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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민주주의

최근 이슈 (청년 극우, 멸칭, 비례대표)에 대한 생각

2026년 9월 20일 by 이상한 모자

1.

최근 미국 교수님의 논문이 일부에서 화제였는데 누가 기사로도 썼으니 이제 코멘트 해본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1919220930901

이른바 젊은 남성의 극우화를 다룬 것인데 지난 번에 시사인에 했던 얘기를 논문으로 쓴 걸로 알고 있다. 대부분은 익숙한 얘기인데, 젊은 남성 극우화의 강력한 반론이라고들 내세우는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부분이 흥미롭다. 다음의 대목.

정작 자신을 극우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낮았다. 조사에서 “나는 극우파다”라는 진술에 동의한 청년 남성은 10%에 불과했다. 청년 남성보다 극우 비율이 낮은 노년 남성(10.6%) 및 장년 여성(10.5%)와 비슷한 수치다. 연구진은 이에 대해 “청년 남성들이 극우적 성향을 극단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으로 간주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후속 탐구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짚었다.

청년 남성의 극우 성향 가운데 유독 ‘약자 멸시’ 태도가 돋보였다. 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의무고용제 등 약자 정책에서 여성이나 다른 세대보다 반대 비율이 높았다. 폭력 사용도 청년 남성들은 가장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다른 세대보다 크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청년 남성을 기준으로 반민주주의 성향을 측정했을 때, 대부분은 청년 남성보다 반민주주의 성향이 높았으며 청년 여성만 유의미하게 반민주주의에 더욱 큰 반감을 보였다.

즉, 이런 거다. 1) 청년 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일반적으로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크다. 2) 젊은 남성은 보수적 태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지어 폭력 사용에도 너그럽지만,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반감이 크다.

민주주의에 대한 민감성은 세대 효과다. 그런데 젊은 남성은 그 안에서 극우화 되고 있다. 극우화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한다. 그런데 젊은 남성은 여전히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들의 극우화를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는 인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인식 속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저쪽이 싫은 책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이다.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독재는 누가 하냐면 중국과 북한이 하며 이를 문재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진보, 페미니즘은 이를 옹호한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반대해야 할 개념의 사슬… 따라서 진보-민주 세력(이들은 이를 한덩어리로 인식한다)과 싸우는 것이 곧 민주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 폭력도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극우 세력의 전략이다. 다른 나라의 극우 세력도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로 자칭한다. 가령 제가 지난 번에 한겨레21에 작성한 글.

이전까지 사람들이 극우정치 지지를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근본주의자가 돼야 하기 때문인데, 포퓰리즘이 극우정치와 결합한 이후에는 극우를 지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극우정치가 포퓰리즘적으로 구성하는 기득권에 반대나 항의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극우주의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조사해보면 AfD를 지지하는 유권자 상당수는 AfD가 극우라기보다는 중도적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극우정치가 기득권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극우정치는 앞서 본 것처럼 특정한 계층이나 민족을 호출하고 결과적으로는 가진 자의 이익을 보장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극우정치는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민주’는 극우정치의 약점이다. 그런데 극우정치는 포퓰리즘적 어법으로 이 약점을 극복한다. 자신들이 아니라 엘리트 주류 기득권이 반민주적 독재를 일삼고, 자신들은 이에 저항하므로 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대중친화적 성격이 민주주의와 서사적으로 통한다는 점을 활용하는 셈이다.

AfD의 구체적 주장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들은 방화벽 자체를 반민주적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극우적 주장도 민주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정당한 의견이므로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막는 것은 부패한 기득권의 횡포이자 독재라는 것이다. 이들은 코로나19 방역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 정책에 대해서도 독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부가 주도하는 방역 정책을 아돌프 히틀러가 합법적 절차를 가장해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추진한 수권법에 비유했다. 오히려 이들이 평소 보여주는 정치관이야말로 나치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는 황당한 주장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구도를 수용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9899.html

그런 점에서 한국의 극우정치는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극우포퓰리즘)의 범주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윤석열의 당선도 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다.

2.

오늘도 유시민 뉴스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한심하다. 결국 ‘문조털래유’라는 말을 어떤 녀석들이 써서 지지층이 분열됐고 이재명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진짜 한심한 세계관이다.

첫째, ‘문조털래유’라는 말이 멸칭인가? 나는 이 말을 인용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노선의 문제를 세력과 사람의 문제로 바꾸면 본질이 흐려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칭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가령 ‘국민의짐’은 멸칭이다. 국민에게 짐이 되는 정치를 하는 세력에 불과하다는 가치판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조털래유’는 사람의 성, 이름, 특징을 열거한 말일 뿐이다. 이게 왜 멸칭인가??

이게 설명이 안되니 조국은 ‘조를 좆으로 바꾼 사례’를 굳이 찾아서 이게 멸칭의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 뭔 논리야 놀자 같은 얘긴가. ‘문좆털래유’는 멸칭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문좆털래유’는 ‘문조털래유’가 먼저 나온 상황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문조털래유’가 없는데 어떻게 ‘문좆털래유’가 나오냐? 근데 조국은 ‘문좆털래유’가 원본이라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여기에 지난 지방선거와 전당대회 구도에 편승해 이 모든 얘기를 하나의 음모론적 서사로 끼워 맞추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모든 얘기의 시작이 ‘문조털래유’로부터 나온 것처럼 되고, 이걸 심지어 대통령의 대국민 기자회견에서까지 말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래 놓고 조국, 유시민 등은 자기들이 뭐라도 쟁취한 거 마냥 의기양양해 있으니 황당하다. 특히 조국은 ‘친명 평론가와 유튜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이들의 세계관이 유튜브 댓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게 문재인의 음모이며 친문의 복귀 시나리오라는 식의 해석에 동의 안 한다. 물론 그런 그림을 그리는 자도 있고 꿈꾸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늘 그랬듯 노선 갈등의 영역이 있고, 그에 기반해서 지방선거나 전당대회에 나가거나 여기에 이익이 달린 사람들이 어느 지지층의 말에 편승할 것이냐를 판단한 문제일 뿐이다. 한겨레가 여론조사기관과 함께 분석한 ‘뉴이재명’ 지지층을 언급했더니 “뭐!? 너희들이 뉴라고? 우린 올드란 말이냐!” 이 염병 떠는 바로 그 지지층 말이다. ‘뉴’는 좋은 거고 ‘올드’는 나쁜 거라는 식의 이런 수준 낮은 얘기를 막 하는데, 한겨레가 애초에 이 분석을 왜 어떻게 했는지는 온데간데 없다. 이들에게 그들이 억울해 하는 일에 다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고, 이들의 반발을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유시민 등인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의 배경에는 각자의 상황 인식이 있지만. 가령 김어준은 유튜브 수익 시스템의 유지, 조국은 자신이 이끄는 세력의 포지셔닝에 대한 정당화, 유시민은 망상과 확증편향에 의거한 음모론적 사고의 확대… 등등.

결국 지지층의 상태가 이런 거고, 나아가서는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대중의 상태의 문제이다. 요즘은 어디나 그렇다. 무슨 세력의 지지층이 좀 더 상태가 낫고 이런 건 없다. 그냥 정치의 일반 문법이 이렇게 되었다.

3.

용혜인 문제, 위성정당 방지법만으론 부족하다는 취지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9930.html

이 얘기를 하는데 최광은, 김찬휘 두 분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좋은 얘기다. 특히 핵심은 아래 대목이다.

이 때문에 이날 강연자와 토론회 발표자들은 ‘개방명부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요한 선거제도 개혁안으로 꼽았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2년 12월 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이 제도를 택했는데, 이는 전국 17개 광역시도를 권역으로 설정하고 각 권역에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 선거제도다. 여기에 정당 지도부가 비례 순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현행 ‘폐쇄명부형’이 아니라 유권자가 지지 정당에 투표하면서 동시에 해당 정당 안에서 지지하는 특정 후보에게 표를 던져 당선자까지 최종 결정할 수 있는 ‘개방명부형’이 전제로 붙었다. 비례대표는 ‘내가 직접 뽑은 의원이 아니다’라는 편견을 애초부터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인 셈이다.

박주민 의원안은 현행 지역대표 의석 253석을 이 방식으로 선출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현행 비례대표 의석 47석은 각 정당이 권역별 선거에서 얻은 의석 비율과 전국 득표율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을 때, 다시 한번 비례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의석 비율을 조정하기 위해 각 당에 추가로 배분하는 ‘조정의석’으로 활용한다.

사실 중간에 나오듯, 이 얘기가 나온 것도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 이 대목을 강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용혜인 문제를 비례 겸직 문제로 놓고 온갖 얘기를 한 이 개판을 보고서 든 생각이다. 겸직 논란은, 기본적으로 비례대표 의원의 역할과 위상 문제다. 양당은 비례대표 의원의 역할과 위상을 지속적으로 축소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 속에 비례대표 의원은 인심 좋게 각 분야에 나눠주는 개념이다. 그러니 언제든 그만두라면 그만둬도 되는 것이다.

용혜인의 경우 위성정당으로 비례 2번에 장관까지 하려니 욕심쟁이 아니냐는 게 대중적 반발의 핵심이었다. 프리라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 정치인의 입장에서 이를 돌파하기 위한 비례대표직 사퇴는 가능하다고 나는 봤고,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양당이 주장하는 ‘장관을 하면 비례는 사퇴하는 게 관례’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고 봤다. 무슨 설명을 갖다 붙이든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격이 다른 존재로 사고하며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건 보궐선거 여부나 후순위 승계 등 편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저 관례는 ‘비례대표 의원은 지역구 의원보다 격이 낮다’는 인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양당의 처지에서야 그 인식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정당(기본소득당의 경우가 아니다)의 경우도 그런가? 그 비례대표 한 석을 얻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했는가?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 시각에서 보면 지역구 의원은 겸직이 당연하다면서 비례는 사퇴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는 장기적으로 소수정당에 독이다. 이번에야 위성정당-욕심쟁이 상태의 용혜인이 하필이면 장관직에 지명돼서 이렇게 됐으나, 나중에 민주당이 독자적인 소수정당에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대신 비례 의원은 사퇴하라고 할 때, 아무리 후순위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들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나?

물론 나는 ‘민주당이 독자적인 소수정당에 장관직을 제안’한다는 이런 정치 자체가 독자적 소수정당에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비례의원직이 더 필요하면 장관 제안은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략/전술의 문제이고,그 때 정치적으로 어떤 상황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건 그때 가봐야 안다. 또, 민주당이 소수정당에 장관을 제안하는 것을 ‘나쁜 정치’라고 비난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관례니까 사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강도와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룰의 문제이다. 룰이라는 것은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관례니까 사퇴, 이딴 얘기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무슨 용혜인 욕하기 경쟁처럼 되고, 용혜인 욕하는 데에 각자가 가진 모든 원한을 실어 떠들어 대는 통에, 나는 아주 질려버렸다. 용혜인이 장관을 하는 데에서 문제로 볼 수 있는 건 2가지다. 1) 이 정권이 성평등가족부 장관직을 가볍게 본 문제, 2) 용혜인 본인이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의 문제. (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주로 방송 등에서 지적했다.) 인사검증이니 뭐니가 다 이 두 쟁점 안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얼마든지 부적격성을 논할 수 있다.

욕하기 경연대회를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논의할 때 쟁점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의원을 가볍게 여기는 원인이 명부를 정당 내부 의사결정에 맡기는 문제에 있다면, 개방명부로 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비례는 장관 겸직 안 된다를 룰로 추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가는 것이 그나마 이 황당한 논의를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포퓰리즘, 극우화, 민주주의, 비례대표, 선거제도 개혁, 성평등가족부, 용혜인, 유시민, 조국

극우-포퓰리즘 이라니깐

2025년 10월 5일 by 이상한 모자

글을 죽 읽으면서 답답한 얘기를 많이 본다. 극우와 극우가 아닌 것을 구분한 후 ‘진정한 극우’를 격리해 안도감을 가지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극우-포퓰리즘은 그런 게 아니라 극우가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방법론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에 가깝다. 분류가 아니라 매커니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비슷하다. 백신과 치료제가 있을 때에는 어떤 바이러스든 다들 안심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바이러스는 격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등장하고 오미크론 등의 변이를 거쳤을 때, 만일 바이러스들에게 자의식이 있었다면 모두 무릎을 쳤을 것이다. 인간의 경계심을 적절한 수준에서 유지하면서 전파력은 극대화 할 수 있는, 그러면서 끝없는 변이를 통해 백신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극우가 포퓰리즘과의 결합을 통해 당당하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면서 보수정치는 굳이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상적인(?) 보수정치와 극우-포퓰리즘 간의 경계는 이제 희미해졌다. 한동훈과 장동혁을 비교해보라. ‘극우는 상대하지 않는다’는 전략은 적나라한 혐오적 내용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실제 상층 정치의 동학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효하지 않다. 직시하고 분석하고 전면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모든 것은 유행이므로, 극우-포퓰리즘의 시대도 이렇게 버티다 보면 지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장은 무엇인가? 극우-포퓰리즘의 동력은 곧 포퓰리즘의 구도, ‘엘리트 대 다수 대중’이라는 구도에서 ‘다수 대중’의 지위를 극우정치가 자칭하면서 생겨났다. 많은 사람들이 극우-포퓰리즘 비판을 하면 ‘그래서 대안은 엘리트주의라는 거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맨날 그러니까 내가 사람들이 남의 말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내가 글에다가 이렇게 쓴 거 아닌가?

물론 이재명 정권이 여론조사상 높은 지지를 얻으며 주류로서 통치 논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찾는 시각도 있을 것이다. 검찰개혁에 대한 대통령실과 여당 사이의 긴장은 이 점을 드러낸다. 문제는 이 구도가 ‘엘리트주의 대 포퓰리즘’의 대결을 답습한다는 데 있다. 이 구도에서 통치를 책임지는 세력은 결국 ‘부패한 기득권’의 혐의를 뒤집어씀으로써 장기적으로 극우 포퓰리즘의 먹잇감이 돼왔기 때문이다.

사실 포퓰리즘이 상정하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관철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게 바람직한 결말로 가는 유일한 경우는 앞서 상정한 노골적 권위주의에 기대는 외설적 ‘국가 주권’의 실현이 아니라 지금과 완전히 다른 대안 체제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 즉 ‘시민/인민 주권’(장석준) 구현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선택지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시민/인민 주권’의 자리를 메꾸는 것은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논란 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코스피 5000 시대를 갈구하는 조직된 소비자-투자자 정신이다. 진정한 위기는 여기에 잠복해 있는 게 아닐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7991.html

여기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정치 개혁이 민주적 주체의 형성 또는 변화와 결코 무관치 않다는 사실이다. 즉, 오늘날 정치를 바꾸고 싶다면 참여와 책임에 기반하는 민주주의를 더 심화하고 실질화해야 한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면 우리 정치의 갈등선은 ‘통치-엘리트 대 무책임한 포퓰리즘 대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삼각구도 사이에 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통치-엘리트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의 대립 구도만 눈에 보인다. 오히려 그 사실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8069.html

위의 글은 9월 11일에, 아래의 글은 9월 25일에 인터넷 상에 나간 것으로 되어 있다. 앞의 글에 나오는 ‘장석준’ 대목은 아래 글의 대목을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모두 그 근거를 ‘주권’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다만 ‘주권’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국민결집은 미국 트럼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국가’ 주권을 외치며, ‘순수한 프랑스인’의 의지를 온전히 대변하는 강한 국가가 개입하기만 하면 기성 정치세력들이 만들어놓은 난장판이 해결될 것이라 장담한다. 반면 급진좌파 장뤼크 멜랑숑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한 신인민전선은 ‘시민/인민’ 주권을 주창하며, 민주주의에 충실한 정부가 부자 증세 등을 과감히 추진한다면 긴축과는 다른 방향에서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여기에서 ‘주권’이란 결국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구축된 낡고 단단한 ‘경제’의 세계에 대한 극적인 개입을 뜻한다. 극우파는 트럼프 정부가 이미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 개입을 실현하려 하고, 좌파는 신인민전선을 지지하는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등이 ‘민주적 사회주의’라 칭한 또 다른 방향에서 개입이 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당장 총선이 다시 실시될 경우, 세 흐름 중 어느 쪽이 앞서 나갈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프랑스 정치의 주된 대립 선이 이미 마크롱 블록과 나머지 사이에서 신인민전선과 국민결집 사이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앞으로 직면할 선택지이기도 하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16817.html

장선생님은 최근에도 비슷한 얘기를 썼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에라도 눈여겨봐야 할 점이 있다. 뉴욕 시장 선거든 칠레 총선이든 모두, 이제껏 주류 리버럴이 이끌어 오던 반극우 연합의 성격이 달라질 조짐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버럴 대신 탈신자유주의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좌파가 반극우 정치의 새로운 구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21819.html

그런데 이런 얘기하면 자칭 좌파라는 사람들도 이게 특정한 구도를 말하는 거라는 점은 보지 않고 ‘그냥 또 정신승리 한다’는 수준으로 자조하고 마는 게 요즘 분위기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사실은 다들 어쩔줄 몰라 하면서, 누가 누구한테 무슨 욕을 하나만 열심히 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지. NL욕 하나 안 하나 뭐 그런 거…

뭐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무슨 얘기 하고 사는지 모른다. 나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그래도 여기다가 징징거렸더니 오늘 안부를 전해온 분 혹은 분들이 있었는데 대단히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극우정치, 극우포퓰리즘, 민주주의

개헌무새들아!

2025년 2월 12일 by 이상한 모자

죄송합니다. 제목은 개헌무새들아 라고 썼지만, 개헌 해야지요. 개헌 해야합니다. 그냥 한 번 외쳐봤습니다. 그러나 난, 윤석열의 내란-양극화 정치 또는 제왕적 대통령-개헌 이 논리로 가는 게 솔직히 답답하다. 이관후 씨 얘기를 한 번 들어보자.

– 정치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정치구조를 정치제도로 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통령제가 좋냐, 의원내각제가 좋냐, 소선거구제가 좋냐, 비례대표제가 좋냐, 여기에는 정답이 없어요. 장단점이 있는 거죠. 어느 제도를 택하기로 정하면 부작용은 감수하고 가는 거죠. 제도를 바꾸면 금방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인은 바뀔 생각이 없는 사람, 핑곗거리를 찾는 사람이라고 봐요. 그렇다고 특정한 사람·집단에게만 책임을 물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비슷한 집단이 또 생겨날 거예요.”

–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치구조에서 제도보다 중요한 게 문화와 행태예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의 저자들도 그렇게 지적을 하고 있잖아요. 새로운 정치 문화와 행태를 보여주는 리더가 나타나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 빠르게 바뀔 거라고 봐요. 그 위에서 제도도 고치고요.”

(…)

– 개헌론은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은 개헌을 해야 할 때다,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개헌을 너무 신성시하는 거라고 봅니다. 개헌은 항상 할 수 있는 얘기예요. 그렇게 논의하다 어느 순간 합의되면 자연스럽게 하는 거죠. 개헌이 만능키도 아니에요. 가령 저에게 ‘분권형 대통령제에서 다수당 체제가 되면 좋냐’고 물어보면 ‘아주 좋을 수도 있고, 아주 나쁠 수도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대통령이 권력을 독점하지 말고 여야 합의로 국무총리를 선출하고 연립정부를 상시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국민 뜻이라고 쳐요. 그걸 인정하고 합의하고 조정하는 정치문화가 있으면 잘되겠죠. 반대로 대통령은 통치할 권력이 없고, 국회는 완전한 합의가 없어 각각 기능을 못할 수도 있어요. 그 틈새에 끼어들어 캐스팅보트를 쥐고 ‘대통령도 무능하고 입법부도 무능하다’고 선동해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어요. 히틀러예요.”

https://www.khan.co.kr/article/202502120600035

비슷한 얘긴데… 단적으로, 아베 신조와 보리스 존슨도 내각제의 산물 아닌가? 연동형비례대표제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그… 그건… 거대양당이 제도를 해킹해서…!! 네 네 일단 알겟구여 저도 선거제도 개혁론자임) 특히 권력구조 개편은 선택의 문제이지 뭐가 뭐보다 낫다 이런 개념은 아닌 거 같다. 논리 구조로 봐도, 윤석열이 제도를 활용해서 내란으로 간 거면 그건 제도를 고치자고 하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상황은, 윤석열이 제도 바깥으로 나가 체제를 공격한 것이고, 체제(제도보다 넓은 개념일 것이다)가 작동해 이 공격을 막아낸 것에 가깝다. 그러면 제도를 왜 고치나?(물론 계엄 발동 요건을 강화해야 한다든가 그런 거는 있는데, 지금 얘기는 그런 차원은 아니니까) 특히 지금 개헌 논리 중에 양극화 된 정치 얘기하면서 개헌으로 가는 논리는 일견 위험하다. 불법적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일부 뒷받침 할 수 있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냐? 제 말씀은, 여러 군데서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다. 이관후 씨가 정치 문화와 행태가 중요하다 이 얘기를 하는데, 그럼 행태와 문화는 어떻게 바뀌나? 그 행태와 문화도 제도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냥 제도가 아니라, 정확히는 체제의 산물인 것이지. 그래서 우리가 87년 체제라고 하는 것 아닌가?

87년 헌법이 체제로서 기능하며 강력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그것이 직선제를 관철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고 직선제를 관철했다는 그 사실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정치 문화와 행태를 규정하는 거다. 그래서 오늘날의 정치 문화와 행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단순하게 말해 지금의 87년 체제가 한계라는 거고, 87년식 직선제가 한계라는 얘기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누가 얘기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개헌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의미가 있으려면 직선제 이후의 직선제 같은 스케일의 얘기 정도가 있어야 되는 거지, 쪼잔하게 분권형이니 내각제니… 이런 것은 근본적 해법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또 뭐라고 할텐데, 그렇다고 개헌 얘기 하시는 분들이 쪼잔하다 이런 게 아니고, 또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대안을 찾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그러면 오늘의 이 한 걸음이, 어떤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인가, 최종적 지향이 무엇이다 라는 것 정도에 있어서 대중적 합의를 시도할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 기껏 개헌 해가지고 와~~ 이제 목표 달성 이제 다시는 윤석열 같은 놈 안 나오겠지 했는데 그 개헌의 결과로 제2의 윤석열이 나오는 거, 이런 거 클리셰잖어? 그러면 사람들이 아~ 개헌하자던 놈들한테 속았구나… 이렇게 되는 거 이것도 익숙한 구도잖습니까. 연동형비례대표제 얘기 다시 할까? 근데 다들 SNS만 해갖고 대중적 합의는 커녕 여러분들끼리 합의도 안 되잖아. 그니까 제가 그냥 이러는 거죠.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87년 체제, 개헌, 민주주의, 이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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