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가 미군 점령군 얘기에 대해 견해를 밝혔는데, 정확하다. 뒤에 이재명 경솔한 발언이라고 한 대목은 논쟁을 해볼 수 있겠지만(독립운동가 기념 시설과 그 후손을 만나는 일정에 그 정도 말도 못하는가??).
우리윤총장님도 오늘 이거 주워 담느라고 논쟁할 생각 없다 하는데, 본인 생각을 그대로 올린 게 아니면 주변 참모진을 갈아버리든지 하시길 바란다. 우파적 메시지로 국힘 입당 간보기로 인한 보수층 동요를 메꾸고, 국힘 입당 간보기로 호남 및 중도 스킨십 강화를 시도하는 건데, 제3후보가 앞으로 쭉쭉 갈 때는 이게 효과가 있을 수도 있지만 수축 국면에선 양쪽에서 찌그러진다. 윤석열 지지층 특성상 한 번 망하기 시작하면 우르르 무너질 수 있다.
다시 홍준표로 돌아와보자. 홍준표는 정부 수립 이전 미군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 미군에 대한 태도를 구분해서 ‘북이나 주사파 운동권’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게 정확한 시각이다. 왜냐.
1965년 이전까지 친일 청산이 잘 안 됐다는 얘기는 일반적인 반기득권적 논리에 가까웠다. 일제나 친일파나 이승만 독재나 기득권이고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는 점에서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이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장준하의 사상계이다. 당시 사상계가 일본에 대한 태도를 다루는 논리는 단지 민족주의가 아니라 근대화의 맥락이었다. 반일은 전근대와 결별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로 가는 경로였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반민특위도 반민특위지만 독재를 했기 때문에 반일의 대상으로 묶인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민족주의 담론은 1960년대 들어 확산되었다. 이게 좀 당연한 게, 1945년에 해방, 그리고 나서 전쟁, 전후 복구…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민족주의가 당대에 맞게 재규정 될 틈이 없었다. 4.19 이후의 혼란은 민족주의 담론 개화의 또다른 계기였다.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그게 뭐냐? 4.19 이후 혼란이 서구식 민주주의 즉 비-민족적 제도의 무분별한 수용의 결과였다는 거다. 경쟁자 윤보선이 꺼낸 건 남로당 이력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거다. 이때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란 개념을 넣고 서로에 대한 반대를 조직화 하는 맥락이 이렇게 혼란스러웠었다.
사상계 그룹은 4.19를 서구식 민주주의의 도입이라는 점에서 근대화의 완성을 기대했지만 곧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다. 지식인으로서 전근대적 민중을 이끌기 위하여 부흥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새로운 주장이었다. 장준하를 비롯한 사상계 그룹 일부가 장면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직접 뛰어들었으면서도 5.16을 긍정한 계기가 여기에 있다.
1964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추진하면서 담론은 재정렬되었다. 이 선택으로 장준하 등이 전제했던 ‘근대화=반일’이라는 공식이 깨졌기 때문이다. 1965년 이후 사상계는 일제의 사실상의 재침략을 우려했고 이를 가능케 한 미국에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친일(극일)-반공산주의로 명확히 하면서 장준하는 반공주의를 버리고 반일-민족주의로 완전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72년의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이 맥락은 북한의 인식이나 NLPDR적 규정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시각으로 보면 반미는 해방 이후 정국에 그치는 게 아니다. 지금 한미동맹이 필요한가, 지금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하는가, 이게 기준이다. 이재명의 발언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걸 북한이나 주사파의 인식과 동렬에 놓는 것은 오류이다.
이걸 보수세력이 모르냐? 안다. 홍준표가 바로 그 얘길 하고 있는 거다. 이 문제에 있어선 나름 주도면밀한 조선일보가 어제 이재명 발언 관련 문제제기성 보도를 하면서 사드 발언을 굳이 덧붙여 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