사로 통합했다. 그러니까 우주세기니 아니니의 논쟁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턴에이 이후에도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의 구분법에 근거한 작품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제 대체역사물 같은 걸 만든다고 하는데… 물론 이쪽에도 모순은 있다. ‘우주세기만 인정한다’라고 했지만, 유니콘을 인정할 수 있는가?
사실 이건 ‘진정한 ~에 대한 논쟁’에 관한 얘기로 끌어올 수 있다. 언젠가 ‘진정한 건담’에 대한 농담을 한 일이 있는데,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진정한 건담이란 퍼스트 건담 밖에는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퍼스트 건담조차 따지면 ‘진정한 건담’답지 않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무엇’이라는 것은 실존하는가(이 비슷한 얘기는 제가 쓴 냉소에 관한 책을 보시면 좀 더 나와있다)? 그러나 이 모임이 건담 푸념 모임은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저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한 건담 애호가와 위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반적으로 좀 그런 느낌인데, 만일 모인 사람들이 ‘저쪽이 싫은 책’을 읽고 왔다면 무슨 얘긴지의 맥락을 훨씬 더 정확하게? 물 흐르듯? 수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내 생각이다. 제발. 내 블로그에 적는 내 생각입니다. 사람의 한계는 곧 정체성이고, 내 한계란 결국 내가 쓴 가장 긴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요즘 하는 얘기도 결국은 이전에 쓴 책들과 같은 맥락 안에 있는 거다.
끝나고 나서 뒷풀이 자리에서 오간 대화에서도 흥미로운 얘기들이 있었다. 가령 모바일 게임에 저당잡힌 인생에 대해 말했다. 나는 랑그릿사 모바일이라는, 중국 회사(중국회사 ’치고‘ 안정적이고 성의있는 운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가 일본 아이피를 갖다가 만든 게임을 5년 넘게 했다. 이런 류의 게임의 정식이 있는데, 매일의 숙제+가챠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12시가 지나기 전에 뭘 눌러서 숙제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새로운 캐릭터가 출시됐을 떼 더 적은 돈을 들여 뽑기를 할 수 있다. 이게 다 매일매일 노력의 댓가인 셈인데, 어느 날 내가 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현타가 와서 지워버렸다. 뒷풀이 자리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한 분은 그 자리에서 평소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넥슨의 유사한 게임을 지워버렸다.
집회 형태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이것도 어느 유튜브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집회에 대한 코멘트는 계급적 기반에 관한 얘기다. 물론 노조나 기타 단체로 조직됐다고 해서 그게 곧 계급이라고 할 순 없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노조나 단체로 조직화 된 대중을 계급적으로 조직하는 게 더 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만 말하자면 집회 형태와 관련한 논쟁을 처음 본 건 2002년의 촛불 시위였다. 앙마라는 사람이 주도했는데, 이 분은 나중에 흑화한 걸로 기억한다. 하여간 그때는 아예 탈중앙화 된 집회 형태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는데, 섬세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와서 평가해보자면 거기서 드러난 요구는 ‘탈정치’였다. 이게 2006년과 2008년에도 반복되었다. ‘깃발 내리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그때는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오면 ‘순수한 시민’들이 깃발을 내리라고 했다. 자신들이 깃발의 소속으로 오인된다는 이유다. ‘숟가락 얹지 마라’는 거지. 그래서 나중에는 처음에 깃발을 들고 모였다가 ‘순수한 시민’들을 위해 깃발들만 옆으로 비켜주는 절차가 생긴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게 ‘탈정치’적 요구다. 계급의 기준으로 보면 ‘탈정치’는 분명 조직이 어려워진 요건이다.
깃발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부활한 것은 박근혜 탄핵 국면이다. 이때는 오히려 ‘순수한 시민’들이 제각기 이상한 깃발을 만들어왔다. 재치와 유머가 돋보였다. 즐거웠다. 그러나 이게 ’탈정치’를 넘어 계급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지향하고 싶어하는 어떤 조직운동)의 쇠퇴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좌파-조직화의 관점에서 유리해진 조건인가, 불리해진 조건인가? 이번 집회에서는 응원봉이 나왔다. 이건 여러차례 얘기했지만 ‘탈정치’를 지나 ‘소비자‘로서 조직된 대중이 표현된 것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뭘 욕하거나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후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과거에 비해 회원으로 가입하기 보다는 일회성 후원에 그치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첫째로 유행의 문제, 둘째로 ’캔슬‘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시민단체의 내로남불이 메인 아젠다인 세상이다. 흠없는 시민단체를 찾기 어렵다. 내 후원금 지출은 흠이 없는 시민단체를 향한 것이었으면 한다. 여기서 시민단체는 상품화된다. 이게 ‘소비자적 문법’이다. 이 ‘소비자적 문법’의 소유자들이 잘못했다거나, 죄를 지었다거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새로운 세상의 문법이라는 거다. 단지, 질문은 이것이다. 이것은 지금 계급을 조직하는 일에 있어서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게 불리한 조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대중에게 ‘소비자에게 벗어나라! 우리가 조직 좀 하게!’ 이렇게 외칠 것인가? 근데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각적 해법이 필요하다. 그 다각적 해법 중에는 같은 소비자로서(결국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도 어떤 처지에서는 소비자이다) 개입, 관여하는 방식도 있는 것이다. 저는 아마, 그 얘기를 한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일 이 다각적 해법의 다른 측면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으시다면 저쪽이 싫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뒷풀이에서 한 말이 좀 더 있는데, 지금은 또다른 얘기를 떠들러 가야 한다. 그래서 그건 또 다음 기회에… 그리고 여기서 한 얘기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어떤 오타쿠적 세계의 얘기이며, 일군의 백래쉬가 법원을 때려부수기 전 얘기다. 법원 때려부순 얘기는 오늘 낮에 택시에서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 얘기긴 하지만 그건 발행되면 알려드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