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갈 하이
격리돼 고통받는 와중에 밥은 먹어야 하고, 밥을 먹는 동안에 뭐라도 여유있게 보면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철지난 일본드라마 리갈 하이를 정주행하였다. 원래 악덕변호사가 주인공이라는… 소재에 좀 거부감이 있어 멀리하였는데 생각 외로 좋은 느낌이다.
사카이 마사토 씨가 코믹연기를 하는… 주인공 고미카도 켄스케 변호사는 돈과 명예에 목숨을 건 전형적인 속물이다. 이 속물이라는 조건은 냉소적 세계관의 표현이다. 진실이든 정의든 그런 것은 의미가 없고 오직 손에 잡히는 실물만이 의미가 있다는… 그의 파트너 마유즈미 마치코 변호사는 여전히 대의니 뭐니를 포기하지 못하는 소시민인데 두 사람의 소소한 대립구도는 늘 속물의 압승으로 끝난다는 게 주요 스토리이다. 시즌2에서는 대의를 추구하는 어떤 순수가 라이벌처럼 등장하지만 그건 결국 어떤 독선으로 귀결되고 역시나 승자는 냉소적 속물이라는 전형적인 얘기로 흘러간다.
여기까지 말하면 아주 악질적인 스토린데, 그래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건 이게 또 우리가 처한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의 기본은 속물이며 냉소이다. 부정할 수 없다. 고미카도 켄스케는 늘 이긴다. 우리는 마유즈미 마치코처럼 어떤 방식으로든 속물적 세상에 순응하고 냉소주의를 받아들이며 그걸 내면화하면서 사는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폐쇄적으로 정의를 논하는 것은 도피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끝이 아니고, 졌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대의와 정의라는 순진한 소리로 다시 고미카도 켄스케에 맞서는 것만이 찰나의 기회라도 살리는 길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의 의미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는 것이라기보다는, 지워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에 있다. 그렇게 버티는 중 어떤 순간에는 고미카도 켄스케도 마유즈미 마치코에게 뭔가 영향을 받은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도망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은 그런 거다.
이 드라마는 민주당 정권 말기부터 아베 신조 2차 집권 초기에 걸쳐 방영되었다. 그런 점까지 고려해보면…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변화’의 자리를 대체해 버린 결과, 변화를 강요하는 시류를 거부하지는 못하면서도 인간의 존엄은 끝내 포기할 수 없다고 소극적으로나마 말하는 어떤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우리는 공정과 상식의 시대… 참고가 될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