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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작품 감상

발더스 게이트 3로 코로나19와 AI를 연상한 글

2023년 12월 10일 by 이상한 모자

올해의 게임으로 뭘 꼽겠느냐 하시기에 팬텀 리버티 확장팩도 쳐주나요 했는데, 그럼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흠… 그런데 아무래도 발더스 게이트 3를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https://www.gamegeneration.or.kr/article/6754a89d-ed04-47aa-a31e-ac353b3b7a03

무릇 비평이라는 것은, 이게 얼마나 좋은 건지를 나열하기 보다는 작품을 통해 현실을 짚고 그 행위를 통해 다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역시 AI의 시대이기 때문에, 사이버펑크2077에 대해서도 언젠가 쓸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쪽은 ‘제거적 유물론’이 승리한 세상을 그리고 있다. 샘 올트먼이 쫓겨나는 과정을 굳이 일반인공지능을 둘러싼 갈등으로 보는 언론의 시각은 이미 완벽하게 제거론이 승리한 세상이다. 사이버펑크2077은 그 세상에서 우리가 우려하는 바가 어떻게 현실이 될 수 있는지, 어떤 시나리오가 가능한지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소재랄까?

어제는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송년회라는 자리가 있었는데, 잠시 게임에 대한 대화를 했다. 어릴 때부터 게임패드 조작이 매우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성별 편향과 그게 게임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잠시 얘기했는데, 뭐 그것은 나중에…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게임, 발더스 게이트3, 사이버펑크2077

일본 할아버지 만화영화 보고 한 생각

2023년 11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일본 할배의 만화영화를 보러 갔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풍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 않아 굳이 볼 생각은 없었지만, 다들 대실망이라고 하기에 급 흥미가 생긴 것이었다.

2차 대전과 그 후의 그 시절은, 그러니까 그런 거다. 죽음과 맞닿은 전쟁을 하던 그 논리로 재건과 생산으로의 동원을 정당화했다. 전투기 엔진 만들던 설비를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데 투입했다. TV, 전기밥솥, 세탁기가 현대적 ‘3종의 신기’로 등장했다. 전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아이러니다. 죽음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삶이다. 1941년생인 일본 할배의 성장기는 그런 때였다.

전쟁과 불길로 소멸한 엄마를 찾고 싶은 본의와 순산이라는 현실의 생산을 맡아야 할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탑으로 돌입하는 주인공은 마치 이상과 생계를 저울질하며 대중예술에 투신하는 할배의 초심을 말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창작이라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거나 혹은 감수하는 세계이고, 동시에 죽은 세계이면서, 죽은 것에 삶을 불어 넣는 세계이다. 창작물은 녹아내린 가짜 엄마나 깨져버린 장미처럼 살아있지 않다.

거기에 삶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은 아직은 늙지 않은 할머니처럼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면서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펠리컨들의 침공은 곧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되는 사건이다. 젊은 상태의 엄마가 팰리컨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생명의 씨앗들도 어쩔 수 없이 불태워지는데 이건 전쟁의 논리다. 더군다나 펠리칸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도 좋아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이상이랄까 그런 것을 찾아 달려온 것이지만 그 안에도 죽음으로 삶을 혹은 삶으로 죽음을 정당화 하는 논리 즉 현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탑 안에서 꿈과 환상의 모험을 쫓은 끝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에 도달하지만 거기서 발견하는 것은 주인공에게 네가 싫다고 말하는 그의 본심이다. 세속적으로 말하면 전처의 자식이다. 좋을리가 있겠나? 그런데 거기서 주인공이 또 깨닫게 되는 것은 삶과 죽음의 동질성, 즉 이상과 현실의 어떤 융합이다. 그 둘은 자매이면서, 같은 자식의 어머니가 될 운명을 지고 있다. 애초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은 현실의 인물이면서 왜 탑에 이끌렸는가? 경위야 어찌됐든 그도 나름의 이상이랄까 명분을 품은 것이다. 주인공을 어른스럽게 대하지 않고 싫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속내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이들 자매는 같다고 해도 좋다.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한쪽하고는 거리를 두면서 다른 한쪽을 그리워하며 울며불며 쫓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더 이상 그렇게 부르지 않고 “나츠코 엄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모험의 클라이막스는 업계의 정점에 달한 일본 할배 그 자신을 마주하는 씬일텐데, 만들어 놓고 보니 자기 혼자 외골수로 도를 추구한다고 뭐가 되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게 뭘 해봐야 세계는 고작 하루 정도 연장될 뿐이며, 그렇게 만든 세계마저도 야심가가 이끄는 군국주의 잉꼬 집단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 이 야심가는 나름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속이 빤하고 속물적이다. 믿을만한 후계자를 세워 세계를 유지해볼까도 하지만 사실은 의미가 없는 몸짓이다. 자기가 만든 세계 안에서도 전쟁과 죽음, 삶과 생산과 이 사이를 잇는 기만은 계속된다(여기까지 왔으면, 어느새 그것이 자연이며, 생명이다!). 애초에 세계를 유지하는 동력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그게 대중이든 자본이든 뭐든)에서 왔다.

그러한 끝에, 군국주의 잉꼬가 고귀한 이상 혹은 심혈을 기울인 유산을 끝내 망쳐버린다면? 그래도 친구를 남겼으면 된 게 아닌가? 애초에 이렇게 되기 훨씬 전의 어떤 시점에 뭔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친구를 택해야 됐던 게 아니었을까? 여기까지 왔는데도 남긴 게 없다고 하면, 그래도 ‘나츠코 엄마’를 현실에 돌려주는 일은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거다.

이게 뭐랄까, 전쟁의 가해자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온전한 피해자일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공범의식을 가질 수도 없는 그 세대 일본인들의 은퇴 심경 같은 거라고 하면 어떨까? 아무튼 어떤 공감이 될만한 얘기라고 생각했으니까 만든 거 아니겠나.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70대 노년층이 보면 만족할만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그런 얘기.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새만금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메모

2023년 7월 17일 by 이상한 모자

어쩌다 새만금과 관련한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게 되었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NL적인 영화였다. 감독이 NL출신이란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인터뷰 등을 찾아보면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 NL적인 영화라는 것은 내가 이걸 보면서 NL을 연상했다는 것이며, NL적인 한계가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NL을 어떻게 하자는 얘기가 전혀 아니다. 갑자기 NL이 왜 나오냐 하실 수 있는데, 제가 운동권 출신이라…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가 카레를 보면서 똥을 연상했다고 해서 실제 카레가 똥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과 비슷한 뭐 그런 거다. 그냥 내가 뭔가 똥 생각 나는 카레라고 하는 거지…

먼저 영화를 본 분이 그런 불평을 했다. 세간의 평도 좋고 실제로도 좋은 영화이지만 감독 본인이 너무 많이 등장해 몰입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라는… 보니까 정말 비슷한 느낌이 받는 장면이 곳곳에 있었다.

거기에 또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영화가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주의적이고 감상적이라는 거다. 가령 등장인물이 조개들이 이제나 저제나 바닷물이 들어오길 기다리다 빗물에 모처럼 갯벌 위로 올라왔지만 말라 죽고 말았다는… 그 얘길 하면서 어떤 실망과 낙담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이건 전형적인 인간주의적 방식의 설명이다. 조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라는 거다. 새들이 먹이를 찾는 모습을 민간 전문가의 생업과 교차편집하는 씬도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새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다. 그게 감독이 조개껍질을 어루만지는 장면이 나오고 죽은 새를 어루만지는 손이 나오는 이유인데,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고,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목적이 있어야 하는 거고, 그게 무엇일까 라는 게 영화 초반에 내가 가졌던 의문이다.

후반부에 미군기지와 전투기가 나오면서, 무릎을 쳤다. 아~~~ 이거구나~~~ 그러니까 이런 거다. 만약에 새만금 사업을 둘러싼 비극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 대 자연의 대립구도로 그려질 것이다. 이 구도라면 본래 자연과 공생했거나, 자연의 편에 의식적으로 서려고 하거나, 자연에 정서적으로 연민을 느끼는 인간이 등장할 수는 있지만 그게 내러티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이런 구도에서 인간은 어디까지나 잘못을 했으니 반성하고 속죄하는 주체이지 자연과 근본적으로 한 편이 될 수는 없다. 근데 미군기지와 전투기가 등장하는 세계관에서는 권력과 민중의 대립구도가 강화된다. 여기서 민중과 자연은 부당한 권력에 핍박받고 맞서 싸우는 같은 편으로 묶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다루는 새와 조개와 고둥과 게의 이야기는 인간주의적이고 감상적으로 그려지는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 죄란 ‘아름다운 것을 본 죄’로 묘사되는 거다. 그리고 이게 말하자면 NL적 세계관이다.

이런 세계관을 덮거나 희석하는 것은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영상과 음향이다. 새와 조개와 게들의 영상이 대단하다. 갯벌의 드론샷도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묵음으로 그것만 보여주는 것도 좀 과하다 싶긴 한데 아무튼 굉장하다. 옛날 같았으면 독립PD? 인디다큐멘터리 제작자? 정도 수준에선(물론 국제적 대기업이 펀딩을 했더라마는…) 촬영할 수 없거나 어려운 장면이다. 물론 옛날에도 어떻게든 했다는 얘기가 있는 것도 사실인데, 아무튼 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세상이 돼서 이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도 수준의 영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들의 날갯짓 만으로도 전해져 오는 그런 게 있다. 몇 번이나 감탄했다.

아무튼… 이러한 세계관의 스토리에서 주인공은 ‘뭔가 막연한 의문을 갖고 있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 근본적 모순에 눈을 뜨고 투사로 거듭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 역할을 완전하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감독 본인 뿐이다. 그러니 나레이션은 1인칭이어야 하고 감독이 주요 장면마다 등장할 수밖에 없다. 가령 감독이 카메라로 새가 아니라 전투기를 쫓는 장면이 한 순간 나오는데, 이 장면이 주인공이 거듭나는 어떤 전환점이 아니겠는가. 하여간 전반부의 의문은 이런 방식으로 풀렸다.

그게 문제라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다. 원래 정체성은 곧 한계이다.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 하는 것도 운동권 출신의 한계 아니겠는가. 영화 전문가도 아니고, 그냥 그런 감상을 가졌다는 것을 개인적 기록으로 남기는 바이다.

Posted in: 작품 감상, 잡감 Tagged: 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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