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한 또 반대

최근에는 어디서든 똑같은 얘기만 한 것 같다. 요 근래 세상의 중심은 바이러스였다. 미세먼지용 마스크가 많이 남아있지만 쓰지 않는다. 천마스크를 빨아 쓰거나 공영방송의 문간에서 얻은 1회용 마스크를 잠깐씩 쓴다. 어차피 사람 많은데 가지도 않고 누굴 만나지도 않고 방송국 들어갈 때나 잠깐 쓰고 그나마도 떠들어야 할 때는 벗는다. 정부의 방역 대책과 어떤 불평등과 또 어떤 차별과 무슨 혐오… 중국과 대구를 연결하며 떠오르는 색깔론과 지역주의의 현란한 변주… 하다하다 미셸 푸코까지 얘기했다. 대남병원과 생명정치. 뭐 갖다 붙이는 거 전문이지.

지난 2월 마지막 주 팟캐스트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란 사람 얘기를 했다. 이 사람은 뭔가를 반대하려고 한 거다. 동북부 금융자본과 공화당이 주장하는 금본위제에 반대해서 사실상의 은화자유주조론을 주장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이 때는 이게 진보였다(비유적으로 보자면 MMT의 19세기 버전일 것이다). 이 사람의 인생에 있어서 기독교가 가졌던 의미도 그런 거였다. 사회복음주의. 경제적 불평등을 바로잡자고 했고 여성참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모던의 세상이 된 1920년대의 제닝스 브라이언은 진화론을 거부하는 전근대적 인물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진보는 어찌하여 반동이 되었는가? 사실 진보가 변한 게 아니라 오히려 특정 시기의 주류를 반대한다는 일관된 태도를 견지 했을 뿐이다.

사이비 종교가 유지되는 매커니즘도 비슷하다고 본다. 인간은 심지어 그게 과학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종교나 뭐 그런 것들에 기대게 돼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나도 나를 잘 모르고, 미래는 불확실하고, 세상은 통제되지 않는다. 좀 뭐 그런 말로 하면 실재의 틈입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이념이든 종교든 뭐 하여간 그런 게 필요한 거다. 이런 대상을 향한 믿음은 민주주의와 근대가 힘을 갖게 해준 대중의 르쌍티망과 결합한다. 신천지인지 뭔지에 가담한 사람들도 애초의 생각은 그런 거였을 거다. 세상은 거짓이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기성의 종교는 거짓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거짓인 세상에 반대하는 것은 내가 ‘나’의 활동으로 할 수가 있다.

무언가에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들끼리의 차이에는 눈을 감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어디나 마찬가지여서 ‘내 것’이 된 조직 활동 속에도 내가 반대하고자 하는 그런 게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다른 게 있다면 여기서의 나는 바깥 세상에서와는 달리 기득권의 대열에 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무언가를 반대한다는 대의보다는, 여기서 높이 올라가기 위한 나의 이득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신천지든 운동권이든 진보정당이든 뭐든 ‘거짓-세상’에서들 하는 온갖 파벌 싸움과 끼리끼리의 정치질이 똑같이 일어난다.

최근 어느 분들과 공영방송에 대해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엠은 그렇다 치고 거기는 왜 그러냐 했는데, 사실 잘못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원로들의 입장 또한 완고하다는 식의 얘기를 들었던 거 같다. 조장관님과 정교수가 뭘 그리 잘못했나! 다들 재산이 56억씩은 기본 있으신가? 아니지… 적폐와 한 몸인 검찰을 반대하시는 거지… 어느 기자님과 대화를 할 일도 있었는데, 어찌 기자가 되셨는가 물으니 존경할만한 교수님을 만나서 이런 길을 걷게 되었다 했다. 그 분은 조국인가 아닌가 물으니, 조국이라고 했다. 뭐 당연하겠지. 이 사람들은 아직도 ‘반대’하는 것이다. 기득권에, 적폐에, 이명박근혜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씨와 마찬가지다.

적어도 집권을 하신 분들은 구도가 그게 아니란 걸 뻔히 알 것이다. 그런 줄 알면서들 하니까 기만이다. 죽어도 비례민주당은 안 한다고 하면서 뒤로는 다 하자고 한다. 정의당이니 뭐니 비례연합정당인지 그거 한다고 하면 뭐 적당히 땡큐고 안 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우리가 함께 적폐의 부활을 막읍시다… 적폐 ‘반대’합시다 했는데 거부하더라고요… 하지만 마지막까지 설득을 해야 되고요… 뭐 이러면서 그냥 가든지 해서 적당히 구색을 맞춰 비례-민주당 아닌 민주당 같은 민주당인 당을 할 것이다. 이미 똥물 얘기했잖아. 거기 다 나오잖아. 정의당이 안 따라와도 된다니깐?

근데 그런다고 되겠어? 민주당 지지층이 비례-민민민당을 용케 찾아서 찍는다는 보장도 없고. 진짜 의원꿔주기까지 하면 모르지. 그래서 지난 주엔가 말했다. 비례민주당 그거 하면 우리 정치의 후퇴고 당장 성과는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러나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하겠다면 빨리 결정해라… 정정당당하게 하라고 할 거면. 총선 폭망하면 유튜브 언론인 같은 사람이 나와서는 우리 때문이 아니고 완강한 진보들이 글쎄… 엉엉… 이럴라고…

요즘 아마 선거법에 목맸던 진보분들이 입에 침을 튀겨가며 비례정당 반대!!!! 이러리라고 본다. 이해는 하지만 잘 한 것도 없으면서… 직접적 이득이 걸린 일에만 눈에 불을 켜고… 우리가 이렇게 뭘 못하는 건 다 선거법 때문이다! 이랬는데 지금 보십시오. 선거법을 뭘로 바꾼들… 지금 보면 선거법 개정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득이 되지 않는 구 선거법-체제를 ‘반대’한 것이다.

이런 ‘반대’들은 필연적으로 ‘진정한 무엇’이라는 공허한 대안을 호출한다. 가짜 선거제도(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는 끝내고 진짜 선거제도(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를! 가짜 운동권(변절/개량/경기동부 등)이 아닌 진짜 운동권을(좌파/녹색/민중/민생/민주적사회주의)! 뭐 하여튼 불의가 아닌 정의를! 이제 비례대표 후보 선거에 눈에 불을 켜고들 있을텐데(‘당원’들은 어디든 젤 좋아함… 당내선거 하는 거…) 한겨레 같은 데가 막 그렇게 쓰더라고. 노조나 외부세력의 조직표 또는 명망가 등 영입인사의 유명세에 당내에서 성장해 온 활동가들이 또다시 고배를 마시는 것이 아닌가… 뭔 서울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서울대가 썼든지 아니면 서울대가 데스킹 봤지? 이놈의 당내에서 성장한 어쩌구… 다 됐고 내용을 갖고 얘기해야지. 왜 내용을 얘기 안 하고 이런 구분법을 쓰지? 내용이 없으니까!!! 내용이 없으니까 가짜 진보 말구 진짜 진보 뽑아주세요 흑흑… 이게 뭐냐 도대체?

정의당이 20석 되면 달라질까? 똑같지, 지금 하는 거 보면 알지. 현대판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들의 모임이지. 그럼 이제 나더러 냉소주의자이며 정치혐오이며 대안이 없으며 뭐 그런 소리 하겠지? 나도 이제 짬이 얼마입니까. 똥탕에서도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내 진짜 마지막 남은 존재 이유이다. 그러려면 여기가 똥탕이라는 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이인영 얘기가 맞지 그러니까. 아무튼 사방이 어둠이기 때문에, 어둠 속을 더듬어 가는 허무한 손짓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순간 불이 번쩍 할 때는, 적어도 가야 할 곳으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꾸역꾸역 살고 있으며, 지금 갈치를 구워 먹었는데 가시가 너무 많아서 1년 후에나 다시 먹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로 마무리.

통제 욕구

원래는 40대를 눈 앞에 둔 독거 상폐남의 일상… 인데 이번 주말은 아빠를 해야 했다. 물론 밥을 해준 것 말고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그래도 쉽지 않다. 아무튼 섭생의 중심이 내가 아니다 보니 최근 신경써서 먹는 식사의 궤도에서 좀 이탈했다. 이것과는 관계없이 금요일에 중요 비즈니스 관계로 소고기를 먹은 것도 있다… 일요일 방송 끝나고도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번 주 식단 조절은 약간 망한 걸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야채는 매끼니 꾸준히 대량으로 섭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미밴드를 쓰고 있으나… 웨어러블기기 자체에 사실 큰 욕심은 없는데, 가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에 관하 것을 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심장은 어떻게 뛰었는지, 잠은 어떻게 잤는지 등등… 그리고 사실 알림을 쉽게 볼 수 있다는 편리한 점도 있고 해서 관심이 생길 때 찾아보는데 대단한 세상이다. 어메이즈 핏 빕을 한동안 썼는데 배터리 문제였던 것인지 어느날 액정이 그냥 분리되어 버렸다. 그래서 좀 식었다. 최근에는 어메이즈 핏 GTR GTS 이런 모델에 관심이 간다. 언제나 켜져 있는 모드도 작동한다고 하니… 근데 이미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이런 건 아주 나중에나 사기로…

근데 아무튼 이딴 통제 욕구라는 게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예전에 성격장애가 있다면 어떤 방향일 것 같냐는 대화를 하면서 자기애성 성격장애이지 않을까 했다. DSM의 진단 기준은 아마 이런 모양이다.

1)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과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예: 성취와 능력에 대해서 과장한다. 적절한 성취 없이 특별대우 받는 것을 기대한다).

2) 무한한 성공, 권력, 명석함, 아름다움, 이상적인 사랑과 같은 공상에 몰두하고 있다.

3) 자신의 문제는 특별하고 특이해서 다른 특별한 높은 지위의 사람(또는 기관)만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는 관련해야 한다고 믿는다.

4) 과도한 숭배를 요구한다.

5)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즉, 특별히 호의적인 대우 받기를, 자신의 기대에 대해 자동적으로 순응하기를 불합리하게 기대한다.

6) 대인관계에서 착취적이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한다.

7) 감정이입의 결여: 타인의 느낌이나 요구를 인식하거나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8) 다른 사람을 자주 부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는다.

9)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이나 태도를 보인다.

이렇게만 보면 그냥 어떤 재수없는 인간인데, 이것도 어떤 개별적인 양상이 있는 거지 고대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객관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있는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할 수 있겠니? 그래서 그건 대개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예를 들어 나 같으면 내가 하는 주장이나 뭐 그런 것에 대한 과도한 확신을 가지면서 여기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섭섭함이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측은함?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인정한 상대에게 제대로 평가받는 것이다(이게 앞서의 3)이다). 만일 내가 인정하는 상대에게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느끼면 정서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아무튼 자신에 대한 통제 욕구도 이런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스스로를 통제하려고 드는 거야 뭐 어때. 중요한 건 이런 감정의 원형은 남을 통제하려는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그게 6)이나 7)인데, 이 시도가 좌절될 때에 또 다시 정서적 타격을 입는 것이다. 이런 성격적 문제는 그래서 결국 남들을 괴롭게 만들기 십상이다. 남들을 괴롭히기 싫다면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사는 것이 답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스스로가 좀 더 훌륭한 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는데, 반복적인 자기수련 같은 게 필요할 수 있지만 결국 남들과 부딪치고 부대끼는 과정을 겪어야 이게 가능해진다. 남을 괴롭히지 말아야지… 하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물론 좀 이런다고 당장 환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진정들 하시고… 환자 수준이 되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합니다. 누구에게나 몇 가지씩 성격장애에 해당할 수도 있는 성향이 있는 거고, 그게 병의 수준에 이르렀을 때에야 성격장애라고 하는 거지. 내일 방송 떠들 내용 보내고 시계 생각을 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 그래도 제가 심리학과 3년 했습니다. 아주대 짱!

마지막 수업의 메모

글을 몇 개 다뤘는데, 포스트-트루스, 기생충, 민주주의의 대립구도, 세대론이 주제인 글들이었다. 그 중 일부는 이 블로그에 공유한 일도 있다. 아무튼 이 글들에 대해서 한 얘기의 핵심인데, 물론 좀 더 쉽게 설명했다.

뭐 그래도 뻔한 말씀인데, 먼저 포스트-트루스. 포스트-트루스는 여기다가도 썼듯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실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의가 실종된 상태의 대중이 취하는 도착적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대타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그것을 요구받은 듯 행동하는 것이다. che voui? 이 도착적 몸부림이 서초동과 광화문으로, 사회주의 독재와 검찰공화국이라는 구호로 구현되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립구도를 보여주는데, 그게 인터넷 때문이든 뭐든 대중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정치적 대의의 실종 상태가 오래 이어질수록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여기서 기성정치는 도착적 저항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의 통치구조를 유지한다.

‘촛불혁명’이 문재인 정권을 탄생시킨 사례는 아카데미가 기생충에다가 상을 준 것, 최근의 정치가 세대론에 근거한 86 정치인 비판을 전문가 영입의 근거로 쓰는 상황과 같은 맥락에 있다. 해피핑크당은 김웅과 김태우 씨에게 공천을 주고 더블민주당은 청년정치와 빨간잠바의 대립구도를 아직도 해결 못 해서 끙끙 앓는다. 이건 요즘 논란인 터프도 마찬가지다. 포스트-트루스의 대안이 근본적으로 엘리트주의와 분리되지 않는 공론장의 회복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런 현상의 정점에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의를 세우고, 대중이 그것을 자신의 욕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을 새로 마련해 지금의 질서 자체를 바꾸고 뒤집는 것이다. 누군가 그 짐을 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이러닉하게도 스스로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사고하면서 낙관을 잃지 않을 때에야 완수할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답을 갖고 있지 않지만, 나름의 답을 찾고 다시 그걸 의심하고 또 확신을 갖는 과정 자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질서의 주인이 아니고 될 수도 없지만 끝없이 질서의 주인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비유적으로, 중거니횽은 사라지는 매개자가 될 것인가?