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 미국 교수님의 논문이 일부에서 화제였는데 누가 기사로도 썼으니 이제 코멘트 해본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6091919220930901
이른바 젊은 남성의 극우화를 다룬 것인데 지난 번에 시사인에 했던 얘기를 논문으로 쓴 걸로 알고 있다. 대부분은 익숙한 얘기인데, 젊은 남성 극우화의 강력한 반론이라고들 내세우는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 부분이 흥미롭다. 다음의 대목.
정작 자신을 극우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낮았다. 조사에서 “나는 극우파다”라는 진술에 동의한 청년 남성은 10%에 불과했다. 청년 남성보다 극우 비율이 낮은 노년 남성(10.6%) 및 장년 여성(10.5%)와 비슷한 수치다. 연구진은 이에 대해 “청년 남성들이 극우적 성향을 극단적이라기보다는 보편적으로 간주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한 후속 탐구 필요성을 제기한다”고 짚었다.
청년 남성의 극우 성향 가운데 유독 ‘약자 멸시’ 태도가 돋보였다. 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의무고용제 등 약자 정책에서 여성이나 다른 세대보다 반대 비율이 높았다. 폭력 사용도 청년 남성들은 가장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반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다른 세대보다 크게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청년 남성을 기준으로 반민주주의 성향을 측정했을 때, 대부분은 청년 남성보다 반민주주의 성향이 높았으며 청년 여성만 유의미하게 반민주주의에 더욱 큰 반감을 보였다.
즉, 이런 거다. 1) 청년 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일반적으로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한 반감이 크다. 2) 젊은 남성은 보수적 태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지어 폭력 사용에도 너그럽지만,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해서는 반감이 크다.
민주주의에 대한 민감성은 세대 효과다. 그런데 젊은 남성은 그 안에서 극우화 되고 있다. 극우화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한다. 그런데 젊은 남성은 여전히 독재-전체주의-권위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들의 극우화를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는 인식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인식 속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저쪽이 싫은 책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이다.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적과 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독재는 누가 하냐면 중국과 북한이 하며 이를 문재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진보, 페미니즘은 이를 옹호한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반대해야 할 개념의 사슬… 따라서 진보-민주 세력(이들은 이를 한덩어리로 인식한다)과 싸우는 것이 곧 민주주의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과정에 폭력도 동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극우 세력의 전략이다. 다른 나라의 극우 세력도 자신들을 민주주의자로 자칭한다. 가령 제가 지난 번에 한겨레21에 작성한 글.
이전까지 사람들이 극우정치 지지를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것은 근본주의자가 돼야 하기 때문인데, 포퓰리즘이 극우정치와 결합한 이후에는 극우를 지지하기 위해 근본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어졌다. 극우정치가 포퓰리즘적으로 구성하는 기득권에 반대나 항의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히 극우주의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조사해보면 AfD를 지지하는 유권자 상당수는 AfD가 극우라기보다는 중도적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극우정치가 기득권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극우정치는 앞서 본 것처럼 특정한 계층이나 민족을 호출하고 결과적으로는 가진 자의 이익을 보장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극우정치는 민주주의와 상극이다. 대중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반민주’는 극우정치의 약점이다. 그런데 극우정치는 포퓰리즘적 어법으로 이 약점을 극복한다. 자신들이 아니라 엘리트 주류 기득권이 반민주적 독재를 일삼고, 자신들은 이에 저항하므로 민주주의자라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대중친화적 성격이 민주주의와 서사적으로 통한다는 점을 활용하는 셈이다.
AfD의 구체적 주장에서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들은 방화벽 자체를 반민주적 독재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극우적 주장도 민주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정당한 의견이므로 이를 어떤 방식으로든 막는 것은 부패한 기득권의 횡포이자 독재라는 것이다. 이들은 코로나19 방역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절약 정책에 대해서도 독재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정부가 주도하는 방역 정책을 아돌프 히틀러가 합법적 절차를 가장해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추진한 수권법에 비유했다. 오히려 이들이 평소 보여주는 정치관이야말로 나치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는 황당한 주장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 구도를 수용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9899.html
그런 점에서 한국의 극우정치는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극우포퓰리즘)의 범주에 들어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윤석열의 당선도 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다.
2.
오늘도 유시민 뉴스가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한심하다. 결국 ‘문조털래유’라는 말을 어떤 녀석들이 써서 지지층이 분열됐고 이재명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진짜 한심한 세계관이다.
첫째, ‘문조털래유’라는 말이 멸칭인가? 나는 이 말을 인용이 아니면 쓰지 않는다. 노선의 문제를 세력과 사람의 문제로 바꾸면 본질이 흐려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멸칭이냐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가령 ‘국민의짐’은 멸칭이다. 국민에게 짐이 되는 정치를 하는 세력에 불과하다는 가치판단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조털래유’는 사람의 성, 이름, 특징을 열거한 말일 뿐이다. 이게 왜 멸칭인가??
이게 설명이 안되니 조국은 ‘조를 좆으로 바꾼 사례’를 굳이 찾아서 이게 멸칭의 증거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 뭔 논리야 놀자 같은 얘긴가. ‘문좆털래유’는 멸칭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문좆털래유’는 ‘문조털래유’가 먼저 나온 상황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문조털래유’가 없는데 어떻게 ‘문좆털래유’가 나오냐? 근데 조국은 ‘문좆털래유’가 원본이라고 주장했다. 유시민은 여기에 지난 지방선거와 전당대회 구도에 편승해 이 모든 얘기를 하나의 음모론적 서사로 끼워 맞추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모든 얘기의 시작이 ‘문조털래유’로부터 나온 것처럼 되고, 이걸 심지어 대통령의 대국민 기자회견에서까지 말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래 놓고 조국, 유시민 등은 자기들이 뭐라도 쟁취한 거 마냥 의기양양해 있으니 황당하다. 특히 조국은 ‘친명 평론가와 유튜브’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이들의 세계관이 유튜브 댓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게 여기서 드러난다.
물론 나는 이 모든 게 문재인의 음모이며 친문의 복귀 시나리오라는 식의 해석에 동의 안 한다. 물론 그런 그림을 그리는 자도 있고 꿈꾸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늘 그랬듯 노선 갈등의 영역이 있고, 그에 기반해서 지방선거나 전당대회에 나가거나 여기에 이익이 달린 사람들이 어느 지지층의 말에 편승할 것이냐를 판단한 문제일 뿐이다. 한겨레가 여론조사기관과 함께 분석한 ‘뉴이재명’ 지지층을 언급했더니 “뭐!? 너희들이 뉴라고? 우린 올드란 말이냐!” 이 염병 떠는 바로 그 지지층 말이다. ‘뉴’는 좋은 거고 ‘올드’는 나쁜 거라는 식의 이런 수준 낮은 얘기를 막 하는데, 한겨레가 애초에 이 분석을 왜 어떻게 했는지는 온데간데 없다. 이들에게 그들이 억울해 하는 일에 다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고, 이들의 반발을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유시민 등인 것이다. 물론 그 판단의 배경에는 각자의 상황 인식이 있지만. 가령 김어준은 유튜브 수익 시스템의 유지, 조국은 자신이 이끄는 세력의 포지셔닝에 대한 정당화, 유시민은 망상과 확증편향에 의거한 음모론적 사고의 확대… 등등.
결국 지지층의 상태가 이런 거고, 나아가서는 한국 정치를 떠받치는 대중의 상태의 문제이다. 요즘은 어디나 그렇다. 무슨 세력의 지지층이 좀 더 상태가 낫고 이런 건 없다. 그냥 정치의 일반 문법이 이렇게 되었다.
3.
용혜인 문제, 위성정당 방지법만으론 부족하다는 취지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https://h21.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9930.html
이 얘기를 하는데 최광은, 김찬휘 두 분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좋은 얘기다. 특히 핵심은 아래 대목이다.
이 때문에 이날 강연자와 토론회 발표자들은 ‘개방명부형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주요한 선거제도 개혁안으로 꼽았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2년 12월 발의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이 제도를 택했는데, 이는 전국 17개 광역시도를 권역으로 설정하고 각 권역에 각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 선거제도다. 여기에 정당 지도부가 비례 순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현행 ‘폐쇄명부형’이 아니라 유권자가 지지 정당에 투표하면서 동시에 해당 정당 안에서 지지하는 특정 후보에게 표를 던져 당선자까지 최종 결정할 수 있는 ‘개방명부형’이 전제로 붙었다. 비례대표는 ‘내가 직접 뽑은 의원이 아니다’라는 편견을 애초부터 방지할 수 있는 대안인 셈이다.
박주민 의원안은 현행 지역대표 의석 253석을 이 방식으로 선출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현행 비례대표 의석 47석은 각 정당이 권역별 선거에서 얻은 의석 비율과 전국 득표율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을 때, 다시 한번 비례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의석 비율을 조정하기 위해 각 당에 추가로 배분하는 ‘조정의석’으로 활용한다.
사실 중간에 나오듯, 이 얘기가 나온 것도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욱 이 대목을 강조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용혜인 문제를 비례 겸직 문제로 놓고 온갖 얘기를 한 이 개판을 보고서 든 생각이다. 겸직 논란은, 기본적으로 비례대표 의원의 역할과 위상 문제다. 양당은 비례대표 의원의 역할과 위상을 지속적으로 축소하려 한다. 이들의 주장 속에 비례대표 의원은 인심 좋게 각 분야에 나눠주는 개념이다. 그러니 언제든 그만두라면 그만둬도 되는 것이다.
용혜인의 경우 위성정당으로 비례 2번에 장관까지 하려니 욕심쟁이 아니냐는 게 대중적 반발의 핵심이었다. 프리라이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 정치인의 입장에서 이를 돌파하기 위한 비례대표직 사퇴는 가능하다고 나는 봤고, 그렇게 주장했다. 그러나 양당이 주장하는 ‘장관을 하면 비례는 사퇴하는 게 관례’라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고 봤다. 무슨 설명을 갖다 붙이든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을 격이 다른 존재로 사고하며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건 보궐선거 여부나 후순위 승계 등 편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저 관례는 ‘비례대표 의원은 지역구 의원보다 격이 낮다’는 인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양당의 처지에서야 그 인식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소수정당(기본소득당의 경우가 아니다)의 경우도 그런가? 그 비례대표 한 석을 얻기 위해 얼마나 처절한 싸움을 했는가?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그 시각에서 보면 지역구 의원은 겸직이 당연하다면서 비례는 사퇴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는 장기적으로 소수정당에 독이다. 이번에야 위성정당-욕심쟁이 상태의 용혜인이 하필이면 장관직에 지명돼서 이렇게 됐으나, 나중에 민주당이 독자적인 소수정당에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대신 비례 의원은 사퇴하라고 할 때, 아무리 후순위가 준비되어 있다고 한들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나?
물론 나는 ‘민주당이 독자적인 소수정당에 장관직을 제안’한다는 이런 정치 자체가 독자적 소수정당에 도움이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비례의원직이 더 필요하면 장관 제안은 안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략/전술의 문제이고,그 때 정치적으로 어떤 상황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건 그때 가봐야 안다. 또, 민주당이 소수정당에 장관을 제안하는 것을 ‘나쁜 정치’라고 비난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관례니까 사퇴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강도와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룰의 문제이다. 룰이라는 것은 언제나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관례니까 사퇴, 이딴 얘기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무슨 용혜인 욕하기 경쟁처럼 되고, 용혜인 욕하는 데에 각자가 가진 모든 원한을 실어 떠들어 대는 통에, 나는 아주 질려버렸다. 용혜인이 장관을 하는 데에서 문제로 볼 수 있는 건 2가지다. 1) 이 정권이 성평등가족부 장관직을 가볍게 본 문제, 2) 용혜인 본인이 성평등가족부 장관으로서 적임자가 아니었던 것의 문제. (나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주로 방송 등에서 지적했다.) 인사검증이니 뭐니가 다 이 두 쟁점 안에 속한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얼마든지 부적격성을 논할 수 있다.
욕하기 경연대회를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논의할 때 쟁점 형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비례대표 의원을 가볍게 여기는 원인이 명부를 정당 내부 의사결정에 맡기는 문제에 있다면, 개방명부로 하는 것이 답이 될 수 있다. 비례는 장관 겸직 안 된다를 룰로 추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개혁을 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가는 것이 그나마 이 황당한 논의를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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