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서 떠도는 얘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SNS 애호가들, SNS에 없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그런 거 아니냐고 하면 또 절~~ 대 그렇지 않다고 자기부정한다) 사람들, 상상해보면 열 받는다. 예를 들어 여기다가 대장동 검찰 수사 얘기 쭉 써놓은 거, 그냥 거의 그대로 됐잖아. 사람들은 뭐 하나 검찰이 혐의 넣고 빼고 액수를 늘이고 줄일 때마다 이러면 이랬다고 난리 저러면 저랬다고 난리… 처음부터 갈 길은 정해져 있었다니깐? 내가 잘나서 이런 얘길 하는 거냐, 그게 아니고 그냥 신문 기사들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거라고. SNS가 아니고.
이해는 한다. SNS가 아니면 세상과 연결될 수 없는 분절된 우리… 그러면 언론이든 사회든 어떤 담론을 얘기할 때는 SNS 내의 쳇바퀴가 아니고 세상 그 자체를 다루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요즘에는 언론도 SNS의 한 구성요소 같아 보일 때가 많다. 게으르고 무책임하다. 뭐 최근 한국일보 시행사의 세계 특집은 여러 한계를 감안할 때 좋았다. 그러나, 나만의 생각인진 모르겠으나 대체적으로 SNS를 겨냥해 기획을 하거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끝에는 SNS 반응을 평가 기준으로 하거나, 하여간 SNS를 상정한 언론 활동이 많다는 생각이다.
물론 현실은 인정해야지. 결국 SNS 의존이나 클릭 수 저널리즘이나 광고주 눈치 보는 거나 다 똑같은 현상이다. 한계 속에서 그나마 나아질 수 있는 역할을 스스로 찾으려는 노력은 숭고한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걸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명분으로 자기 자신과 남을 속이려는 도착적 행태에 대해서 짜증을 내는 거다.
어느 방송에서 사건사고 평론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에 아이템을 최대 3개까지 한다. 근데 어느 날은 아이템 3개가 전부 아동성범죄인 거였다. 이럴 필요가 있나? 같이 출연한 변호사님에게 오늘은 아이템이 좀 그렇다 라고 하니 이 사건에 이러 저러한 의미가 있다 라고 설명을 하더라. 각각의 사건에 뉴스로서 또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면 하루종일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나 3개 아이템이 다 그렇다고 생각되진 않았기에 시청률 의식한 편성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최근 무슨 시사라디오 방송 내용을 보는데 역시나 아동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거였다. 내가 자꾸 강조하지만 아동성범죄를 다루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게 아니다. 중요한 뉴스다. 맞다. 그런데, 손을 속옷 안으로 넣었느니까지 얘기를 해야 우리가 이 범죄의 심각성을 비로소 알게 되는 거냐? 가령 살인 사건이라면 꼭 한 손으로 어디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쥔 칼로 어디를 찌른 후 몇 도를 비틀었고 피는 몇 리터가 나왔고… 이런 걸 다 알아야만 살인의 심각성을 인정하게 되니? 그런 게 중요한 건 도축의 기준을 논할 때다. 살인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기준은 아니다.
가장 열받는 포인트는 진행자가 불편해도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이라는 식으로 이런 시사-포르노적 행태를 정당화하는 거였다. 스스로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도착인 것이다. 옛날에 지선생 왈… 맞나? 지선생이 그랬다. 대타자가 원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히스테리다. 대타자가 정말 그것을 원한다고 믿어서 행하는 건 강박이다. 대타자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원한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행하는 것은 도착이다. 저널리즘의 윤리는 시사-포르노를 원하는가?
같은 맥락에서, 언론이든 사회적 논의든 SNS가 아닌 실제 현실을 향하라는 건 그냥 열심히 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해야 한다. SNS에서 이뤄지는 시민들의 논의를 지면에 반영한다… 그런 건 없다. 인터넷에 없는 걸 찾아야 한다. 실제로 인터넷에 없는 게 현실에 있든지 없든지. 그러지 않으면… 이러다 다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