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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작품 감상

13기병방위권, 호라이즌에 대한 글

2022년 6월 14일 by 이상한 모자

오랜만에 또 께임 제네레이션에 글을 썼다.

https://gamegeneration.or.kr/board/post/view?match=id:120

마침 오늘 뉴스를 보다 보니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크림반도까지 되찾아버리겠다며 전의를 불태우는 거였다. 이런 때에는 레선생의 해법을 상기하게 된다. 혁명적 패배주의… 독일이 쳐들어오건 말건 상관없고 전쟁을 일방적으로 끝내겠다는 선언을 한 거다. 이건 우크라이나더러 전쟁 더 끌어봐야 서방세계만 곤란해지니 돈바스 지역을 그냥 러시아에 넘겨주고 시마이하자는 개념과는 다르다. 혁명적 패배주의는 전쟁 그 자체가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캠페인을 전제로 한다. 그런 전제를 놓고보면 젤렌스키의 크림반도 수복론은 그가 우크라이나의 민족적 영웅일순 있으나 어떤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인지를 드러내는 언술이기도 한 것이다.

뭐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읽어주시면 왜 저런 글을 썼는지 느낌이 오실 것으로 생각.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크림반도, 혁명적 패배주의

리갈 하이

2022년 3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격리돼 고통받는 와중에 밥은 먹어야 하고, 밥을 먹는 동안에 뭐라도 여유있게 보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철지난 일본드라마 리갈 하이를 정주행하였다. 원래 악덕변호사가 주인공이라는… 소재에 좀 거부감이 있어 멀리하였는데 생각 외로 좋은 느낌이다.

사카이 마사토 씨가 코믹연기를 하는… 주인공 고미카도 켄스케 변호사는 돈과 명예에 목숨을 건 전형적인 속물이다. 이 속물이라는 조건은 냉소적 세계관의 표현이다. 진실이든 정의든 그런 것은 의미가 없고 오직 손에 잡히는 실물만이 의미가 있다는… 그의 파트너 마유즈미 마치코 변호사는 여전히 대의니 뭐니를 포기하지 못하는 소시민인데 두 사람의 소소한 대립구도는 늘 속물의 압승으로 끝난다는 게 주요 스토리이다. 시즌2에서는 대의를 추구하는 어떤 순수가 라이벌처럼 등장하지만 그건 결국 어떤 독선으로 귀결되고 역시나 승자는 냉소적 속물이라는 전형적인 얘기로 흘러간다.

여기까지 말하면 아주 악질적인 스토린데, 그래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건 이게 또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기본은 속물이며 냉소이다. 부정할 수 없다. 고미카도 켄스케는 늘 이긴다. 우리는 마유즈미 마치코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속물적 세상에 순응하고 냉소주의를 받아들이며 그걸 내면화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폐쇄적으로 정의를 논하는 것은 도피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끝이 아니고, 졌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대의와 정의라는 순진한 소리로 다시 고미카도 켄스케에 맞서는 것만이 찰나의 기회라도 살리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의 의미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워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에 있다. 그렇게 버티는 중 어떤 순간에는 고미카도 켄스케도 마유즈미 마치코에게 뭔가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도망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은 그런 거다.

이 드라마는 민주당 정권 말기부터 아베 신조 2차 집권 초기에 걸쳐 방영되었다. 그런 점까지 고려해보면…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변화’의 자리를 대체해 버린 결과, 변화를 강요하는 시류를 거부하지는 못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은 끝내 포기할 수 없다고 소극적으로나마 말하는 어떤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우리는 공정과 상식의 시대… 참고가 될 수도 있겠네요.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리갈 하이

소울

2021년 4월 23일 by 이상한 모자

유튜브에서 돈을 내고 소울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인터넷의 감상평을 보면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자 뭐 그런 메시지로 해석되는 것 같다.

정치병자의 해석은 당연히 다르다. 극중에 나오는 어린 영혼은 이미 자기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으며 그럼에도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냉소주의적 대중의 속성을 갖고 있다. 누가 무엇을 말해도 이미 아는 얘기라며 부정한다.

이 영혼을 각성으로 이끄는 것은 특별한 멘토나 어떤 교육 기술이 아닌, 삶의 경험 그 자체이다. ‘아는 것’과 ‘살아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경험이 지식에 우선한다는 얘긴가? 내가 보기엔 그렇다기보다는, 세계의 주인이 된 것과 아닌 것의 차이다. 세계의 주인이 되어야 비로소 정치를 비롯한 세상만사가 ‘내 일’이 된다.

정치가 실패하는 이유… 더 정확히 말해 손바닥 뒤집기식 반대의 정치만이 가능한 이유가 이거다. 그렇기에 대안은 사람들을 세상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에 있다. 영화에서 영혼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그저 보통 사람이다. 그 보통 사람이 삶인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민주주의로 해방된 삶을 통하여 오히려 삶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아이러니를 바로잡는 것이 시작이다. 삶은 삶으로 연결돼야 한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냉소주의, 무세계성,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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