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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이준석

이재명 윤석열은 대통령 되면 안 될 사람들

2021년 6월 8일 by 이상한 모자

다들 정치적 가스라이팅에 질려버렸기 때문에, 이제 흑은 흑이라 하고 백은 백이라 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재명 씨 하는 거 보면 전혀 아니다. 틀린 걸 인정을 안 한다. 지난 번 지역화폐 논쟁 때도 그랬다.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논리를 들고 오는 게 아니고 불순한 관료라는 ‘배후론’을 주장했다. 이번에도 하다 안되니 노벨상 운운하다 그것마저도 헛발질 했다. 그런 걸 하나도 인정 안 한다. 이 정권에서 뭐 하다가 안 되면 검찰 탓 언론 탓 하는 거 똑같이, 더 심하게 할 거다. 요즘 하는 얘기 보면 전투형 노무현이 아니고 다운그레이드 문재인 같다.

생각에 있어서는 정치적 냉소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기본소득과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념들을 가져다가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맥락으로 소비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탄소중립을 위해 산림청이 하는 것처럼 나무를 대량으로 벤 후 그걸 한국형 목재펠릿 목질형 바이오매스 발전에 투입해 경제를 살려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주장할 사람이다. 기후변화 어쩌구 그걸 더 이상 누가 믿겠냐?

윤석열 씨는 자기가 왜 정치를 해야 되는지도 모르고 정치에 전혀 진지하지도 않다는 점에서 완전히 실격이다. 지금 이게 뭐냐. 장난치냐? 내가 이걸 길게 얘기하고 싶으나, 요 며칠 털보아저씨가 뒤늦게 방방 뜨고 있어서 자제한다. 그거 내가 먼저 했다. 털보아저씨 따라 가냐는 소리 누가 할까봐…

내가 먼저 했다 라고 하려니 생각나서 한겨레21에 이준석 씨에 대해 쓴 글을 되돌려보게 되는데…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0408.html

봐라, 컷오프도 전인 5월 27일날 써서 넘긴 글이야. 근데 저기 잘 보면 오류가 있지.

“구 친박(친박근혜계)은 나경원·김무성 전 의원 등을, 비박은 주호영 의원, 유승민계는 이준석 전 최고위원과 김웅 의원을 지지한다는 건데,”

라고 돼있는데, 내가 넘긴 원문을 찾아보면 이렇게 써있다.

“구 친박은 나경원 전 의원, 김무성 전 의원 등 비박은 주호영 의원, 유승민계는 이준석 전 최고위원과 김웅 의원을 지지한다는 건데,”

구 친박 -> 나경원

김무성 등 비박 -> 주호영 (근데 최근 손 뗌)

유승민계 -> 이준석, 김웅

이렇게 쓴 건데… 이거보세요. 다들 내가 하는 말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는 거야.

갑자기 빈정 상해서 그만 씀. 이런 걸 블로그에다가 쓰고 있으면 뭘 하냐.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윤석열, 이재명, 이준석

조국과 이준석

2021년 6월 4일 by 이상한 모자

글쟁이니 지식인이니 하는 사람들이 가끔 하는, 옛날 글 붙여 넣어서 내가 뭐랬어 라고 하는, 그거 나도 한 번 더 해보자.

아래는 2019년 2월달에 쓴 글이다. 한 번 읽어봐라. 읽기 싫지? 이렇게 썼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407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시장원리와 완전경쟁을 통한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면화 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적극적 역할’이라는 것 역시 이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데 좀 더 분명한 시장원리, 좀 더 공정한 경쟁, 좀 더 ’나’에게 유리한 각자도생의 룰이라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시장에서의 ‘실전’에 막 진입하기 시작한 젊은 세대가 이런 목소리를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즉 20대의 보수화는 근본적 의미에서 ‘사회’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체제가 재생산해온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어느 특정 정파의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거 민주정부 10년의 ‘개혁’도 이런 믿음의 극복을 제대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란 슬로건이 “기회가 평등하면 과정도 공정하고 결과도 정의로울 것”이란 믿음으로 환호를 받은 것 또한 비슷한 이유이다. 보수정부와 민주정부는 서로 다른 사회적 철학에서 경쟁을 한다기보다는 공장한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누가 더 잘 관철할 수 있느냐를 두고 경쟁해 온 면이 있다는 것이다.

(…)

기성 정치권은 지금까지 청년이니 뭐니 하는 딱지를 붙여 젊은 사람을 비례대표 의원 후보로 영입을 하거나 지도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량을 베풀어 왔다. 운 좋게 국회에 입성한 청년 정치인은 그저 소모되다가 사실상의 조기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요즘에는 그나마 하버드 출신의 최고위원이 이러한 청년 정치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사실 이 사례는 그나마 ‘청년’에게 할당된 자원마저 학벌 엘리트가 차지한 것이란 점에서 어떤 모범사례로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최근 이런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소외된 20대 남성을 대변한다고 하니 좀 이상한 기분도 든다.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걸음이다.

내가 잘났다는 게 아니다. 이런 얘기 나만 했겠나? 다들 한 얘기다. 뻔히 예상되는 결말을 알면서도 여기까지 자기들 하고싶은 것만 해온 편협하고 기만적인 정치를 돌아보라는 것이다. 봐라, 이런 글도 있었어. 2019년 5월달에 쓴 글이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3582

‘촛불’을 통해 정치를 정상화 하면 세상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들은 마치 난파선에서 탈출하는 선원들처럼 자기 이익이라도 챙기자는 각자도생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최근의 ‘여경’ 논란이 결국 팔굽혀펴기 등의 고용 방식 문제와 경찰 권력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은 이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장외투쟁을 놓고 중도 확장에 한계를 보였다는 둥 가짜뉴스의 온상이 됐다는 둥 말이 많지만, 이들의 행보가 최근의 우울한 풍경을 정치적으로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결과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최저임금 인상과 탈원전 정책으로 경제가 무너졌고, 국가채무비율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으며, 남은 것은 세금폭탄 뿐이라는 황교안식 레파토리가 보수언론과의 공조를 통해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 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거다.

개혁을 말하는 정치가 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국회 관료 언론 재계 이해당사자들 모두에게서 우군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국민에게 호소해 대중적 압력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총선을 겨냥해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단기적 관점의 ‘묘수’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적어도 지금은 여러 난국에 빠져 당장 관철하기 어렵더라도 제대로 된 비전을 제시하면서 이를 관철할 의지 역시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에 대한 평가는 당장 눈 앞에 닥친 선거 결과로 이루어지지만 ‘역사적’으로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정치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당장은 손해와 패배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최소한 대의명분에 복무하였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기는 것이다. 대의의 정치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만 부활할 수 있다.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말도 있다. 말하자면,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다. 지금 이런 각오를 가진 정치세력은 어느 쪽인가? 이른바 ‘범여권’이라 일컬어지는 ‘개혁’세력인가, 아니면 ‘극우’의 색채를 숨기지 않는 보수야당인가?

아래는 2019년 9월달에 이른바 조국 사태 정국에서 쓴 글이다. 송영길 씨의 사과는 이런 식의 대응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0178

조국 후보자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이 권력을 독점하고 ‘편법’을 활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현실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난 정권 말의 촛불시위 역시 ‘유능’하고 ‘깨끗’한 새로운 엘리트 지도자를 요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런 세계관이 반영된 걸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국 후보자 문제에서 반복 확인되는 것은 사람들이 요구한 사회 개혁이 엘리트들의 소속 당파를 바꾸는 결과로만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었어도 기득권 정치의 재생산도구는 ‘개혁’이라는 포장지만 달리하며 여전히 존속된다. 그런 점에서 ‘무능’하고 ‘부패’한 기득권과 ‘유능’하고 ‘깨끗’한 엘리트는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까지 ‘개혁’을 내세운 정치는 오직 동전을 뒤집는 제스추어로만 대중의 분노에 대응해왔다. 이게 조국 후보자에 대한 반발에 대입제도 개편이라는 대답으로 대응하는 정치의 본질이다.

이러한 정치가 낳는 폐해 중 하나는 사람들이 기득권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며 사익을 추구하는 통에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냉소적 현실 인식은 자신이 가진 조그만 기득권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각자도생의 의식을 추동한다. 사람들은 손해를 감수하며 체제를 바꾸는 모험에 나서기보다는 그나마 근대 민주주의가 이룩한 ’공정한 질서’를 ‘편법’과 ‘부패’라는 오염원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골몰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생들의 촛불시위 배후는 ‘물 반 고기 반’의 자유한국당이 아니라 기득권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지켜내려는 정치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원래 ‘민중의 투쟁’이란 그런 것이다. 분노하는 대중의 에너지가 사회를 바꾸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가 이에 제대로 된 방식으로 호응해야 한다. 정시확대가 아니라 모두가 손해를 조금씩 감수하면 반드시 더 나은 내일이 온다는 확신을 주는 정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조국 후보자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집권 세력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의문이다. “조국 봐주고 선거법 얻어낸 거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보수세력의 공세에도 “청문회 이후에 판단하겠다”며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하는 원내의 진보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분노할 때마다 동전의 앞뒤만 뒤집는 정치는 이제 그만 끝내야 한다.

마찬가지로 2019년 9월달에 쓴 글이다. 이미 한 얘기를 계속하는 것도 지겨워서 여기까지만 한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1111

여야 모두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부동층’은 말 그대로 중립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 내부에 존재하는 담론적 에너지까지 무효화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삶을 직접적으로 개선해주지 뭇하겠다면 적어도 경쟁할 기회라도 보장해 달라는 시장원리 구현에 대한 요구이다. 조국 장관을 둘러싼 논란과 의혹, 이를 둘러싼 기성언론들의 정파적 자기기만은 이 요구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

진보정치가 자기 대의를 대중적으로 전달하는데 실패할 때, ‘부동층’의 에너지는 공정한 시장원리 구현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극우포퓰리즘이나 또다른 엘리트 정치로 귀결되는 길을 밟게 된다. 이는 진보적 대의가 냉소의 대상이 되고 오직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목적인 각자도생의 사회원리가 고착화 되는 현실을 강화시킬 것이다. 부동층의 입맛에 맞는 정치를 하라는 게 아니다. 그 ‘부동층’의 것조차도 되지 못하는 여론에 불을 당기고 이를 배경으로 대안적인 진보정치가 기득권을 압박해야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각박한 환경에서 진보정치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한가한 얘길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19세기 말 서구의 좌파들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표어를 즐겨 사용했다. 앞서 정치사회적 개념 혼란을 촉발시킨 장본인인 조국 장관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사청문회에서 “나는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민주주의자”라고 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야만을 향한 길을 여는 열쇠가 되도록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이준석, 조국

들이받는 리더십

2021년 6월 4일 by 이상한 모자

이준석이 대구에서 박근혜 탄핵은 정당했다며 특유의 갖다 붙이는 논리를 구사했는데 반응은 괜찮은 것 같다. 적어도 사탕발림 하지 않고 직구로 승부했다는 것이다. 부산과 대구 일정에서 티비토론에서의 건방진 인상을 상당히 만회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여당은 뭐 좀 느끼는 바 없나?

윤석열 이준석 이재명 공통된 리더십의 상이랄까 그런 게 있는데, 욕 먹어도 할 말은 하고 들이 받아야 할 땐 들이 받는다는 뭐 그런 이미지가 있다는 거다. 이준석은 앞의 둘과는 또 다른 아웃복싱을 구사하지만 젊다는 생물학적 요소가 이걸 인파이팅으로 보이게 하고 있다. 그래서 차기를 규정하는 시대정신은 들이받는다는 것인 듯 하다.

왜 이렇게 됐는가? 문통이 좀 답답한 스타일이라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집권세력이 국민을 가스라이팅한 탓이 있다고 본다. 뭔가 익숙하지 않은 걸 하는데, 처음에는 그게 개혁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했다.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다들 그게 개혁이라고 하니 또 그런가보다, 내가 개혁을 잘 몰라서 그런가보다… 스스로를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게 나의 구체적 손해로 돌아오니 역시 아니잖아! 이렇게 되는 거고… 그럼 왜 다들 개혁인척 했어! 이렇게 되는 거지.

백보 양보해서 그게 개혁이 맞다면 설명하고 설득하고 정 아니다 싶은 건 고치고 이런 게 있었어야 되는데 안에선 찍어 누르고 밖에선 거짓말하고… 이러니 눈치 안 보고 할 말 하는 사람이 좋다는 정서가 대세가 될 수밖에 없다. 뒤집어 말하면 다음 정권에서 사람들은 눈치보지 않고 할 말 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는 걸 체감하게 될 것이다.

역시 말만 갖고는 안 되고 능력이 있어야 되겠지. 능력을 증명해야겠지. 오늘 갤럽 여론조사(주관식이다)에서 이준석 대통령 답한 사람이 3%란 뉴스 보고 생각한 이야기.

Posted in: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능력주의, 윤석열, 이재명, 이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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