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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오타쿠

우리 여성-신체-이미지-식민지 절대 지켜

2025년 4월 25일 by 이상한 모자

자러 가기 전에 아까 본 거.

지난해 5월 한 만화 동호인 전시회에서 아동 성착취물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 전시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아동 성착취물을 제작· 유통할 경우 적용하는 아동청소년 성보호법 위반이 아닌 형법상 음화반포죄로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아동청소년 성보호법은 게임물과 영상물에 한정해 처벌하기에 적용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회는 처벌 대상을 만화나 그림 등 인쇄 매체로 확대하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하지만, 그 개정안에 3만 건에 달하는 의견이 달렸는데 대부분은 법안에 반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중국이나 러시아에나 있을 법이다”, “피해자가 없는데 어떻게 처벌하냐”, “표현의 자유 침해로 이어진다” 등의 반발이었습니다.

(…)

취재팀이 입수한 국회 입법조사처 검토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연방법은 성적 행위가 담긴 시각 묘사물이라면 만화라도 아동 음란물로 보고 처벌합니다. 독일과 일본도 영상물이든 그림이든 관계없이 아동 음란물은 무조건 처벌 대상입니다. 즉, 권위주의 국가들이나 만화로 표현된 아동 성착취물을 처벌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069235

SBS가 보도한 내용. 국회가 괴이한 내용의 만화도 아청법으로 처벌할 수 있게 하도록 하는 법 개정에 나서자 남-오타쿠들이 몰려가 3만건에 달하는 의견을 달면서 ‘중국’, ‘표현의 자유’ 운운 하였다는 내용이다. ‘중국’과 ‘표현의 자유’가 등장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게 지금 다듬고 있는 저의 긴 원고에서 다루는 세계관이기도 한데, 또 좋은 사례가 나왔다. 길게 추가하기는 뭐하고, 각주로 넣어야 겠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다룬 개념의 사슬과 반대의 정치에 대해 기억하시는 분도 있을 것. 상대를 ‘중국-북한-전체주의(권위주의/공산주의)-문재인-더불어민주당-진보-페미니즘-차별금지법’이라는 개념의 사슬에 집어 넣은 후, 이 사슬 전체를 반대하는 동맹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반대의 정치’ 문법을 가동한 보수정치에 대해… 이게 여성-신체-이미지의 식민화(여성-신체의 직접적 식민화는 이미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여성-신체-이미지의 식민화를 지키려는 것)를 사수하려는 남-오타쿠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실인식임. 여기서는 다른 게 보수화가 아니고, 이런 게 보수화인 것.

그런데 SBS가 이런 보도를 하자 또 이들이 다들 SBS 보도에다가 무력시위를 한 모양이다. 다른 나라는 이렇게 처벌하지 않는다는 둥… 표현의 자유, 중국 운운의 연장선이다. 이에 대한 SBS의 애프터서비스가 있는데, 이 역시 볼만하다. 각 나라별로 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세세하게 밝히면서 남-오타쿠들의 주장을 논파하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이미 아청법 도입을 통해 아동 보호라는 가치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법 취지에 맞춰 우리 법원은 가상의 성착취물이라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일본 음란만화를 스캔한 이미지 파일을 인터넷을 통해 유포했다가 아청법을 적용한 판례도 쌓이고 있습니다. 다만, 처벌 대상을 게임물 또는 통신 매체를 통한 화상‧영상 등의 형태로 한정하고 있어 입법 미비가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국회의 법 개정안은 이런 기형적인 입법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한 만화인 동호회에서 ‘어린이 런치세트’라는 제목으로 아동 성착취물을 연상케하는 창작물을 전시하고 판매했음에도 현행 법체계에서는 아청법을 적용할 수 없어 법률 개정안을 발의한 것입니다. 기형적인 입법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 목적이지, 새로운 영역으로 처벌과 규제의 칼날을 확대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에 반대한다면 이제는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어린이 런치세트’와 같은 아동 성착취물이 과연 서브 컬쳐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지, 더 나아가 표현의 자유로서 온전히 보호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질문들에 과연 우리 사회가 동의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073081

추가. ‘이대남-오타쿠’라고 쓰려다가, 요즘 이대남을 혐오하지 마라 예단하지 마라 잉잉 이러는 분들이 많아서 그냥 남-오타쿠라고만 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성착취, 아청법, 오타쿠

좌파-오타쿠 행사에서 한 말

2025년 1월 23일 by 이상한 모자

좌파 오타쿠 행사에서 두서없이 떠든 내용을 주최측이 정리해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떠들면서 망설임이 많았다. 평론가질을 하고 다니면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덧없음을 계속 체화하던 차이기 때문이다. 말을 해봐야, 똑같은 의미의 말을 해도 자기가 원하는 표현으로 나오지 않으면 알아듣지를 않는 시대다. 더군다나 오타쿠들을 상대로? 오타쿠란 대체로 자기 영역에서 자기가 최고 오타쿠고 최고 잘 알고 최고 맞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과거에는 가난해서(이렇게 말하면 돈 없어도 얼마든지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들 있는데, 그거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지금은 평론가질을 하느라 오타쿠를 제대로 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많지 않다. 이건 사실이다.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전에도 썼듯, 단지 모여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해서 주제 넘게도 여러 말씀을 떠들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Gr7oRm5cS_TgqYvSa36Zw3X_5q5RoEMn11wlkeTOqY4/edit?tab=t.0

사실 내 생각에는, 제대로 말하려면 더 긴 시간이 주어져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드는 얘기였다. 하나를 말해도 말이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선 여러 생각을 담을 수밖에 없다. 가령 우주세기 건담은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다만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이며, 모든 건담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한 대목이 있다. 대개의 사람은 그냥 웃고 말텐데,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많은 생각을 하는 거 아니겠나?

건담의 아버지가 굳이 턴에이건담을 만들어서 그 때까지의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를 하나의 역사로 통합했다. 그러니까 우주세기니 아니니의 논쟁은 무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턴에이 이후에도 우주세기와 비우주세기의 구분법에 근거한 작품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이제 대체역사물 같은 걸 만든다고 하는데… 물론 이쪽에도 모순은 있다. ‘우주세기만 인정한다’라고 했지만, 유니콘을 인정할 수 있는가?

사실 이건 ‘진정한 ~에 대한 논쟁’에 관한 얘기로 끌어올 수 있다. 언젠가 ‘진정한 건담’에 대한 농담을 한 일이 있는데, 하나하나 따지다 보면 진정한 건담이란 퍼스트 건담 밖에는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데!? 퍼스트 건담조차 따지면 ‘진정한 건담’답지 않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진정한 무엇’이라는 것은 실존하는가(이 비슷한 얘기는 제가 쓴 냉소에 관한 책을 보시면 좀 더 나와있다)? 그러나 이 모임이 건담 푸념 모임은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저렇게 말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행사가 끝나고 나서는 한 건담 애호가와 위와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

전반적으로 좀 그런 느낌인데, 만일 모인 사람들이 ‘저쪽이 싫은 책’을 읽고 왔다면 무슨 얘긴지의 맥락을 훨씬 더 정확하게? 물 흐르듯? 수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내 생각이다. 제발. 내 블로그에 적는 내 생각입니다. 사람의 한계는 곧 정체성이고, 내 한계란 결국 내가 쓴 가장 긴 이야기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요즘 하는 얘기도 결국은 이전에 쓴 책들과 같은 맥락 안에 있는 거다.

끝나고 나서 뒷풀이 자리에서 오간 대화에서도 흥미로운 얘기들이 있었다. 가령 모바일 게임에 저당잡힌 인생에 대해 말했다. 나는 랑그릿사 모바일이라는, 중국 회사(중국회사 ’치고‘ 안정적이고 성의있는 운영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가 일본 아이피를 갖다가 만든 게임을 5년 넘게 했다. 이런 류의 게임의 정식이 있는데, 매일의 숙제+가챠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매일 12시가 지나기 전에 뭘 눌러서 숙제를 해야 하는데, 그러면 새로운 캐릭터가 출시됐을 떼 더 적은 돈을 들여 뽑기를 할 수 있다. 이게 다 매일매일 노력의 댓가인 셈인데, 어느 날 내가 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현타가 와서 지워버렸다. 뒷풀이 자리의 사람들도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한 분은 그 자리에서 평소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넥슨의 유사한 게임을 지워버렸다.

집회 형태에 대한 얘기도 했는데, 이것도 어느 유튜브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다. 집회에 대한 코멘트는 계급적 기반에 관한 얘기다. 물론 노조나 기타 단체로 조직됐다고 해서 그게 곧 계급이라고 할 순 없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러나 노조나 단체로 조직화 된 대중을 계급적으로 조직하는 게 더 쉬운 일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내 경험으로만 말하자면 집회 형태와 관련한 논쟁을 처음 본 건 2002년의 촛불 시위였다. 앙마라는 사람이 주도했는데, 이 분은 나중에 흑화한 걸로 기억한다. 하여간 그때는 아예 탈중앙화 된 집회 형태가 필요하다는 주장까지 나왔는데, 섬세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와서 평가해보자면 거기서 드러난 요구는 ‘탈정치’였다. 이게 2006년과 2008년에도 반복되었다. ‘깃발 내리라’는 요구가 대표적이다. 그때는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오면 ‘순수한 시민’들이 깃발을 내리라고 했다. 자신들이 깃발의 소속으로 오인된다는 이유다. ‘숟가락 얹지 마라’는 거지. 그래서 나중에는 처음에 깃발을 들고 모였다가 ‘순수한 시민’들을 위해 깃발들만 옆으로 비켜주는 절차가 생긴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게 ‘탈정치’적 요구다. 계급의 기준으로 보면 ‘탈정치’는 분명 조직이 어려워진 요건이다.

깃발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부활한 것은 박근혜 탄핵 국면이다. 이때는 오히려 ‘순수한 시민’들이 제각기 이상한 깃발을 만들어왔다. 재치와 유머가 돋보였다. 즐거웠다. 그러나 이게 ’탈정치’를 넘어 계급운동(…이라고 말할 수 없더라도 그것을 지향하고 싶어하는 어떤 조직운동)의 쇠퇴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좌파-조직화의 관점에서 유리해진 조건인가, 불리해진 조건인가? 이번 집회에서는 응원봉이 나왔다. 이건 여러차례 얘기했지만 ‘탈정치’를 지나 ‘소비자‘로서 조직된 대중이 표현된 것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뭘 욕하거나 폄하하자는 게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단체 후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과거에 비해 회원으로 가입하기 보다는 일회성 후원에 그치는 일이 늘었다고 한다. 첫째로 유행의 문제, 둘째로 ’캔슬‘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시민단체의 내로남불이 메인 아젠다인 세상이다. 흠없는 시민단체를 찾기 어렵다. 내 후원금 지출은 흠이 없는 시민단체를 향한 것이었으면 한다. 여기서 시민단체는 상품화된다. 이게 ‘소비자적 문법’이다. 이 ‘소비자적 문법’의 소유자들이 잘못했다거나, 죄를 지었다거나, 태도를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새로운 세상의 문법이라는 거다. 단지, 질문은 이것이다. 이것은 지금 계급을 조직하는 일에 있어서 유리한가, 불리한가?

그게 불리한 조건이라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대중에게 ‘소비자에게 벗어나라! 우리가 조직 좀 하게!’ 이렇게 외칠 것인가? 근데 그렇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거다.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각적 해법이 필요하다. 그 다각적 해법 중에는 같은 소비자로서(결국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도 어떤 처지에서는 소비자이다) 개입, 관여하는 방식도 있는 것이다. 저는 아마, 그 얘기를 한 것 같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만일 이 다각적 해법의 다른 측면에 대한 생각을 알고 싶으시다면 저쪽이 싫은 책을 보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뒷풀이에서 한 말이 좀 더 있는데, 지금은 또다른 얘기를 떠들러 가야 한다. 그래서 그건 또 다음 기회에… 그리고 여기서 한 얘기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어떤 오타쿠적 세계의 얘기이며, 일군의 백래쉬가 법원을 때려부수기 전 얘기다. 법원 때려부순 얘기는 오늘 낮에 택시에서 쓴 글이 있는데, 그것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 얘기긴 하지만 그건 발행되면 알려드리겠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오타쿠, 좌파

말

2025년 1월 19일 by 이상한 모자

어제 아니 12시 넘었으니까 그제 오타쿠 4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3시간 동안 떠드는 일을 했다. 그게 오타쿠들의 기대에 맞는 얘기였는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모여서 떠들 수 있었다는 게 중요하고,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서도 말했지만, 어차피 생각이라는 게 100%는 잘 전달되지 않는 시대다. 말을 하는 사람의 문제든, 수단의 문제든, 뭐든 간에…

집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날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어느 기자님에게 전화가 왔는데 여론조사 얘기를 묻는 거였다. 여론조사에서 국힘이 잘 나오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에 말을 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거였다. 그래서, 좀 짜증을 냈다.

이게 그럴만하면 괜찮다. 근데 그럴만하지 않았다. 라면을 끓이는 얘기로 비유해보자. 냄비에 물을 넣고, 물을 끓이세요. 봉지를 뜯고 라면을 꺼내서 넣으십시오. 그리고 스프를 뜯으세요… 까지 말했는데, 그렇군요! 그럼 샌드위치 만드는 방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는 거지.

이건 무슨 뜻이냐? 안 듣고 있었다는 거잖아. 굳이 전화를 해서 질문을 해놓고 왜 답을 안 듣고 있냐? 얘기 뻔하다 이거 아닌가? 아~ 이 사람도 과표집파니까 그럼 인용할 필요 없겠군. 근데 내 생각에 내 얘긴 그냥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거든? 근데 뭐… 그게 뭐 중요하겠냐. 어차피 그 정도 기대를 갖고 전화한 건데.

그러나 적어도 오타쿠들끼리 모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으면, 그런 정도는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기분이 있는 것이다. 큰 결심하고 오신 오타쿠분들께 감사드리고, 자리를 마련해주신 분들께 또 감사드리고, 그 자리에서 말씀드렸듯 모두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각자의 방식으로 즐기자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린다. 그리고 안노 히데아키 녀석은 반성하시오.

Posted in: 신변잡기, 잡감 Tagged: 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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