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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언제나 시기상조

정치 사회 현안

판단중지의 세상

2020년 8월 31일 by 이상한 모자

비운의 졸저 냉소사회에 보면 ‘판단중지’의 현대적 버전을 묘사한 부분이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일의 실체, 즉 진리를 따지려 노력하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판단이 중지된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노력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치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판단이 중지된 문제를 서로 유리한 대로 서사화 하는 게 더 일반적이다. 이 ‘서사’는 사적이익의 추구라는 보편적 의구심(사유재산의 보편화가 이 의구심을 더 위력적으로 만들었다)에 크게 기댄다. 그리고 전에도 썼지만 이게 ‘찬성’을 조직하는 게 아니라 ‘반대’를 조직하는, 근대 민주주의의 주요 문법이 돼왔다.

백서와 흑서의 논리는 대표적 사례가 될 것 같다. 백서는 조국 임명에 대한 반대를 검찰 입장에 대한 찬성과 개혁에 대한 반대로, 즉 ‘우리 편 아님’으로 규정한다. 흑서는 이 정권이 추진하는 모든 개혁을 선거나 정치자금 기타 정치적 이득 등의 ‘사익추구’로 규정한다. 즉 백서와 흑서는 서로를 ‘배신자’와 ‘사기꾼’으로 규정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게 기본이고, 이걸 ‘찬성’을 조직하는 얘기로 포장하려니 개혁가는 동서고금 원래 이중적 존재라는둥 사익추구를 위한 선전선동이 아닌 팩트와 논리라는 둥 서사를 동원하게 되는 거다. 이게 조장관님이 조광조가 되고 후니월드가 시대의 양심이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이다.

이런 면에서 ‘배신자’와 ‘사기꾼’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를테면 ‘사기꾼’은 개혁에 동의하는 촛불시민에 대한 ‘배신자’이다. ‘배신자’는 금전이나 관심, 또 다른 정치적 이득을 추구하는 ‘사기꾼’이다. 양쪽의 부족원들은 서로 의도가 불순하다는 걸 증명하려 할 뿐 여기에 도움이 되는 걸 제외하면 문제 그 자체에는 사실 무관심하다. 서로가 진정성을 거론하고 있음에도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진리에 대한 냉소를 증명한다.

애초에 왜 ‘반대’로 조직하는가? 그게 효율적인 동시에 유일하게 믿을만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사기꾼’과 ‘배신자’가 아님을, 즉 ‘우리 편’임을 증명하는 일은 그저 신의성실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고 “나는 사기꾼 또는 배신자가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는 절차로만 된다. 주장은 믿을 수 없으니, 행동으로 증명하라! 짜르라! 집에 가야지!

그래서 나는, 그런 거는 웬만한 게 아니면 안 하기로 했다 이 말이다. 뭐에 반대하는 사람 모두 모이시오 이런 거.

얘기하다 보니까 갑자기… 우리가 옛날에 민주대연합을 왜 반대했습니까? 그건 좌익소아병(childish disorder! 유치한 혼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뭔가 ‘찬성’을 근거로 조직하는 신의성실을 앞세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거연대를 반대한 게 아니라, 선거연대에 이를 수 있는 여러가지 합의나 절차를 요구한 것이다. 물론 그 합의 내용과 절차에 대해 합의를 못해 끝없는 주장을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전공의협의회 비대위가 이렇게 된 것도 리더십에만 국한해 보면 그런 아마추어리즘 때문이라고 본다. 안건 심의 방식이 그게 뭡니까… 회의의 프로들인 운동권들이 컨설팅을 해줬어야?

일하러 가기 싫고 별 생각 다 했는데… 그만 하고 일하자.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냉소주의

백서와 흑서들이 사는 세상

2020년 8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얼마 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백서 흑서 얘기를 했다. 백서에 대해선 그랬다. 조국 씨가 억울한 게 있을 수 있고 검찰과 언론의 만행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가가 실제로 한 일들만 따진다 하더라도, 그걸 기득권이면 모두 하는 일로 일반화하고 정당화 하는 게 옳은가? 우리 사회의 기준은 그 정도면 되는 것인가? 흑서에 대해선 그랬다. 분명 새겨들을 말이 있다. 특히 이 정권 지지자들 사이에 ‘대안적 서사’가 만연해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주장은 그러한 ‘대안적 서사’에 또다른 서사로 대항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게 아닌가 의문이라고 했다. 물론 권력이 기획을 하다시피한 백서와 별볼일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어댄 얘기를 책으로 만들고 흑서랍시고 하는 걸 동렬에 놓고 비교할 일은 아니긴 하다.

아무튼, 그럼에도 세상 만사 다 똑같아서 지겹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횡행하는 논리… 조국이 미워서 윤석열을 지지하겠다든지, 윤석열이 미워서 조국을 지지하겠다든지… 정권에 속았다 이러면서 사뭇 비장하게… 이런 게 말이 되나? 조국 윤석열이 선거 나갔습니까? 지지하고 말고 하게? 걔네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고 억울한 건 억울하다고 하고, 그와 별개로 정권의 성격을 평가하고… 그러면 그만 아닌가?

이제는 뭐만 하면 박근혜랑 뭐 다르냐, 최순실이랑 똑같다 이러는데 물론 굳이 같은 점을 찾자면 찾을 수도 있다. 그걸 근거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도 그걸 성실히 하면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냥 인상 하나를 단편적으로 떼서 봐라 박근혜랑 최순실이랑 뭐가 다르냐, 이러는 건 그럼 뭐 다른가?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더 낫다’는 게 아니고,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이걸 앞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이해를 못해. 더블민주당에 실망했으니 난 이제 보수정치를 지지… 이게 상품논리라고 얘기를 해도… “문정권이 박정권보다는 낫다”는 단순비교로 받아들인다. 빼빼로에 실망했다고 새우깡을 사겠다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그게 아니고 원래부터 새우깡을 살 생각이었고 난 새우깡이 좋다… 그러면 새우깡을 사세요 누가 뭐라고 합니까?

왜 이런 세상이냐? 원래 이게 근대 민주주의의 문법이다. ‘지지한다’는 게 핵심이 아니고 ‘반대한다’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모양 이꼴로 사는 것이다. 이거 처음 하는 얘기 아니야. 작년에도 했지. 서초동 촛불 어쩌고 할때. 봐라.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의 직접 행동은 무언가에 대한 요구보다는 ‘반대’하는 차원에서 이뤄진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것은 ‘독재정권에 반대한다’는 명확한 반대논리가 있어야 가능해진다. 2017년 조기 대선을 가능케 한 촛불집회 역시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의한 통치를 반대하자는 것이었다. 이른바 ‘운동권’들은 습관적으로 자신들이 선호하는 의제를 말하며 “촛불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야말로 이러한 반대 논리의 실천적 결론이었다. 28일의 시위도 마찬가지다.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검찰의 과잉수사와 이를 주도하는 인물로 비춰지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전횡에 반대한다는 것이고, 이의 실천적 결론이 ‘조국 수호’인 것이다.

(생략)

이 결과 남는 것은 오로지 이해득실과 손익계산이 정치의 본질이 되는 냉소적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어떤 가치판단이나 대의명분이 설 자리가 없다. 다들 어떤 당위를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제 가치와 명분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 세계관에서 앞서의 ‘열광’은 ‘각자도생’과 동전의 양면을 구성한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546

글을 하나만 쓴 게 아니예요. 지겨워.

대중이 직접 거리로 나오는 ‘투쟁’은 대개 비주류 의식의 발현이다. 기성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기득권에 대항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다. ‘서초동’과 ‘광화문’은 서로를 가리켜 기득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신의 기득권적 속성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따라서 이것은 텅 비어있는 대중투쟁이며 양쪽의 대립은 기만적 포퓰리즘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다. ‘서초동’과 ‘광화문’의 배후가 되고 있는 정치세력들은 각자 이런 상황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며 정치적 이득을 재생산하기 위한 정치에 골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실종된 것은 ‘대의정치’가 아니라 기만적 대립구도에 파열을 낼 ‘대안적 정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대안적 정치’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것 중 하나는 ‘서초동’이냐 ‘광화문’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대중투쟁의 ‘스펙터클’이다. 200만이니 300만이니 하는 데에만 몰두해서는 이 함정을 빠져나갈 수 없다. 그런데 언론과 기성 정치는 빠져 나가긴커녕 오히려 스스로 함정 속으로 몸을 던지는 상황을 계속해서 연출하고 있다. 이런 자해적 몸짓이 아니라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기이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3224

이런 똑같은 관계가 백서와 흑서 사이에도 성립한다고 본다. 이제 또 그러겠지… 무슨 얘긴지 다 아는데 난 더 이상 이 정권을 지지할 수 없다… 난 처음부터 지지 안 했으니까 그건 맘대로 하시라고요!!! 제발!!!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조국

여당 전당대회 결과에 할 말은 없고

2020년 8월 30일 by 이상한 모자

윤석열 전광훈 아베신조 죽일 놈 그런 얘기만 하면 만사오케이라는… 예상했던 내용, 예상했던 결과, 예상했던 뭐 그대로니까 할 말도 없고. 엊그제 심야 라디오 방송에선 당청관계의 변화 필요성을 말하면서 화형식 하고 들이 받으라는 게 아니고 이제 청와대는 뒤로 물러서고 당이 앞에 나서서 자기 목소리를 내야 정권재창출 로드맵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여기서 ‘자기 목소리’란, 그걸 내면 내용이 좋을 거다 이런 게 아니라 걍 공학적인 얘기다.

일전에 잡지에 썼던 글이나 다시 올려본다.

이 정권은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고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피플파워’란 말을 쓴 일도 있다. 정권 초기엔 제법 기분이라도 냈는데,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논란 이후 개혁은 없어졌다. 그나마 밀어붙인 선거제도 개혁은 안 하느니만 못한 일이 됐고 ‘검찰개혁’은 윤석열 검찰총장 거취만 관심사다.

이 상황이 고약한 건 개혁은 핑계였고 결국 유불리가 본질이란 인식의 근거가 될 수 있어서다. 휴지 조각이 된 선거법 개정도, 천하의 역적(?)이 된 ‘우리 윤 총장’도, 유리할 때는 삼키고 불리할 때는 뱉는 감탄고토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재보선 원인 제공 정당은 후보를 내지 않는다는 당헌은 그냥 없는 걸로 치는 분위기가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니 최근 여당의 행보는 최소한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원내대표가 행정수도 이전 같은 엄청난 일을 부동산 대책 말하듯 했는데, 정말 추진할 의지가 있어서 꺼낸 얘긴지 아니면 다른 부수적 효과를 노린 것인지 헷갈린다. 의지가 있다면 지방 소외가 가난한 사람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현실으로 이어지는 문제를 행정수도 이전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제시해야 한다. 정치판에 진심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박원순 전 시장에 대한 애도와 기자에게 폭언을 하는 이해찬 대표의 목소리엔 분명 진심이 있었다.

잘해보려다 안 된 것과 애초부터 할 마음이 없었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개혁이란 명분이 결국 특정 정파의 이익을 보장하는 핑계에 불과했다는 게 사실이 되면 국민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각자도생만 남는다. 이렇게 ‘피플파워’를 냉소하게 되는 와중에 치르는 전당대회의 가장 큰 의제가 또다시 대권을 둘러싼 ‘차기’들의 득실 문제라면 우리 정치가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http://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8991.html

 

Posted in: 잡감, 정치 사회 현안 Tagged: 이낙연,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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